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숙
본지 편집위원
근자 우리 사회의 화두는 단연 ‘미투(MeToo)’다. 친구들 사이에 만나서 서로 문안을 하다가도 “혹시 자네도 떨고 있나, 미투?” 하며 농담한다. 대체로는 모두 싱거운 농담인 듯 반응하지만, 그 속내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미투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면 보통의 ‘남자사람친구’들은 괜스레 볼멘소리로 ‘서로 좋아했을 텐데, 왜 이제 와서 미투냐’고 시비를 걸기도 한다. 이 중차대한 시기에 참으로 겁도 없고 눈치도 없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남자사람들은 정말 ‘미투’의 속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가,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인가.

잘 알다시피, 전도양양한 어떤 정치인이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았을 한 참모의 ‘미투’로 인하여 하루아침에 추락하는 신세가 되었고, 서슬이 퍼런 검찰 조직에서도 한 검사의 ‘미투’로 인하여 해묵은 비행(非行)의 연결고리가 들춰지고 있다. 장르도 다양한 문화예술계나 학계 역시 미투의 메아리가 쟁쟁하게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나라 안팎에서 거세지고 있는 미투 운동은 대개 조직의 상급자나 어느 분야 권위자의 성희롱-성추행-성폭력 등의 이슈(issue)와 함께 부각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점은 성(性)이라기보다는 권력관계의 문제이다.

사실 알고 보면, 피해자인 여성들이 어느 날 갑자기 미투를 주장하게 된 것이 아니다. 각자는 사건 당시에도 이미 어떤 식으로든지 상대방 관계자의 행위에 대해서 그 문제성을 주위에 호소한 바 있었다. 하지만 대개가 귀담아들어 주지 않았고 오히려 피해자의 발설(發說)을 저지하기도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상급자나 권력자 혹은 이웃의 가해[非行]에 대해서 알면서도 스스로 침묵하거나, 피해자의 침묵을 종용한 다수의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오늘에 와서는 ‘미투’라는 외침이 우리 사이에서 크게 들리기 시작하는 것인가.

돌아보면 미투 운동은 지금이 아니라 과거 어느 시기부터 우리 사회 일각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어느 회사나 정부기관의 구성원으로 일하다가 목격한 각종 비리에 충격적으로 회의(懷疑)하고, 죽도록 고민하고, 마침내 위태로운 결단을 내리는 개개인들을 그린 영화나 드라마가 봇물 터지듯 개봉된 것이 하나의 증표이기도 하다. 그런 가상세계가 아니라 현실에서도 연전에 ‘내부제보 실천운동’이라는 단체가 일부 불교계의 힘을 받아서 출범하였다. 박근혜-최순실 권력 공유 게이트에 관련된 민관(民官)의 제보자들을 비롯해서, 대기업 · 학교 · 종교계 등의 내부비리에 홀로 맞서던 제보자들이 미투를 외치고 나와서 모여 있는 곳이다.

최근에 대한항공 회장 일가의 천박한 모습이 또다시 언론에 보도되자마자, 마치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그간의 저질 행태들을 제보하려는 카톡방까지 열려서 수많은 기삿(記事)거리 · 수사(搜査)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불행히도 회장댁 당사자들이 세간의 이목을 두려워하거나 조금이라도 조심하려고 애쓴 것 같지는 않으나, 한편에서 많은 사람이 대한항공사 최고위층의 문제성을 목격하였고 기억하고 있었으며, 이제는 그런 적폐들을 청산하자는 자연스러운 흐름에 동참하려는 의미로 ‘미투!’가 된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미투는 우연하게 지금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가 지나온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고속성장의 시대에, 그 화려한 빛에 가려서 깊이 돌아보지 못했던 부족함과 부적절함이 누적된 탓이다. 개개인들은 무조건 출세를 지향하고 그런 성공을 경쟁적으로 과시하고, 어떻게든지 권력과 재력이 결탁하는 데 스스럼이 없고, 그런 결탁으로 각자 이익을 편취하기 위해서 불공정 거래를 함에도 부끄러움을 몰랐다. 그 결과, 우리 사회에 총체적으로 꼬이고 왜곡된 부분들이 상당히 여러 면에 걸쳐져 있었다는 진단이 아무래도 맞을 것 같다. 그러니까 과거로부터 누적된 잘못들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는 여건에 이르러서 필연적으로 나타난, 인과응보적인 현상의 하나가 바로 미투 운동이다. 미투 운동의 배경에는 단지 몇몇 성(sex)에 관련되고 부도덕한 개별적 일탈의 문제를 넘어서서 우리 사회 전체 영역에서 재력 · 권력 · 지위 등에 관련되고 지속적이며 구조적이었던 인권유린과 불의[不正義]의 문제가 크게 자리하고 있다는 말이다.

반성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선택한 어떤 행위가 당사자 간에 진정한 ‘존중’이 담긴 것인지를 충분히 헤아리고, 그것이 인간으로서 기본적 ‘존엄성’에 부합하는 의미가 있는지 여부를 자세히 살폈어야 할 일이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그런 의미를 살폈어야 했고,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도 살폈어야 했고, 교사와 학생 사이에서나 상급자와 하급자 사이에서도 살폈어야 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서, 부자와 빈자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열악한 입장들을 진즉부터 좀 더 존중하는 자세를 가졌어야 했다. 존중받지 못한 이들이, 그동안에는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제 목소리를 낮출 수밖에 없었겠지만, 오늘날은 세상이 바뀌어가면서 약자였던 그들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음을 크게 주장하게 된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세상사는 쉼 없이 변천한다. 본래 변화하게 되어 있는 세상의 이치에 둔감하거나 그것에 역행하려는 태도는, 불교의 관점으로 말하자면 무지[無明]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예로든 일부 철없는(?) 남성들이 미투하는 여성들에 대해서 ‘그때는 서로 좋아했을 것이면서 왜 이제 와서 고발하는 거냐’고 볼멘소리를 할 때, 혹은 누군가 공무원이나 대기업 직원으로 ‘본인도 그 속에서 잘 지냈으면서 왜 자기 조직을 고발하는지’ 그 저의가 의심스럽다고 말할 때, 이들의 생각은 세상사의 인과법을 잘 모르기 때문인 것 같다.

소위 미투 운동가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고민하고 호소하고 결단하는 순간들을 거쳐서 여기에 이르렀는지를 헤아려야 한다. 그 치열한 속사정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수구적(守舊的)인 사람들 가운데는 미투 운동이 그저 개인적인 복수(復讐)이거나 사회의 관습적 안정을 깨뜨리려는 목적으로 벌이는 불순한 선동쯤으로 폄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지난 시간에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함께 이 나라에 뿌린 검은 씨앗이 여기저기서 발아하여 지금껏 갈등 현상을 빚은 것처럼, 음으로 양으로 그에 맞서온 미투 운동 역시도 하나의 씨앗이 되어서 몇몇 특정인의 스캔들로 끝날 수 없게 하는 생명력을 가지고, 좋은 결실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 된다.

이 시대의 흐름과 그 배경과 앞으로의 전망을 바로 보자고 하면, 누구보다도 특히 불자로서는 연기법(緣起法)을 제대로 보는 정견(正見)의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업보나 인과응보와 관련하여, 불교는 ‘이숙과(異熟果)’라는 개념을 공들여 설명하고 있다. 어떤 원인이 된 행위가 있었다고 해도 당장 결과로 나타나지 않으며 때를 달리해서 나타나고, 다른 성질의 결과로 드러난다는 것이 이숙(異熟)의 의미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보니,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事)가 흔하고 사소한 일인 줄로 혼자서 단정하고 슬그머니 덮었던 인연이 놀랍게도 세간에 촉망받던 정치인들과 그 권력을 넘어뜨렸다. 또, 큰 회사에서 그동안 복종만 하는 걸로 보였던 하찮은 ‘아랫것들’에게 던진 고함과 물컵이 뜻밖에도 회장님 일가와 그 재력에 상당히 치명적인 손실로 돌아왔다. 하얀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태평양 건너로 몰고 간 태풍과도 같은, 이것이 이숙(異熟)의 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제는 불의를 불의로 덮어두고 넘어가는 세상이 아니다. 과거의 낡은 습관에 사로잡혀 있다면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낡은 생각을 바꾸는 일, 그것은 불교가 그토록 강조하는 정견(正見)의 깨우침이라는 점을 잊지 말 일이다.

2018년 6월

이혜숙(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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