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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언] 내셔널리즘을 어떻게 볼 것인가 / 서재영
[63호] 2015년 09월 01일 (화) 서재영 본지 편집위원

불교의 보편주의 전통

   

서재영
본지 편집위원

갠지스 강 아지라파디 강 사라푸 강 마히이 강은 인도의 문화와 삶이 흐르는 이름난 강들이다. 하지만 그 강이 유유히 흘러 대해에 이르면 각각의 이름은 사라지고 단지 바다로만 불린다. 마찬가지로 출가한 사람은 그가 어떤 계급이었고, 무슨 일을 했든 단지 부처님의 제자[釋迦子]로만 불린다. 초기경전에 나오는 이 말씀은 흔히 계급을 부정하는 근거로 인용된다. 하지만 이 말씀은 불교의 보편주의 정신을 나타내는 대목으로 볼 수도 있다.

강은 분리와 경계로 대표되는 개별주의를 상징하고, 바다는 무경계와 통합으로 대변되는 보편주의를 상징한다. 붓다는 강이 아니라 바다로 상징되는 보편주의를 지향했다. 연기설과 무아설 역시 개별적 존재의 울타리를 해체하고 전체로 확장되는 관계성의 가르침이다. 그 결과 불교는 인도대륙을 넘어 세계종교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이는 자민족 중심주의에 갇혀 있던 브라마니즘과 대비되는 전통이다. 불교는 설산을 넘어 중앙아시아로 확장되었고, 광활한 사막을 가로질러 중국대륙으로 전파되었다. 불교가 인종과 민족, 국가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보편주의를 지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종교에서 보편주의적 전통은 불교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중세 유럽사회를 지배했던 기독교 역시 보편주의적 세계를 지향했다. 종교가 지향하는 보편적 가치와 그것이 빚어내는 세계에는 민족과 국가라는 특수한 단위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따라서 근대 유럽에서 대두된 내셔널리즘은 종교적 보편주의의 해체를 의미했다. 내셔널리즘은 근대 국가를 앞세워 그 공백을 대체했다. 국가 단위로 개별화된 세계는 곧 타자와의 경쟁을 의미했고, 경쟁에 이기기 위해서 구성원들의 단합된 결집이 필요했다. 내셔널리즘은 안으로는 구성원들을 통합시키고, 밖으로는 타민족과 국가로부터 자유와 독립을 지향했다. 내셔널리즘의 이런 특징은 이탈리아라는 근대 국가를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1,400년 동안 이탈리아는 분열 상태였지만 내셔널리즘의 힘은 통일 국가를 가능케 했다.

종교와 내셔널리즘의 만남

특수성을 지향하는 내셔널리즘과는 달리 종교는 보편적 자비와 사랑, 평화와 공존을 말한다. 이렇게 보면 내셔널리즘과 종교는 만나기 어려울 것 같지만, 이 두 전통은 세계 곳곳에서 왕성하게 결합해 왔다. 내셔널리즘은 그 자체만으로는 내용을 담보할 수 없는 2차적 이데올로기이므로 다양한 이념과 내용적 접목이 요구된다. 풍부한 사상적 내용과 문화적 동질성을 지닌 종교와 내셔널리즘이 결합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보편적 세계를 지향하는 종교와 만난 내셔널리즘은 그것이 가진 특수성이 다소 중화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정반대의 결과로 나타나는 사례를 수도 없이 보아왔다. 종교는 보편성을 지향하지만 다른 종교와 대비되면 특수성에 대한 지향으로 돌변하기 때문이다. 결국 두 전통의 결합은 내적 응집력을 증폭시키고, 구성원들의 일체감을 고취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 결과 종교가 지향하던 보편성은 특정 민족이나 국가의 범위로 축소되고 만다. 그리고 종교와 내셔널리즘의 결합으로 발생한 구심력은 다른 민족과 종교에 대한 타자화와 배제라는 원심력으로 작용한다. 끔찍한 학살과 전쟁이 도사리고 있는 화약고에는 종교와 결합한 내셔널리즘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의 화약고 발칸반도가 그랬고, 현재진행형인 팔레스타인이 그렇고, 아시아에서 종족 갈등이 깊어지고 있는 스리랑카가 그렇다.

대세르비아주의를 내건 밀로셰비치가 이끄는 세르비아는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보스니아의 이슬람교도 25만 명을 학살했다. 인종청소라는 명분으로 학살과 강간이 자행되었던 이런 만행의 저변에는 종교와 결합한 내셔널리즘이 있었다.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통일된 남슬라브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대세르비아주의와 기독교의 만남은 알바니아인과 이슬람에 대한 타자화로 이어졌다. 그 결과 보스니아 내전은 유럽에서 벌어진 가장 잔인한 전쟁으로 얼룩지고 말았다.

현재진행형인 팔레스타인 분쟁도 예외가 아니다. 곳곳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은 2차 대전 이후 팔레스타인에서 아랍인들을 내쫓고 이스라엘을 건국하면서 분쟁이 촉발되었다. 가자 지구를 봉쇄하는 거대한 게토를 설치하여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고립시키는 이곳에도 내셔널리즘과 종교가 결합되어 있다. 유대민족은 유대교에 근거한 시온주의를 신봉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슬람교와 아랍민족주의에 뿌리를 둔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로 맞서고 있다.

아시아에서 갈등이 깊어지고 있는 스리랑카 내전도 빼놓을 수 없는 사례 중 하나다. 스리랑카의 다수를 차지하는 싱할리족은 불교를 믿는 반면, 소수 타밀족은 힌두교를 믿는다. 식민통치 기간 영국은 타밀족을 우대했지만 독립 이후 싱할리족이 주도권을 회복하면서 갈등은 내전으로 확장되었다. 드물게 불교와 힌두교가 개입된 이 갈등에도 종교와 내셔널리즘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

물론 이상과 같은 갈등과 분쟁에는 다양한 정치·사회적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종교와 결합한 내셔널리즘이 갈등을 격화시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내셔널리즘과 종교의 결합은 분쟁이 있는 지역일수록 뚜렷하다. 안으로 단결하고 밖으로 적과 대항하기 위해서는 종교와 내셔널리즘만큼 강력한 조합도 없다. 내셔널리즘이 종교와 결합하면 동질성과 소속감은 배가되지만 타자에 대한 배제와 투쟁의 에너지는 증폭되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하는 불교와 내셔널리즘

세계사적으로 종교와 내셔널리즘의 만남은 부정적 결과를 초래했다. 하지만 근대 한국사회에서 민족이라는 이름은 정의의 또 다른 맥락으로 통용되어 왔다. 침략에 맞선 해방투쟁에서 민족주의는 저항의 구심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민족주의는 두 가지 양상으로 전개됨을 알 수 있는데, 침략적 민족주의와 저항적 민족주의가 그것이다.

일본은 내셔널리즘에 입각해 자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고, 밖으로는 침략전쟁으로 영토 확장에 나섰다. 일본불교 역시 그와 같은 침략적 민족주의에 동조해 조선에 개교사를 파견하고, 곳곳에 포교소를 설치하며 식민통치에 일조했다. 그와 같은 침략적 민족주의에 맞선 것이 바로 민족불교라는 조선의 저항적 민족주의였다. 조선불교계의 저항적 민족주의 운동은 만해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임제종 운동과 수좌들을 중심으로 한 선학원 운동을 들 수 있다. 임제종 운동은 조선의 원종과 일본 조동종 간의 합병에 맞서 조선불교의 독자성을 지키고자 했다. 이처럼 조선에서도 종교와 내셔널리즘이 결합했지만 우리에게 그것은 자랑스러운 역사였다. 일제의 침략에 맞서 조국과 민족을 지키고자 하는 저항적 민족주의였기에 악에 맞선 정의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는 지금도 민족주의가 가진 긍정적 측면이 분명 있다. 강대국들에 의해 분단된 한반도를 통일하는 데 내셔널리즘은 긍정적 에너지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과 북은 하나라는 민족의식은 서로의 동질성을 확인해주는 토대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한국에서 내셔널리즘이 만능이 될 수는 없다. 신장된 국력과 결합된 내셔널리즘은 동남아를 비롯해 약소국에 대한 우월의식으로 나타나는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국사회 자체가 다문화와 다종교 사회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셔널리즘은 오히려 사회통합을 해치는 기제로 작용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불교와 내셔널리즘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무엇을 경계할 것인지 고민이 깊어진다.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불교는 분명 보편주의적 전통을 지향하고 있다. 따라서 내셔널리즘과 불교의 만남은 어디까지나 방편이어야 하며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이번 호에서는 이런 고민을 담아 ‘불교와 내셔널리즘’이라는 특집을 기획하였다. 8편의 글을 통해 불교 내셔널리즘의 발생과 전개는 물론 각 나라의 사례들을 심층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불교의 보편적 이상과 내셔널리즘의 바람직한 관계를 모색해 보는 기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

2015년 9월

서재영(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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