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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언] “세상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창간 20년을 맞은 《불교평론》의 다짐
[80호] 2019년 12월 01일 (일) 홍사성 본지 주간
   
 

세상살이는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것이 없다. 재채기를 잘못해 허리가 아프기도 하고 물 한 모금 잘못 먹다 사레가 들리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은 더 어렵다. 만원 전철에서 어깨 조금 밀쳤다고 눈 흘김을 받고 고속도로에서 끼어들기 잘못했다고 보복운전 을 당하기도 한다. 나라와 나라 사이는 또 어떤가. 겉으로는 우방이라고 웃는 척하지만, 속내는 굴종과 지배를 추구한다. 환경을 걱정한다면서 쓰레기를 함부로 내다 버리고 매연과 일산화탄소를 내뿜는 기계를 가동한다. 그 결과 지구는 온난화가 촉진돼 북극의 얼음덩이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오늘의 세상은 정치 · 경제 · 사회 · 환경 · 교육 · 윤리적 어려움이 총체적으로 나타나는 현장이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참고 견뎌야 하는 사바세계(裟婆世界)에 살고 있다.

불교가 세상에 출현한 이유는 사바세계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주기 위해서다. 더 적극적으로는 고통의 근원을 제거해 영원히 행복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흔히 ‘전도선언’이라 부르는 잡아함 39권 《승삭경(繩索經)》의 말씀은 불교의 종교적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게 해준다.

“수행자들이여, 나는 인천(人天)의 모든 올가미에서 벗어났다. 그대들도 모든 올가미에서 벗어났나. 이제 그대들은 유행을 떠나라. 세간의 모든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인천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 유행을 할 때는 두 사람이 한 길로 가지 말라. 사람을 만나 설법할 때는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조리와 표현을 갖춘 법(法)을 설하라. 원만 무결하고 청정한 범행(梵行)을 설하라. 사람들 중에는 마음에 더러움이 적은 이도 있어 설법을 들으면 바른 눈을 뜰 것이다. 그러나 설법을 듣지 못한다면 그들도 악도에 떨어지고 말리라. 나도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벨라의 세나니가마로 가리라.”

부처님이 여기서 천명한 ‘세간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라는 말은 곧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라는 뜻이다. 불교식 표현으로는 ‘해탈’ 또는 ‘열반’이라 한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참다운 행복[涅槃]을 성취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이에 대한 부처님의 결론은 간단명료하고 의미심장하다. 《승삭경》의 전제에 따르면 부처님이나 그 제자들이 도달한 행복은 ‘인천과 인간의 모든 올가미에서 벗어난’ 상태, 즉 해탈을 의미한다. 무엇이 인천과 인간의 올가미인가. 중아함 21권 《진인경》은 그것을 무명의 구성요소인 탐욕과 분노와 집착이라고 말한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끊지 못했으면서도 초선, 2선 3선, 4선을 성취하고 공처, 식처, 무소유처, 비상처, 비비상처의 선정(禪定)을 성취했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참된 수행자가 아니다. 반대로 귀족 출신도 아니고, 박학다식하지 않고 장로가 아니고 초선과 비상비비상처정을 성취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살피며 삼독심을 끊어 없애려는 사람이 있다. 그가 참된 수행자이다.”

요컨대 불교 수행의 목적은 탐진치 삼독을 줄이는 데 있으며, 그래야 참다운 행복을 성취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불교의 이러한 가르침에 동의하려 하지 않는다. 도리어 불교가 가르치는 해탈과 열반을 비웃고, 그러한 행복에 이르고자 삼독을 줄이려고도 하지 않는다. 사실이 그렇다. 세속에 사는 사람치고 탐욕을 줄이기 위해 이웃과 나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분노를 줄이기 위해 자기를 낮추려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집착을 줄이기 위해 잘못된 생각을 비우려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실상을 말하면 모든 사람은 불교가 가르치는 나누고 낮추고 비우려는 생각보다는 더 많이 갖고 더 높이 군림하고 더 강하게 집착하는 삶을 원한다. 불자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절에 나오는 목적도 더 많이 갖고 더 높게 되고 더 맘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해달라는 소원이 더 많다.

물론 이것이 반드시 나쁜 것인가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있다. 물질적으로 풍족하고 남보다 존경받고 마음의 구애 없이 잘살고 싶은 것이 모든 사람의 소원이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남보다 많이 갖고 남보다 높이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소유한 것을 빼앗아야 하고 누군가를 억압해야 한다. ‘만인은 만인의 적’이 될 수밖에 없다. 세상의 모든 불행은 여기에서 기인하다. 행복하고자 하면서 불행의 길로 향하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는 영영 불행의 늪에 빠질 뿐이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우리의 욕망과는 정반대의 길로 갈 것을 권한다. 어려운 것은 사람들이 이런 말씀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부처님도 적지 않은 걱정을 했던 것 같다. 중아함 10권 〈권청품〉은 그 심경을 이렇게 전해준다.

‘내가 얻은 이 법은 알기도 어렵고 깨닫기도 어렵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이 법은 번뇌가 사라지고 미묘한 지혜를 가진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고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법은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길(逆流道)이다. 이치를 분별하여 배우기를 게을리하면 깨달음의 기쁨을 얻을 수 없다. 이처럼 미묘한 법을 사람들을 위해 설법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이 법을 받들어 행하지 않으면 나는 헛수고만 하게 된다. 나는 차라리 침묵을 지키고 수고로이 설법하지 않으리라.’

그런데 만약, 부처님이 수고로움을 귀찮게 여겨 설법에 나서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세상은 악법이 횡행하여 더 사람들이 눈을 잃고 방황할 것이다. 그래서 경전은 범천왕의 입을 빌려 부처님의 내면적 결심과 변화를 이렇게 묘사한다.

“원컨대 여래께서는 중생을 위하여 미묘한 법을 널리 설하여 주옵소서. 중생들 가운데는 훌륭한 근기를 가진 자도 있사온데 만일 그들도 설법을 듣지 못한다면 진리의 눈을 잃게 되고 버려진 아이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비유하면 연꽃이 진흙 속에서 싹을 틔우기는 했지만, 물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나이다. 중생들도 그와 같아서 근기는 이미 익었으나 생로병사에 시달려 설법을 듣지 못하고 그만 죽는 자도 있습니다. 어찌 가엾다 하지 않으리까. 원컨대 세존께서는 저들을 위해 법을 설하여 주옵소서. 지금이 그때이옵니다.”

범천의 권청을 받은 부처님은 드디어 ‘이제 행복의 문은 열렸다. 귀 있는 자는 듣고 법의 요지를 잘 분별하여 낡은 믿음을 버리라’면서 설법을 결심한다.

이 경전에서 보여준 부처님의 결론은 참으로 위대하고 결연하다. 세상을 행복으로 이끄는 길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눈뜬 자의 사명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똑같은 생각은 앞서 인용한 《승삭경》의 전도선언에도 나타난다. 바른 법을 설해도 듣지 않을 사람도 있겠지만 그중 일부는 불교의 가르침에 동의하고 따를 사람도 있을 것이란 기대이다. 불교는 이런 사명감으로 태어난 종교다. 부처님이 45년간 메마른 인도대륙을 누비며 설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약하면 이렇다. 불교가 주장하는 행복, 추구하는 방법은 무명에 눈이 가려진 사람들이 동의하기 어려운 ‘역류의 길’이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확대하려는 사람들에게 불교는 도리어 피하고 싶은 종교다. 어떤 경우는 불교의 가르침을 멋대로 왜곡하려는 사람도 있다. 그럴수록 불교는 자신에게 부여된 역사적 종교적 사명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부처님이 모범을 보였던 것처럼 더 큰 원력으로 세상을 향해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지, 어떻게 해야 행복한 세상이 만들어질지를 설법해야 한다.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조리와 표현을 갖춘 설득을 해나가야 한다. 우리가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세상은 좋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창간 20년을 맞는 《불교평론》은 이런 사명감으로 ‘불교, 이상사회를 꿈꾸다’를 특집으로 꾸몄다. 불교의 이상을 현실에서 구현하려는 원력은 한마디로 고난의 길이다. 그 길을 함께 가려는 사람에게 《불교평론》은 기꺼이 친구가 될 것이다. 그동안 동행해준 여러분께 깊이 감사 드리며 앞으로도 꾸준한 성원을 부탁한다.

 

2019년 12월

홍사성(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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