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동서양 위인들의 전기를 읽고 있었는데 어느 날인가 고타마 싯다르타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룸비니 왕국의 왕자인 싯다르타가 생로병사의 고통을 꿰뚫어 보고 출가를 결심하는 장면에서 갑자기 ‘죽음은 무엇일까, 사람이 죽은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라는 의문이 생겨났습니다. 이 의문은 ‘위인전 속의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라는 물음으로 이어졌고, 아무리 달리 고민해 봐도 ‘그들은 현재 존재하지 않고 있으며, 생각하지 않고 있다’라는 결론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그토록 뛰어난 사람들도 피하지 못한 죽음이 곧 저에게도 다가와 지금 세상에 없는 그들처럼 생각하지도 판단하지도 못하게 되는 저를 상상하는 것은 몹시 두렵고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그 무렵 두 살 터울의 누나가 일찍 세상을 떠난 일도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더욱 부채질하게 만들었고, 그 이후 죽음에 대한 생각은 아무리 멀리하려 해도 이따금 튀어나와 일상의 평온함을 여지없이 깨뜨리곤 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조금이라도 덜어지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에 인도의 성인인 마하트마 간디가 쓴 글을 읽고 난 후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비교적 쉬운 문장을 통해 삶과 죽음의 이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Each night, when I go to sleep, I die. And the next morning, when I wake up, I am reborn.

 

우리가 살아 있다고 자각하는 것은 의식의 차원에서 살아 있음을 인식하는 것인데, 잠을 자는 동안은 의식을 통제하거나 제어할 수 없어 무의식 상태에 이르게 되고 이는 죽음과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에 단 한 번만 있는 줄 알았던 죽음이 사실상 매일 되풀이된다고 생각하니 그토록 두려워하고 멀리하려 했던 대상이 제 삶에 가까이 다가온 느낌이 들었습니다. 

반복되는 삶과 죽음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니 그 둘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서로 의지하고 있으며, 각자의 내면에 서로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삶 안에 죽음이 있고, 죽음 안에 삶이 있다면 삶과 죽음은 손바닥과 손등처럼 전체로서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진리도 아울러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늘과 땅 차이 이상으로 벌어져 있다고 여겨지는 삶과 죽음이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는 이치는 우리네 세상살이에도 적용된다고 봅니다. 우리가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까닭의 상당 부분은 남과 나를 비교하기 때문인데 남과 나를 저울질한 결과 내가 조금이라도 모자란다고 생각되면 그 사람을 향한 시기와 질투로 마음이 괴로워지기 시작합니다. 반대로 내가 조금이라도 남는 듯이 보이면 남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는 행동을 하게 되어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본디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고 나와 다른 사람은 분리되지 않은 하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남과 비교할 거리도 없고, 그래서 더 이상 시기나 질투할 것이 없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잘한 일은 내가 잘한 일이 되므로 마음껏 축하해 줄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안타까운 사정은 곧 나의 아픔이 되므로 진심으로 걱정해 줄 수 있게 됩니다. 역지사지가 저절로 이뤄지고 남과 다툴 일이 없기에 일상이 평온하고 즐겁게 될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기후 변화와 환경오염으로 인한 위기 속에 살고 있고 여러 학자나 전문가들은 가까운 시일 안에 인류가 기후 위기, 환경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대부분의 동식물이 멸종하게 되고 인류도 더 이상 생존하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된 까닭은 인류가 살아가는 지구환경을 이익 추구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바람에 마구잡이로 난개발을 하고 자연을 파괴하였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사는 터전을 쑥대밭으로 만든 우리와 반대로 영화 〈아바타〉 속 나비족들은 촘촘하게 연결된 신경망을 통해 그들이 사는 판도라 행성의 모든 동식물과 교감하면서 평화로운 공존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자연은 함께 숨 쉬고 살아가는 공동체이자 자신의 분신과도 같습니다. 우리도 나비족처럼 자연과 연결되어 함께 살아간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환경오염이나 자연훼손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될 여지가 없게 됩니다. 여기에도 삶과 죽음은 하나이고 남과 내가 하나라는 이치가 적용되는 셈입니다.

 

우리는 지나가서 되돌릴 수 없는 일에 대한 후회와 한탄으로 귀한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정작 해야 할 일을 미루거나 놓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하나라는 관점에서 보면 시간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찰나처럼 보이는 순간도 계속 미분하여 쪼개 나가면 영겁의 시간과 마찬가지로 끝이 없게 되어 결국 찰나와 영겁은 하나가 됩니다. 찰나의 순간은 현재 속에서 끊임없이 영겁의 시간으로 흐르고, 과거와 미래는 현재 속에서 계속하여 하나가 되기에 오직 의미 있게 존재하는 것은 지금밖에 없게 됩니다. 이를 깨닫게 되면 지나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불필요한 걱정과 후회를 할 필요가 없게 되고, 우리는 선물(present)처럼 주어진 소중한 현재(present)를 값있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진리를 향한 구도의 길을 찾기 위해 일생 노력하신 법정 스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스님, 임종게를 남기시지요.”

“분별하지 말라. 내가 살아온 것이 그것이다. 간다, 봐라.”

ssj@leeko.com

 

정상식 / 변호사, 전 법무부 기획관리실 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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