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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언]불교의 근본을 성찰케 하는 담론 / 명법
[66호] 2016년 06월 01일 (수) 명법스님 본지 편집위원

   

명법스님
본지 편집위원

종교적인 성향이 강한 한국사회에서도 최근 십여 년 사이에 종교 환경이 급격히 변화했다. 도심 명상센터를 채우는 마인드풀니스와 자비명상, 오색등 화려한 연등 행렬, 산사의 템플스테이, 초파일마다 동자승들의 재롱과 함께 불교는 더 현대화되고 더 대중화되었지만, 종교라는 말보다 문화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것이 되었다.

종교의 세속화와 사사화가 한국사회에서도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쩌렁쩌렁 산을 울리던 서릿발 같은 선사의 호령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가 되었고 뉴에이지, 웰빙, 그리고 영성의 범람과 함께 어느새 불교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추구하는 일로 바뀌었다. ‘기분전환’과 ‘휴식’과 같은 불교의 새로운 이미지를 소비하는 사이에 이웃 나라 일인 줄만 알았던 종교인구의 이탈과 출가자 감소 같은 일들이 불교계에서도 발등에 붙은 불이 되었다.

그런데 최근 불교계에서 흥미로운 논쟁이 한창이다. 작년 가을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이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 발표를 통해 ‘깨달음은 이해’라는 주장을 한 다음 날부터 마른 섶에 불을 지른 것처럼 스님들과 불교학자들 사이에 ‘깨달음’ 논쟁이 불타올랐다. 불교계 언론매체가 현응 스님의 발표문 전문과 그것에 반대하는 글을 전면 게재하고 각종 학술세미나에서 첨예하게 토론되는 등 불교계 안팎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으면서 이 논쟁은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다.

일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그동안 벌어졌던 논쟁을 되돌아보면, ‘깨달음’과 같은 절대적인 것의 추구가 아직도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이 시대의 종교의 가장 중요한 난점이 아무도 사물을 깊이 응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라는 어느 문학비평가의 우려처럼 가벼움이 종교마저 휩쓸고 있는 오늘날, 왜 사람들은 이처럼 심각하고 형이상학적 주제에 매료될까?
지식마저 일종의 소비재로 소모하는 후기현대사회에서 깨달음마저 지적 허영을 위한 소모품이 된 결과라고 비관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응 스님이 제기한 깨달음, 연기, 공, 이해, 선정, 사띠와 같은 개념들과 현실에서의 실천이 지금까지 유효성을 잃지 않은 불교적 문제들을 포괄하고 있다.
따라서 빈약한 전거와 성긴 개념 때문에 많은 논란거리를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듯이 학술적인 글이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천명한 일종의 선언문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응 스님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실천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그 글의 빈틈은 꼭꼭 채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전 지구적으로 촘촘히 연결된 현 체제의 구성망을 비집고 주체로서 실천하려면 현실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인간의 실존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논쟁에 참여하는 일부 사람들이 견지하고 있는 원형주의적 사고는 후기현대사회의 복잡한 사회구조와 인간 내면의 혼란을 통찰할 수 있는 성찰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칫 이 논쟁을 일부 호사가들의 말잔치로 그치게 할 우려를 낳고 있다.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학문함의 태도, 다시 말해 과거의 문헌에서 최종적인 판단의 근거를 찾으려는 시도나 종교적 경험을 객관성이라는 과학주의, 또는 이성주의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모두 일종의 원형주의적 사고로 이해할 수 있다. 불교학이 아닌 불교수행에서 그것들을 경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문헌적 정확성에 경도된 실증주의와 자기도취에 빠진 계몽주의적 이성이 종교의 본질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에 의해 과학이 “근거 없는 가정과 무의식적인 편견, 무조건 당연시되는 진리, 스스로가 물들어 있기에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믿음 따위만이 아니라 선입견과 당파성으로도 얼룩져 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계에서 원형에 대한 추구가 공고하게 흔들리지 않는 것은 슬라보이 지제크의 지적처럼 모든 것이 극단적으로 불확실한 시대에 “하나님이 직접 선포한 명백하고 확실한 진리만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근본주의가 종교가 기대기 쉬운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대승불교 운동이나 선불교의 창안은 원형에 매달리지 않는 혁신적인 사고의 소유자들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붓다가 제시한 깨달음, 즉 자유는 자신이 서 있는 실존적 문제들과 역사적 현실을 뚫고서만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깨달음이든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이든 어떤 것이든 하나의 원형으로 되돌리려는 원형적 사유는 깨달음을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진리는 헌신의 행동을 불러일으키고 그 행동을 통해 주체가 태어난다고 본 알랭 바디우의 생각은 지구 저편에서 이루어진 사유이지만 불교가 지향하는, 나아가 종교가 지향해야 하는 깨달음의 정체를 바르게 지시하고 있다. 깨달음은 그들 각자에게 자신의 현실로서 서로 다르게 체현될 수 있다. 그러나 깨달음을 통해 그들 각자가 주체가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불교적이지는 않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깨달음과 같은 절대적인 것, 궁극적인 것에 대한 추구가 아직도 이 사회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은 기이하기까지 한 일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영적 가치를 소중하게 여긴다고 흔히 얘기되지만, 자본주의적 삶의 환경 속에서 실제로 그것을 믿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처럼, 또한 그럴 수도 없는 것처럼, 깨달음 논쟁 또한 지적 호사에 그칠 수 있다.

따라서 모처럼 불교의 근본을 생각하게 하는 이 논쟁이 ‘불교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을 위한 그들만의 리그에서 끝나지 않으려면 ‘진정으로 불교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의 관심과 실천이 필요하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진 후기현대사회에서 아직도 수행에 온몸을 바치는 수행자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들에 의해 이 논의가 현실적인 실천으로 탈바꿈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빛 좋은 담론이라도 언어의 유희로 끝나고 말 것이다.

《불교평론》은 아직 성근 깨달음 담론을 더 촘촘하게 채워줄 글들을 모아 이번 여름호 특집을 마련했다. 원전주의에 사로잡혀서는 안 되겠지만 온고지신의 슬기는 필요하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에서 논의된 깨달음의 의미와 앞으로 깨달음 논쟁이 지향해야 할 지점들을 짚어보았다.

테리 이글턴은 말한다. 세속적 좌파마저도 종교에서 배울 것이 있다고.

기독교를 옹호하는 글이지만 불교로 치환하더라도 그리 틀리지 않은 이야기가 될 것 같아 그의 글 일부를 인용한다.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와 무수히 많은 사람의 일상적 관습을 그처럼 직접적으로 연결시킨 상징형식이 종교 이외에 또 있었는가? 심원하기 이를 데 없는 생각들과 지극히 구체적인 인간 현실을 그처럼 긴밀하게 짝지어놓은 삶의 방식을 종교 말고 찾을 수 있는가? 종교적 믿음은 인간의 내면과 초월적 권위를 직접 이어주는 핫라인이다.
— 《신을 옹호하다》 중에서


2016년 6월

명 법(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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