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교미술의 현대화 문제삼국시대 이래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불교미술은 한반도의 대표적 조형 활동으로 시대를 이끌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현대사회에 들어 불교미술은 과거의 영광에만 머물러 있다는 느낌이다. 오늘의 불교미술에서 시대정신은 실종된 듯하다. 한마디로 찬란했던 불교미술의 전통은 오늘날 창조적으로 승계되지 않고 있다. 무엇 때문에 낙후된 모습조차 벗겨내지 못하고 있을까.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전통 불교미술을 공부하면서, 또 평단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는 입장에서 우리 불교미술의 미래를 염려한 주장이라고 할 수
현대미술과 불교불교를 비롯한 종교를 현대미술과 연결 지어 이해할 때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기초적인 상식인 현대미술에 대한 정의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미술은 그 작품에 대해 절대 권위를 가진 미술가에 의해 창조된다.”와 같은 말들이 그것이다. 미술이란 제도 안에서 정의되고 유통되는 것으로서 근대 이후의 발명품과 같은 것이다. 세계적인 명화로 여겨지는 미켈란젤로의 〈시스틴성당 벽화〉도 개인의 의지에 의한 창작이 아니므로 현대적인 의미의 미술이라고 할 수는 없다. 또한 건축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것이지 회화작품으로서 위치하는 것은 아니다
- 사찰 조형물 현대화의 현장절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들절에는 왜 가는 것일까. 절이 하는 기능은 무엇일까. 자문자답할 때가 있다. ‘절하는 집.’ 절은 ‘절하는 집이다’라는 소박한 답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절이 품고 있는 기능은 절하는 집 외에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승려가 불상을 모시고 불도(佛道)를 닦으며 교법을 펴는 집이라는 사전 설명이 명쾌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고개를 젓게 하는 것이 오늘의 절이다. 세상이 복잡하니 절도 단순할 수가 없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절에서 찾고 싶어 하는 것을 주어야 한다.21세기에 한국
불교는 인도 및 동아시아 전역에 걸쳐 물질문화(物質文化)의 꽃을 피웠고, 그 꽃은 바로 불교미술이다. 불교가 동아시아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불교미술은 기왕의 종교미술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하고 또 영향을 주기도 하면서, 외연도 넓어지고 양적으로도 더욱 풍성해졌다. 필자는 불자(佛子)로서 불교미술을 대할 때 ‘좋다’ ‘좋지 않다’를 판단하지 않는다. 불자로서 불교미술을 마주할 때는 부처님을 대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필자에게 불교미술은 감상이나 분별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미술사 연구자로서 바라볼 때는 견해가 조금 달
― 불전미술(佛傳美術)을 중심으로 1. 불전미술(佛傳美術)의 탄생고대 인도 불교미술의 특징은 불탑(佛塔)의 조영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석가여래의 성도지인 인도 보드가야 상징물은 하늘에 닿을 듯한 거대한 불탑과 그 안에 모셔진 석가여래 성도상이다. 불당(佛堂)을 갖추고 있는 보드가야 대탑은 5세기경 건축물이고, 그 안에 모셔진 석가여래 성도상은 10세기경에 제작된 것이다. 세계 각지의 불교도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바로 깨달음의 성지인 보드가야이고, 보드가야의 상징은 석가여래의 사리를 봉안한 불탑과 불상이다.(그림 1)필자는 지난
1. 들어가며시인은 절 마당에 서 있는 ‘석불’을 보고 이렇게 읊조린다.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꿈꾸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 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문정희 〈돌아가는 길〉 전문천년의 세월, 비바람에 씻기고 또 어쩌면 누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