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대승불교 연구 전통유럽에 대승불교 경전이 처음 소개된 것은 1820년 네팔에 주재한 영국인 관리 호지슨(Hodgson, 1800~1895)에 의해서였다. 그는 네팔 사원에 있는 산스끄리뜨어 경전들을 수집하여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과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보냈다. 그리고 당시 프랑스의 산스끄리뜨어 학자인 뷔르누프(E. Burnouf, 1801~1852)에게 연구를 부탁했다. 이것이 유럽에서 인도 대승불교의 연구에 대한 시작이었다. 뷔르누프는 이 경전들을 바탕으로 인도불교의 전반을 소개하는 《인도 불교사 입문》(1841)을 저술했
들어가며케네스 첸에 대해 써달라는 요청을 받고 생각해보니, 필자가 이런 요청을 받은 것은 순전히 그의 저서 가운데 하나인 Buddhism in China: A Historical Survey를 《중국불교》라는 제목으로 번역하여 케네스 첸이라는 학자의 이름을 한국에 대중적으로 알린 것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필자는 벌써 30년도 더 전에 그의 책을 번역하였을 뿐, 그 인불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인터넷 검색도 해 보고, 미국에서 유학하고 온 학자들에게 물어보기도 하면서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인터넷
필자와의 인연필자는 2014년 9월 루드비히-막시밀리안 뮌헨대학교(LMU)의 불교학 박사과정에 입학하였다. 독일어는 고사하고 영어도 서툴렀던 필자는 외국 생활에 적응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지도교수였던 옌스-우버 하르트만(Jens-Uwe Hartmann)은 매주 월요일 오후 ‘필사본 강독’ 세미나를 운영하였다. 그 세미나에서 교수와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 가며 겨우겨우 공부해 나가고 있었다. 아델하이트 메테 교수도 그곳에서 처음 보았다. 필자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가을에 다른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겨울부터 세미나에 참석하였다. 8
1. 서언임계유(任繼愈, 1916~2009)는 현대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의 철학 및 종교학계를 대표하는 학자이다.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쳐 1949년 개국한 중국은 75년의 기간을 거치는 동안 미국과 더불어 세계를 지배하는 강대국이 되었다. 이 기간 모택동의 문화대혁명과 등소평의 개혁 개방 등을 거치면서 중국의 종교인과 지식인들은 크나큰 시련을 겪었다. 이러한 시기 중국 민족의 정신문화를 계승 보존하면서도 사회주의 체제에 맞는 철학과 사상을 정립하는 것은 지식인에게 부여된 시대적 과제라 할 수 있다. 철학과 종교학의 분야에서 이러
1. 들어가는 말 필자는 2024년 3월10일 《냐나띨로까 스님의 생애》를 번역 출판했다. 2002년에는 냐나띨로까 스님이 1906년 독일어로, 1907년 영어로 저술한 《붓다의 말씀》을 고요한소리 출판사에서 번역 출판한 바가 있다. 이 책은 대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 중반부터 조금씩 번역을 했었다. 초기불교에 관한 책이 거의 없었던 당시에 초기불교의 핵심 가르침인 사성제를 빨리 니까야를 중심으로 선별하고, 번역 및 해설을 추가한 책자를 만나 기쁘게 공부하던 때였다. 먼저 냐나띨로까(1878~1957) 스님의 생애를 간단하게 정리
1. 엔료의 소년기 고백이노우에 엔료(井上円了, 1858~1919)(이하 엔료)는 자신의 《불교활론서론》(이하 《서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본래 절에서 태어나 불교의 세계에서 자라나 메이지유신 이전에는 오로지 불교의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불교가 진리가 아닌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고, 머리를 깎고 염주를 손에 들고 일반인을 대하는 것은 일신의 치욕으로 생각하고 하루라도 빨리 절을 떠나 세상으로 나가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메이지유신을 맞이해 종교계에 대변동이 일어나 폐불훼석(廢佛毁釋)
1. 유년 시절엘리스 진 스미스(Ellis Gene Smith, 1936~2010)는 1936년 미국 유타(Utah)주 오그던(Ogden)의 모르몬교도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 가족의 종교적 배경은 진 스미스에게 두 가지 면에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첫째, 계통과 족보를 중시하는 모르몬교의 전통은 이후 그의 티베트불교에 대한 관심과 활동에 반영되었다. 둘째, 전 세계 각국에 직접 선교사들을 파견하는 모르몬교 교육에서는 여러 가지 언어들에 대한 학습이 중시되었고, 진 스미스 또한 이러한 영향을 받은 듯하다. 이러한 집안의 종교적
서언제2차 세계대전과 국가의 침체기, 부흥기를 함께 겪었던 상황 속에서 일본 불교계도 시대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였다. 1900년대부터 일본 불교학은 교리적인 흐름에 입각한 사상사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로 불교의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는 기초가 세워졌다. 패전 이후에는 패러다임의 변화로 불교학계도 새로운 방법론, 새로운 불교학을 암중모색하는 시기가 도래했다. 혼란한 시대 속, 한국불교와 중국불교의 양 영역에서 고군분투했던 학자가 바로 가마타 시게오(鎌田茂雄, 1927~2001)이다.기존의 안목에서 벗어난 새로운 불교 연구를
2017년 일본의 불교학계를 대표하는 학회인 ‘인도학불교학연구회(印度學佛教學研究會)’는 ‘인도불교 연구의 미래’라는 패널 발표 보고회를 개최하였다. 이 보고회의 부제가 바로 ‘포스트 히라카와 아키라 시대의 불교학이 나아갈 방향’이었다. 대승불교의 새로운 기원을 주창한 히라카와 아키라의 학설과 그에 대한 비판을 회고하고, 대승 경전을 전문으로 하는 연구자 및 불경의 사본(寫本)과 율장(律藏)의 전문가 4인을 초청하여 인도불교 연구의 미래를 논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이처럼 일본을 넘어 전 세계 불교학계의 거두로 인정받은 히라카와
1. 탕용통(湯用彤, 1893~1964)은 1893년 간쑤성(甘肅省) 퉁웨이(通渭)에서 태어났다. 본적인 후베이성(湖北省) 황메이현(黃梅縣)은 초기 선종의 도신과 홍인이 머물던 기주(蘄州) 쌍봉산(雙峯山)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애강남부(愛江南賦)》와 같은 역사서를 애독했던 부친의 영향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98년 부친 탕위산(湯雨三)은 관직을 떠나 서당을 세웠고, 탕용통은 이곳에서 공부했다. 형 탕융빈(湯用彬)이 후에 국무원 국사편찬처(國史編纂處) 처장이 된 것도 이러한 가풍의 영향이었을 것이다.1908년 베이징 공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북미의 불교학계에서는 문헌자료를 중심으로 텍스트에 담긴 교리와 철학을 연구하였던 고전적이고 규범적인 불교학을 뒤로 하고,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불교학이 대세가 되었다. 루이스 고메스(Luis O. Gómez, 1943~2017)는 북미 불교학이 포스트모더니즘, 역사주의, 탈식민주의의 불교학으로 변화하던 시기에 그 변화와 발전의 선두에 있었던 학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적 불교학은 ‘불교’란 다양하므로 같은 표준으로 잴 수 없다는 생각, 즉 세속의 불교 전통들은 서로 본질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다른 것이므로 이들에게서
1. 현대 스리랑카가 낳은 불세출의 불교 철학자쿨라팃사 난다 자야틸레케(Kulatissa Nanda Jayatilleke, 이하 자야틸레케)는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탁월한 철학적 해석’으로 회자되는 《초기불교의 지식론(Early Buddhist Theory of Knowledge, 이하 EBTK)》이라는 책으로 세계적 인정을 받은 불교 철학자이다. 자야틸레케의 학문은 제자이자 후배 학자들인 데이비드 칼루파하나(David J. Kalupahana), 파드마시리 데 실바(Padmasiri de Silva), 구나팔라 다르마시리(Gun
1.우이 하쿠주(宇井伯壽, 1882~1963)는 근대화의 격랑이 일던 1882년 6월 1일 아이치현(愛知縣) 호이군(宝飯郡) 미토정(御津町) 에서 평범한 농부였던 아버지 우이 젠고(宇井善五)와 어머니 몬(もん) 사이에서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단카(檀家)로서 사찰과 사회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부친이 6 세에 사망했기에 편모슬하에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을 것으로 추측된다.아마도 이 두 가지 이유가 결합해, 당시 막 의무교육화가 이뤄졌 던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 초등학교 저학년에 해당)
1. 들어가며필자가 리타 그로스(Rita M. Gross, 1943~2015)를 처음 만난 것 은 2009년 베트남에서 개최된 세계불교여성대회(샤카디타)였다. 당시 세계는 여성 인권을 위한 성주류화 정책이 강화되고, 여성과 지구 환경 등과 관련한 전 지구적 여성연대가 중시되었다. 불교도 이에 영향을 받아, ‘샤카디타’에서는 동아시아 출가 수행녀들의 열 악한 현실 극복과 티베트불교 비구니 승단의 회복을 위하여 전 세 계 불교 여성들이 연대해서 논의가 활발했다. 그런데 상좌부불교 국가에서 볼 때, 한국 비구니들은 높은 교육 수준과 독자
근대불교학의 도입과 대승비불설일본의 대승비불설의 문제는 불교가 아카데미 내에서 근대적인 학문으로 정립되어 가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서구의 불교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 방법으로 문헌적 역사적인 연구가 도입됨에 따른 것이다. 불교에 대한 전통적인 수학은 수행과 신앙을 위한 불교 성전에 관한 훈고학적인 연구였다. 대승불교에 대한 비불설은 에도시대에 최초로 토미나가 나카모토(富永仲基)의 《출정후어(出定後語)》에서 제기되었지만, 당시의 풍조 속에서는 단지 배불논서(排佛論書)로 수용되는 것에 그쳤다. 나카모토는 ‘가상(加上)’이
1. 서구인 최초의 공식 불교 신자이 글은 19세기 후반, 신지학(神智學, Theosophy)에서 출발하여 불교로 개종한 후, 남아시아에서 불교 연구와 불교 근대화 운동에 헌신한 헨리 스틸 올코트(Henry Steel Olcott, 1832~1907)의 삶과 사상을 ‘종교불학(宗敎佛學, Buddhology of Religions)’의 관점에서 재조명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의 생애는 동서문화의 만남과 변화의 경계선에 있던 한 서구 지성인이 자신의 속한 전통의 테두리를 벗어나 보편적인 진리 지평을 향해 걸어 나간 구도자의 모습을
1. 서언인순(印順, 1906~2005) 대사는 20세기 100년을 중국, 홍콩, 대만 등지에 머물면서 불교학 연구, 저술 및 출판, 강의, 후학 양성 등에 매진했다. 대사는 출가 수행자이면서 불교학자이고 동시에 스님과 일반인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일생을 지냈다. 대사가 중국과 대만의 현대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겼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인순 대사는 중국 근대불교를 이끌었던 고승 중의 한 사람인 태허 대사의 인생불교(人生佛敎) 가르침을 바탕으로 인간불교(人間佛敎) 사상을 제시하고, 삶 속에서 이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이
이병욱 교수가 《인도불교사》(라모트 지음, 호진 스님 역) 서평에서 언급한 것처럼 외국어에 웬만큼 숙달되지 않는 한, 외국 서적을 읽고 어떤 학문적 관점을 이끌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 권의 좋은 책이 번역된다는 것은 우리 학계의 수준을 한 단계 올리는 작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호진(浩眞) 스님이 8년여 ‘인고와 보람의 세월’에 걸쳐 번역한 《인도불교사》는 실제로 우리 불교학계의 수준을 몇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 웬만한 불교학 전공자라면 사실 책이나 논문 몇 가지를 참고하여 웬만한 수준의 인도불교사 관련 서적
1. 근대불교의 영욕 속에서근대 일본불교는 음과 양이 교차한다.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세워진 신정부에 의한 폐불훼석(廢佛毁釋)으로 불교계는 절치부심의 심정으로 범교단적인 개혁을 단행한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인재 양성이었다. 불교계는 유럽의 학문 체계를 받아들여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간다. 고대에 유입된 불교가 중세를 거치면서 일본열도에 토착화를 이뤄갔듯이. 이처럼 일본 불교학이 세계적인 학문의 대열에 들어선 것은 근대의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부심 또한 높았지만 오만한 부분도 있었다. 동아시아불교의 중심이 일본임을
1. 들어가며아시아로 전파되어 대표적인 ‘동양 종교’로 여겨지는 불교가 아주 오래전 유럽으로도 전해졌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후 유럽이 기독교화하면서 불교는 유럽에서 진지한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 19세기에 들어서서야 불교는 다시 유럽에서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이때 불교는 소수였지만 지식인들의 관심사였다. 철학자, 극작가, 문인, 종교인들이 낯선 ‘이방의 종교’를 사뭇 진지한 태도로 바라보게 된 것이 그 시작이었다.그러나 이후 1세기도 채 지나지 않아 불교는 눈에 띄게 확산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