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대승불교 연구 전통유럽에 대승불교 경전이 처음 소개된 것은 1820년 네팔에 주재한 영국인 관리 호지슨(Hodgson, 1800~1895)에 의해서였다. 그는 네팔 사원에 있는 산스끄리뜨어 경전들을 수집하여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과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보냈다. 그리고 당시 프랑스의 산스끄리뜨어 학자인 뷔르누프(E. Burnouf, 1801~1852)에게 연구를 부탁했다. 이것이 유럽에서 인도 대승불교의 연구에 대한 시작이었다. 뷔르누프는 이 경전들을 바탕으로 인도불교의 전반을 소개하는 《인도 불교사 입문》(1841)을 저술했
1. 성인을 향한 불굴의 여정, 왕양명의 생애 15~16세기 중국 사상계는 주자학(朱子學)이라는 거대한 산맥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 깊고도 단단한 주자학의 골격을 흔들기란 누구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 속에서 과감히 도전장을 던진 인물이 있었다. 바로 《전습록(傳習錄)》의 주인공이자 양명학(陽明學)의 창시자 왕양명(王陽明, 1472~1529)이었다. 그의 본명은 ‘수인(守仁)’이지만, ‘빛나는 태양’을 뜻하는 ‘양명(陽明)’이라는 호(號)에 어울리는 인생을 살아간 인물이었다. ‘마음에 자리한 꺼지지 않는 태양(陽明)’을 믿고 ‘백
한 장의 불교신문 한 사람의 포교사나는 중학교 3학년때 교목의 성경 강의가 마음에 안들어 옆 반에 가서 수학 공부를 하기도 했다. 내가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스물두세 살 무렵에 〈대한불교〉(불교신문)를 만나면서부터였다. 내가 다니던 첫 직장의 전무께서 등산 도중 만난 대학생 불자들의 단체 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을 인원수대로 뽑아서 보내 주라고 내게 필름과 주소를 맡겼다. 그 후 사진을 받은 인솔자가 매주 〈대한불교〉 신문을 회사로 보내왔다. 그 인연으로 나는 〈대한불교〉 독자가 되었다. 보내는 사람은 ‘목정배’라고 쓰여 있
들어가며케네스 첸에 대해 써달라는 요청을 받고 생각해보니, 필자가 이런 요청을 받은 것은 순전히 그의 저서 가운데 하나인 Buddhism in China: A Historical Survey를 《중국불교》라는 제목으로 번역하여 케네스 첸이라는 학자의 이름을 한국에 대중적으로 알린 것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필자는 벌써 30년도 더 전에 그의 책을 번역하였을 뿐, 그 인불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인터넷 검색도 해 보고, 미국에서 유학하고 온 학자들에게 물어보기도 하면서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인터넷
필자와의 인연필자는 2014년 9월 루드비히-막시밀리안 뮌헨대학교(LMU)의 불교학 박사과정에 입학하였다. 독일어는 고사하고 영어도 서툴렀던 필자는 외국 생활에 적응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지도교수였던 옌스-우버 하르트만(Jens-Uwe Hartmann)은 매주 월요일 오후 ‘필사본 강독’ 세미나를 운영하였다. 그 세미나에서 교수와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 가며 겨우겨우 공부해 나가고 있었다. 아델하이트 메테 교수도 그곳에서 처음 보았다. 필자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가을에 다른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겨울부터 세미나에 참석하였다. 8
1. 서언임계유(任繼愈, 1916~2009)는 현대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의 철학 및 종교학계를 대표하는 학자이다.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쳐 1949년 개국한 중국은 75년의 기간을 거치는 동안 미국과 더불어 세계를 지배하는 강대국이 되었다. 이 기간 모택동의 문화대혁명과 등소평의 개혁 개방 등을 거치면서 중국의 종교인과 지식인들은 크나큰 시련을 겪었다. 이러한 시기 중국 민족의 정신문화를 계승 보존하면서도 사회주의 체제에 맞는 철학과 사상을 정립하는 것은 지식인에게 부여된 시대적 과제라 할 수 있다. 철학과 종교학의 분야에서 이러
머리말 정신분석(Psychoanalysis)은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 1939)에 의해 창시된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론이다. 그는 임상 정신의학자로 평생 환자를 진료한 경험을 바탕으로 마음의 병적 상태에 대한 이론적 가설을 점차적으로 수정해 나가면서 정신분석을 발전시켰다. 그는 1856년 오스트리아령 모라비아의 프라이베르크에서 유대인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빈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생리학과 신경학을 전공하면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프랑스에서 샤르코(Jean-Martin Charcot)를 통해 히스테리와
강보불자(襁褓佛子)나의 불교와의 첫 경험은 늙은 어머니와의 동반으로 시작된다. 평생 한글도 떼지 못한 어머님 손에 끌려 서대문의 어느 ‘선(仙)바 위’ 사암(寺庵)을 오른 일이 기억에 떠오를 뿐이다. 어머님은 나를 깨워 이른 새벽 암자를 찾아 기도드리러 갔다. 이때마다 며칠 전부 터 집안을 ‘깨끗이 소쇄(掃灑)’한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7남매의 막 내인 내 손목을 이끌고 이 절, 저 절로 치성을 드리러 다녔다. 이러 면 나는 소위 기독교식으로 말해 ‘강보(襁褓) 불자’이지 않을까 강변 해 본다.그러나 이 기억만을 두고 나의 정체성
1. 들어가는 말 필자는 2024년 3월10일 《냐나띨로까 스님의 생애》를 번역 출판했다. 2002년에는 냐나띨로까 스님이 1906년 독일어로, 1907년 영어로 저술한 《붓다의 말씀》을 고요한소리 출판사에서 번역 출판한 바가 있다. 이 책은 대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 중반부터 조금씩 번역을 했었다. 초기불교에 관한 책이 거의 없었던 당시에 초기불교의 핵심 가르침인 사성제를 빨리 니까야를 중심으로 선별하고, 번역 및 해설을 추가한 책자를 만나 기쁘게 공부하던 때였다. 먼저 냐나띨로까(1878~1957) 스님의 생애를 간단하게 정리
1. 엔료의 소년기 고백이노우에 엔료(井上円了, 1858~1919)(이하 엔료)는 자신의 《불교활론서론》(이하 《서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본래 절에서 태어나 불교의 세계에서 자라나 메이지유신 이전에는 오로지 불교의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불교가 진리가 아닌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고, 머리를 깎고 염주를 손에 들고 일반인을 대하는 것은 일신의 치욕으로 생각하고 하루라도 빨리 절을 떠나 세상으로 나가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메이지유신을 맞이해 종교계에 대변동이 일어나 폐불훼석(廢佛毁釋)
보살이나 요괴나 결국 일념(一念)에서 나온 것일 뿐, 근본을 따지자면 모두 무(無)에 속한 게 아니더냐?— 《서유기》 제17회 모든 부처님과 일체중생은 한마음일 뿐, 거기에 어떤 법도 없다. 이 마음은 본래부터 생기거나 없어진 적이 없으며 푸르거나 누렇지도 않다. 정해진 모양이 없으며 있고 없음에 속하지 않으므로 새롭거나 낡음을 따질 수도 없다. 길거나 짧지 않고, 크거나 작지 않으니 모든 상대성을 뛰어넘어 그대로 있을 뿐이다. 이는 마치 허공과 같아서 끝이 없으니 재어 볼 수도 없다. 이 한마음 그대로가 부처일 뿐이니 부처와 중생
1. 죽지 않을 권리를 찾아서주검과 파괴의 이미지가 일상의 한 장면이 되고 있다. 어느새 2년이 훌쩍 넘은 러 · 우전쟁과 이어서 발발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 간의 전쟁이 실시간 영상으로 전송되면서, 전쟁과 폭력이 인류의 불가피한 현실이라는 암울한 비관주의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가공할 만한 전장의 이미지를 마주하면서 파시즘의 부상 앞에서 역사의 개념을 인상적으로 구상한 비평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연상이 아닐까 싶다. 그는 역사를 서사적 연속성으로 인식하지도 말고 진보한
내 불심의 고향, 사천 다솔사내가 나고 자란 고향은 경남 하동군 진교면 산골이다. 30여 호가 모여 살던 산골 동네인데, 부모님은 평생 다랑논과 밭을 일구며 사셨다. 먹고사는 것이 바쁜 터라 부모님은 절에 다닐 여유조차 없었다. 그 밑에서 자란 나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불교를 처음 만난 것은 10대 후반이다. 1970년, 나는 심한 위장병으로 수술을 받았다. 요양을 위하여 고향에서 이십여 리 떨어진 다솔사로 들어갔다. 그 무렵 나는 얼굴은 유채꽃처럼 노랗고 몸매는 풀 대궁처럼 가냘픈 병약한 청춘이었다. 그렇지만 청춘의 맥박은
1. 유년 시절엘리스 진 스미스(Ellis Gene Smith, 1936~2010)는 1936년 미국 유타(Utah)주 오그던(Ogden)의 모르몬교도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 가족의 종교적 배경은 진 스미스에게 두 가지 면에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첫째, 계통과 족보를 중시하는 모르몬교의 전통은 이후 그의 티베트불교에 대한 관심과 활동에 반영되었다. 둘째, 전 세계 각국에 직접 선교사들을 파견하는 모르몬교 교육에서는 여러 가지 언어들에 대한 학습이 중시되었고, 진 스미스 또한 이러한 영향을 받은 듯하다. 이러한 집안의 종교적
서언제2차 세계대전과 국가의 침체기, 부흥기를 함께 겪었던 상황 속에서 일본 불교계도 시대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였다. 1900년대부터 일본 불교학은 교리적인 흐름에 입각한 사상사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로 불교의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는 기초가 세워졌다. 패전 이후에는 패러다임의 변화로 불교학계도 새로운 방법론, 새로운 불교학을 암중모색하는 시기가 도래했다. 혼란한 시대 속, 한국불교와 중국불교의 양 영역에서 고군분투했던 학자가 바로 가마타 시게오(鎌田茂雄, 1927~2001)이다.기존의 안목에서 벗어난 새로운 불교 연구를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는 프랑스와 더불어 계몽주의가 왕성했던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도덕철학 교수를 지냈다. 구질서는 해체되며 새롭게 상업사회가 도약하던 18세기 후반, 스미스는 두 권의 책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1759)과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1776)으로 자본주의 승리에 쐐기를 박았다는 평가와 함께 ‘경제학의 아버지’란 칭호를 얻었다. 사회질서와
불교의 체화(體化)나는 1948년 7월 17일 경상북도 청도에서 태어났다. 그날은 대한민국 헌법이 처음 제정 · 공포된 제헌절이다. 우리나라 헌법과 같은 날에 태어나서, 나이도 우리 헌법과 꼭 같은 것이다. 76년을 살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수행하고 몸에 스며들도록 체화하는 과정에, 불법을 가르치신 스님들께서 주신 법명이 셋이다. 불이(不二), 태허(太虛), 당래(當來)의 셋이 그러하다. 그럼에도 아직 그 가르침의 언저리를 걷고 있는가 하는 생각에 돌아보고 또 수행하려고 애쓰는 오늘이다. 고향 청도는 옛 신라의 서라벌에서
2017년 일본의 불교학계를 대표하는 학회인 ‘인도학불교학연구회(印度學佛教學研究會)’는 ‘인도불교 연구의 미래’라는 패널 발표 보고회를 개최하였다. 이 보고회의 부제가 바로 ‘포스트 히라카와 아키라 시대의 불교학이 나아갈 방향’이었다. 대승불교의 새로운 기원을 주창한 히라카와 아키라의 학설과 그에 대한 비판을 회고하고, 대승 경전을 전문으로 하는 연구자 및 불경의 사본(寫本)과 율장(律藏)의 전문가 4인을 초청하여 인도불교 연구의 미래를 논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이처럼 일본을 넘어 전 세계 불교학계의 거두로 인정받은 히라카와
1. 탕용통(湯用彤, 1893~1964)은 1893년 간쑤성(甘肅省) 퉁웨이(通渭)에서 태어났다. 본적인 후베이성(湖北省) 황메이현(黃梅縣)은 초기 선종의 도신과 홍인이 머물던 기주(蘄州) 쌍봉산(雙峯山)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애강남부(愛江南賦)》와 같은 역사서를 애독했던 부친의 영향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98년 부친 탕위산(湯雨三)은 관직을 떠나 서당을 세웠고, 탕용통은 이곳에서 공부했다. 형 탕융빈(湯用彬)이 후에 국무원 국사편찬처(國史編纂處) 처장이 된 것도 이러한 가풍의 영향이었을 것이다.1908년 베이징 공
1. 들어가는 말한국인에게 홍자성(洪自誠)의 《채근담(菜根譚)》은 백여 년 이상 꾸준하고 폭넓게 읽히고 있는 고전의 하나이다. 험한 세상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지 마음 깊은 곳에서 웅숭깊게 성찰하도록 만드는 잠언집으로 지금도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고 있다. 이것은 한국의 독서 시장만의 고유한 현상이 아니다. 조금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일본과 중국은 한국보다 더 오래 많은 독자에게 환영받고 있다. 명실상부하게 동양의 잠언집을 대표하는 책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디지털 시대로 전환한 21세기에도 여전히 큰 호응을 받는 책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