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기 / 법조윤리협의회 위원장, 변호사

천상천하 유아독존. 명상. 무명. 피안. 삼독심. 화쟁론, 수처작주 입처개진, 개유불성. 상구보리 하화중생. 이 뭣고. 만다라. 병 속의 새. 화두. 삼천 배. 무소유. 팔정도. 영혼. 윤회. 번뇌. 해탈. 열반. 참선. 깨달음. 불교적 삶. 보시. 반야심경. 보살. 플럼 빌리지. 허무주의. 불상에 왜 절하는가. 

불교를 생각하며 이 글을 쓰기 전 적어 본 것들이다. 흔히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한다. ‘깨달음’의 사전적 의미는 ‘진리나 이치 따위를 생각하고 궁리하여 알게 됨’이다. ‘깨달음’은 불교에만 있는가. 학자들이 부단한 연구를 하여 그 분야의 진리를 발견하는 것도 깨달음이요, 다른 종교 신자들도 그 율법에 따른 수행을 통해 절대자의 존재에 대해 깨달을 수 있지 않은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크리스마스 때 갔었던 시골 교회, 그 후에도 몇 번 교회에 갔었고, 최근에는 10여 년전 미국 버클리대로 연구년 갔을 때 산호세 한인교회에서 새 신도로 소개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부디스트(buddhist)이다. 

하지만 일요일에는 친구가 선물한 성경을 읽는다. 표현이 다를 뿐 불경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내용이 많다. 다만 이방인, 적(enemy)이라는 말이 많이 나와 읽으면서도 편치 않다. 교회에서 들은 목사님 설교가 나쁘지 않은데도 왠지 절실하게 마음에 와닿지 않았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 성경을 줄줄이 외어 ‘꼬마 목사’로 불렸던 철학자 니체의 말마따나, 왜 우리를 모두 원초적 죄인으로 만들고 잘못을 회개하라는 것인지. 기독교에서는 신, 예수를 아버지, 주님이라 한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존하나, 누구든지 불성이 있고 마음을 닦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런 맥락에서 부처님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인간의 존엄성을 표현한 말로 이해하고 싶다.

하나님은 우주의 모든 것을 창조하고 관장한다는데 왜 악인이 잘되게 놔두고 죄 없는 사람들이 고통받게 하는가. 왜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는가. 기독교 신자에게 들어보니 ‘현생만이 생이 아니므로 다음 생에 단죄된다’는 것이다. 하긴 불교에서도 내세 단죄는 마찬가지다. 영혼 불멸을 전제하지 않고는 종교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된다.

불교 교리에 의문이 드는 부분도 있다. 아수라, 인간, 천상, 아귀, 축생, 지옥의 육도 윤회나 삼독심이다. 

번뇌의 근원인 삼독심에 대해 살펴본다. 탐심을 버리면 어떤가. 매사 남에게 양보하는 좋은 사람일 수 있다. 그런데 ‘무엇을 탐하는 마음’ 탐심이 있어야 하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터인데 그것을 버려야 한다니. 일본은 예외이지만 불교를 믿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서양에 비해 뒤떨어진 것은 혹시 이 때문이 아닌가. 서양인들은 프로테스탄티즘 윤리로 신, 예수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탐심을 적극 발휘해 번영을 가져온 것이 아닌가.

탐심을 가진 보살들이 절에 자주 오고, 부처님께 기도도 열심히 한다는 어느 스님의 말씀은 일리가 있다. 어느 종교든지 신자들이 기복신앙으로 흐르고 있지 않은가. 무엇인가 이루게 해 달라고 부처님께 하는 기도는 탐심의 발로가 아닌가.

‘성냄’은 또 어떠한가. 화를 내는 건 좋지 않은 성정이다. 그러나 불의를 보고도 성내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사람은 군자가 아니라는 공자의 말씀은, 시비곡직을 가리라는 말이 아닌가.

‘어리석음’은 어떤가. 매사 어리석게 판단하여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될 것이다. 어리석음은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안긴다. 지도자의 어리석음은 백성을 굶주리게 하고, 전장에서 장수의 어리석음은 병졸들을 몰사시킨다. 어리석음은 무능으로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나 어진 사람, 어진 임금, 바보 이반이라 할 때는 다르다. 현명하지만 영악하지 않고 어리석은 면이 있을 때 ‘어질다’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믿는 종교와 사람의 인격은 정합적이진 않다. 그렇지만 불자들이 기독교 신자들에 비해 너그럽고 여유롭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불자들이 어질고 보시심이 있기 때문으로 본다.

2,500여 년 전 부처님께서 설한 삼독심을 현실적으로 해석해 본다. 남에게 해악을 끼치는 지나친 ‘탐심’은 지양해야 하지만, 적당한 탐심은 발전의 근원이므로 가져야 하지 않을까. 성찰과 수양으로 지나친 ‘성냄’도 지양할 일이다. 세상사에 현명하게 대처해야 하나 다소 어리석음이 섞인 ‘어짊’도 요구된다. 

기독교 신자들은 불상에 참배하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비난한다. 자기들이 십자가나 예수상에 경배하는 것은 우상이 아닌가. 불자들은 진리를 깨닫고 가르침을 준 선지자인 부처의 상징에 머리 숙이는 것이다. 타 종교를 존중하는 것은 예의이다. 원효대사의 화쟁사상은 불경 해석을 둘러싼 쟁론 극복이었지만, 종교 간에 정서적 화쟁이 필요하다. 각자 인연 따라 믿는 것이 종교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우리 중생은 ‘따로 따로가 아니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부처님의 연기 사상은 굳이 코스모폴리타니즘에 이르지 않더라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세계 경제가 몸살을 앓고 있는 이즈음 여법하게 느껴지고도 남음이 있다.

 

 이은기 / 법조윤리협의회 위원장,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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