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성, 도덕, 섭리와 지혜의 키워드로 읽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는 프랑스와 더불어 계몽주의가 왕성했던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도덕철학 교수를 지냈다. 구질서는 해체되며 새롭게 상업사회가 도약하던 18세기 후반, 스미스는 두 권의 책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1759)과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1776)으로 자본주의 승리에 쐐기를 박았다는 평가와 함께 ‘경제학의 아버지’란 칭호를 얻었다. 

사회질서와 번영의 동인을 인간의 감정으로 규명한 《도덕감정론》은 통상 윤리학 책으로 분류되곤 한다. 하지만 토머스 홉스가 《리바이어던》(1651)에서 만인의 전쟁 상태를 끝내려면 사회계약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 전체 4부 가운데 1부를 오롯이 인간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데 할애한 것을 상기한다면, 《도덕감정론》은 17년 뒤에 펴낸 《국부론》의 전편으로 보아도 무방하겠다. 

고전을 읽는 재미는 당대의 고민과 모색을 엿보고, 오늘날에 어떤 울림을 주는가를 가늠하는 데 있겠다. 이 글은 스미스의 논지를 본성-도덕-섭리의 열쇠말로 살피고, 불교의 지혜에 비춰본 것이다. 

본론에 앞서 고백하자면, 예전에도 그랬고 이번에 《도덕감정론》을 읽으면서도 똑같은 경험을 했다는 점이다. 19세기 영국의 문호 찰스 디킨스(1821~1870)의 소설 《어려운 시절》(1854)에 등장하는 장면들과 내용들이 《도덕감정론》의 행간을 타고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아래는 그 한 예다. 

 

교사(이름은 ‘아이질식 M’(Choakumchild)이다!): “정치경제학의 제1원리가 무엇인가?”

씨씨: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입니다.”

교사: “이 학급이 국가라고 가정하자. 오천만 파운드의 돈이 있다면 부유한 국가인가?” 

씨씨: “모르겠습니다.” (누가 돈을 갖고 있는지, 그중 얼마라도 제 돈인지 아닌지를 모른다면 부유한 나라인지 아닌지, 제가 부자 나라에 사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

교사: “백만 명 가운데 연간 25명이 명이 굶어 죽는다, 이 비율에 대한 너의 의견은?”

씨씨: “굶어 죽는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이 백만 명이든 백만 명의 백만 배이든 마찬가지로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1. 본성: 공감과 동감

《도덕감정론》의 서두는 요약적이고 선언적이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라 하더라도, 그 본성(nature)에는 분명히 몇 가지 원리(principles)가 존재한다. 이 원리로 인하여 인간은 타인의 행운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단지 그 행운을 바라보는 즐거움밖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행운을 얻은 타인의 행복이 자기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1부 1편 1장) 

요컨대 자신의 이해관계(interests)와 상관없어도 타인의 운명이나 처지에 관심을 가질뿐더러 타인의 느낌을 공유하는 것이 ‘있는 그대로의 인간 존재’이며, 감정이 사회질서를 이끌어내는 도덕의 토대라고 선언한 것이다. 스미스가 중시하는 사회질서란 ‘사회의 구성원들이 일정 규칙에 따름으로써 평화롭고 안전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말한다. 위의 글머리는 《국부론》이 핀 제조공장의 분업을 예시로 시작되는 것만큼이나 강렬하다. 

스미스가 말한 본성의 원리들을 구분해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타인의 감정과 행위에 관심을 갖는 데서 시작된다. 타인이 처한 상황이나 감정과 행위의 원인을 이해하려 애쓴다. 물론 관찰자는 타인이 무엇을 느끼는지 직접 알 수는 없다. 이때 스미스는 인간 본성의 원리들 가운데 하나로 ‘상상력’을 끌어들인다. 상상력은 근대에 해방된 정신 활동이다. 근대 이전의 서양 사람들에게 상상은 허용되지 않았다. 원죄를 진 죄인이자, 정념의 충동에 휘둘리는 변덕스러운 존재인 인간은 계율과 계시에 순종해야 했다. 예컨대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그저 따라야 하는 것이지, 이웃의 형편과 표정을 살피고, 처지와 감정을 상상으로 헤아려 그리하는 것은 아니라고 여겼던 것이다.

다음 단계로 상상 속에서 자신과 당사자의 처지를 바꿔, 자신이 그 같은 경우라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행위를 할 것인가를 따져본다. 스미스는 타인에 관심을 갖는 본성의 원리로 ‘입장 바꿔 상상하기(by the imagination we place ourselves in other’s situ-ation)’와 ‘타인의 몸속으로 들어가듯 하기(we enter as it were into other’s body)’를 들었다. ‘입장 바꿔 상상하기’는 《맹자(孟子)》에서 유래한 사자성어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온전한 영역인 셈이고, ‘타인의 몸속으로 들어가듯 하기’는 20세기 초 생겨난 영어 단어 ‘empathy(공감)’를 개념상으로 선취한 것이다. 스미스가 인간 본성에 관한 통찰에 기여한 것이 있다면, ‘공감(共感)’을 일찍이 간파한 점이라 하겠다. 《도덕감정론》 번역서 두 권 모두 앞엣것을 역지사지로, 뒤엣것을 공감으로 옮겼다.

이렇게 공감이 작동해서 타인과 ‘동료 감정(fellow feeling)’, 말하자면 ‘남의 일 같지 않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마음의 작용이 동감(sympathy, 同感)이다. 요컨대 동감은 타인의 기쁨, 슬픔, 분노 등의 감정을 자신이 상상해, 타인의 처지와 감정에 동조하는 역동적인 능력이다. 요즘 동감보다 공감이 더 널리 쓰이다 보니 동감과 공감을 별개로 대하기도 하지만 동감은 공감보다 나중에 오는 것일 뿐이다.     

동감이 사회질서의 밑바탕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 단계를 거쳐야 한다. 스미스는 이를 ‘상호 동감(mutual sympathy)’이라고 했다. 나에게서 타인으로의 일방향 동감에서, 타인도 내가 느끼는 동료 감정에 호응하는 쌍방향의 동감으로 흐를 때 비로소 동감은 도덕감정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미스는 ‘동감’에 이어 ‘상호 동감의 기쁨’을 이렇게 강조한다. 

동감의 원인이 무엇이건, 그것이 어떻게 생겨나건, 다른 사람도 마음속으로 우리 마음속의 감정에 동료 감정을 느끼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 이상으로 즐거운 것은 없다. 또한 다른 사람이 마음속으로 우리와는 반대로 느끼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만큼 충격적인 일도 없다.(1부 1편 2장)  

 

2. 도덕: 공정한 관찰자와 ‘허영의 시장’

동감과 상호 동감은 서로에게 기쁨을 주지만, 그 마음의 작용으로 인해 서로 충격을 당한다면, 그 까닭은 무엇일까? 《도덕감정론》의 가장 앞에 있고, 분량보다 질적으로는 책 전체를 압도하는 제1부의 제목 ‘행위의 적정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동감과 상호 동감이 작동하려면 어떤 감정이나 행위를 두고 타인을 향한 나의 공감과 나를 향한 타인의 공감이 서로에게 모두 타당하다고 판단하는 ‘적정성(propriety) 심사’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스미스는 타인의 감정이 자신의 감정과 일치하는지 아닌지에 따라 타인의 감정이 타당한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그 판단을 관장하는 ‘공정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라는 ‘무엇’을 끌어들인다.

‘무엇’이라고 부르는 건, 스미스는 공정한 관찰자를 사회질서의 도덕감정에 관한 ‘마음속 판관(判官)’이라고 했지만, 과문한 탓에 갈피를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미스에 따르면, ‘공정한 관찰자’는 당사자의 이해관계에조차 얽매이지 않기에 불편부당하다. 이해관계는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려는 욕망들의 총칭’이다. ‘공정한 관찰자’라는 무엇은 마음속에 있지만 체득된 것이란 점에서 본능은 아니다. 그래서 그 무엇은 양심인 듯도 하고 윤리로 보이기도 하며, 내면화한 관념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 태도와 욕망의 경계와 틀을 정하고 강제하는 사회구조 혹은 이념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누군가를 기쁘게 하고 싶다는 자연적 욕구에 의해 (……) 스스로 습관을 만들어 나간다. (……)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인정(approbation)3)을 얻으려는 불가능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길을 추구한다.하지만 이내 경험에 의해 이러한 인정이 보편적으로 전혀 획득될 수 없다는 것을 배운다.      

따라서 ‘공정한 관찰자’의 인정만이 자신의 감정과 행위가 적정한지를 판단하게 하는 유일한 근거가 된다고 스미스는 강조한다. 그렇다면 감정과 행위의 최종심급을 주관하는 이 ‘무엇’은 동감의 적정성 판단뿐 아니라 공감 즉, 역지사지의 본성까지 통제하는 ‘마음속의 검열관’인 걸까? 

‘공정한 관찰자’가 《어려운 시절》의 씨씨를 불러낸다. 정치경제학의 제1원리를 묻는 교사에게 씨씨는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답했다. 이는 《공자(孔子)》의 “자신이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와 뜻이 똑같은 서양 전래의 도덕률이다. 씨씨는 선생님의 표정에서 동감의 실패를 직감했으리라. 가뜩이나 씨씨에게 절대로 상상을 하지 말라고 다그치던 선생님이 아닌가. 상상이 막히면 공감의 회로는 작동하지 않는다. 공감이 없으면 동감은커녕 상호 동감의 밑돌 위에 세워진다는 사회질서의 도덕감정은 어떻게 되는 걸까? 씨씨들에게 상상과 공감 능력을 삭제하고 그 자리에 교육을 통해 ‘공정한 관찰자’라는 무엇을 주입하려는 것이 그 선생님의 질문 의도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공정한 관찰자’는 스미스 자신에게도 수수께끼였던 것일까? 에두르는 법이 없는 독설가 피에르 조지프 프루동은 “모호한 잡동사니 안에 흩어져 있는 그의 빛나는 관념들은 원초적 계시의 재탕”으로 보인다며, “애덤 스미스는 모든 계시받은 자들처럼, 보기는 보아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이야기하지만, 이해력을 가지지 않는다. 그는 신에게 영감을 받아 말하지만 놀라지도 않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없다. 그리고 그의 말의 의미는 그에게 수수께끼”라고 혹평한 바 있다.    

과연 스미스가 수수께끼를 늘어놓은 것일까? 외려 사회질서의 ‘공정한 관찰자’는 경제의 주체로서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합리적 경제인)’란 자본주의적 인간형을 승인하기 위한 스미스의 의도된 포석으로 보는 것이 ‘적정성’에 부합하지 않을까 싶다.

이 세상 사람들이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 야단법석을 떠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탐욕과 야심, 부와 권력, 최고를 추구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천성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인가? 가장 비천한 노동자의 임금으로도 그것을 만족시킬 수 있다. 우리는 그가 임금으로 자기 가족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본다. (……) 인류 사회의 각계각층의 사람들 모두에서 나타나는 경쟁심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인가? 그리고 소위 자신의 지위 개선이라고 하는 인생의 거대한 목적을 추구하는 것은 어떤 이익이 있어서인가? 남들의 시선을 끌고 주의와 주목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그들로부터 동감과 호의와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바로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안락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허영(vanity)이다.(1부 3편 2장)

스미스는 ‘자신의 참된 가치, 즉 마음속 공정한 관찰자가 자신에게 주는 평가보다도 높은 평가를 세상에 요구하는’ 허영이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미덕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기심과 탐욕, 축재 욕구에 대해서도 스미스는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려는 인간의 강력한 본성을 충족하기 위한 가장 통속적이고 분명한 수단”이라며, ‘정의가 실현된 경쟁’ ‘미덕으로 제어되는 탐욕’을 추천했다.     

물론 악덕이 미덕일 수 있다는 논지의 토대는 허술하다. 예컨대 “절대다수의 대중들은 부와 권세의 찬미자이자 숭배자”(1부 3편 3장)라며, 부자가 되거나 높은 지위에 오르면, 타인이 자신의 기쁨에 동감하고 칭찬할 것으로, 반대로 가난해지면 동감해주지 않고 경멸할 것으로 상상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상상한다고 봤을까? 스미스는 “사람들이 비애보다 환희에 대해 더 많이 동감하는 편이라, 우리는 자신의 부는 과시하고 궁핍은 숨기려는 경향”(1부 3편 2장) 때문이라고 했다. 근거가 허술하기에 오히려 스미스의 의도가 더 드러나는 듯하다. 요컨대 ‘돈을 벌려면 이기심과 탐욕이 악덕이지만 유용하다. 그렇다면 악덕을 미덕으로 바꿔주는 도덕의 변환기(converter)를 발명하자. 그 발명품에 불편부당하고 고상한 이름표를 달자. ‘공정한 관찰자’ 어떤가요?’라고 묻는 듯하다.

여기에 스미스의 세계관을 덧붙일 필요가 있겠다. 그는 사회질서가 인간의 의도와 무관한, “자연의 특별하고도 애정에 찬 배려의 결과”라고 봤다. 자연은 인류의 보존과 번영을 촉진하는 ‘섭리’라는 것이다. 이는 현재의 사회질서를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 그러하다’고 보는 보수적 입장을 대변한다. 세상이 ‘마땅히 그러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반론에 대해선, 조물주가 사회질서의 유지 비책도 마련해 놨으니, 그것이 인간의 본성인 동감 능력이라고 방어한다. 요컨대 도덕감정의 공정한 관찰자가 정의에 입각해 사회질서의 적정성에 관한 일반규칙을 만들어 사회질서를 떠받친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정의를 ‘타인의 생명과 신체, 재산, 명예를 훼손시키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갈무리해 보면 이렇다. 사회는 경제보다 더 크다. 경제가 이해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면, 사회는 경제적 이해관계뿐 아니라 ‘이해 없는 이해관계’까지 끌어안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인정욕구와 생활개선 욕망은 칭찬을 극대화하고 부와 권세를 숭배하는 분명한 ‘선호’를 보인다. 고로 그 선호는 ‘공정한 관찰자’가 적정성을 판단하는 근거라는 것이다. 경제 활동의 주체들이 이익이란 선호만 좇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재정의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사회 도덕률의 바탕을 이루는 다양한 감정들 가운데 나쁜 정념을 유용한 정념으로 바꿔주는 ‘공정한 관찰자’의 역할은 과소평가 될 수 없다. 스미스는 ‘공정한 관찰자’의 이름으로 악덕에 도덕적 적정성을 부여하는 길을 텄다. 그렇게 시민사회는 부와 지위를 기준으로 평판이 거래되는 ‘허영의 시장(vanity fair)’으로 바뀌었다.

이와 관련해, 16~18세기 서양 자본주의 형성기 정치적 논변들을 통찰력 있게 짚어낸 앨버트 허시먼의 분석이 흥미롭다.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다양한 정념들을 ‘재산의 증식’에 대한 욕구로 정리하기 위한 이론적 길을 정비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정반대의 작업을 하는 척하면서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3. 섭리: 보이지 않는 손과 맹목성

《도덕감정론》의 우리말 번역자는 소책자 한 권 분량의 긴 해제를 끝내며 “스미스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키워드는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 ‘완전한 정의, 완전한 자유, 완전한 평등을 확립하는 것이 모든 계층의 최고도 번영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증하는 매우 단순한 비밀이다.’”라고 했다. 

애덤 스미스의 의도가 번역자의 의견과 같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만 보는 건 왜일까? 자본주의 논쟁은 애덤 스미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적 이익 추구가 허용될 때 전체 사회의 물질적 복지가 개선된다는 스미스의 논지를 논쟁의 왕좌로 밀어 올린 것이 ‘보이지 않는 손’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스미스에게 ‘매우 단순한 비밀’과 ‘보이지 않는 손’은 다른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은 《도덕감정론》에서 지주와 소작농의 소출 배분과 관련해 한 번 등장한다. 

아무리 거만하고 몰인정한 지주라도 땅의 수확물을 독식하는 일은 없는데, 이는 그의 위장 용량이 욕망의 무한성에 전혀 비례하지 않고, 단지 가장 비천한 농부의 위장 용량 정도만을 수용할 것이기 때문이며, 결국 지주는 생산물을 가난한 사람과 나누게 된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인도되어 대지가 모든 주민에게 똑같은 몫으로 분할되었을 경우에 이뤄졌을 것과 동일한 정도로 생활필수품의 분배를 하게 된다. 결국 신이 대지를 소수의 지주들에게 분배했을 때, 이 분할에서 제외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망각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았던 것이다.(1부 4편 1장) 

소수의 지주가 땅을 소유하고 땅이 없어 많은 사람이 가난한 것도 신의 뜻이고, 지주가 제 땅의 생산물을 비천한 농부의 위장을 채우도록 나눈 것도 신의 손길이라는 스미스의 세계관이 흥미롭다.   

《국부론》의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은 시장을 향한다.

개인은 공공의 이익을 의도적으로 증진시키려 하지는 않으며, 얼마나 증진시키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다 (……) 다른 많은 경우처럼 개인은 바로 그때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던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 사회의 이익을 의도적으로 증진시키려 할 때보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함으로써 개인은 더 자주, 더 효율적으로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킬 수 있다.(4권 2장)

《국부론》의 푸줏간 주인 이야기는 250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 입에 오른다. 우리가 저녁에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이 자비로워서가 아니라 자신의 돈벌이(자기 이해)에서 비롯된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는 푸줏간 주인들의 시장이 아니다. ‘공정한 관찰자’가 탐욕과 이기심에 가짜 도덕을 부여해 사회를 ‘허영의 시장’으로 바꾸었다면, ‘보이지 않는 손’의 섭리는 세상이 ‘상인들의 사회’라는 환상을 낳으며, 경제에서 사회적인 것을 발라낸(disembedded) 흉기가 됐다.      

‘보이지 않는 손’의 어감처럼, 자유주의 경제는 태생적으로 불투명할뿐더러 국가의 통치술을 불필요하고 불가능하게 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최소한의 기능만을 수행하는 국가보다는, (정치 또는 정부가) 어리석은 행동을 저지를 수 있는 능력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는 국가를 옹호한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의 원리를 과대평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셸 푸코는 고전파 자유주의든 신자유주의든 ‘보이지 않는 손’에 기대기는 마찬가지지만, 신자유주의는 ‘보이지 않음’, 즉 맹목성에 방점을 두고 통치를 무력화한다고 봤다. 예컨대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주권자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나를 건드리면 안 된다. 왜냐고? 너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데, 왜냐하면 너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는 네가 무능력하다는 의미에서 할 수 없는데, 왜 너는 무능력하고, 왜 너는 할 수 없을까? 네가 할 수 없는 것은 네가 모르고 있기 때문이고, 네가 모르고 있는 것은 네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신을 볼 수 없듯, ‘보이지 않는 손’을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플라톤의 철인정치하에서 가장 먼저 쫓겨날 운명이라는 시인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디킨스는 ‘보이지 않는 손’의 마술을 이렇게 그려낸다.

마술에 걸린 바로 이 방에서 가장 복잡한 사회문제가 계산되고 정확한 합계가 나오며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실제로 관련된 사람들이 이 장면을 볼 수 있기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마치 천체관측소가 창문 하나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듯이, 그리고 그 안의 천문학자는 별이 총총한 우주를 펜과 잉크와 종이만으로 배열할 수 있다는 듯이, 그래드그라인드 씨는 자신의 관측소 안에서(이런 관측소는 실제로 많이 있다) 자기 주변에 들끓는 수많은 사람에게 눈길 한 번 던질 필요 없이 그들의 운명을 석판 위에서 결정짓고, 작고 더러운 스펀지 조각 하나로 그들의 모든 눈물을 닦아낼 수 있었다.

4. 지혜: 경제와 불교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을 다섯 번이나 개정했다. 그가 사망한 1790년에 출간된 6판에는 41년 만에 한 개의 장(1부 3편)이 추가됐는데, ‘부자와 권세가를 존경하는 반면 빈자와 하위계층을 경멸하고 무시하는 성향으로 야기되는 도덕감정의 타락’이란 제목이 예사롭지 않다. 《도덕감정론》의 ‘에필로그’이자 애덤 스미스의 유언처럼 읽히기도 한다.    

부와 권력이 지혜(wisdom)와 미덕(virtue)에만 적절히 주어져야 하는 존경과 감탄을 받는 반면, 악덕(vice)과 우매함(folly)이 그 유일하고 적절한 대가로 받아 마땅한 경멸이 빈곤과 약자에게도 종종 매우 불공정하게 부여된다는 사실은 모든 시대에 걸쳐서 도덕가의 불평이 되어왔다 (……) 세상 사람들의 존경과 감탄을 받을 만하게 되는 것, 그리고 그것을 획득하고 향유하는 것은 야심과 경쟁심이 지향하는 커다란 목표다. 이처럼 모든 사람이 무척이나 희망하는 목표를 동일하게 달성할 수 있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길이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다. 하나는 지혜의 탐구와 미덕을 실천함으로써 도달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부와 권세를 획득함으로써 달성하는 길이다. (……) 선망의 지위에 도달하기 위해서 재산을 도모하는 지망자들은 덕성에 이르는 길을 너무나 빈번히 포기한다.(1부 3편 3장)

 

인생 황혼의 스미스가 보기에 세상이 ‘지혜의 길’에서 멀어진다는 걱정이 들었던 모양이다. 허영이 시장과 상인들의 사회엔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마따나 ‘악마의 맷돌(satanic mills)’이 요란하게 돌고 있었다. 스미스 사후 지혜의 길은 넓어졌을까? 1930년, 대공황의 폐허를 보며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우리 손자 손녀들이 누릴 경제적 가능성〉이라는 짧은 글을 통해 스미스의 유지를 환기했다.    

지난 200년 동안 우리를 성가시게 했던 많은 가짜 도덕 원칙에서 벗어날 수 있다 (……) 우리는 이제 가장 확실한 종교적 원칙과 전통적 미덕으로 홀가분하게 돌아갈 수 있다 (……) 하지만 명심하라! 이 모든 일이 이뤄질 때가 아직은 도래하지 않았다. 우리는 앞으로 적어도 100년간은 더 우리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에게도 아름다운 것은 추한 것이며, 추한 것은 아름다운 것처럼 처신해야 한다. 추한 것은 쓸모가 있지만 아름다운 것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한동안은 더 탐욕과 고리대금, 내일을 위한 예방책을 우리의 신으로 모셔야 할 것이다. 그런 것들만이 경제적 필요성이라는 어두운 터널에서 우리를 밝은 빛으로 꺼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케인스가 ‘예측한’ 그 100년 뒤가 코앞이다. 가짜 도덕에서 벗어나 종교적 원칙과 전통적 미덕, 혹은 지혜의 길을 가리키는 ‘U턴 표지판’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왜일까?

근대의 수많은 기획들은 모두 하나의 자명한 이치를 가볍게 취급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모든 사람이 영혼을 갖고 있으므로 체계가 이들의 자존심을 모욕하고 자유를 훼손한 것을 물질적 부의 증가만으로 보상할 수 없다는 이치 말이다.

에른스트 슈마허는 반세기 전 펴낸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지혜의 길은 어떤 여건이 되면 절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밭을 갈 때 생겨나는 것이라고 일러준다. ‘불교경제학’의 제안자인 슈마허는 오늘날 사회적, 경제적 질병의 원인이 “지혜를 영리함(cleverness)으로 대체한 탓”이라고 일갈했다. 팔정도를 외우고 ‘자리이타(自利利他)’의 해석에 매달린다고 될 일이 아니다. 마음속에 스며든 ‘공정한 관찰자’와 ‘보이지 않는 손’이 가짜임을 깨닫는 것이 지혜의 출발일 수 있겠다.   

싯다르타의 선정이 그러하다. 파종제로 요란하던 봄날, 농부가 쟁기질하는 모습에서 문득 어떤 슬픔을 느낀다. 소는 힘겹게 쟁기를 끌고, 쟁기가 지나간 자리에 벌레가 꿈틀거리고 새가 날아들어 벌레를 쫀다. 싯다르타는 잠부나무 아래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상호의존성을 깨달았다. 지혜를 향한 첫걸음이 일상을 재발견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가르침이 신선하다. 이렇게 “지혜를 얻으면 이는 곧 자비와 통하며, 타인을 돕는 일이 영원한 사명이 된다.”15)

슈마허는 “불교를 선택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며 여타 위대한 동양의 전통만큼이나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등의 가르침도 이용할 수 있다”16)고 했다. 모든 종교적, 전통적 지혜가 가리키는 방향은 인간의 욕구와 자연 리듬의 조화를 향한다. 분명한 것은 지혜와 사랑을, 물질보다 인간을, 수단보다 목적을 중시하는 다른 살림을 모색하기에 너무 늦을 때는 없다는 점이다. 

스미스도 인류의 치명적 약점으로 자기기만(self-deceit)을 경계했다. “우리 자신을 나쁘게 생각하는 것은 불쾌한 일이기에, 종종 불리한 판단이 내려질 그런 사정에서 의식적으로 눈을 돌리고 외면”(3부 4장)한다는 것이다. 《도덕감정론》은 우리가 어디서 길을 잃었는지를 더듬기에 훌륭한 반면교사일 수 있다. ■

 

유병선 
서울대학교 사학과 졸업(동양사 전공), 경향신문 논설위원 역임. 사회적 기업과 다른 경제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 저서로 《보노보 혁명》 《고장 난 자본주의에서 행복을 작당하는 법》 등이 있음. 현재 우리동물병원생명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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