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세계를 가르친 현대불교의 스승 10인

동양의 근대는 아편전쟁(1840년)과 청일전쟁(1894년)으로 대변되듯, 서양 제국주의 세력이 동양으로 침범해 들어오던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로, 동서양 문화와 사상이 정면으로 부딪치며 갈등 · 융합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 중국의 대표적 지식인이었던 양계초(梁啓超, 1873~1929)는 동서양을 포함하여 세계사상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가로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 칸트를 들었다. 근대 이후로는 마르틴 루터, 베이컨, 데카르트를 근세의 성인(聖人)으로 꼽았는데, 이들 사상의 중요성을 높이 평가한 엄복의 견해를 따른 것이다.

이 중 마르틴 루터(M. Luther, 1483~1546)는 기독교 내부의 대규모 개혁운동을 시작한 종교철학자이자 개혁가로서, 그를 전후하여 중세와 근대를 나눌 정도로 세계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다. 그런데 근대 중국 불교계에도 ‘마르틴 루터’로 불리는 사상가이자 개혁가가 등장하였으니, 그가 바로 태허(太虛, 1889~1947) 대사이다. 태허의 불교개혁 운동이 마르틴 루터의 가톨릭 비판과 신교 수립만큼이나 중요하고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본 것이다.

 

중국 전통불교에 기반한 개혁의 길

근대 시기 사상가이자 개혁가로서 태허의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시기의 사상적 배경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근대 시기 전통 철학의 주요한 부분인 불교는 서양철학에 대항하는 사상적 무기로서 역할과 동서문화 교류의 계합점이라는 이중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이 이중의 역할은 세 가지 흐름으로 나타났다.

첫째는 유식불교의 등장이다. 유식불교의 부활을 주장하는 구양경무(歐陽竟無, 1871~1943), 여징(呂澂, 1896~1989) 등 남경내학원 학자들은 유식불교의 이성적 · 사변적인 논리 정신이 서양철학의 유입에 대응하는 최상의 방법이며, 불교가 서양과 중국 전통 철학의 계합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둘째는 중국 전통불교의 옹호이다. 태허, 은태여(殷太如) 등 무창불학원 학자들은 진여연기론에 기반을 둔 전통 중국불교가 서양의 충격에 대응하고 동양 우수성의 근거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셋째는 불교의 유학화이다. 유식불교와 중국 전통불교를 옹호하는 학자들 간의 논쟁은 많은 철학적 논의를 불러일으켰고, 불교와 유학을 결합시켜 서양에 대응하는 독창적인 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웅십력(熊十力, 1885~1968) 등 현대 신불가(新佛家)들은 유식불교를 비판하며 중국 전통불교를 유학화시켰는데, 이는 중국불교의 진여연기론을 발전시킨 철학이다.

이러한 세 흐름 중에서 태허는 두 번째 유형을 대표하는 학자이다. 실제로 중국 불교계에서는 태허의 스승인 양문회(楊文會, 1837~1911)가 일실되었던 유식학 문헌들을 간행한 일이 계기가 되어 유식불교가 크게 유행하였다. 규기의 《성유식론술기》가 간행된 뒤, 양문회는 구양경무와 매광희(梅光羲, 1880~1947) 등을 격려하여 유식불교를 연구하게 하였고, 여기에 태허와 한청정(韓淸淨, 1884~1949) 등이 합류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여징은 물론 강유위(康有爲, 1858~1927), 장태염(章太炎, 1869~1936), 담사동(譚嗣同, 1865~1898), 양계초, 양수명(梁漱溟, 1893~1988), 웅십력 등 당시 거의 모든 불교학자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유식불교는 인도불교에 속하고, 중국 전통불교는 《대승기신론》 계통의 천태 · 화엄 · 선불교이다. 《대승기신론》에 사상적 바탕을 둔 중국불교는 중국 고유 사상인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을 흡수하여, 인간이 본래 불성을 가지고 있고 종교적 실천을 통하여 그 불성의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불교에서 엄격한 논리체계를 가진 철학적 측면보다 수행과 관련된 종교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이에 불교가 서양철학과 대응할 수 있는 철학적 논리체계에 비중을 두어야 하는지, 아니면 전통 중국불교의 깨달음에 기반을 둔 종교성을 강조해야 하는지의 문제가 대두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인도 유식불교의 계보를 이은 현장-규기 계열의 유식불교를 진정한 불교철학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대승기신론》 계통의 전통불교를 진정한 불교철학으로 볼 것인가 하는 논쟁이 생겨났다. 서양문화의 충격으로 전통 철학을 반성하게 되는 지성적이고 비판적인 분위기에서 지적인 이해가 없는 신앙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구양경무 등 내학원 학자들은 신앙을 강조하는 《대승기신론》을 비판하고, 유식불교에 이끌렸다. 반면에 《대승기신론》이 중국불교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태허 등 무창불학원 학자들은 전통불교를 비판하는 것은 중국의 정신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전통불교를 옹호하였다.

태허는 전통불교의 입장에서 불교개혁과 재생에 선봉 역할을 하였던 실천적 승려이다. 그는 선종의 사상이 중국불교 개혁의 최대의 정신적 동력이라고 주장하고, “중국불교만이 불교의 핵심을 파악하였다”고 중국불교를 높이 평가하였다. 논리적, 철학적인 접근을 강조하는 구양경무의 입장은 유식불교를 지향하게 되고, 철학적인 접근과 함께 종교적인 접근을 강조하는 태허의 입장은 중국불교를 지향하게 된다.

실제로 태허는 《대승기신론》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성격을 옹호하였다. 태허가 보는 진여는 《대승기신론》에서의 진여와 같이 ‘절대부동성(絶對不動性)’과 더불어 ‘수연(隨緣)’의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법성과 법상을 통일하는 논리를 제시하고, 유식불교와 《대승기신론》은 여러 차별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라는 원교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는 불교의 새로운 이론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단지 불교의 다양한 종파들의 특징을 결합하여 유식불교와 화엄 · 천태 불교를 조화시키고자 하였다. 이것은 《대승기신론》의 진여연기론의 합리성을 강조하고 이를 우회적으로 변호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대승기신론》 논쟁에서 보는 태허 사상

이러한 차이는 근본적으로 ‘진여(眞如)’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견해차에서 비롯되었다. ‘진여는 활동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구양경무는 ‘절대부동(絶對不動)’의 측면을, 태허는 ‘인연에 따른 움직임(隨緣)’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구양경무는 유식불교에 근거하여 진여와 정지(正智)를 구분하였는데, 진여는 본체이고 아무리 오염된 종자가 사라졌다고 해도 깨달은 상태인 정지는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구양경무에게 진여는 생성 소멸되지 않는 절대적인 실체이고, 진여와 정지는 서로 차원이 다른 영역에 속한다. 구양경무의 이러한 논의는 진여의 절대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반면 태허는 《대승기신론》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현상계의 모든 것은 진여의 표현이며, 진여는 생성 소멸하는 부동의 실체가 아니라 인연에 따라 움직이는 활동성을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사실상 ‘진여의 훈습(薰習)’이라는 문제와 연관된다. 구양경무가 보기에, 진여는 고요하고 활동성이 없으며 현상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것이므로 결코 훈습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면 “더러운 현상이 깨끗한 진여에서 나온다는 모순”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이다. 더러운 현실 세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완전하고 깨끗한 절대적인 진여’라는 분명한 목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태허는 《대승기신론》이 제창한 진여연기론의 합리성을 강조하였다. 태허의 관심사는 진여 그 자체가 절대부동한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지 생동감을 가지고 현실에 투영될 수 있는 논리(인연에 따라 움직이는 진여)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서 진여가 활동성을 가질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태허는 연기(緣起)의 주체를 더러운 망식(妄識)의 성격을 갖는 아라야식이 아니라, 진여와 진여의 활동을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아타나식[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으로 설정하였다.

또한 “《대승기신론》과 유식불교는 회통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구양경무와 달리 태허는 근본적인 입장에서 보면 둘은 일치한다고 보았다. 태허가 보기에, 유식불교는 차별적인 현상 세계는 이론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지만 실천적인 평등 진여의 진실성을 잘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차별의 형상을 떠나 일체법의 진여 실성을 나타내 보일 수 있다면, 그것을 유식 법성이라고 부른다”고 하며, 유식불교와 《대승기신론》이 근본에서 일치한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태허는 기본적으로 중관불교는 물론 유식불교, 그리고 《대승기신론》을 하나로 보는 원교적(圓敎的)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런 입장은 《대승기신론》과 중국불교의 내재적 관계를 생각해볼 때, 중국불교의 근본인 《대승기신론》이 뒤엎어지면 근대 시기에 서양의 도전에 맞대응할 동력을 잃게 되리라는 깊은 우려에서 나온 주장이었다.

 

태허의 생애와 이력

태허는 1889년 중국 절강성 숭덕에서 태어났고 속명은 여폐림(呂沛林)이었다. 태어난 다음 해 아버지가 병사하였고 어머니도 그가 어렸을 때 개가하여,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다. 1904년 16세에 선불교 임제파에 속하는 영파 천동사(天童寺)에서 출가하였다. 출가 이후 은사 스님은 그가 허약하여 건강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태허(太虛)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도교에 독실한 외할머니의 영향으로 그는 1904년 그는 사찰에서 전통불교를 공부하는 외에도 당시 젊은이들이 많이 보았던 톨스토이, 바쿠닌, 프루동 등의 사회성 짙은 글들을 탐독하였다. 또한 당시 서세동점의 시대적 고민을 짊어지고 있던 청년 지식인들을 격동시켰던 글들을 빠짐없이 읽었다. 태허 자신의 말에 따르면, “민국이 성립되기 4년 전인 1908년부터 민국 3년, 1914년까지 강유위의 《대동서》, 담사동(譚嗣同)의 《인학(仁學)》, 손문의 《삼민주의》, 엄복의 《천연론》, 장태염의 《오무론》 《민보》, 양계초의 《신민총보》 등의 영향을 받았다. 선종, 《반야경》, 천태를 통한 불교 이해로써 불교 혁신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면학의 분위기 속에서 태허의 불교 혁신 사고가 싹텄다고 할 수 있다.

1909년 태허는 양인산(楊仁山) 거사가 설립한 금릉각경처 내 교육기관인 ‘기원정사’에 입학하였다. 당시 10명 남짓한 학생 가운데 절반 정도가 승려였는데, 이후 중국 근대 불교계의 양대 산맥이라 할 구양경무와 태허가 양인산의 제자로서 그곳에서 함께 수학하였다. 구양경무는 거사로서 재야의 불교 연구를 대표하였고, 태허는 승려로서 출가자를 대표하였다. 그곳에서는 양인산 거사가 직접 《능엄경》을 가르쳤고, 소만수(蘇曼殊. 1884~1918)가 서양 학문에 접근할 수단인 영어를 가르쳤다. 그러나 반년 만에 기원정사는 문을 닫았고, 태허는 양주의 승려사범학당에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태허는 불교협진회를 설립하였으나, 신구 대립이 심해서 불교개혁의 첫 시도는 실패하였다. 당시 혼란을 타개하려던 고승 경안(敬安, 1851~1912)이 입적하자 태허는 ‘나와 불교의 인연이 이렇게 끝나는가’라고 생각하며 방황하였다. 고승 인광(印光, 1861~1949)의 도움으로 보타산 법우사에서 은둔하면서 그는 3년 동안 참선 · 예불하고 경전을 읽으며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능엄경》 《대승기신론》 등을 다시 새롭게 읽었으며, 엄복이 번역한 서양 사회과학 책들도 탐독하였다. 실제로 태허는 자신이 엄복과 장태염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자술하고 있다. 1917년, 3년 만에 은둔에서 벗어난 태허는 확실히 방향이 섰고 더 이상 방황할 일이 없었다. 1918년부터 그는 불교개혁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불교의 3대 혁명:
‘불교 교리 혁명’ ‘승단제도 혁명’ ‘불교 재산 혁명’

태허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상해에 ‘각사(覺社)’를 창립하는 것이었다. 각사 창립에는 그가 존경하던 장태염 등 재가 불교인들도 많이 참여하였다. 각사는 불교개혁 운동의 근거지로서 불교 수행과 연구, 그리고 불교잡지를 간행하는 일을 주된 업무로 삼고자 하였다. 1920년에는 각사에서 발간하던 《각사총간》을 《해조음(海潮音)》으로 개칭하였는데, 당시 시대 문제에 대해 매우 적극적으로 논의를 전개하며 불교 계몽을 이끌었다.

태허는 “나는 우연히 불교 혁명사상가들과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불교계에 혁명이 일어나자, 나는 상해혁명의 흐름에서 ‘불교 교리 혁명’ ‘승단제도 혁명’ ‘불교 재산 혁명’이라는 깃발을 내걸었다”고 하였다(〈나의 불교혁명 실패사〉).

그는 첫째,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통치자들이 미신을 이용하여 국민을 속이는 것을 지목하였다. 또한 중국 가족제도가 배양해온 법맥 제도, 즉 사찰 재산을 개인적으로 상속하는 제도를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사찰 재산을 개인적으로 상속하는 것은 불교가 추구하는 공(空)의 생활에 정면으로 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둘째, 개혁해야 할 대상으로, 불교가 현실 세계에 무관심한 ‘산(山)속 불교’의 형태를 취하고 산속에 숨는 일을 비판하였다. 불교가 죽음의 문제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귀신을 받드는 일만 생각하는 종교에서 사람에게 봉사하고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의 현장들을 돌보는 종교로 변화할 것을 주장하였다.

셋째, 건설해야 할 목표로서, ① 인생불교를 건설하는 것, ② 현대 중국사회의 환경에 맞는 출가 승단을 건설하는 것, ③ 재가 신도를 조직화하여 단체를 건립하는 것, ④ 농업, 공업, 상업, 군사, 정치, 예술 등 사회 각층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불교의 ‘열 가지 선(十善)’으로 융화시켜 중국 민족 및 전 세계가 십선문화를 이루도록 한다는 것을 제기하였다.

태허가 주장하는 교리, 제도, 사찰경제를 중심으로 한 불교혁명은 사실은 손문(孫文, 1866~1925)의 ‘삼민주의(三民主義)’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태허 자신도 “중국 혁명에서 세계적 국민혁명으로 나아가는 데에는 삼민주의가 있고, 중국불교의 세계적 불교화와 불교혁명에는 ‘삼불주의(三佛主義)’가 있다”고 하였다. 손문의 삼민주의는 민족주의(民族主義), 민권주의(民權主義), 민생주의(民生主義)로서, 민족을 중심으로 하고 국민의 권리와 국민의 삶을 중심으로 한다는 원칙에 근거하여 사회 변혁을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에 적용된 것이 바로 삼불주의로서, 태허가 말한 불교혁명의 세 원칙인 이상적인 출가 승단의 성립, 이상적인 재가 신도 단체의 설립, 그리고 정신과 물질의 생산과 발전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태허는 죽을 때까지 중국불교의 부흥을 위해 노력했지만, 전쟁과 혁명을 통해 중국이 겪은 경제적, 정치적 혼란 때문에 그의 시도들은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는 1947년 3월 12일 상해 옥불사(玉佛寺)에서 입적하였다. 그의 저술, 인터뷰 등을 모은 《태허대사전집(太虛大師全集)》(1-12집)이 있고, 인순(仁順, 1906~2005)과 동초(東初, 1907~1977) 등의 제자가 있다.

 

참여불교: 승려의 전쟁 참여에 대한 논의

중국 국민당 정부는 1946년 태허에게 항일전쟁 승리 훈장을 수여하였고, 다음 해 그가 세상을 떠나자 태허의 업적을 기리는 글을 발표하였다. “태허는 항전 시절 승려들을 독려해 구호대를 조직하였다. 승려들이 가사에서 군복으로 갈아입기까지 그의 공이 매우 컸다. 그는 1928년 이래 수십 년간 항일의 뜻을 굽히지 않았으니, 호국의 공이 가상하다.”

1931년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하였을 때도 태허는 〈대만과 조선, 일본의 4천만 불교도들에게 보내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일본과 조선, 대만의 불교도들은 붓다의 구세 정신을 계승할 의무가 있다. 모두 일어나 군벌을 폐출하고 전쟁을 제지하여 세계평화 구현에 앞장서야 한다.

만주사변 2년 후, 상해사변이 발발하자 태허는 승려로서 산속에서 염불만 할 것이 아니라 현실에 참여할 것을 적극 권하였다. 전국의 청년 불자들에게 ‘불교청년호국단’ 조직을 권하였고, 종군과 모금, 선전 활동을 독려하는 등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아갔다. 그 때문에 ‘정치 승려’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이에 대해 당시의 저명한 문학가 노신(魯迅, 1881~1936)은 “많은 사람들이 태허를 정치 승려라고 깎아내리지만, 가당치 않은 말이다. 태허는 ‘근대 화상’이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온갖 명성을 누리면서도 큰스님의 위엄은 한 조각도 찾기 힘들고, 봄바람처럼 모두를 푸근하게 해준다. 그의 말이라면 무엇을 해도 도리에서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항일전쟁이 본격화되고 국공연합이 결성되자 중국 정부는 전국의 승려들에게 징집령을 내렸다. 이러한 정부의 방침에 대해 승려들 사이에서는 격렬한 찬반 논쟁이 벌어졌다. 정부 방침에 찬성하는 이들은 “우리도 국민의 한 부분이다. 국민 병역의 의무가 있다.”라고 하였고, 반대하는 이들은 “우리는 이미 출가해서 붓다의 자비를 봉행하는 사람들이다. 전선에서 적을 살상하는 것은 불교 교리에 어긋난다.”고 주장하였다. 태허는 훈련총감부에 서신을 보내 “승려들끼리 훈련을 받겠다. 복장은 우리에게 맡겨라. 간편하되 원형은 유지하고 싶다. 두 가지 사항만 허락하면 일반인과 똑같이 훈련에 참여하겠다. 단 훈련을 마친 후 전투부대에는 배속시키지 말아달라.”고 청하였다. 정부에서는 태허의 요청을 수용하였다.

그 뒤 태허는 전국 사찰에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다. 우리는 출가한 몸이지만, 국가를 뒤로하지는 않는다. 신해혁명 이후 계속된 우리의 근대화는 일본의 파괴에 직면했다. 비분을 가눌 길 없다. 비바람이 외로운 등불을 꺼뜨리려 한다. 목탁을 두드리며 희생된 항일 전사를 추모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정부의 통일된 지휘 하에 난민 구호와 전쟁 지식을 습득하기 바란다. 몸을 던져 국가와 인민을 구하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을 실현하는 길이다. 의학 상식과 군 기본동작을 익히고, 삼민주의와 정치사상 같은 학과도 소홀히 하지 마라. 밥값은 각자 부담하고 부족한 부분은 사찰에서 지원하라.

이러한 태허의 말에 따라 전국의 사찰에는 승려 훈련반이 발족하였다. 태허 사상이 철저한 참여불교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태허의 ‘인생불교’와 인순의 ‘인간불교’

태허의 사상은 한마디로 ‘인생불교’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태허의 제자인 인순의 ‘인간불교’도 태허의 인생불교에 근거한 것이다. “태허가 말한 인생불교는 귀신과 죽음을 중시하는 중국불교를 겨냥하여 제기된 것이다. 나는 인도불교의 천화(天化), 즉 신화(神化)의 정도가 너무 심각하고 또 중국불교에 깊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인생’이 아니라 ‘인간’을 말하였다. 중국불교가 신화에서 탈피하여 현실의 인간에게 돌아오기를 바란다.” 태허는 중국불교가 가진 귀신과 죽음을 중시하는 성향을 인생, 즉 인간의 현실의 삶으로 극복해낼 수 있다고 보았고, 인순은 더 나아가 인간을 위한 불교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태허는 불교 각 종파의 불신관을 모두 받아들였다. 이 중에는 역사적 붓다 외에도 붓다를 이상화하고 인격적 요소를 내포하는 천신화된 붓다의 성격도 포함되어 있다. 태허 사상은 전통불교에 기반하였기에 그가 생각하는 붓다는 인간인 동시에 천신(天神)의 요소도 일부 가지고 있는 반면에, 인순이 긍정하는 붓다는 역사적 인간으로서 붓다가 중심이 된다. 이는 기독교에서 예수를 역사상 실존 인물인 동시에 신의 아들로 봄으로써 신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종교적 입장과 역사상 실존하는 인간으로만 보는 신학의 차이에 비견할 만한 차이이다. 이것이 스승 태허의 인생불교와 제자 인순의 인간불교의 차이이다.

태허는 “인간이 사는 이곳에서 성불한다(卽人成佛)”라는 입장을 철저히 하였고, 인간을 벗어난 초현실적인 어떤 세계에도 깊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중국불교를 개혁하려는 혁명승들에게 주는 가르침〉이라는 글에서 “인간에서 보살로, 그리고 부처로 나아가는 인생불교를 건설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인간 중심, 즉 현세의 살아 있는 인간에 관심을 둔 태허 사상에서 보면, 정토종의 ‘정토’에 대한 인식이 좋을 수는 없었다. 정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에 대한 관념이기 때문이다. 그는 정토종을 현실화하려고 시도하였다. “오늘 오염된 중국을 중국의 깨끗한 땅인 정토로 바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마음의 힘과 정토를 만들 능력이 있으니, 이 세상을 순수한 땅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자”고 제안하였다. 그의 실천적, 제도적 개혁 시도는 정부의 종교 정책이나 불교계 내부의 의견 통합의 어려움 등 여러 요인들로 인해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죽음과 귀신 등 저 세상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의 인간의 삶을 중시하는 그의 ‘인생불교’ 사상은 이후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이 사는 이 세상의 개혁과 혁명을 시도하려는 인순의 ‘인간불교’ 사상으로 발전해갔다.

결국 중국 근대불교의 대표자라고 할 태허의 사상은 전통불교에 근거하되 인간의 삶을 중심에 놓고 그를 지향하는 ‘인생불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참여불교적인 실천과 개혁적 시도 모두 인생불교 사상에 근거하였다. 태허의 인생불교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처럼 불교를 인간 중심의 종교로 받아들이게 한 근대적 변혁이었고, 중국 전통을 바탕으로 서양의 사상 · 문화를 보조적으로 받아들인 중체서용(中體西用)의 불교라고 할 수 있다. ■         

 

김제란 redhairran@hanmail.net

고려대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태동고전연구소(지곡서당) 한문연수과정 수료. 고려대 철학연구소 및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소 연구초빙교수 역임. 박사학위 논문은 《熊十力 哲學思想 硏究-동서 문화의 충돌과 중국 전통철학의 대응》. 주요 논문으로 〈한 · 중 · 일 근대불교의 사회진화론에 대한 대응양식 비교〉 〈당군의 철학에 나타난 동서융합의 논리-유학, 헤겔철학과 화엄불교의 융합〉 등과 저서로 《원효의 대승기신론 소 · 별기》 등이 있다. 현재 고려대 철학과 강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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