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기
본지 편집위원
우리는 타자의 시선 속에서 살아간다. 그 타자가 누구인지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고 한 사람에게서도 시기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타자를 완전히 의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가끔 자신이 바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고 내세우는 경우를 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오히려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시선을 더 의식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타자는 때로 자신을 지켜주는 수호자로서 역할을 하기도 해서 율곡 선생은 가능하면 혼자 있는 것을 삼가라는 자경문(自警文)을 남기기도 했다. 또 타자는 경쟁심을 불러일으켜 내 안의 발전 에너지를 촉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이 혼자 뛸 때보다는 경쟁하는 사람이 있을 때 더 좋은 기록을 내는 것이 그런 좋은 사례가 된다.

이런 타자의 존재에 대해 가장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유교와 불교처럼 인간의 본질을 관계성 또는 연기성(緣起性)에서 찾는 동양철학의 전통이다. 한 사람의 인품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그를 둘러싸고 있는 문중이나 친구 같은 관계를 보는 것이 좋다는 유교의 관점은 이미 우리 문화의 심층 속에 스며들어 있고, 인간을 포함한 타자와의 연기적 의존 속에서만 비로소 인간의 생명과 삶이 가능하다고 보는 불교적 관점 또한 일정하게 살아 있다.

그런데 이런 전통적인 관점은 고립성과 이기성을 전제로 하는 개인(individual)을 사회의 주체로 설정하는 서양 계몽주의 시대 이후의 인간관이 지배하는 시민사회가 우리 사회에도 정착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도전을 맞고 있다. 인간은 이기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고립된 존재로 태어나 자신의 이익을 전제로 하는 계약 속에서만 사회가 가능하다는 이러한 인간관과 사회관은 이미 우리 사회에서도 상당 부분 통용되고 있다. 그 속에서 타인은 실존철학자 사르트르의 적절한 지적처럼 일차적으로는 지옥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 지옥 같은 인간과 최소한도라도 관계를 맺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의 또 다른 숙명 때문에 벌어진다. 외로움은 그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심리적 촉진제 역할을 해준다는 최근 사회심리학의 연구결과도 있는 것을 보면, 관계 맺기의 어려움을 넘어서야만 하는 우리의 생애에 걸친 과업은 앞으로도 더 큰 과제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듯하다.

한국불교계를 상징하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총무원장 선거가 끝났다. 외형적으로나 내면적으로 적지 않은 뒷말을 남기고 끝난 선거는 이제 그 후유증을 어떻게 극복하고 새로운 분위기의 한국불교를 보여줄 것인가 하는 과제를 우리 앞에 던져주고 있다. 문제는 이 과제가 잘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상황이 더 악화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절망감이 교차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문명과의 만남에서 모든 종교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우리나라 상황 속에서는 유독 불교가 더 많은 눈총을 받는 종교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렇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고려 불교의 흥성에 이은 정치적인 타락을 마음이 맞는 몇 사람의 도반들과 함께 결사를 감행함으로써 극복한 지눌 스님의 숭고한 노력은 숭유억불을 내세운 조선의 선비들에 의해 물거품이 되다시피 했다. 서산과 사명, 초의와 백파 같은 스님들을 통해 겨우 그 맥을 유지했던 불교는 개화의 과정에서 대처승단을 기반으로 하는 왜색불교에 의해 뿌리째 흔들리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그 위기 상황을 직시한 경허와 용성, 만해, 석전을 비롯한 기라성 같은 스님들이 나타나 선(禪)의 전통을 지키면서 다른 한편, 수계(受戒)와 경전 공부라는 삼학(三學)의 전통을 비교적 온전히 회복하는 데 일정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의 그림자가 짙어 ‘봉암사 결사’라는 결연한 의지 표명과 ‘불교정화(佛敎淨化)’라는 길고 처절한 대립의 과정을 거쳐 세워진 ‘대한불교조계종’은 외형적으로 ‘각목을 들고 피 흘리는 싸움을 벌이는 스님들’과 그럼에도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드문 승가 공동체 전통을 유지하면서 법정과 혜민, 템플스테이 등으로 상징되는 치유의 상징적 아이콘으로 남아 21세기 현재를 지탱해내고 있다. 이번 총무원장 선거도 그런 복잡한 시선과 함께 한국불교계가 지니고 있는 양면성을 ‘성공적으로’ 보여주기에 충분한 과정이었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일은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성찰의 시간을 갖는 일이겠지만, 안과 밖의 구분이 본질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불교적 사유에 기반을 두고서 우리를 바라보는 타자의 시선에 눈을 돌려보는 일 또한 꼭 필요하다. 불교계를 향한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외부자의 시선이 있다면, 그는 대체로 우호적인 타자일 가능성이 높고 그의 시선 속에서 우리가 미처 챙기지 못하고 있거나 알고도 이런저런 이유로 애써 무시해왔던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을 재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니 말이다.

이번 호의 특집으로 ‘외부자의 목소리’를 설정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편집위원회에서 논의할 때의 기대와는 달리 그런 의미 있는 외부자들 중 많은 분이 우리의 원고 청탁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떤 분은 받아들였다가도 막상 원고를 시작하는 단계에서 정중하게 거절하기도 해서 담당 편집위원으로서 상당한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한국을 대표하는 종교 중 하나로 자리하고 있는 불교를 향해 어떤 평가나 충고를 하는 일 자체를 꺼리는 우리의 지식인 문화에 기인한 것 같기도 하고, 짧지 않은 원고 매수 또한 부담으로 작용한 때문인 것도 같다.

그런 와중에서도 이렇게 귀한 원고를 주신 분들께 진심 어린 고마움을 이 권두언을 통해 꼭 전해드리고 싶다. 이 귀한 시선을 통해서 21세기 한국불교계가 직면한 다양한 문제들이 다양하면서도 심층적으로 드러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그 시선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 시선을 우리가 어떤 자세로 수용하고 그것을 통해 어떤 마음의 변화를 이끌어낼 것인가 하는 실천적 지점이 확보되지 않으면 공염불이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최근 우리 불교계에는 담론이 넘쳐나고 있다. 그 많은 학술세미나와 담론의 장들이 마련되는 일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전혀 없지만, 자칫 그것들이 말의 향연으로만 그칠 경우 더 근원적인 공허감을 불러와 담론의 장 자체가 지니는 심연을 무너뜨릴 가능성 또한 적지 않다. 이미 일각에서는 그런 징후가 보이기도 한다. 학술세미나장에 동원된 사람들 말고는 자발적인 참여자가 거의 없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고, 일회성 행사가 끝나면 버려지는 화환들처럼 세미나나 심포지엄 자료집들이 일회용 행사를 위한 부품으로 전락해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한 담론의 장을 마련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진정한 공감과 그에 따른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는 논의의 장으로 만들어내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진정성(authenticity)이다. 우리는 이미 상당 부분 삶의 기본 요건인 이 진정성을 상실한 채 허위와 과장, 거짓말의 파고 속에서 일상을 살아내고 있다. 서로를 진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지 못한 채 일정 수준의 거짓과 불신을 당연시하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잘 살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삶의 근원적인 지속성은 당연히 무명(無明)의 짙은 그림자로 인해 보장받을 수 없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우호적인 시선은 물론 적대적인 시선에 대해서도 정당한 관심을 기울이면서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보는 일은 진정성을 전제로 하는 의미 있는 삶을 위한 기본 요건이다. 21세기 한국불교계 구성원이라는 정체성을 확인하면서 이 기본 요건을 갖추려고 노력하는 일은 또한 자본주의 문명과의 접점 모색 과정에서 삶의 의미 상실이라는 곤혹스러움을 공유하고 있는 한국인 모두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

2013년 12월
박병기(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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