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산사 심원암 그리고 월주 스님

 

재작년 늦가을 금산사 심원암(深源庵)에 다녀왔다. 김제 금산사에서 30여 분 거리의 모악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암자다. 지금은 암자 바로 밑까지 차로도 갈 수 있게 길이 다져져 있었다. 나는 일부러 금산사 주차장에서 내려 낙엽과 단풍이 어우러진 숲길을 걸었다. 50여 년 전 바로 그 길의 풍광을 기억의 저편에서 끌어올리기 위해. 때로는 한밤중 소나기에 흠뻑 젖으면서, 때로는 꼭두새벽 눈 속을 헤치면서 기어가다시피 절에 당도했던 그때의 추억들이 흐르는 물의 낙화 송이처럼 뇌리를 스쳐 갔다. 암자는 그대로였으나 내가 거처했던 암자 뒤편의 딸린 집은 사라지고 잡초가 우거져 있었다. 그 뒤편에 서 있는 화강암 3층 석탑(보물 제29호)의 자태가 석양에 고독했다. 나는 10대 후반 2년간을 이 암자에서 보냈다. 오로지 책만을 읽으면서.

 

1971년 9월 나는 중학교를 졸업한 지 6개월 만에 대학입학자격 검정고시 전 과목에 합격했다. 그것도 독학으로 해냈다. 가정형편 때문이 아니라 남과 다른 길을 가 보고 싶은 마음에서 모험을 한 것이다. 그해 대학입학 예비고사까지 통과하였으나 대학 진학을 미루고 금산사 심원암에 들어갔다. 도 닦으러 간 것이 아니다. 그대로 대학에 진학하기에는 무언가 채워지지 않은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책을 읽기 위해 간 것이다. 2년간 500여 권 가까이 읽었다. 세계문학, 동서양 고전, 철학, 역사서, 전기물 등이었다. 처음에는 사서 읽다가 교직에 있는 친지 등의 도움으로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해 오고 나중에는 절에서도 많은 책을 구해 주었다(이 과정에서 월주 스님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물론 그중에는 내용이 난해하고 무미건조한 것도 상당수 있었으나 대부분 끝까지 독파했다. 결코 재미있다고 볼 수 없는 괴테의 《파우스트》와 씨름하기도 하고, 사마천의 《사기》에 푹 빠져들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가슴 벅차오르는 감동으로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라는 《파우스트》의 키워드는 젊은 날의 독서 격랑기부터 지금까지 항상 뇌리에 잠재하면서 나로 하여금 올바른 길을 찾아가도록 독려해주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한 번 죽는다.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그것은 죽음을 이용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라고 절규했던 사마천, 생식기를 절단당한 치욕(궁형)을 감내하면서 역사에 우뚝 선 그의 《사기》를 읽을 때마다 내가 처한 고민과 고통의 현실이 부끄럽게 여겨지면서 힘이 솟는다.

젊은 시절, 절에서의 독서로부터 얻은 지식과 지혜가 지금까지 내 삶의 자양분이자 자신감을 갖게 해주는 원천이 되고 있다. 저 아프락사스(Abraxas)를 향하여 날아가는 새(《데미안》)처럼 내 삶의 격동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로부터 특히 대학을 거쳐 군 복무를 마칠 때까지의 10여 년은 집념과 방황, 도전과 좌절, 고뇌와 번민으로 점철된 극복의 과정이자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그 샐러드 같은 나날, 비록 판단력이 미숙했던 때도 있었으나 사유의 폭은 호탕무애(豪宕無碍)하였으며, 젊음의 집념 속에 온 세상이 나의 무대였다. 나는 그 과정을 거의 매일 기록(일기)으로 남겼다. 10대 후반 감수성 많던 시절 나 스스로 택한 길이었다.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간다’는 지금도 내 삶의 모토다.

나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항상 모험과 도전의 정신으로 임해 왔다. 그리고 소신의 일관성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비슷하게 보고 비슷하게 행동하는 것은 나약한 자들의 시각이었다. 좀 더 편한 삶을 살기 위해 무리들 속에 그냥 머무는 것은 내 생각 밖이었다. 이는 늘 책과 더불어, 책 속의 지혜와 함께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나는 사고가 자유롭고 하는 일에 자신감이 있었다. 그 때문에 ‘예, 아니오’를 분명히 할 수 있었다 이 또한 모두 독서의 힘이다. 물론 ‘예, 아니오’를 분명히 말하는 성향을 지닌 사람은 항상 아웃사이더로서 주류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살게 된다는 지적(E. H. Carr 《역사란 무엇인가》)처럼 손해를 본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오늘의 나를 만든 건 8할이 독서였고 그 태동기는 바로 금산사에서의 2년간 몰입의 시기였다.

심원암에서 책 속에 묻혀 1년쯤 지난 1972년 가을, 당시 금산사 주지로 계시던 송월주 스님으로부터 본절로 한번 내려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젊은 애 하나가 코피까지 쏟아가며 책을 읽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한다. 나는 스님에게 암자에 온 목적과 읽고 있는 책에 관해 말씀드리고 당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읊조렸던 선시를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바로 《금강경오가해》 관련 야보(冶父) 선사의 그 시를 지금도 나는 이따금 되뇌고 있다.

산당의 조용한 밤에 말없이 앉았으니/ 적적하고 고요하여 모두가 자연 그대로다/ 어찌 된 일인지 서쪽 바람에 임야가 움직이더니/ 외기러기가 높은 하늘에서 구슬피 우는구나

한 달쯤 지나 스님께서 40여 권의 책을 사서 보내 주셨다. 동양고전과 서양철학 시리즈였다. 기쁜 나머지 한걸음에 달려가 스님께 감사드렸고 단숨에 독파하기 시작했다. 예나 지금이나 아직 읽지 않는 책을 선사 받는 것처럼 기쁠 때가 없다. 1년 후 나는 대학 진학을 위해 심원암을 떠났고 그로부터 30년 가까이 지난 2000년 초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무총장으로 활동하면서 다시 월주 스님을 뵙게 됐다. 경실련 특별고문으로서 스님은 많은 격려와 조언을 주셨고 때로는 정신적 귀의처 역할을 해주셨다. 특히 당시 시민운동의 권력화, 초법화(超法化) 현상을 비판하면서 참여연대의 박원순 사무처장과 각을 세웠던 내 입장을 지지해 주셨고, 한국 시민운동의 바람직한 방향에 대해서도 공개적으로 입장을 표명하시기도 했다. 그 후로 스님이 입적하시기 6개월 전까지 3~5개월 간격으로 뵙곤 했다. 재작년 여름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듣고도 금산사 다비식장에 내려가지 못했다. 대신 집 근처 비구니회관이 있는 법룡사에 마련된 분향소에 아내와 함께 가 스님과의 연을 떠올리면서 명복을 빌었다. 

올봄 금산사에 내려가 곳곳에 스며 있는 스님의 발자취를 더듬어 봐야겠다. 아니 심원암에도 올라가 봐야지…… 아, 봄볕 있는 곳에 꽃피지 않는 곳이 어디 있으랴!(春光無處不開花)

 

이석연 / 법무법인 서울 대표변호사, 전 법제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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