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성
본지 편집위원장
어떤 시인이 쓴 〈몸을 철학해보니〉라는 시를 읽은 적이 있다.

“몸이 전부다// 몸이 있어 숨 쉬고 몸이 있어 일하고 몸이 있어 사랑하는 거다 그래서 몸에 충성하는 거다 몸을 우습게 보지 마라 몸한테 잘 보이려고 옷 입고 몸 배고프지 말라고 밥 먹고 몸 쉬게 하려고 집 짓는 거다// 그래서 악착같이 돈 벌려고 하는 거다 몸이 있으니 살아 있는 거다, 몸이 전부다”

머리가 저절로 끄덕여진다. 숨 쉬고 일하고 사랑하는 것, 악착같이 돈 벌어서 옷 입고 밥 먹고 집 짓는 것은 몸을 위해서라고 한다. 권력을 탐하는 것도 몸을 위해서일 거다. 욕망으로 움직이고, 때때로 수고(受苦)하는 것도 몸이다. 그렇다, 생로병사 등 만행은 다 몸의 일이 아닌가. 배고픈 사람들이 단결해서 혁명을 일으키는 것도 몸에 대한 충성 때문이다.

숨 쉬고, 사랑하여 자식을 낳고 돈 벌어 집을 사는 것은 몸이 행하는 본능적·원초적·일상적 행위로 볼 수 있으니, 이런 행위를 하는 몸을 일상적인 몸이라고 부르자. 일상의 몸은 종종 상도(常道)를 벗어나 살인, 절도, 음란, 거짓말 등의 악을 행한다. 이런 악행을 방지하거나 줄이는 것이 출가 승단의 계율과 세속 법률의 기본 목표다. 특정한 빛과 소리에 끌리는 본능이나 원초적 성향을 가진 우리의 감각기관이 그 빛과 소리를 사랑하면, 그것들은 도리어 우리를 악마의 덫(mārapāsa)에 가둔다(쌍윳따니까야 6권). 그리고 빛과 소리에 대한 애착은 종종 폭력(daṇḍa)으로 이어진다(디가니까야 2권). 그래서 초기경전에는 시청각에서 오는 감각적 쾌락(까마)에 대한 경고가 수없이 반복된다.

싯다르타 태자가 출가한 것은 일상적인 몸의 끈질긴 요구―악마의 덫, 부자유와 폭력을 초래하는 요구―에서부터 해방과 자유를 얻기 위해서였다. 태자가 출가 수행하여 완전한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된 것, 이 극적인 변화(성불)가 불교의 시작이었다. 성불을 위해 붓다와 초기불교도들은 감각기관과 몸의 움직임을 깊이 관찰하고 엄격하게 수행했다. 성불하여 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 몸이다. 변화된 몸은 청정행과 자비행의 장소가 된다. 붓다가 “몸으로(kāyena) 최상의 진리를(paramasaccaṁ) 실현한다”고 했을 때(맛지마니까야 2권), 이는 성불한 몸을 가리킨다. 성불한 이후에도 색(色, rūpa)은 명(名, nāma)에서 떨어지지 않고, 몸과 마음은 이어져 있다.

‘몸으로 진리를 실현한다’는 사유에서 우리의 감각을 활용하여 덫에서 완전한 해방을 얻지는 못해도 해방에 가까이 가보자는 생각은 나올 수 있다. 세상의 빛과 소리를 잘 분별해서 활용하면 해방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감각을 통한 해방이므로 감각해방론으로 부를 수 있다. 그런 해방론을 실천한 분 중에 법정 스님이 있었다.

스님에게 불교는 ‘본래적인 자기’의 회복을 약속해 준다(〈佛誕數題〉). 그런데 본래적인 자기를 회복하고 타인과 자연, 우주와의 연결이나 일치는, 사량분별하는 머리로 되는 일이 아니라 감성의 회복으로, 주로 감각의 활용으로 되는 일이다. 법정은 “인간의 정서를 이루는 데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이 빛과 소리”라고 했다(〈등잔불 아래서〉). 법정에게 미각, 시각, 청각을 통해서 “정신적으로 기쁨을 느끼고 위로를 삼으려는 취향”은 동물에게는 없는, 인간만의 특권이다(〈茶禪一味〉).

스님은 색깔과 소리를 좋은 것(善, kusala)과 좋지 않은 것(不善, akusala)으로 분별했다. 본능이나 원초적인 성향으로부터의 해방이나 자유를 우리에게 가져다주면 선이고 그 반대면 불선이다. 이런 분별은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몸의 경험에서 나왔을 것이다. 법정은 좋은 것은 푸른색으로, 좋지 않은 것은 누런색으로 칠했다. 그에게 푸른색은 인간의 개성과 창의성을 키워주고 본래적인 자기로 인도해 줄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색이지만, 누런색은 세속, 일상, 반복을 상징하는 색이다.

스님은 반 고흐의 〈별밤〉(Starry Night)을 연상하며 〈별밤 이야기〉라는 수상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의 끝 부분에 “별밤을 가까이하라. 한낮에 닳아지고 상처받은 우리의 심성을 별밤은 부드러운 눈짓으로 다스려줄 것”이라고 적었다. 법정에게 별밤은 치유력의 원천이었다. 그는 귀도 밝아서 이 시대 최고의 천이통(天耳通)이었다고 할 만하다. 음악도 듣고 자연의 소리도 듣고, 침묵도 듣는다고 했고, 볼 수 있는 것도 때때로 듣는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득한 모음(母音)〉이라는 글에서는, 뻐꾸기 소리를 영혼의 모음이고 아득한 모음이라고 부르면서, 그 소리가 아득히 들려오면 마음은 분별이 없어지고 그저 무심이 되고, 생명의 일치를 느낀다고 했다. 뻐꾸기 우는 소리에서 스님은 이슬이 밴 5월 아침과 맑은 햇살이며 풀꽃 냄새 그리고 지난밤의 별을 함께 느낄 수 있어서, 뻐꾸기 울음을 우주의 하모니라고 했고, 그 아득한 소리를 듣고 있으면 모든 존재에 대해 새삼스레 연대감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새벽에 내리는 빗소리에서 “우주의 호흡이 내 자신의 숨결과 서로 이어지고 있음을 감지한다.”고도 적었다(〈새벽에 내리는 비〉). 인간의 소음은 영혼의 모음과 내심의 소리를 훼방하기 때문에 나쁜 소리였다.

자연에 대한 스님의 교감은 두터웠다. 그는 물미역을 먹을 때 해안선에 밀려드는 물결 소리와 갈매기 울음을 함께 들을 수 있었으며, 제초제로 죽어 가는 장미를 보고는 ‘내 출혈 같은 아픔’을 느낄 수 있었고, 철 지난 뜰에서 져버린 꽃들의 넋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이런 교감력은 동물에까지 미쳐서 모기와 금붕어를 가족처럼 느낀다고 했다. 이끼 돋은 돌을 방에다 들여놓고 서로 듣고 눈길을 주고받으며 한겨울을 났다는 얘기도 있다. 스님에게 자연은 생명, 거룩함과 신성이 깃든 곳이었으니 이용과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공존, 감사와 환희의 존재였다.

뻐꾸기 소리에서 만물의 연대감을 느끼는 것은 본래적인 자기로 가는 통로, 아니 본래적인 자기의 실현이다. 우주의 호흡이 나의 숨결과 이어진다는 말은 범아일여(梵我一如)라는 인도 사상을, 그리고 미국의 에머슨과 소로가 주장했던 초절주의(超絶主義, transcendentalism)를 상기시킨다.

초절주의란 다양한 구체적인 사물 배후에 하나의 영적인 원리가 있다는 철학적 원리다. 초절주의자에게 자연은 내면적 영혼이나 마음의 외면적인 표시다. 에머슨은 〈자연〉에서 “보이는 사물과 인간의 사유에는 근본적인 호응”이 있다고 했다. 소로는 《저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초록색 신전에서 울려 퍼지는 모기떼의 저녁 노래를 듣는다.”(김욱동 《소로의 속삭임》) 그는 모기떼의 노랫소리에 신성을 느낀 것이다. “모든 자연은 나의 신부다.”라는 소로의 말에도 범신론이 보인다. 영혼을 구원해 주는 별밤을 쳐다보는 것은 눈이고, 뻐꾸기 소리를 듣고 우주와 하나 됨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귀다. 여기에 빛과 소리를 통한 초절주의가 있다.

대승불교의 삼신설(三身說)까지 감안하면 몸에 대한 불교도의 성찰은 깊고도 넓다. ‘몸이 전부다’라는 말에는 적어도 일상의 몸과 성불한 몸, 두 몸이 필요하다. 전자에는 욕망과 덫이 있고, 후자에는 열반의 해방과 자유가 있다. 부처님의 몸도 몸이니, ‘몸이 전부다’라는 말은 여전히 진리다. 가장 불쌍한 시민중생은 몸을 우습게 보아 몸에 당하면서도 몸을 부린다고 인식하는 자다. 몸을 잘 알고 있을 우리의 시인은 저 하릴없는 중생에게 일갈하신 거다.

그런데 아시는가! 몸을 철학하면서 정말로 좋은 것은, 비록 지난 싸움에서는 졌지만 새해와 새날 아침에 성불한 몸을 대망한다는 거다. ■


2014년 3월

허우성(본지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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