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연초부터 온 세상이 코로나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가운데 자연히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기 시작하였다. 그간 사방팔방에서 알려주는 정보에 의하면 세계사의 오래전부터 다양한 전염병이 여러 차례 사람들을 혹독한 죽음으로 내몰았다는데, 그 역사를 거의 모른 채 살아왔다. 비교적 최근이라 할 2003년도의 사스 · 2009년도의 신종플루나 조류독감(AI) · 2015년도의 메르스 때까지도 바이러스니 전염병이니 하는 소식에 대해서 남의 일처럼 잠깐 건성으로 들었던 것 같다. 한편에서 일찍부터 이 분야 전문가들은 지금과 같은 팬데믹(
세상살이는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것이 없다. 재채기를 잘못해 허리가 아프기도 하고 물 한 모금 잘못 먹다 사레가 들리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은 더 어렵다. 만원 전철에서 어깨 조금 밀쳤다고 눈 흘김을 받고 고속도로에서 끼어들기 잘못했다고 보복운전 을 당하기도 한다. 나라와 나라 사이는 또 어떤가. 겉으로는 우방이라고 웃는 척하지만, 속내는 굴종과
근자 우리 사회의 화두는 단연 ‘미투(MeToo)’다. 친구들 사이에 만나서 서로 문안을 하다가도 “혹시 자네도 떨고 있나, 미투?” 하며 농담한다. 대체로는 모두 싱거운 농담인 듯 반응하지만, 그 속내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미투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면 보통의 ‘남자사람친구’들은 괜스레 볼
우리의 시간은 늘 찰나적이고 연기적이다. 지금 이 순간조차 온전히 붙잡을 수 없지만, 내게 주어진 오늘의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가면서도 지속성이라는 환상을 안겨준다. 다른 한편, 시간은 지금 머물고 있는 이 공간 속에서 수없는 연기(緣起)의 인드라망을 연출하며 삶의 복잡성과 복합성을 부른다. 언제까지고 지속될 것 같은 착각 속에서, 그 연기의 얽힘으로 인한
우리 현대사에서 촛불 혹은 촛불집회는 하나의 상징이다. 민의를 반영하는 통로가 간접적인 방법밖에 주어지지 않은, 그나마도 4년에 한 번씩밖에 기회가 없던 시절에, 정치꾼들에게 왜곡되어버린 민심을 바로 세우는 유일하다시피 한 기회였다. 그래서 촛불은 그리고 촛불 저항은 우리에게 시민참여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다. 2000년대 이후, 우리 사회는 자주 촛불을 들어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는 참 많은 말들이 있다. 특히 남을 헐뜯거나 무시하는 말들이 많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대화에 끼어들게 될 때가 있다. 심심하고 지루한 일상 속에서 남을 욕하는 것은 생각보다 재미있는 일이거나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기회에 그 대상이 바로 자신임을 알아차렸을 때 느껴야 하는 당혹감과
올 것이 왔다. 최근 발표된 우리나라 종교인구 조사결과 불교는 기독교에 비해 2백만 명이 더 적은 2위 종교로 내려앉았다. 이는 정부수립 이후 종교인구를 조사하기 시작한 처음 있는 일이다. 일부에서는 조사방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불교는 이미 한국사회에서 1위 종교 자리를 기독교에 내준 지 오래됐다. 통계수치 때문이 아니다. 생
어느덧 한 해의 끝에 다다랐다. 나라 전체가 혼란스럽다. 유전자가 침팬지와 98.8%나 일치하는 인간이 짐승과 다른 특성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중에서도 백미는 성찰이다. 내 안의 짐승들의 유전자가 작동하여 본능적으로 탐욕을 추구하다가도 멈추어 서서 돌아보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성찰이다. 성찰로부터 우리는 자아와 직접 대면하고 그 앞의 세계와 그 의미와
종교적인 성향이 강한 한국사회에서도 최근 십여 년 사이에 종교 환경이 급격히 변화했다. 도심 명상센터를 채우는 마인드풀니스와 자비명상, 오색등 화려한 연등 행렬, 산사의 템플스테이, 초파일마다 동자승들의 재롱과 함께 불교는 더 현대화되고 더 대중화되었지만, 종교라는 말보다 문화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것이 되었다.종교의 세속화와 사사화가 한국사회에서도 광범위
인도의 종교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째는 제사(祭祀)의 길(Karmamarga)에 속하는 종교, 둘째는 신애(信愛)의 길(Bhaktmarga)에 속하는 종교, 셋째는 지혜(智慧)의 길(Jnanamarga)에 속하는 종교다. 제사의 길에 속하는 종교는 제사의례에 최고의 중점을 둔다. 여기서는 의례집행이 바르게 이루어지면 운명까지도 좌우할 수 있
불교의 보편주의 전통갠지스 강 아지라파디 강 사라푸 강 마히이 강은 인도의 문화와 삶이 흐르는 이름난 강들이다. 하지만 그 강이 유유히 흘러 대해에 이르면 각각의 이름은 사라지고 단지 바다로만 불린다. 마찬가지로 출가한 사람은 그가 어떤 계급이었고, 무슨 일을 했든 단지 부처님의 제자[釋迦子]로만 불린다. 초기경전에 나오는 이 말씀은 흔히 계급을 부정하는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 그리고 희론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물론 동물들도 의사소통을 하지만 인간만큼 섬세한 감정을 나누거나 정의와 진리 같은 추상적 개념을 주고받을 수는 없다. 언어가 있어 인간은 감정을 표현하고, 경험과 지식을 축적하여 후세로 전승할 수 있다. 2,600여 년 전 붓다의 말씀을
불성에는 남북이 없다노(盧) 행자는 중국의 변방 영남 신주의 궁벽한 촌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는 어떤 스님이 독송하는 경전을 듣고 영혼에 깊은 진동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홍인 대사를 찾아가면 그 경에 대한 가르침을 배울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 길로 스승을 찾아 나섰다. 당시 홍인 문하에는 천 명에 이르는 걸출한 제자들이 모여 있던 터라 시골 총각을 압
가톨릭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다녀갔다. 교황은 방한 기간 중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는 평소 가난한 사람들을 배제하는 현대 자본주의를 ‘새로운 형태의 독재’라고 비판한 것과 맥이 닿아 있다. 노숙자가 숨지면 뉴스가 안 되지만 주가가 2포인트만 떨어져도 뉴스가 되는, 이 비정상적인 세상을 질타하는 그의
5월은 계절의 여왕이다. 겨우내 숨죽였던 나무들이 잎을 틔워 산하대지는 연초록으로 싱싱하다. 5월 한 달에는 즐거운 날들이 줄줄이 몰려 있다. 5일은 어린이날, 8일은 어버이날,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부처님오신날도 음력으로는 사월초파일이지만 5월 초순에 들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언제부터인가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부른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인
어떤 시인이 쓴 〈몸을 철학해보니〉라는 시를 읽은 적이 있다. “몸이 전부다// 몸이 있어 숨 쉬고 몸이 있어 일하고 몸이 있어 사랑하는 거다 그래서 몸에 충성하는 거다 몸을 우습게 보지 마라 몸한테 잘 보이려고 옷 입고 몸 배고프지 말라고 밥 먹고 몸 쉬게 하려고 집 짓는 거다// 그래서 악착같이 돈 벌려고 하는 거다 몸이 있으니 살아 있는 거
우리는 타자의 시선 속에서 살아간다. 그 타자가 누구인지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고 한 사람에게서도 시기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타자를 완전히 의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가끔 자신이 바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고 내세우는 경우를 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오히려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시선을 더 의식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타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참선 수행’이란 용어가 익숙하겠지만, 이를 현실에서 활용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명상 치료’라는 용어가 더 친숙하게 쓰이고 있다. 참선 혹은 명상이 종교적으로 수행(修行)하는 방법이라기보다는 어떤 병리적 문제를 치료하는 방법으로 소개되는 경우들이 늘어난 것이다. 이미 1995년도에 미국의
최근 교과부가 받아들인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위원회(이하 교진추)의 청원에 대하여 고등학교 과학 교과서를 출판하는 인정교과서 업체 대부분에서 ‘시조새는 파충류와 조류의 중간이다.’라는 기술과, ‘말(馬)의 진화’ 부분을 삭제하거나 수정하기로 했다는 소식은 일반인들을 놀라게 했다. 이 일은 저명한 국제적 과학학회지인 《
1. 십악(十惡)으로 얼룩진 한국 사회저 인도의 부처님은 흔히 지혜와 자비의 화신으로 불린다. 그가 최초로 보인 자비행은 교화의 행위이다. 정각 직후에 깊디깊은 불법을 중생에게 가르친다는 것이 피곤한 일일 것으로 예상하여 주저했지만 결국 교화하기로 한 것, 이는 분명 자비행이다. 하지만 자비는 우주에 줄곧 존재해 왔는지도 모른다. 우주의 오묘한 법이 고통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