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것이 왔다.

홍사성
불교평론 주간
최근 발표된 우리나라 종교인구 조사결과 불교는 기독교에 비해 2백만 명이 더 적은 2위 종교로 내려앉았다. 이는 정부수립 이후 종교인구를 조사하기 시작한 처음 있는 일이다. 일부에서는 조사방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불교는 이미 한국사회에서 1위 종교 자리를 기독교에 내준 지 오래됐다. 통계수치 때문이 아니다. 생활 주변을 살펴보면 온통 기독교 세상이다.

번거롭게 숫자를 갖다 댈 필요도 없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360도 한 바퀴를 돌면 반드시 한 곳에는 교회가 눈에 들어온다. 일요일이면 교회가 있는 동네 골목길은 예배를 보고 나오는 성도들로 채워진다. 그까짓 1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냐, 숫자로만 1위를 하는 것보다 실질적 내용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허세 역시 열패감에 대한 자위일 뿐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5 대한민국 종교인구 조사결과는 불교의 현주소가 어디에 있는가를 말해준다. 우선 통계를 살펴보자. 불교는 몇 년 전까지 부동의 1위였다. 1995년 조사 때까지만 해도 1천만 명(1,015만 4천 명)이 넘었다. 10년 뒤인 2005년에는 조금 늘어나기까지(1,058만 8천 명) 했다. 그러던 것이 2015년 조사에서는 무려 300여만 명이 줄어든 760만 명으로 조사됐다. 기독교의 경우는 1995년에 850만 명, 2005년에는 조금 줄어든 840만 명이었다가 이번에 120만 명이 늘어난 960만 명으로 조사됐다. 천주교의 경우는 증감이 좀 심한 것으로 조사됐다. 1995년에 280만 명이던 것이 2005년에는 500만 명으로 늘었다가 이번에는 390만 명으로 조사됐다. 210만 명이 늘었다가 110만 명이 준 것이다.

이 같은 결과에 대해 종교마다 해석이 조금씩 다른 것 같다. 우선 기독교의 경우는 지나친 독선과 이웃종교와의 불화 등으로 혐오감이 깊어진 가운데 나온 수치라서 조금은 의아해하는 눈치다. 이단 교파까지 포함된 수치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체로 한국사회의 지배종교라는 점에서는 사실과 수치가 일치한다면서 자부심을 보인다. 증감이 널뛰기한 가톨릭은 조사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는 분위기다. 신자를 전산으로 관리하는 가톨릭은 소폭 늘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결과가 의외라는 것이다.

가장 당황하는 쪽은 불교다. 불교는 우리나라에서 기독교나 가톨릭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오랜 역사를 가진 종교다. 역사가 오랜 만큼 당연히 민족의 삶과 문화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국가지정문화재의 70% 가까이가 불교와 관련된 문화재다. 그래서 당연히 가장 많은 신자를 거느리고 있다고 자부했다. 한때는 언필칭 2천만 불자를 들먹이며 국민의 절반이 불교신도라고 호언했다. 유럽에서는 가는 곳마다 성당을 보고 와야 하듯 외국인도 한국을 방문하면 일부러 찾아가는 곳이 사찰이다. 그런 불교가 불과 10여 년 사이에 1위 종교 자리를 내주었으니 속이 말이 아닐 것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물론 일부에서 제기하듯이 조사방법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이번에 사용한 표본조사는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은 노인들이 많은 불교로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치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딴은 그렇기도 하다. 지금까지의 인구센서스는 조사자가 가정을 방문하여 대면 조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대개의 가정은 낮시간 동안 주요 가족구성원들이 집을 비우고 주부나 여성이 집을 지킨다. 이때 조사자가 찾아와 가구원 수와 종교를 물으면 우리 집은 어떤 종교를 믿으며, 가구원 수는 몇 명이라고 답변한다. 노인들 중에는 절에 나가는 분들이 많았다. 그 결과 불교인구는 개별 신앙과는 관계없이 당연히 1위를 차지했다.

이 조사방식은 개개인의 종교를 확인할 수 없다는 허점이 있다. 이에 비해 이번 조사는 보다 객관성이 담보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지역과 나이 성별 등으로 모집단을 만들어 표본조사를 해서 조사대상에서 누락된 사람들이 통계에 반영되도록 한 것이다. 일부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표본조사 80% 방문조사 20%를 합산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만약 이번 조사에서 방문조사 20%를 반영하지 않았으면 그 숫자는 훨씬 더 줄었을지도 모른다. 통계 전문가들은 이 방식이 과거에 방문조사로 작성하던 통계보다 훨씬 신뢰도가 높다고 했다.

종교인구의 역전 현상은 오래전부터 예측된 결과다. 서구 종교의 적극적인 선교활동에 비해 불교는 늘 소극적으로 대처해왔다.

불교계의 대표종단인 조계종은 1960년대부터 ‘포교’를 역경, 도제양성과 더불어 3대 사업으로 정하고 포교에 나서기는 했다. 1994년부터는 종단의 행정체계를 총무원, 교육원, 포교원으로 나누어 포교에 역점을 두기로 했다. 본말사 주지 품신 때 포교에 헌신적이고 공이 큰 사람을 우선하여 임명하겠다는 조항도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구호나 제도가 제대로 작동했는지는 의문이다.

무엇보다 미래불교의 자산인 어린이나 청소년을 위해 법회를 하는 사찰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현실을 말하면 어린이나 중고등학생을 절에 보내고 싶어도 가라고 할 절이 없다. 실제로 학교나 회사에서 종교인구를 조사하면 불교를 믿는 학생의 숫자는 가뭄에 콩 나듯 드물다는 것이 학교 현장의 교사들 증언이다.

 그 결과는 고스란히 청년포교에 나타나고 있다. 한때 전국의 모든 대학에 거의 다 만들어졌던 대학생 불교연합회는 점차 신입생을 회원으로 영입하지 못하는 지회가 늘어나고 있다. 이런 사정이 계속된다면 10년 뒤인 2025년 조사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뻔하다. 과장이나 엄살이 아니라 어쩌면 3위 종교 4위 종교로 추락할지도 모른다. 불교는 이미 포교적 측면에서는 완행열차가 아니라 뒤로 가는 열차를 타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교단운영의 제일 과제를 전법에 맞추어야 한다. 총무원 같은 행정조직이 존재하는 이유는 오로지 전법교화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사찰이 존재하는 이유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불교교단에 출가자가 있어야 하는 이유도 오로지 설법하기 위해서라는 인식이 광범하게 확산돼야 한다. 불교는 인간고의 근본이 삼독무명에 있음을 깨달은 사람들이 삼독을 극복해야 완전한 행복의 성취가 가능하다는 가르침을 널리 펴기 위한 종교다. 이를 위해 부처님은 깨달음을 성취한 후 누구보다 먼저 다섯 명의 친구를 찾아가 설법했다. 불교라는 종교가 성립하고 발전한 것은 ‘일인오화(一人五化)’의 초전법륜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를 본받아야 한다.

위기는 기회다. 이번 조사에서 2,750만 명이 종교가 없다고 응답했다. 종교가 있다고 응답한 2,160만 명보다 600여만 명이 더 많은 숫자다. 이런 현상은 서구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된 일인데 한국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복잡한 종교의례, 지나친 조직화로 사적 영역의 간섭, 제도종교에 대한 실망 등이 꼽힌다. 이제 사람들은 명상이나 선행 등 종교적 영성은 갖되 제도종교의 틀에는 들어가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사람들에게 가장 적합한 종교가 어떤 종교이겠는가.

불교는 과거에 사찰이 산중에 있기 때문에 포교에 불리하다고 했다. 하지만 여가가 늘어난 요즘은 사찰이 산중에 있어서 종교적 접촉이 더 용이해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종교적 영성은 갖되 특정 종교에 매이지 않으려는 현대인의 성향은 불교의 개방성과 진리성에 매우 유리하다. ‘불교적 ○○교인’이 늘어날수록 불교의 세계는 확장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에게 어떻게 더 적극적으로 불교적 세계관과 인생관을 심어주느냐에 있다. 양이 아니라 질로 승부할 때가 됐다는 뜻이다.

이제 불교는 새로운 시대의 포교전략을 새롭게 구상해야 한다. 2위 종교가 됐다고 좌절할 것이 아니라 1위를 넘어서는, 불교의 오리지널리티 회복을 통한 ‘특등 종교’로 비상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자면 부처님이 당부한 ‘모든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두 사람이 한길로 가지 말라’고 한 전도부촉의 실천에 나서야 한다. 옛사람들은 그 다짐을 이렇게 했다.

“가령 부처님을 머리에 이고 산다 해도 몸을 평상 삼아 온 세상을 돈다 해도 전법을 통해 이웃을 이롭게 하지 못하면 끝내 부처님 은혜 갚았다 하지 못하리라(假使頂戴經塵劫 身爲牀座遍三千 若不傳法度衆生 畢竟無能報恩者)”

2017년 3월

홍사성(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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