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시아불교 중흥 이끈 실천불교학자

1. 서구인 최초의 공식 불교 신자

이 글은 19세기 후반, 신지학(神智學, Theosophy)에서 출발하여 불교로 개종한 후, 남아시아에서 불교 연구와 불교 근대화 운동에 헌신한 헨리 스틸 올코트(Henry Steel Olcott, 1832~1907)의 삶과 사상을 ‘종교불학(宗敎佛學, Buddhology of Religions)’의 관점에서 재조명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의 생애는 동서문화의 만남과 변화의 경계선에 있던 한 서구 지성인이 자신의 속한 전통의 테두리를 벗어나 보편적인 진리 지평을 향해 걸어 나간 구도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올코트가 제기한 여러 문제의식은 현대사회와 불교계에도 중요한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올코트는 1832년 미국 뉴저지주 오렌지의 장로교 가정에서 태어나 뉴욕대학과 컬럼비아대학에서 수학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인간의 자유와 내면의 영성(靈性, Spirituality)에 관심이 많았다. 1853년에 뉴욕영성학회를 창립하고 저널리스트로서 여러 신문과 잡지에 영성과 관련한 에세이를 기고했다. 미국 남북전쟁 때는 육군 장교로 참전하였고, 링컨 대통령 암살사건의 조사관을 맡기도 했다. 대령으로 전역한 후에는 변호사가 되어 노예제도 반대운동과 농업 및 공무원 제도 개혁에도 참여했다. 이때부터 그는 미국의 가장 진보적인 지성인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올코트는 당시 스리랑카에서 기독교 선교사와 불교의 구나난다(M.Gunananda. 1823~1890) 스님 등 간에 펼쳐진 ‘빠나두라 종교논쟁(Panadura Debate, 1873)’에서 불교 측이 압도적으로 승리했다는 보도를 접하고 불교에 귀의하였다고 한다. 1874년에 미국에 온 독일계 우크라이나 출신의 여성 영성가 헬레나 블라바츠키(Helena Blavatsky, 1831~1891)를 만났으며, 1875년에는 윌리엄 콴 저지(William Quan Judge) 등과 함께 신지학회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이 되었다. 

신지학은 ‘진리보다 더 높은 종교는 없다’는 슬로건을 채택하고, ‘근원에 도달한 동서양 성인’의 예지에서 비전되어 온 진리를 찾아 다시 그 신적 지혜로 복귀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올코트는 “불교는 영속적인 겁 속에서 어떤 빛의 조명을 받은 존재인 깨달은 이(붓다)에 의해 성립된 진리라고 믿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라고 쓰고 있다. 샤카무니 붓다는 과거칠불을 비롯한 깨친 성인들의 조명을 받아 인류의 영적 진화를 지도하고 있는 존재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올코트는 ‘위대한 영혼(mahatma)’ 가운데 가장 존경하던 샤카무니 붓다의 고향인 인도에 가서 활동하기로 결심하였다. 올코트는 1878년 12월 뉴욕을 떠나 다음 해 2월 뭄바이에 도착했으며, 인도의 첸나이 아드야르(Chennai Adyar)로 신지학회 본부를 옮기고 여기에 도서관과 연구기관을 설립했다. 

인도에서 올코트는 불교, 힌두교, 조로아스터교 등 인도 고대 종교를 연구하며 이들에 대한 지원 활동을 시작했다. 1880년 5월에는 스리랑카 콜롬보로 활동 무대를 다시 옮겼으며, 같은 해에 올코트는 블라바츠키와 함께 갈레(Galle)의 계단(戒壇)에서 삼귀의계(三歸依戒)와 오계(五戒, Pancha Sila)를 받고 불문에 귀의하였다. 이는 서양인으로서 최초로 공식 불교 신자가 된 기록이다. 이때부터 올코트는 자신의 신앙은 ‘순수한 원시불교(pure, primitive Buddhism)’라고 밝히고 있다. 

당시 스리랑카는 아쇼까왕(Aśoka, BCE 268~232 재위)의 불교 전파 이래 테라와다불교의 종주국이었으나, 16세기부터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으며 기독교 교육을 강요받고 있었다. 대부분의 스리랑카 불교 신자들은 불법의 진수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으며, 불교 지도자들도 타락하여 지도력이 상실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올코트는 영국의 식민지 정책과 강압적 기독교 선교를 비판하면서, 싱할라 불교도들에게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일깨워 주고자 했다. 그는 본래 인도에 가서 위대한 구루에게 불법을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미국에서 출발했으나, 스리랑카에 와서는 오히려 불교를 가르치고 교단을 개혁하는 스승이 되었다.

올코트는 불교는 개인의 도덕적 실천뿐만 아니라 사회의 개혁을 통해 ‘인간의 복리와 행복’을 증진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오계의 준수, 채식주의, 순결, 절제, 금주 및 금연, 마약 금지, 저속한 언어 사용 금지 등의 윤리 강령을 적은 편람을 만들어 교육했다. 특히 1879년 뭄바이에서 창립한 ‘아리안금주협회’는 325개 지부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올코트는 붓다와 링컨의 개혁 정신을 본받아 여성의 권리 증진, 카스트 계급제도 개혁, 신문 · 잡지 발행, 도덕적 매뉴얼 발간 등의 사회개혁 운동도 선도했다. 올코트는 창조된 영적 힘은 삶과 사회의 실제 영역에 응용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근대 응용불교학의 진정한 선구자라고 볼 수 있다. 

올코트는 교육은 미래를 위한 가장 중요한 초석이라고 믿고, 신지학회와 함께 아난다대학(Ananda College)을 비롯한 4개의 대학과 205개의 크고 작은 불교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그 이전까지 스리랑카에는 2개의 불교학교밖에 없었다고 한다. 불교학교에서 가르칠 교재도 편찬했으며, 찬불가 형태의 대중가요도 보급했다. 1883년 불교와 가톨릭 간의 고따헤나 충돌사건 후에는 ‘불교도방위위원회’의 대표 자격으로 런던에 가서 영국 정부로부터 종교적 중립 보장과 불교 사원의 토지에 관한 불평등한 법률의 파기를 승인받았으며, 붓다의 탄생일을 법정 공휴일인 웨삭절(Vesak day)로 제정케 하였다. 또한 세계불교도의 연합을 목표로 ‘세계불교기’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이 깃발에 있는 여섯 색깔은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을 이루었을 때 그 몸에서 나타난 오라(aura)의 빛을 상징한다. 1891년에는 스리랑카 불교신지협회 회원이며 재가불교 운동가인 아나가리까 다르마빨라(Anagarika Dharmapala, 1864~1933)를 도와 인도 붓다가야 등의 불교 성지 관리를 위한 국제기구인 ‘마하보디협회(Maha Bodhi Society)’도 설립했다. 

남아시아 불교도의 교육과 중흥을 위한 올코트의 이러한 업적은 그의 특유의 신념과 지도력, 그리고 서구적 경영 기술과 영국 행정가들과의 네트워크를 잘 활용한 결과였다. 올코트는 현재에도 스리랑카인들에게 독립운동의 영웅이자 불교 전통문화의 수호자, 위대한 보살, 아쇼까왕의 환생이라고까지 찬양되며 존경받고 있다. 스리랑카 곳곳에는 올코트를 기념하는 거리 이름과 그의 동상 등이 조성되어 있다.

 

2. 주요 저술과 《불교교리문답서》에 나타난 종교해석

헨리 올코트의 주요 저술과 기고문, 연설문 등의 원본 자료는 미국의 주요 대학 도서관이나 신지학회 홈페이지에 영인본이나 e-book 형태로 소장되어 있다. 그의 주요 논저에는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들》(1874), 《불교교리문답서》(1881), 〈인도에 필요한 문명〉 《신지학》 《종교와 오컬트 과학》(1895), 〈붓다의 생애와 교훈〉 《힌두교와 불교의 친족 관계》(1893), 《조로아스터교의 정신》(1882), 〈연례대회 연설문〉 《Theosophical Society 창립 18주년 보고서》(1893), 〈인도 졸업생들에게 전하는 연설〉 《인도와 실론에 전달된 신지학과 고대 종교에 관한 강의집》(1883), 〈일본 고위 승려들 앞에서 한 연설〉 《모든 종교의 공동 기초》(1919),《불교의 황금률》(1883), 〈인도; 과거, 현재, 미래〉 《응용신지학과 기타 에세이》(1975), 《오래된 일기장》(1887-1892), 《신지학과 불교》(1907) 등이 있다. 특히 《오래된 일기장》은 전 6권으로 구성된 올코트의 자전적 에세이로서 스리랑카와 인도에서의 활동 상황과 그의 사상의 흐름을 상세히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올코트의 대표적인 불교 저술인 《불교교리문답서(The Buddhist Catechism)》는 1881년 스리랑카 정부의 문화부 출판부에서 처음 간행되었다. 초판본에는 ‘남방 교단의 경전에 의거하여(According To The Canon Of The Southern Church)’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책은 붓다의 생애와 기초 교리를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문답식으로 편찬한 일종의 불교 개설서이다. 올코트는 서문에서 불교의 역사와 윤리와 철학을 간결하면서도 포괄적으로 요약하여 초보자도 붓다의 숭고한 가르침을 쉽게 이해케 할 목적으로 집필했다고 쓰고 있다. 이 책은 판을 거듭하면서 수정 증보되어 더 많은 문답이 추가되었으며, 1887년에 이미 2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불교교리문답서》 제40판(토론토대학 도서관의 영인본, 1903)을 중심으로 그 내용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목차는 ① 붓다의 생애(질문 1-105), ② 교리(질문 106-255), ③ 상가(질문 256-278), ④ 불교 전파의 역사(질문 279-324), ⑤ 불교와 과학의 관계(질문 325-383) 등 다섯 범주로 나뉘어 있고, 내용은 모두 383개의 질문과 답변으로 구성되어 있다. 

올코트는 《불교교리문답서》의 첫째 질문의 각주에서, ‘종교(religion)’라는 용어를 테라와다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그는 서구의 종교 개념은 불교에는 적합한 용어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싱할라 불교도들은 라틴어에서 유래된 ‘religion’의 어원이 암시하는 창조신과 인간의 관계라는 개념을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며, 신에 대한 복종이나 구원과 같은 개념이 매우 생소하다는 것이다. 반면에 서양의 종교 개념과 유사한 테라와다의 동의어는 ‘븟다아가마(Buddha-Āgama)’라고 하였다. 아가마는 산스끄리뜨어로 ‘접근’ 또는 ‘오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독교 선교사들은 스스로 ‘크리스찬아가마(Christian-Āgama)’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불교적 번역은 ‘크리스찬니반드흐나(Christianibanḍhna)’라는 말이 적합하다고 조언한다. 올코트는 ‘banḍhna’라는 용어를 ‘religion’의 어원적 동의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불교철학이라는 용어는 본래 ‘분석’을 의미하는 ‘Vibhajja vāḍt’ 또는 ‘Adbayurāḍt’를 사용해야 하나, 편의를 위해 익숙한 철학이라는 의미를 사용한다고 부언하고 있다. 

올코트는 이어서 ‘붓다의 가르침을 불교(Buddhism)’라고 표기하는 것이 적절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질문 3). 그의 답변은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서구 신학자들은 기독교만이 절대 종교이고 다른 종교의 가르침은 하나의 지류 사상인 ‘주의(ism)’에 불과한 것으로 폄하하기 위해 ‘Judaism’ ‘Buddhism’ ‘Hinduism’ ‘Taoism’ ‘Confucianism’ 등의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코트는 ‘Buddhism’을 ‘Buḍḍha Dharma’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고 제안하였다. 여기에서 올코트는 서구적 세계관과 종교 개념의 범주에서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는 기존 동양학자들의 인식에 강한 비판의식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올코트의 이 제안은 WFB에서도 채택되어 ‘Buddhism’을 ‘Buddha-Dharma’로 표현하기로 결의하기도 했다. 

《불교교리문답서》에서 올코트는 붓다의 가족, 탄생연대와 장소, 열반 장소 등에 대해서는 실증적 역사학과 고고학적 증거와 분석으로 설명하고 있다. 싯다르타의 출가를 불효가 아닌 모든 유정을 유익하게 하려는 자비의 실천으로 해석한다(질문 28). 싯다르타의 수행 과정과 성도, 그리고 제자들의 교화, 열반에 이르기까지의 생애를 흥미로운 예화로 설명하고 있다. 올코트는 불교는 수동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길을 가르친다고 강조하며(질문 148), 윤리적 종교로서의 남녀평등(질문 224-225)에 대한 가르침, 전파 과정에서 전쟁이 없었던 관용과 생명 존중의 종교(질문 281), 과학과 합치하는 종교(질문 325), 이성과 경험의 종교(질문 326), 아라한의 삼명과 육신통의 과학성(질문 365) 등 불교의 종교적 특징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올코트는 비교종교학적 문제도 곳곳에서 제기하며 명쾌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구원(salvation)보다 더 나은 말은 없는가’(질문 127) 하는 문제에 대해, ‘해탈(解脫, sk.vimukti, pali vimuttti)’이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불교와 다른 종교의 결정적 차이에 관한 질문에서 올코트는 불교는 창조신이 없는 최고의 선을 가르치는 종교라고 가르친다(질문 187). 불교는 영원한 영혼, 제사, 사제가 필요 없는 자력의 종교이며, 우상숭배(idol worship)는 외부에 실재하지 않는 존재에게 예경하는 일로 스스로를 얽매는 족쇄이지만, 불상 예배는 스승에 대한 존경의 표현일뿐이라고 답한다(질문 179). 그는 해탈은 외적 숭배(āmisa pūj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스스로 팔정도 수행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질문 183)고 강조하고 있다. 

이에 더하여 《불교교리문답서》는 그 부록으로 〈북방불교와 남방불교가 동의하는 불교 단일성의 기반으로서의 14개의 명제〉를 제시하고 있다. 이는 테라와다와 대승불교 간의 대화를 유도하여 불교도 간의 연합을 실현하고자 한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대승과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거론치 않아 남방과 북방 불교도 간의 대화 문제는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불교교리문답서》는 서구적 근대사상을 수용한 최초의 불교 서적으로 평가된다. 모든 불교 용어는 빨리어와 산스끄리뜨어로 병기하고 있으며, 당시 출판된 참고문헌 목록도 싣고 있어 19세기 후반의 유럽 불교학 성과를 일별할 수 있다. 그는 빨리 경전에 나타난 붓다의 가르침의 본질을 근대 서구의 과학주의와 합리주의적 관점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미신과 신화적 불교로 변질하기 전 붓다의 순수한 가르침을 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불교교리문답서》는 현재까지도 불교 개론서 또는 포교 교재로서 활용 가치가 충분한 고전이 되었다.

3. 학문적 오리엔탈리즘의 문제 

올코트가 처음 인도에 갔을 때, 식민주의자들은 이른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빠져 있었다. 오리엔탈리즘은 본질적으로 서양인의 식민지 지배 경험에서 온 동양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었다. 당시 식민 정부의 관료 학자들은 통치를 위해 인도의 문화와 종교적 관습을 연구하였다. 이러한 동양학 연구는 객관적인 학문이라기보다는 유럽인의 우월성과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적 학문에 불과하였다. 

18세기 관료 학자로서 학문적 오리엔탈리즘의 선구적 역할을 한 이는 윌리엄 존스(William Jones, 1746~1794)였다. 그는 벵골의 대법원 판사로 재직(1783~1794)하면서 인도-아리안어(Indo Aryan Language) 간의 상호관련설을 주장했다. 또한 아리안족의 인도 침입설 등의 근거를 찾아내어 식민 지배를 위한 정책적 기초를 제공했다. 빨리성전협회(PTS)를 창립한 리스 데이비즈(T.W. Rhys Davids, 1843~1922)도 빨리 불교학의 연구는 영국의 남아시아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역설하였다. 

한편, 당시의 학문적 오리엔탈리스트들은 붓다의 근본 가르침이 담긴 원시불교만을 순수한 불교라고 보고, 후대에 형성된 불교 의례나 사상은 왜곡된 불교로 보았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불교를 의례와 신앙보다 윤리 종교 또는 합리주의적 철학 체계로 보는 관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원시불교 지상주의는 당시 초기불교 학자들 사이에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있었다. 올코트도 이러한 학문적 조류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붓다의 순수불교’에 대한 신념도 붓다의 시대를 동경하는 일종의 이상주의라고 볼 수 있다.

올코트의 인도와 스리랑카에서의 활동으로 그는 자연스럽게 옥스퍼드대학의 종교학자 막스 뮐러(Friedrich Max Müller, 1823~ 1900)나 동년배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타일러(Edward B. Tyler, 1832~1917)와 같은 동양학자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그는 옥스퍼드대학에 가서 뮐러와 타일러를 직접 만나기도 했다. 특히 산스끄리뜨 문헌학자이며 비교언어학자이자 신화학자였던 막스 뮐러로부터 인도 종교 텍스트 번역의 도움을 받았으며, 인도에는 직접 가보지 않은 막스 뮐러도 올코트로부터 남아시아 불교와 종교문화에 대해 정보를 받으며 연구의 폭을 넓힐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올코트 등을 비롯한 학자들의 남아시아 불교 근대화 운동을 인류학자 가나나쓰 오베에세케르(Gananath Obeyesekere)는 ‘프로테스탄트 불교’라고 명명하였다. 오베에세케르는 ‘프로테스탄트 불교’는 기독교 선교에 대한 항의(protest)로 시작되었지만, 그 구조와 내용은 개신교를 모방한 불교라고 주장하였다. 이 용어와 유형론은 지금도 많은 남아시아 불교학자들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조지아주립대의 스테판 프로테로(Stephen Prothero)도 ‘프로테스탄트 불교’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올코트의 불교 운동은 전통적인 테라와다 요소와 개신교 모더니즘, 뉴욕 메트로폴리탄 상류사회의 젠틸리티(gentility), 그리고 학문적 오리엔탈리즘 등이 섞인 ‘혼합화(creolization)’ 성격이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스테판 프로테로의 의견은 어느 정도 논리성이 있으나, 개신교적 불교라는 뉘앙스가 풍기는 ‘프로테스탄트 불교’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한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본다. 

올코트에게 신지학회 운동과 불교 모더니즘(Buddhist Modern-ism) 운동은 같은 맥락의 진리 운동이었다. 불교 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불교 담론은 서구적 방법론을 통해 불교의 대중화, 생활화, 국제화, 과학화 등을 추구하는 불교의 새로운 변용 운동이었다. 서구 사상을 불교에 끌어와 불교의 이성주의와 합리주의, 현실주의, 평등주의, 사회참여와 행동주의의 이론을 체계화하고 직접 실천으로 보여준 이는 올코트가 처음이었다. 

그는 1880년에 ‘불교신지학회(Buddhist Theosophy Society, BTS)’를 만든 이래 버마, 인도, 일본도 방문하여 BTS를 세우고 불교 근대화 운동을 세계적으로 확산시켰다. 그는 1893년 9월 시카고에 열린 세계종교회의(World Parament of Religions)에 애니 베상트(Annie Besant) 등의 신지학회 회원을 대거 참석시켰다. 이러한 올코트의 불교 모더니즘 운동은 일본의 ‘신불교 운동’의 발흥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올코트는 종교 간의 다양성보다는 여러 종교에 숨겨진 통일성과 공동기반을 중시했다. 그는 모든 종교는 ‘우르종교(ur-religion)’라고 하는 원초적 진리에서 나왔으므로 그 공동기반이 같으며, 모두 동등하게 진실하다고 믿었다. 모든 영혼은 잠재적으로 신성하며, 종교는 이 잠재된 신성을 이끌어 내는 도구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종교는 인종이나 성별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이러한 신지학의 지향점은 대승불교의 테두리 없는 공성(空性, śūnyatā) 사상과 만날 수 있는 지평이 된다.

블라바츠키는 신지학은 미래에 불교,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와 같은 세계종교를 대체하여 전 인류사회로 펴지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세계종교의 정통적 신자들은 이러한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테라와다에서도 ‘숨겨진 비밀 가르침(密敎)’이 따로 있다는 신지학의 주장을 비판하고 있다. 올코트 이후 신지학회는 많은 분파로 분열되면서, 뉴에이지(New Age) 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 운동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다.

 

4. 올코트의 업적과 사상 재평가 

헨리 올코트는 다양한 경력과 사상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진보적 저널리스트, 군인, 법률가, 농업과학자, 사회개혁가, 신지학회 창립자, 남아시아 불교 중흥 운동가, 프로테스탄트 불교도, 응용신지학자 및 응용불교학자 등으로 불린다. 그는 전 생애를 통하여 신지학과 테라와다불교와의 순환적 해석 과정을 통해 사상의 지평을 확장해 나갔다. ‘올코트의 불교’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올코트의 생애와 사상에서 제기된 문제들은 다음과 같이 재평가해 볼 수 있다.

첫째, 올코트는 신지학적 조망에서 붓다를 이해했으며 붓다의 가르침을 신지학의 최고 가르침으로 생각했으므로, 그의 불교 운동은 신지학 운동과 같은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올코트의 입장은 스리랑카의 전통불교를 대변하던 다르마빨라 등과의 갈등을 노정했다. 그들은 힌두교를 불교와 엄격히 분리하고자 하였으며, 호교론적인 불교민족주의 노선을 따랐다. 반면에 올코트의 신지학은 기본적으로 인종과 국가, 종교의 차별 없이 인류의 보편적 형제애 실천을 목표로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올코트는 불교 포괄주의(inclusivism)를 넘어서는 다원주의적 입장에 있었다. 

둘째, 자연에 내재한 신성은 모든 인간에게 종교적 감정의 형태로 존재한다고 생각한 올코트는 사실 테라와다보다는 대승불교에 더 적합한 사상가였다. 그가 만약 붓다의 초기 가르침에 함축되어 있었던 불성(佛性) 사상을 정채롭게 발전시킨 대승사상에 먼저 접근했었다면, 그는 더 풍성한 이론을 창출했을 것으로 본다. 이러한 과제는 블라바츠키를 비롯한 다른 신지학자들에 의해 정립되어 갔다. 

셋째, 올코트의 대표적인 저서인 《불교교리문답서》는 붓다의 메시지가 근대 사회에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명료하게 밝혀준 불교 교육서로 평가된다. 올코트는 이 책에서 서구적 개념으로 불교를 축소하여 해석하고 있는 오리엔탈리스트들의 태도를 교정하고자 했다. 불교는 불교 본연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며, 어떤 세계관이나 다른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는 독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서구적 합리주의와 근대과학, 심리학과 서양철학을 원용한 올코트의 새로운 불교 해석은 불교 모더니즘 운동을 촉진케 했다.

넷째, 올코트는 실천불교학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종교 경험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실천이 따른다고 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오계 윤리의 실천을 강조하면서, 남아시아 불교계에 만연했던 미신과 비불교적인 요소를 개혁하고자 했다. 올코트의 진보적 불교 운동은 현재 우리 불교계의 당면 과제가 되고 있는 불교의 대중화, 생활화, 조직화, 과학화, 국제화를 위한 모델이 될 수 있다.

다섯째, 현대 학자들이 올코트류의 불교를 ‘프로테스탄트 불교’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치 못한 용어 선택이다. 올코트는 젊은 시절에 이미 기독교를 떠났으며, 예수의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는 제국주의적 기독교를 비판했다. 그는 비록 서구적 경영 원리와 기독교적 선교 방법을 원용하여 불교의 근대화 작업을 수행했지만, 그 내용은 불법의 기본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여섯째, 올코트가 〈북방불교와 남방불교가 동의하는 불교 단일성의 기반으로서의 14개의 명제〉를 제시한 것은 다른 불교 전통 간의 대화 필요성을 환기하기 위함이었다. 이 문제는 현재에도 세계 불교계의 큰 화두가 되고 있다. 그러나 남방불교를 중심으로 제시한 불교의 공동 기반론은 대승의 붓다관, 경전관, 교리관, 계율관, 수행관 등의 차이를 해결할 회통적 원리가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대승에서는 붓다의 깨달음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끊임없는 재해석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으나, 테라와다는 역사적 붓다의 정통성을 더 강조하고 있다. 종교 내의 대화는 종교 간의 대화보다 더 우선되어야 한다. 불교 내 여러 전통 간의 대화는 미래 불교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마지막으로, 올코트는 당시의 동양학자들과 같이 원전 번역에 전념한 문헌학자는 아니었으나 불교 성전의 바른 해석과 그 실천에 앞장섰으며, 서구의 모더니즘을 활용하여 남아시아불교의 중흥과 불교의 서구화에 공헌하였다. 

올코트의 불교 연구는 이론을 위한 학문이 아닌 모든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실천불교학이었다. ■

 

김용표 
동국대 불교학과, 미국 템플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졸업(MA 및 Ph.D).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를 역임하며 한국불교학회장, 한국종교교육학회장, 한국교수불자연합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주요 저서로 《불교와 종교철학》 《포스트모던시대의 불교와 종교교육》 《경전으로 본 세계종교(불교)》 등과 역서로 《보리행경》, The Essential of Mahā Prajñā Pāramitā Sūtra of Wonhyo 등이 있다. 현재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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