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미술 현대화의 과제

현대미술과 불교

불교를 비롯한 종교를 현대미술과 연결 지어 이해할 때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기초적인 상식인 현대미술에 대한 정의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미술은 그 작품에 대해 절대 권위를 가진 미술가에 의해 창조된다.”와 같은 말들이 그것이다. 미술이란 제도 안에서 정의되고 유통되는 것으로서 근대 이후의 발명품과 같은 것이다. 세계적인 명화로 여겨지는 미켈란젤로의 〈시스틴성당 벽화〉도 개인의 의지에 의한 창작이 아니므로 현대적인 의미의 미술이라고 할 수는 없다. 또한 건축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것이지 회화작품으로서 위치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현재의 우리는 그것이 제작되던 당시의 경건한 종교적 마음이나 지식으로 그것을 대할 수도 없다.

우리는 역사나 사회적 상황의 한계를 안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만큼, 이해하는 만큼만으로 대상을 대하고 감동하고 받아들인다. 불교에서도 사찰 안의 상들과 불화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장엄이자 불교의 제도를 가시화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은 철저히 “미술작품의 제작에 따른 통찰적 시각과 권위는 외부의 정치적, 종교적 주인이 주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종교의 제도 아래 있는 것은 현대의 미술이라 지칭할 수 없는 영역이다.

사찰 봉안을 위한 미술은 종교의 제도에 속하므로 작가의 자발성에 기반한 현대미술의 영역에서 고찰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현대 미술가들은 마땅히 따라야 한다는 노선을 더 이상 갖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작품은 미술의 제도 즉 미술관, 갤러리, 미술시장, 미술 출판 등에서 통용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기서 현대 불교미술이란 영역은 불교적인 내용이나 불교적인 전통 혹은 형상 등 불교적인 속성이 있는 현대미술에 한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작가가 불교를 작품의 소재나 주제로 선택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자기 수행이라는 종교의 개인적 차원의 쓰임새이다. 그것은 정신적인 영역의 것으로서 자신의 심적 상태, 숭고함과 같은 개인적인 상태를 드러내는 데 적합한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써 사용이다. 다음으로는 종교미술이 갖는 도상의 특성을 활용하기 위한 방안도 있다. 상징언어로 구성된 미술에서 내레이션화된 불교미술의 도상이야말로 상징을 통해 내용을 구성할 수 있는 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또한 오래된 한국의 역사 안에서 불교가 전통의 상징이 된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불교적인 요소는 오래된 역사 혹은 전통의 모습으로 사용될 수 있는 자원인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를 지나온 한국의 현대미술에서 민족성, 주체성, 한국성과 같은 화두는 전통에 관심을 두게 하였고, 그 중심에 불교적인 요소들이 자리한다. 한때 삶의 지표였던 불교가 갖는 포용성과 선가(禪家)가 주는 자유로움은 유가(儒家)에 의해 옥죄인 일상에 한 줄기 숨구멍과 같은 것이기도 했다. 도(道)를 찾는 여정은 노장사상(老莊思想)과도 어긋나는 것은 아니어서 세계에 대한 이해, 자연관을 불교의 생각들이 형성하여 왔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개인의 주체성, 권력과 강제에 반하는 미술의 특성상 불교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과 함께한 현대 미술가에게는 귀중한 자원이었다.

 

미망을 깨는 목어 소리, 박생광

눈부신 채색화의 대가 박생광(朴生光, 1904~1985)의 작품은 화사한 오방색, 테두리, 강렬한 진채의 사용 등 한눈에 드러나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박생광 화풍의 특징은 그의 노년기에 완성된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일본에 머물렀고 또 그만큼의 시간을 진주에 머물렀기 때문에 중앙 화단에 소개되기까지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화가가 많지 않던 그때 그의 행보가 더뎠던 것은 지방에 거주한 탓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 수행에 집중했던 작가이다. 그 수행은 물론 평생지기 청담 스님처럼 불가에 들어서 행자 생활을 했던 것을 포함한다. 그는 유학 생활 동안 몸 안에 배었을 일본적인 요소와의 전투를 치렀다. 그 전투가 얼마나 지독했던지 한번 집에서 나서면 두세 달 소식이 없다가 나타났으니, 자녀들은 그런 아버지가 낯설어 그가 어서 다시 길을 떠나기만을 고대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박생광은 일본에서 동양화를 배웠으며 ‘조선미술전람회’에 서양화부와 동양화부에서 각각 1회씩 입선한 뒤로 출품하지 않았다. 일본의 명랑미술전과 일본미술원 동인이 되는 등 일본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광복과 함께 25년간의 일본 생활을 접고 귀국하여 진주에서 활동하였다. 피난 생활을 하던 이중섭이 진주, 통영 등에서 전시를 하고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도와준 것도 박생광이었다.

박생광은 자신의 그림 속에 있는 일본적인 요소를 버리기 위하여 기법이나 양식에서 일본적인 방식을 버리고 주제 또한 초현실주의부터 토속적인 것에 이르는 것들을 섭렵하여 나아갔다. 그는 “샤머니즘의 색채, 이미지, 무당, 불교의 탱화, 절간의 단청, 이 모든 것들이 서민의 생활과 직결되는 그야말로 ‘그대로’ 나의 종교인 것 같아.”라는 말을 남겼다. 자신의 호 ‘내고(乃古)’를 ‘그대로’로 표기하여 그림 안에 박아넣었는데 그 형상은 목어였다. 항상 눈을 뜨고 정진하는 삶, 법음을 전하는 목어를 자신의 상징으로 삼은 것은 깨어 있음을 선택한 결과일 것이다.

그의 작품은 장식적 요소가 강하고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하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울림이 가득한 맘을 흔드는 색채는 자연에 기반한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감지되는 색채와 도상(圖像)은 불화나 무속화에서 가져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불화는 그의 주요한 테마였다. 오래전에 출가한 경험도 있던 그에게 단청이나 사찰 벽에 그려진 그림들은 당연히 주요한 모티프였다. 벽화를 모사한 듯한 화면은 신선, 무녀와 함께 이상적인 낙원의 세계로 인도한다. 단청의 색채와 문양 그대로를 모사한 것은 학습을 위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모든 사물을 두루 그려낸 뒤에는 단청, 가릉빈가, 꽃살문 같은 것을 조화롭게 배치하기도 하였다. 그는 사찰 안에서 볼 수 있는 장엄을 모두 화면에 담아 재구성하였던 것이다. 진채의 단단한 구조는 박생광이 꿈꾼 견고한 이상세계를 대상의 층위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깊고 멀리 보이게 하였다. 그의 화면은 저 멀리 있는 극락정토이자 가까이에서 만나곤 하던 사찰의 기운으로 가득한 것들이었다.

그는 자신의 친구이자 선사인 청담 대종사를 6점이나 그렸다. 마치 팔상도처럼 이야기 구조를 가진 〈사바세계의 청담 대종사〉를 본 프랑스의 아르도 도토리브가 그를 ’85살롱전 특별전 작가로 초대하였다. 그의 그림이 포스터로 채택된 살롱전에 참석하지 못하고 타계하였지만, 그의 역작인 〈청담대종사〉를 비롯한 〈명성황후〉나 〈전봉준〉에서도 역사화이면서도 삶을 초월하는 인간의 생사에 대한 관념을 보게 된다. 작은 목어 안에 ‘대로’ 혹은 ‘박생광’을 써넣은 작가는 우이동 개천을 넘어 작은 집에서 채 종이를 다 펼쳐놓지도 못한 방안에서 벌레처럼 오그리고 자며 그림을 그렸다. 그가 그려낸 세계는 무아(無我), 진동하는 우주와 합일한 인간의 정신과 같은 것들을 유추케 함으로써 당대까지는 주변부의 것이었던 불교미술의 가치를 끌어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상의 세계를 깨고 나온 반복의 수행, 이응노

이응노(李應魯, 1904~1989)는 사대부집에서 태어났으나 뼈저린 가난을 겪으면서도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다. 양반가의 체통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 그림 그리는 일은 늘 방해만 받기 마련이었다.

 

“……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마침 마을에 산제당을 새로 지어서 그림을 그릴 사람을 찾고 있는데, 그려보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해왔습니다. 생각지도 않던 행운이었어요. 산제당이란 것은 마을을 지키는 신을 모신 곳이랍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가까운 절간에 놀러 가 그곳에 그려진 그림을 보곤 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지요. 절에는 탱화를 그리는 스님 밑에 ‘단청’을 그리는 화공이 있어서 틈틈이 산신이랑 선녀 그림 같은 것을 그리기도 했어요. 그 마을에서 세 끼 먹여주고 일당 1원에 그림을 그리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당시 1원은 큰돈이었지요. 건장한 남자라도 겨우 20~30전을 벌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니 하루에 1원이라면 굉장한 거지요. 다음날 청양으로 가서 그림 그릴 화폭과 물감 등을 사다가 곧장 여관에 틀어박히게 되었습니다.”

 

이응노가 화가의 길로 들어설 수 있게 한 계기는 바로 동네의 산제당에 그릴 그림 주문이었으며, 그의 최초 작품은 절에서 보아온 불화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그렇게 어렵게 모은 돈으로 해강 김규진을 찾아갔다. 그림 공부를 위해서 찾아간 곳에서 그는 집안의 허드렛일을 하며 묵죽을 배웠다. 대나무를 열심히 그렸지만 단 한 번 입선한 뒤로 7년 동안이나 번번이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였던 그가 특선을 하게 된 것은 우연히 대나무 숲을 지나치다가 비바람에 술렁이는 대나무를 본 때문이었다. ‘깊은 인상’으로 단숨에 그린 그림이 특선에 이르게 됨으로써 그는 ‘다른 사람의 작품이나 전통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애써서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

이응노는 수덕사 앞에서 나혜석을 만나 서양화를 배운 시간이 있었다. 나혜석을 통해 다양한 미술의 경험과 프랑스에 대한 동경을 갖게 된 시간이기도 했다. 나혜석이 떠난 뒤 이응노는 수덕여관을 구입하였고, 6 · 25 전쟁기에는 서울이 수복되자 피난을 내려와 지내기도 하였다. 수덕사와의 인연은 불교미술의 시각적인 경험뿐만 아니라 불교적 생활이나 세계관에도 영향을 미쳤을 터이다. 그것은 절집 그림을 흉내 내어 그렸던 첫 작품과는 달리 이제는 작품에 내재한 정신적인 것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이응노는 프랑스로 가기 전부터 문자도를 시도하였다. 그는 종정문(鐘鼎文)에서 볼 법한 문자 ‘노(奴)’에 근거하여 수레를 끄는 사람 모양으로 나타내기도 하였다. 〈영차영차〉 같은 경우도 문자와 인간의 형태를 함께 보여주고 있어서 달마도나 ‘불(佛)’ 자의 구조를 상기시킨다. 또한 주역의 괘를 나타내는 일련의 시리즈는 1974년 스페인 왕실의 주문으로 출판을 목적으로 한 프로젝트였다.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서양인에게 동양의 자연에 대한 이치를 설명하는 목적을 보여준다.

이응노의 서체 추상이 갖는 자유로운 묵희(墨戱) 정신은 선가의 사상과도 연결된다. 금강산 여행을 하였던 1941년에 해금강에서 그가 그린 것은 물풀이 우거진 물 위에 배를 뒤집으며 위로 뛰어오르는 물고기 한 마리였다. 배가 볼록한 복어 같기도 하고, 짚단에 얹어져 삭혀지는 생선 같기도 한 형태는 동글한 눈과 수염이 등용문의 잉어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밥 잘 먹고 배 두드리는 작가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은유와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는 선가의 그것처럼 해학과 깨달음으로 가득하다.

여러 사람이 화면 가득히 있는 군중 시리즈에서는 반복을 통한 수행성을 읽어낼 수 있다. 마치 주문처럼 형태는 반복되고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른다. 같은 형태의 반복, 그러나 결코 같지 않은 형태들은 흰 화면 위에 검은 글씨처럼 써지고 사람 모양으로 그려진다. ‘평화’라는 주제는 그렇게 진언처럼 화면에 각인된 것이다.

 

연화장 세계에의 꿈, 이중섭

이른바 ‘국민 작가’로 불리는 이중섭(李仲燮, 1916~1956)은 애잔한 가족 사랑으로 인하여 그의 작품 내에서는 황소와 자신, 아내, 두 아들의 관계가 눈에 띄기 마련이고, 우리는 이들의 서사에 집중한다. 일본의 분카학원을 졸업한 이중섭은 이미 원산에서 미국과 일본, 프랑스를 유학한 화가 임용련과 백남순 부부에게 지도를 받은 터였다. 또한 평양부립박물관을 드나들며 고구려 고분벽화 모사도를 보았고 유물들과 각종 민속품을 눈에 담았다.

6 · 25전쟁으로 갑자기 아내와 두 아이 그리고 장조카만 데리고 올라탄 피난선은 그를 부산에 내려놓았고, 피난민 소개 명령에 따라 이들은 다시 제주도로 갔다. 부족한 식량 배급 탓에 바닷가 게를 잡아먹으며 지내던 가족은 다시 부산으로 와 아내 마사코의 친정으로 잠시 가 있기도 하였다. 그렇게 가족과 떨어져 지내던 이중섭에게 가족은 가장 중요한 작품의 주제였으며, 그것은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표현한 절절한 작품들로 탄생되었다.

이중섭은 호신불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고 전해질 정도로 독실한 불교 신자라고 하였는데, 그동안 그의 작품이 불교적 측면에서 해석되지 못하였던 것은 바로 절절한 개인의 서사가 눈을 사로잡았기 때문일뿐더러 고구려 고분벽화와의 친연성으로 인하여 그의 작품이 도가적 세계관으로 인지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백동자도’와 같은 전통의 측면에서 관계성이 고찰되어 왔다. 그런데 2000년 4월에 서울옥션에 등장하였다가 다시 2010년 12월에 K옥션에서 〈탄생불〉이 공개되었다. 이중섭의 불교적 도상에 대한 이해를 완연히 드러내는 이 작품은 이중섭과 불교의 관계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자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담배가 습기에 젖지 말라고 감싼 담뱃갑의 속지인 은지에 그린 그림을 우리는 ‘은지화’라고 지칭한다. 이중섭은 은박지에 뾰족한 도구로 눌러서 선을 그리고 그곳에 물감을 채워서 형태가 드러나게 하였다. 바탕에 홈을 내고 은실 같은 것을 집어넣어 형태를 보여주는 은입사나 상감기법과 다를 바 없는 방식이다. 이 은지화는 담뱃갑에서 나온 것이라서 크기가 한정적인 것이 이중섭 은지화의 크기가 비슷한 이유이다.

두 옥션에서 소개된 〈탄생불〉 이전에는 호암미술관 소장으로 알려진 〈부처〉(15.2x10.1cm)가 있다. 왼쪽 상단부가 조금 잘려 나갔지만 육계와 나발이 표현된 부처는 연화좌 위에서 한쪽 다리는 세우고 한쪽 다리는 눕힌 일종의 유희좌를 하고 있다. 〈탄생불〉(8.7x15.2cm)은 은지를 가로로 길게 사용하여 좌우에 부처를 놓았다. 우측에는 잎새와 만개한 꽃이 대를 형성하고 그 위에 하엽의 연화좌 위에 왼손에 연꽃을 든 보살이 결가부좌 하였다. 좌측에는 잎새를 가로로 펴서 지대석을 삼고 그 위에 복숭아를 놓아 대좌로 삼은 탄생불이 왼쪽 다리는 쭉 펴고 오른쪽 다리는 약간 구부린 채로 천지인을 하고 있다.

보살상은 약간 탄생불을 향하고 있고, 탄생불은 걷는 자세로 표현하여 간략한 선조로 이루어진 작품에도 불구하고 서로 조응하는 분위기이다. 머리가 고불고불한 마사코는 가끔 보살의 모습으로 이중섭의 편지화에서도 등장한다. 고달픈 삶의 한가운데서 이중섭에게 가족은 낙토를 상징하는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단순함과 깨달음의 붓질, 장욱진

장욱진(張旭鎭, 1917~1990)은 비공거사(非空居士)로 불렸다. 장욱진은 평생 옮겨가며 살았다. 부인과 가족은 서울에 기거하고 자신은 시골에 머물며 그림을 그렸다. 집을 나와 택한 장소, 그곳이 번잡한 도시와 세상의 존재 이유를 묻는 가족이 함께하지 않는 장소였을 때 우리는 탈속 혹은 은거라고 말한다. 세속을 떠난 수도자와 같은 삶, 시정의 번잡함을 떠나 자연과 함께하는 삶, 은거 사상의 실현을 장욱진의 삶에서 발견한다.

장욱진의 탈속과 연관된 삶은 성홍열을 앓은 17세부터 시작되었다. 그림을 그린다고 집안에서 꾸중을 듣던 중에 병을 앓자 정양을 떠난 곳이 만공 선사가 머물던 예산 수덕사였다. 이곳에는 김일엽 스님이 주석했고 그의 친구인 나혜석이 또한 수덕여관에 머물고 있었다. “함께 보리수나무를 그렸다. 정월은 불란서 인상파 초기 스타일로 그렸고 나는 아주 간결한 선으로 그려 보였더니만 정월은 내 그림이 자기 그림보다 좋다 칭찬했다.” 정월은 근대기 유명한 여상화가 나혜석을 이르는 말이니 장욱진은 건강을 회복하는 일과 그림 학습을 산속의 절에서 동시에 이루었다. 그는 경봉 스님과 선문답을 나눌 수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도인들이 갖는 특별한 면모인 헐렁한 옷과 술을 좋아하고 말을 아끼며 단순함을 지향하는 점도 그를 속세의 인물과 달라 보이게 하는 부분이다.

장욱진 작품의 전반적인 특성은 그가 입에 달고 살았다는 ‘심플’과 깊은 연관이 있다. 종이든 캔버스이든 혹은 벽화이든 색을 입혀도 긁어내거나 엷게 물감을 올려 바닥이 드러나 보인다. 거기에는 숨기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소(素) 그 자체를 작품의 외면에 배치함으로써 말 그대로 그림임을 드러낸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눈앞의 대상을 그대로 나타내는 재현의 세계가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과 사물이 만나 작용하는 뜻의 세계가 된다.

그것은 서양화로도, 동양화로도 보이고 때로는 선화(禪畵)나 민화 혹은 문인화나 불화로도 보인다. 이 경계 없이 확장되는 세계는 자연을 최대한 드러낸 결과이자 가장 회화적인 요소를 아낀 결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의 화면에는 지나침이 없기 때문이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어떤 선입견도 없이 들어가 이해하는 것, 그것은 어린아이의 시각이자 가장 소박한 마음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이 가장 단순한 어린이의 시선과 깨달은 자의 사물을 명쾌하게 이해하는 시선을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다.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무소유의 법정 스님과 장욱진의 생활 태도는 다르지 않다. 생전의 교류 또한 드물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욱진의 작품에서 집들이 거꾸로 놓여 있는 것과 같은 세상을 다르게 보기, 아동화 같은 양상의 천진한 눈으로 보기와 같은 것은 불교적 시각이기도 하다.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 심플이란 어린 시절로의 회귀였으며, 일상사에서 원초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던 시간의 고정을 통해 구현한 공간이었다.

장욱진은 캔버스에 유채로 보리수나무 아래 득도한 인물을 표현한 〈수하〉, 불경을 외는 부인을 형상화한 〈진진묘〉, 부처의 일대기를 도식화한 〈팔상도〉 같은 불교적인 내용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가장 간단한 동그라미와 선 몇 개로 완성한 사람 모양은 일본 일련종 단체에 기증하였던 것인데, 불교의 수행 정심을 잘 표현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외에도 장욱진의 작품들은 불교로 분류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양의 종이에 먹을 듬뿍 묻힌 필을 휘둘러 완성하는 선화(禪畵)가 있다.

 

도상의 파괴와 정신, 권진규

권진규(權鎭圭, 1922~1973)의 작품을 들여다보노라면 조용하기 한이 없는 형태의 내부 저 깊은 곳에서 가슴을 찢는 것 같은 비명을 듣는다. 또렷한 눈매도 아닌 인물들이 매섭게 가슴을 후벼 파는 시선을 주기도 하고, 굳게 다문 입술로 준엄한 꾸짖음을 내뱉는 것도 같다. 관람자로 하여금 자신의 감정적 동요를 바라보게 하는 것 또한 권진규 작품이 갖는 힘인데, 이는 작가의 제작에 대한 엄밀한 태도에 기인한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담배와 커피, 음악으로 하루를 시작한 작가는 아침(6~8시), 오전(10~1시), 오후(3~6시), 밤(8~10시)으로 나누어 이른 아침과 밤에는 작품 구상, 오전과 오후에는 작품 제작을 하였다. 이러한 생활에서의 절도는 “커다란 진흙 덩어리를 덜퍽 붙여놓고 깎아내는 것이 아니라 콩알만큼의 작은 점토 덩어리를 조심스럽게 붙여나가는 절도 있는 작업”과 같은 맥락 안에서도 지켜졌다.

일견 단순해 보이는 권진규의 작품은 사실 조각적 재료의 충실함으로 그득하다. 잘 알려진 〈자소상〉을 포함한 두상 계열의 테라코타 작품들은 흙으로 형태를 만들어서 그대로 구워낸 것이 아니라 형태를 고정시켜 석고 틀을 만든 다음 안에 흙을 밀어 넣어 떠낸 것으로서, 〈지원의 얼굴〉 경우만 해도 한 번에 3점을 제작하였다. “돌도 썩고, 브론즈도 썩으나 고대의 부장품이었던 테라코타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잘 썩지 않습니다. 세계 최고의 테라코타는 1만 년 전의 것이 있지요. 작가로서 재미있다면 불장난에서 오는 우연성을 작품에서 기대할 수 있다는 점과 브론즈같이 결정적인 순간에 딴 사람(끝손질하는 기술자)에게로 가는 게 없다는 점입니다.”라는 권진규의 말은 바로 테라코타가 그의 작가주의를 드러내기에 가장 적합한 재료였음을 알려준다.

그의 모델들은 젊은 여성과 소, 말, 고양이, 닭과 같은 동물들과 미술사에 존재하는 유명 작품의 이미지를 닮은 전통의 것들도 이었다. 여승을 건칠로 만든 〈춘엽니〉 이외에도 자신을 승려의 모습으로 나타낸 〈자소상〉 등 권진규의 작품은 인물상에 내재한 정신을 표현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것은 극복과 절제와 같은 엄격한 수행자적 삶에서 발원한 정신적 자유를 의미한다. 또한 권진규는 〈불상〉을 몇 점 조각하였는데 목조의 조각들은 고대 보살상의 보관에 부처의 수인을 하는 등 다양한 변주를 이루고 있다. 이는 권진규가 도상을 명확히 알고 있음으로 인하여 그것을 깨어 다양한 조합을 시도한 결과이다. 절제와 극복은 결국 정신적 자유를 위한 것이라는 그의 불교에 대한 이해를 나타내는 작품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는 말이다. 그 스스로 불교에 심취하였지만 종교적 예배 대상이 아닌 예술의 모티브로 활용하였던 것이며, 이는 현대미술로서 불상을 자리매김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권진규는 동선동에 아틀리에를 지으면서 천장을 높게 하였다. 기념조형물을 만들려는 의도에서였다. 1968년부터 1973년까지 전국에 15기의 애국선열 기념조상위원회에서 주관하여 선열의 동상을 세웠지만 권진규는 한 점도 수주받지 못하였다. 〈원효대사상〉 〈사명대사상〉 등이 불교계의 맘에 들지 않아 다시 만들자는 의논이 일었을 때, 권진규에게 의뢰가 돌아갔다. 그는 매우 기뻐하였지만 계약금을 받지는 않았다. 나중에 하자는 말은 아마도 수전증으로 몸이 힘들어졌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권진규의 손에 의한 불교 조형물은 세워지지 못하였지만, 그의 인체 두상들은 불교적인 정진의 상징으로 미술사에 자리하고 있다.

 

만다라에서 찾은 추상, 하인두

하인두(河麟斗, 1930~1989)에게 추상이란 정신적인 차원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불교적 주제에서 ‘혼불’로 초월적인 세계를 추구하였다. 하인두는 한때 징역을 살 때 독방 신세가 된 적이 있었는데 손수건만 한 햇살이 감방 바닥에 내려앉으면 금싸라기 같은 햇살이 그리 고마울 수가 없었노라고 회고하였다. 이상의 〈날개〉를 상기시키는 햇살의 크기에 대한 비유이지만 병마와 투쟁하던 1988년, 그는 감옥에서의 기억과 병실의 상황을 유사하게 느꼈고 철창 밖 세상의 “먹구름 틈새의 별처럼 그렇게 부시고 드밝은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결심하였다. ‘밝은, 불같이 더운 그림’을 그리기로 한 것이었고 ‘혼불’은 그러한 상황의 상징이다.

생애 마지막을 불태운 오방색의 회오리치는 이미지로 가득한 〈혼불〉 이전에 그는 천도교, 불교 등 민족적 종교에 심취하여 있었다. 그것은 삶의 방식이기도 했다. 성인으로서 잠들기 전 하루에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했는가 반성하는 이가 과연 있을까? 청화(靑華) 하인두는 하루하루를 반성하며 착하게 살고자 했다. 그는 인간 본연의 심성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삶에서 종교적 태도를 유지하였다. 일찍이 민족적인 주체성이 강한 성격의 천도교도였으며 어려운 시절에 선(禪)으로 자신을 다스렸고 불교 경전을 탐독하였다.

〈미륵〉 〈묘환〉 등의 작품명은 불교의 개념이므로 종교와 작품의 관계를 고찰하는 데 적절한 예이다. 이 시기 작품은 인간 의식 저변에 자리한 애증, 증오, 번뇌 등의 추적을 추상적인 사상이나 심상 등을 구체적으로 시각화한 것이다. 그가 독서와 문학적 사색을 통해 접근했던 세계는 수행자가 이룩하는 세계로서 ‘깨달음의 미학’인 폭넓은 사유체계로의 접근이었다. 사찰의 문이나 단청에 구현된 조형은 현대인에게는 전통 세계의 미의식으로 보이지만, 실은 사찰의 장엄으로서 종교적 사상이 가시화된 것이다.

그는 철두철미 한국인으로서 한국적인 것의 중요성, 전통의 존중을 표방하고 있고 그것의 구현을 오랜 세월 한국의 정신적 중심에서 작용한 불교의 도상에서 찾았다. 또한 전후 현대미술의 추상표현주의 미술도 발상의 뿌리는 선(禪)이나 무(無)의 사상이 짙게 깔린 것이어서 현대 프랑스 화단의 ‘술라주(Pierre Soulages), 아르퉁(Hans Hartung)’에서도 그러한 것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역사 속에서 정신의 표현으로서 종교에 접근하였고, 표현의 실제 예로 불교미술에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천주교인이었든 불교인이었든 그는 언제나 종교 이전에 그것이 지닌 미덕인 자비나 사랑 등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마음과 마음의 문이 열리고 가슴끼리의 온정이 트일 때, 화합이 이룩되고 그것이 바로 ‘묘계환중(妙契環中)’의 이치라 설명하고 있다. 온 마음으로 모든 것을 다 내어놓는 보시가 바로 이러한 경지라고 하였던 것이다. 결국 부처님, 하느님 모두 생명의 동일한 원천이라는 개념은 그가 작품의 명제를 〈묘환〉이란 불교적 개념을 사용했을 때조차 불교에 한정하여 경계를 지닌 것은 아니었다. 무애행(无涯行)의 화신인 원효가 이룩한 개념을 형상화한 것이니 성과 속, 삶과 죽음이 모두 하나로 압축되어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이국만리에서 독경 소리를 들으며 그려낸 작품이 〈묘환〉인 것도 당연하다.

 

부처가 부처를 보다, 백남준

백남준(白南準, 1932~2006)은 6 · 25전쟁 중에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미학을 전공하였고, 1956년에는 독일에서 음악학과 미술사를 공부했다. 독일에서 존 케이지(John Cage),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 등과 교류하면서 전자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텔레비전을 이용한 작품을 선보여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 불리게 되었다. 국제적인 아방가르드 집단인 플럭서스(Fluxus)의 일원이기도 한 그는 1964년에 미국 뉴욕으로 이주하여 첼리스트인 샬럿 무어먼(Charlotte Moorman)과 함께 비디오와 음악을 혼합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1980년대에는 전 세계를 하나로 잇는 위성 TV 작업을 통해 새로운 미술의 장을 열었다.

세계를 이동하며 작업하였던 그는 제45회 베니스비엔날레(1993)에는 독일관 대표로 참가하여 황금사자상을 수상하였다.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에 한국관을 열 수 있던 데에는 백남준의 역할이 컸고 광주비엔날레 또한 백남준의 힘이 이루어낸 국제 행사였다. 어린 시절 한국을 떠났고, 여러 국가의 거주자라는 신분으로 살았지만, 항상 그의 내면에는 한국적인 정신세계가 장착되어 있었다. 민속적인 굿과 신명과 같은 것 이외에 백남준의 대표작에서 발견되는 불교적인 요소는 그의 뿌리 의식에서 발원한 것이기도 하다.

백남준의 작품 중 불교적인 색채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TV부처〉 시리즈이다. 고물상에서 구입한 듯한 불상이 TV 화면을 마주 보고 있다. 이 불상은 가까이에 카메라가 놓여 있어서 실상 부처는 TV 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내성, 자신을 본다는 것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니! 관객은 부처(상)와 TV 사이에 끼인 상태가 아니라 내려다보면서 이 둘의 관계를 응시하며 자기를 본다. 테크놀로지를 통하여 2,500년 전의 성자가 지시한 정신적인 상태를 시각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또한 백남준의 퍼포먼스는 선사들의 일탈이나 무애행과 닮아 있다. 머리카락에 먹물을 묻혀 글씨를 써가는 〈머리를 위한 참선〉은 선화를 그리던 옛 스님의 일화를 상기시킨다. 바이올린을 끌고 걸어가는 백남준의 뒷모습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때려 부수라는 꾸짖음을 떠올리게 하고, 〈영화를 위한 참선〉은 깨달음을 향한 내면의 여행인 묵언수행을 떠올리게 한다. 예술은 사기라고 한 그의 말은 공 사상과도 연결되며, 색즉시공 공즉시색 현상에 대한 그의 인식을 전하는 말이기도 하다. 진실이라고 믿는 것들에 대한 의심을 통해 진실에 다가가는 각고의 시간들을 그의 초시간적이며 초월적 공간을 담은 미디어 작품 속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 이미지로 끄집어내진 《삼국유사》, 이만익

이만익(李滿益, 1938~2012)은 6 · 25전쟁으로 떠난 부산 피난지에서 평생 스승인 화가 박상옥을 만나 그림을 본격적으로 배웠다. 경기중학교 3학년인 1953년에 환도한 서울에서 열린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출품하였다. 〈정동의 가을〉과 〈골목〉이 입선하였는데, 어린 학생의 작품이 입선한 것이 문제가 되었고, 이 사건 이후 국전은 성인을 대상으로 한 전람회라는 정체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천재적인 화가의 자질을 지녔던 이만익에 관한 일화이다.

그가 처음으로 개인전을 한 것은 프랑스로의 유학을 위해서였다. 유학 중에도 앙가주망 동인으로서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표하였는데 1974년에는 ‘르살롱전’에서 은상을 수상하였다. 1975년 ‘귀국전’에서는 누드 작품 등을 선보였지만 바로 2년 뒤인 1977년 미술회관의 개인전에서는 〈헌화가(獻花歌)〉 등 40점을 출품하였다.

《삼국유사》의 내용을 작품으로 제작하여 전시한 것은 누드를 그리던 화가의 행보와는 매우 다른 것이다. 유학을 통하여 다른 나라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며 테두리를 짙게 만드는 자신만의 양식을 이룩하였다. 그리고 이후 내용으로 충만시켜 나간 방향이 바로 《삼국유사》의 세계였으니 한국인의 정한(情恨)을 표현했다고 지칭될 정도였다. 그는 설화나 소설책의 내용들이 삽화처럼 눈앞에 지나가게 하는 오래된 삽화의 방식인 판화처럼 보이는 형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 형상의 변이를 상상으로 극대화할 수 있는 신화적 세계인 《삼국유사》 의 이야기는 아주 좋은 주제였다. 그것은 상상의 세계가 아니라 상상으로 인지되는 현실의 삶이었다. 불교를 국교로 한 시대인들의 삶을 가시화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불교적 소재가 그에 의해 화면은 평평하게 평면적이면서도 내용은 입체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본다.

〈치술신모도(鵄述神母圖)〉는 호랑이를 탄 신모가 칼을 든 채 달밤을 헤맨다. 그런데 둥글고 노란 달은 그녀의 바로 머리 뒤에 있어서 그녀의 광배처럼 빛나고 있다. 단순화한 나무와 구름, 새 그리고 둥글게 빛나는 별은 그녀가 밤에 존재함을 보인다. “사당이 있다 하나 신모(神母)는 이런 모습으로 밤마다 치술령 깊은 곳을 헤맬 것 같다.”는 작가의 글은 여성인 그녀를 호랑이와 결합시켜 산신령으로 위치시킨다. 그녀의 얼굴은 〈관음도〉 〈명성황후〉 〈유화〉에서도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리고 그 원형을 우리는 하회탈 등 전통적인 탈놀이에 등장하는 각시탈에서 발견한다. 민초들이 생각한 여성성, 그 이미지를 예술화하여 끝없는 변주를 통해 역사화하는 것이다. 그 연면성(連綿性), 끊이지 않는 생명성이야말로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외는 만트라의 힘과도 연계되어 있다.

그의 그림이 갖는 힘은 텍스트성이다. 그것은 이집트 상형문자처럼 단호하고, 한자의 시원처럼 테두리로 이루어져 있고, 그리고 도상화한다. 대상의 확고한 형태감은 그것을 대하는 모든 이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현대미술의 불통과 소외를 극복한다. 명확한 선을 택함으로써 얻어낸 서술성은 원색을 통해 보완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아름다운 서사성에 의해 전통의 맥락 안에서 이해된다.

 

사회를 반영한 불교적 정신으로서 회화, 오윤

오윤(吳潤, 1946~1986)은 길지 않은 작품 제작 시간을 가졌던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현대미술사에 확실한 족적을 남긴 작가 중 하나이다. 그는 민초들의 삶을 전통의 모습으로 재현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한국 현대사에서 전통은 국가적 차원에서 보호되고 계승되어야 할 참된 어떤 것이었다. 식민지를 겪고 난 이후 정권에서는 왕조 국가의 해체 이후 정통성이란 문제에 직면하였고, 국민을 설득하여 인정받는 방법은 ‘전통’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것도 한 방안이었기 때문이다. 에릭 홉스봄이 주시한 것처럼 전통은 창조되고 민족을 하나로 만드는 이데올로기이다. 민초들에 기반한 문화는 대다수를 계몽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한 정치적 입장과 그에 함께한 지식인들 사이에는 전통의 영역에 드는 항목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위의 것이었다. 오윤은 기층민의 문화 저변에 깔린 이미지의 힘을 간취하고 그것을 소통의 방식으로 사용하였다.

만다라나 단청에서 볼 수 있는 연화문 안에 사람을 넣은 〈팔엽일화〉는 부처의 ‘팔상도’를 연상시키지만 억압받고 유린당한 민초의 삶을 표현한 것이다. 〈마케팅-지옥도〉는 불화에서 보는 ‘지옥도’를 현대 자본주의의 모습으로 재현한 작품이다. 사람을 고문하고 벌주는 지옥의 존재들은 코카콜라와 맥심이다. 자본주의의 대명사들이 소시민의 삶을 돌과 돌 사이에 넣고 밟는 벌, 끓는 기름 가마 속에 넣는 벌을 준다. 소시민들이 느껴야 하는 끝없는 고통 앞에 지장보살은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있다고 믿는 세계의 도상을 빌려와 제시하는 이 방법은, 그것이 필요했던 시대에는 주술도 사실이었던 것처럼 그는 그가 보고 느낀 ‘사실’을 표현한 것이다. 이렇듯 적극적으로 불화의 방식을 차용하여 자신의 메시지를 전한 작가는 이전에 없었다. 오윤은 민초의 삶을 반영하기 위해 민초의 것이었던 전통 즉 불교나 민화 같은 것들을 차용하였고, 그런 중에서 삶과 죽음이 크게 구분되지 않는 세계를 인지하고 바른 삶을 지향하게 하는 것이다. ■

 

조은정
이화여자대학교, 동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석사 · 박사).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며 2023 서울국제조각페스타 · 2020 여수국제미술제 · 세종대왕과 음악 국제전시회 등의 전시감독, 서울벤처정보대학원대학교 교수 등 역임. 주요 저술로 〈1920년 창덕궁 벽화조성에 대한 연구〉 〈20세기 황제릉 조각에 대한 연구〉 〈한국 현대미술에서 민화의 이코노그래피〉 등의 논문 다수와 《한국 조각미의 발견》 《권력과 미술》 《동상》 《고희동》 등의 저서 다수가 있다. 현재 고려대학교 디자인조형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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