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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무남북(佛性無南北)과 통일 / 서재영
[60호] 2014년 12월 01일 (월) 서재영 본지 편집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서재영
본지 편집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성에는 남북이 없다

노(盧) 행자는 중국의 변방 영남 신주의 궁벽한 촌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는 어떤 스님이 독송하는 경전을 듣고 영혼에 깊은 진동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홍인 대사를 찾아가면 그 경에 대한 가르침을 배울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 길로 스승을 찾아 나섰다. 당시 홍인 문하에는 천 명에 이르는 걸출한 제자들이 모여 있던 터라 시골 총각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노 행자는 홍인 대사에게 자신은 영남 사람이며 불법을 구하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그러자 홍인 대사는 오랑캐 주제에 감히 어떻게 부처가 되겠느냐며 되레 호통을 쳤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아무 말 없이 물러났겠지만 노 행자는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겠지만, 불성에 어찌 남북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꾸했다.

단번에 스승으로부터 인정받게 된 이 말이 그 유명한 “불성에는 남북이 없다(佛性無南北)”는 《육조단경》의 말씀이다. 필자는 이 대목을 접할 때마다 우리나라를 떠올리곤 한다. 불성에는 남북이 없다고 하는데 지금 한반도에는 날카롭게 대립하는 남과 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불성은 이상의 세계이고, 분단은 냉엄한 현실이므로 그 둘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상의 세계는 현실의 문제를 푸는 열쇠이기도 하다. 따라서 ‘불성무남북’이라는 관점으로 분단과 통일을 바라보면 또 다른 해석과 담론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남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표면적으로 보면 노 행자가 사는 가난하고 낙후한 남쪽과 스승이 사는 북쪽 중심부를 가르는 지역적 구분이다. 하지만 《단경》에서 말하는 ‘남북’은 단지 그와 같은 지역적 차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중생들이 살아가는 사바세계는 기본적으로 이분법적 사유가 지배하는 세계이다. 나와 남이 있고, 선과 악이 있고, 있음과 없음이 있고, 삶과 죽음이 있고, 범부와 성인이 있다. 현실에서 그것은 남성과 여성, 부자와 가난한 자, 서양과 동양, 지배와 피지배, 진보와 보수, 남한과 북한이라는 양태로 나타난다. 이렇게 세상을 대립과 갈등 관계로 이해하고, 극단에 매몰되어 세상을 바라보는 사유 패턴을 불교에서는 ‘변견(邊見)’ 즉 ‘극단적 견해’ 또는 ‘치우친 시선’이라고 한다. 《단경》은 그 같은 이분법적 시선과 사유를 ‘남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중생의 무명이 빚어낸 분열과 대립의 세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혜능은 ‘불성에는 남북이 없다’고 말했다. 불성의 세계, 진리의 세계에는 나와 남, 선과 악, 진보와 보수처럼 분별과 망상이 빚어낸 차별과 대립이 없는 세계다. 이렇게 극단적 사유와 차별적 변견을 넘어선 세계를 부처님은 중도(中道)라고 했다. 홍인 대사가 “너는 영남 오랑캐 출신인데 감히 어떻게 부처가 되고자 하는가?”라고 한 말은 지역적으로 낙후하고 배우지 못한 천민 출신이기 때문에 부처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 말에 담긴 의미는 남과 북, 선과 악, 나와 너라는 이분법적 사유에 사로잡힌 마음으로는 부처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분단, 차별과 변견(邊見)의 세계

우리는 60년 넘는 세월 동안 분단된 조국의 슬픈 국민으로 살고 있다. 5천 년을 함께한 혈육을 주적으로 설정하고 총칼을 들고 마주 서 있다. 서로를 향한 이와 같은 적개심과 분단의 현실은 중생의 무명이 빚은 고통이자 차별과 변견이 불러온 비극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분단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한반도의 분단은 열강에 의해 만들어진 타력의 산물이다. 우리는 전범국이 아니라 식민지배의 피해 당사국임에도 불구하고 열강은 한반도를 분단시켰다. 한반도의 분단은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수탈하고,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고,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차별과 변견의 산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분단을 극복하는 것은 제국주의와 식민지라는 이분법적 사유와 차별이 초래한 구시대의 잔재를 청산하는 것이며, 대립과 갈등이라는 중생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둘째, 분단의 고착화와 마음의 분단이다. 분단 상황이 반세기를 넘기면서 남북을 서로 다른 나라로 생각하는 정서적 분단이 고착화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남북은 서로에게 주적이 되어 있고, 서로를 알고 가까이하는 것은 반국가 행위로 간주되어 가혹한 탄압이 뒤따른다. 그 결과 남과 북은 서로 다른 나라이며, 서로를 궤멸시켜야 행복해질 것처럼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불교적 사유의 기본은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는 연기사상이다. 연기적 관점에서 보면 너를 부정하면 나도 있을 수 없다. 어느 한쪽이 무사한 채 어느 한쪽이 궤멸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셋째, 분단이 낳은 진영논리가 사회적 갈등의 원천이 되고 있다. 분단은 남한과 북한이라는 국토의 분단과 체제의 대립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분법적 사유에 기초한 진영논리는 남북 양측에서 차이를 억압하고 배제하는 경직된 사회를 만들어 왔다. 오랫동안 대립, 갈등하며 구축해 온 진영논리는 남북을 가르는 대립을 넘어 이제 우리 사회의 갈등을 증폭하는 메커니즘으로 굳어지고 있다. 우리 사회는 분단 상황에서 좌경, 용공, 종북, 좌빨이라는 이름에 엄청난 악마성을 부여해 왔다. 그리고 정부나 기득권층에 부담스러운 이슈와 요구는 종북으로 몰아세웠다. 그 결과 종북이라는 유령은 진보와 보수, 수도권과 지방의 분권, 원전과 에너지 문제, 세월호의 진상규명, 언론자유, 노동자의 권리와 같은 사회적 이슈들이 이념적 주장으로 치환되곤 했다. 건강한 사회를 만들고자 마땅히 토론하고 논의해야 할 다양한 이슈들이었지만 진영논리로 덧칠되면 종북몰이로 이어지고 결국 토론과 대화가 좌초되는 모습을 수없이 보아왔다. 이처럼 분단은 국토의 단절, 민족의 분절, 혈육의 이별, 이념적 대립이라는 분열과 갈등을 넘어 우리 사회의 갈등을 증폭하는 고통의 뿌리가 되고 있다. 따라서 분단을 극복하지 않는 한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이 같은 진영논리도 사라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통일, 중도불이(中道不二)의 세계

불교적 시각으로 볼 때 분단은 중생의 어리석음이 빚어낸 차별과 변견의 산물이다. 그런 점에서 분단은 대립과 갈등이 없는 불성의 세계와 가장 거리가 먼 것이고, 나와 남이라는 구분을 넘어선 불이(不二)의 세계와 철저하게 동떨어진 것이다. 따라서 분단을 극복하고, 진영논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현실에서 중도적 사유를 실천하는 것이며, 남북이 둘이 아니라는 불이의 인식으로 우리의 불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분법적 사유가 초래한 분단과 진영논리를 극복하는 데에 불교의 중도사상은 철학적 바탕이 될 수 있다. 중도는 쌍차쌍조(雙遮雙照)의 논리가 핵심이다. 나와 남을 동시에 부정하고[雙遮], 나와 남을 동시에 긍정[雙照]하는 것이 쌍차쌍조이다.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북도 없고, 남도 없어야 한다. 북도 그 이데올로기를 버려야 하며, 남도 흡수통일 같은 대립 의식을 내려놓아야 한다. 각자 자신의 논리와 태도를 내려놓을 때 남쪽과 북쪽은 차이를 넘어 하나가 되고, 모두가 크게 살아나는 것이 바로 쌍차쌍조로 대변되는 중도사상이다.

불교적 시선으로 남북문제를 바라보고, 불교적 가치에 입각한 통일담론이 활발하게 제시되고, 불교가 통일에 무엇인가 이바지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토론과 시론이 필요하다. 《불교평론》에서는 이런 맥락에서 ‘불교, 통일을 말하다’라는 제하의 특집을 마련하였다. 분단 상황을 재인식하고 불교계의 통일담론을 만들어가고자 함이다. 이번 특집을 계기로 분단 상황에서는 화해와 공존을 도모하고, 더 나아가 장기적으로는 평화통일을 이룩하는 데 불교의 적극적 역할을 모색하는 담론이 활발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혜능 선사의 말처럼 불성에는 남북이 없다. 남북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갈등하는 한 남북은 고통으로 가득 찬 중생세간일 뿐이다. 반면 분단을 극복하는 것은 중도를 실현하는 것이며, 통일을 향해 가는 것은 불성을 완성해 가는 거룩한 실천이다. 그런 점에서 통일은 우리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온갖 차별과 변견이라는 무명에서 벗어나는 종교적 실천이기도 하다. ■

2014년 12월

서재영
(본지 편집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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