가슴에 구멍을 뚫으면 피리가 되지몇 개를 막으면 노래가 되지 노래에 구멍을 뚫으면 춤이 되지자면서도 멈출 수 없는 춤떼 지어 다녀도 늘 혼자인 춤 구멍이 다 막히는 날노래도 춤도 다 막히고,막이 내리지 다음 공연은 아직 미정 — 시집 《우리가 끝나면 주황물고기》(천년의 시작, 2022) 정채원1996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나의 키로 건너는 강》 《슬픈 갈릴레오의 마을》 《일교차로 만드는 집》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수 없지만》 등. 한성유문학상 수상.
커피잔이 마룻바닥에 떨어졌다아끼던 것그는 깨지면서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벌겋게 충혈된 안개꽃무늬들책상다리의 살점을 저며내고내 손가락에서도 피가 흘렀다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는서로 다른 세상의낯선 기호가 되고 말았다 아끼던 것들은 깨지는 순간에그처럼얼굴을 바꾸는구나 순한 이별은 없다— 시집 《기둥들은 모두 새가 되었다》(한국문연, 2022) 최금녀 1962년 《자유문학》으로 소설 등단. 1998년부터 시 창작. 시집 《바람에게 밥 사주고 싶다》 《길 위에 시간을 묻는다》 외. 현대시인상, 여성문학인상, 공초문학상 등 수상.
산성 마을에 와서새벽 닭소리 듣는다저 닭들은 모두가 잠든 깊은 밤홀로 깨어서 홰를 치며왜 저리도 큰소리로 자꾸 외치는가한참 생각하다가그 사연과 까닭 문득 깨달았다닭들은 밤새도록 하늘의 경전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닭과 별과 구름의 운행벌레소리와 안개의 조용한 이동을 보다가옛날 어느 큰스님이 그랬듯이한순간 알았다 알았다 되풀이하며그 기쁨 못 참고 날개까지 푸드득거리며통쾌한 깨달음의 소식혼자 목청껏 외치는 것이다 — 시집 《고요의 이유》(애지, 2022) 이동순1973년 〈동아일보〉에 시, 1989년 〈동아일보〉 평론 당선으로 등단. 시집
어려서 외할머니랑 둘이서오두막집 꼬작집 지켜서 살 때가을만 깊어지면 뒤뜰 울타리에가랑잎 부시럭대던 소리밤중에는 더욱 크게 들리던가랑잎 바람에 맨살 부비는 소리아무래도 나는 가랑잎이사람들처럼 살아 있어가랑잎이 숨 쉬는 소리라 여겼는데이제 와 돌이켜보니 과연 그건그런 게 아닌가 싶은 생각내 몸의 저 깊은 곳 어딘가에숨어 있다가 살아서 들려오는가랑잎 바람에 몸 부비는 소리마른 기침으로 친구하자 알은체한다. — 시집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열림원, 2022) 나태주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첫 시집 《대숲 아래서》 외
남극의 황제펭귄이 영하 수십 도의 폭풍설을 견디는 것은 포옹의 힘이다그들은 겹겹이 에워싼다수백 수천의 무리가 하나의 덩어릴 끌어안고 뭉친다천천히 끊임없이 회전하며 골고루 포옹의 중심으로 들어가도록 한다그 중심은 열기로 더울 정도라고 한다남극 황제펭귄의 포옹은 영하 수십 도를 영상 수십 도로 끌어올린다 — 시집 《포옹》(황금알, 2022) 유자효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성자가 된 개》 《아직》 《꼭》 《신라행》 등과 시선집 《성스러운 뼈》 《세한도》 등이 있다. 정지용문학상, 유심작품상, 만해문예대상 등 수상.
삼짇날 아침 제비가처마를 한 바퀴 휙 돌고 날아가더니열흘이 넘도록 다시 안 온다제비가 제 집을 버렸다올봄 우리 마을에는-충북고속철도 애련마을 통과 결사반대!붉은 현수막이 하나 나붙었다철도가 지나가면사람 집도 제비집도 다 날아간다는 걸제비는 어떻게 알았을까공청회에 참석하여결사반대 결사반대 외치자고마을 방송은 아침부터 목이 쉰다 — 시집 《비백(飛白)》(문학세계사, 2022) 오탁번1966년 〈동아일보〉(동화) 1967년 〈중앙일보〉(시) 1969년 〈대한일보〉(소설) 등단. 시집 《아침의 예언》 《벙어리 장갑》 《손님》 《우리 동네》
이 책을 쓴 일차적 의도는 비록 재가의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마음만으로라도 출가를 해야 불자일 수 있다고 할 때, 과연 ‘출가’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그다음 이차적 의도는, 스님들, 특히 젊은 스님들에게 출가를 감행하는 일이 갖는 높은 가치, 출가자의 자부심(프라이드), 그리고 그에 따르는 책임감 등에 대해서 전달하고자 해서입니다. 《출가정신의 전개-붓다에서 법정까지》는 2017년에 펴낸 《결사, 근현대 한국불교의 몸부림》(씨아이알)의 후속작입니다. 애당초 ‘결사’와 ‘출가’는 함께 추
《조론(肇論)》과 이 책의 저자인 승조(僧肇, 384~414) 스님의 이름을 1990년대 초반에 처음 들었다. 고려원에서 우리말로 번역 · 출간된 《조론(략주)》을 읽었다. 내용이 잘 이해되지는 않았다. 4세기 말 5세기 초의 중국이라는 시 · 공간에 살다가 ‘31세에 요절한 한 젊은 지성인’이 쓴 글이라는 점에 왠지 마음이 심하게 끌렸다. 고전 한문을 익혀 내용을 직접 파악하는 것이 제일 좋겠다고 생각했다. 북경에서 공부하던 2011년 봄 무렵 ‘중국어가 나름의 수준에 도달됐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한번 《조론》 읽기에 도전했다
이 책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서양철학을 전공한 학자가 불교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느꼈던 여러 가지 상념을 논리적으로 서술한 글이다. 이 책을 번역하게 된 것은 불광출판사에서 의뢰가 왔기 때문이다. 번역을 시작하기 전에 저자인 지지엔즈(冀剑制)를 검색하고는 상당히 놀랐다. 그것은 저자가 대만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상당히 많은 책을 출판하였으며, 발표한 학술논문도 수십 편이 검색되었고, 더욱이 논문의 주제들이 본인의 전공인 서양철학 이외에 유학과 도교 등 상당히 광범위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중국에서는 화범(華梵)대학에서 건학이념
통계청의 종교인 전수조사를 들지 않더라도 피부에 닿는 공기에서도 불교가 정체되어가는 것을 느낀 터에, 2015년 통계청 조사는 실제로 이를 확인시켜 준 계기였다. 불교를 위시해 기독교, 천주교 등 종교 모두가 큰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전 국민의 56.1% 이상이 무종교인이라는 것은 모든 종교인에게 충격이었고, 2020년에는 61% 이상이 종교가 필요 없다고 답했다. 더 심한 것은 ‘종교가 이제는 더 이상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에는 전 국민의 82%가 동의한 것이다. 21세기의 판을 뒤엎는 최첨단 과학기술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이 책은 ‘서울대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명강의’ 시리즈 중 하나로 출간되었다. 뇌를 이해하는 것이 시대의 화두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의 뇌는 심장이나 허파와 같은 세포로 이루어진 몸의 장기의 하나이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나를 나답게 만드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심장이나 허파와 같은 생명 유지를 위한 장기와는 다른 의미가 있다. 물론 뇌는 우리가 생명 유지를 위해 숨을 쉬고 호흡하며 조절해야 하는 수많은 생리학적 현상을 통제하는 기능을 하므로, 뇌가 정지하면 우리의 생명은 정지한다는 점에서 필수 장기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이 책은 필자의 2021년 동국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붓다의 입멸 에피소드에 관한 통시적 연구〉를 보완해 출판된 책이다. 붓다의 마지막 공양 · 수명 · 입멸과 사후존속 · 교단 유훈에 관한 초기불교 · 부파불교 · 대승불교의 견해를 고찰한 것이다. 이러한 통시적인 관점에서 불타관 · 열반관 · 불멸 후 교단 유지에 관한 견해가 어떻게 전승 또는 변화하는지를 조망한 연구서이다. 붓다의 입멸은 정각과 함께 불교사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이다. 정각을 이룬 붓다는 불사(不死)의 열반을 성취했다. 열반은 인간이 꿈꾸는 죽음이 없고 고통이 없
이 책에서는 초기불교에서부터 동아시아불교에서 찬술된 문헌에 이르기까지, 고대인도에서부터 중국을 거쳐 한국과 일본, 동남아에 이르기까지 불교의례 설행의 교의적 근간을 이루는 지옥 사상과 아귀 사상, 그리고 아귀 상태로부터의 구제를 위해 실천되는 불교의식에 대해 들여다보고 있다.이 책의 3분의 1 분량을 차지하는 ‘지옥’ 관련 서술은 2017년 한 해 동안 〈법보신문〉에 매주 ‘지옥을 사유하다’라는 주제로 47회에 걸쳐 연재했던 칼럼의내용을 다시 정리한 것이다. 불교문헌 속의 아귀도 관련 교설은 2019년에 연구재단에서 받은 시간강사
불교와의 첫 인연은 우연히 찾아왔다. 예비고사를 끝내고 독서 토론을 지도하던 선생님과 산사를 찾았다. 당일로 다녀오려던 일정이었지만 눈이 많이 내려 차량 운행이 일찍 끊겼다. 본의 아니게 산사에서 하루를 머물게 되었다. 다음 날 새벽 여명에 창호지가 비취색으로 물들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황홀감이 찾아왔다. 그 순간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불교를 공부해 보겠다고 생각하였다. 그해 마지막 달력이 떨어지기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생각조차 못 했던 죽음이 눈앞에서 일어나자 무엇인가 의지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산사에서 느꼈
1980년에 작가로 데뷔한 이래 42년 동안 수십 권의 책을 내었다. 낸 책들은 문학으로는 소설, 시, 수필, 아동문학을 아우르고, 비문학으로는 철학, 종교, 명상, 리더십 등 여러 분야를 망라한다. 한편으로 보면 전문 분야가 분명하지 않은, 다른 편으로 보면 많은 분야를 아우르는 전천후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여기까지는 직업인으로서의 내가 걸어온 길이지만, 나는 나 자신을 글쟁이로서와 함께 ‘사람’으로 바라본다. 그것을 나는 “저는 글쓰기가 아니라 인생을 전공하는 사람이다”라는 말로 표현해 왔다. 젊은 시절 문학 잡지사에서 일
허1. 포스트휴먼 시대 -‘동물로의 전환(animal turn)’이 왔다그동안 분야별로 혹은 국지적으로 발전되어 오던 과학기술은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서로의 기술을 융복합하는 가운데 폭발적인 시너지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의 획기적인 발전이다. 인공지능의 발달과 응용 가능성은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꿀 만큼 실로 무궁무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소 이른 감이 없지 않으나 인공지능이 인간의 자연 지능을 완전히 초월하는 이른바 ‘특이점(singularity)’의 도래
1. 들어가는 말 1967년 12월 3일 세계 최초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흉부외과 의사 크리스천 네이틀링 버나드(Christiaan Neethling Barnard)는 인간의 심장이식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이 수술에는 무려 30명의 의료진이 참가했으며 수술 시간만 9시간이 걸렸다. 인공심폐기의 발명에 힘입어 1950년대에 신장이식, 1960년대에는 간이식에 성공한 이후, 개심(開心) 수술의 시대를 연 것이다. 뇌사 이전의 심장 정지를 죽음으로 확정했던 시기, 심장이식 수술은 자신의 심장을 떼어 내 죽은 사람을 부활시킨 상징적인
보1. 시작하며인간의 몸은 첨단 과학기술을 통해 어떤 변화를 겪게 될까. 그 변화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며 그 변화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 질문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으로 귀착된다. 그 질문은 다시 인간과 기계는 향후 어떤 관계를 맺게 될 것인가, 혹은 맺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으로 다시 확장될 수 있다. 최근 4차 산업혁명 혹은 4차 혁명, 4차 인간, AI 시대 등등 과학기술의 비약적 혁신을 시대에 담아내기 위한 표현들이 속속 등장한다. 그 명칭의 적실성 여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이전과는 확연히
1. 머리말20세기 후반 생명공학, 유전공학, 인지과학, 정보통신 기술, 컴퓨터공학, 나노기술 등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비인간 주체가 사회적 영역으로 급속히 부상하였다. 인공지능, 로봇, 복제된 생명 등의 존재는 ‘포스트휴먼(post-human)’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이끌어냈다. 기계인간에게 인류의 생존을 위협받는 내용을 담은 〈터미네이터〉나 〈배틀스타 갤럭티카〉 같은 SF영화는 막연하게 떠오르는 포스트휴먼의 이미지를 구체화하는 수단을 제공하였고, 자율주행 자동차나 이세돌 기사를 압도한 알파고의 등장이 회자되면서 포스트휴먼은 현실이
에드워드 콘즈의 삶과 저술한국 불교학계는 1980년대에는 주로 일본 학계의 연구성과를 수용하였고, 그와 함께 영어권 연구도 학계에 소개되었다. 일본 학계의 연구성과는 기본적 설명이 충실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거시적 관점과 자신의 분명한 주장에서 무언가 아쉬운 점이 있었다. 그런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것이 영어권 연구성과라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영어권 연구성과에서 대표적 인물의 한 사람인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 1904~1979)의 삶과 학문적 성과를 간단히 검토하고자 한다. 콘즈는 독일 사람이지만, 영국 런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