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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구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 허우성
[51호] 2012년 05월 18일 (금) 허우성 본지 편집위원장

   

허우성
본지 편집위원장

1. 십악(十惡)으로 얼룩진 한국 사회

저 인도의 부처님은 흔히 지혜와 자비의 화신으로 불린다. 그가 최초로 보인 자비행은 교화의 행위이다. 정각 직후에 깊디깊은 불법을 중생에게 가르친다는 것이 피곤한 일일 것으로 예상하여 주저했지만 결국 교화하기로 한 것, 이는 분명 자비행이다. 하지만 자비는 우주에 줄곧 존재해 왔는지도 모른다. 우주의 오묘한 법이 고통과 악에서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싯다르타 태자의 몸으로 출현한 것 그 자체가 자비의 원천이고 인류사에 경이로운 축복이다.

태자는 뭇 생명이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는 것을 보고 출가하고 수도하여 열반(nibbāna)을 얻었다. 그리고 제자들이 모여들자 작은 공동체를 설립하고 계율, 선정과 지혜로써 그들을 지도하여 삼독을 제거함으로써 열반에 이르게 했다. 한 생명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른 생명을 먹어야 한다면, 열반은 최소 폭력을 보장하는 최고의 경지로서 바로 자애(metta)와 통한다. 초기 경전인 《법구경》은 “열반에 이른 자에게는 적의(敵意)가 전혀 없다.”고 하고, “성자는 어떤 생명도 해칠 수가 없다(ahimsā).”라고도 한다. 적의가 전혀 없는 아힘사, 이를 한문 문화권은 불살생으로 번역해 왔지만, 적극적으로 말하면 자비가 된다.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아래 구절은 특히 유명하다.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바쳐 구하듯, 이와 같이 모든 생명에 대해 한량없는 마음을, 온 세계에 대해 자애롭고 한량없는 마음을 닦게 하여지이다.

부처님의 출현 이후에도 인간 세상의 악이 줄어든 것으로 보이지 않으니 우리는 오늘도 자비심을 간절히 구해야 한다. 2천 수백 년 전 인도의 중생들은 보통 십악(十惡) 중 하나 이상을 범했다. 십악이란 살생, 절도, 음란, 거짓말, 이간질[兩舌], 욕설[惡口], 꾸민 말[기어(綺語)], 인색과 탐욕[간탐(慳貪)], 질투, 사견(邪見)을 가리킨다. 이는 장아함의 《소연경》에 나오는 말이다. 그런데 이 경은 역사와 신화가 섞여 있는 까마득한 옛적에 중생들이 먹을거리를 두고서 싸웠다고 하고, 폭력의 예방책으로서 두 길을 제시한다. 하나는 왕을 세우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선 수행의 전통을 되찾는 길이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후자가 더 확실한지도 모른다. 출가 수도와 선정(禪定, jhāna)의 궁극적인 목표는 열반이고, 이를 성취하면 십악은 완전히 사라진다. 승속을 가리지 않고 십악의 일부라도 범한다면 이는 열반에 이르지 못한 명백한 증거이다. 오늘날 우리의 조계종 승단은 십악에서 얼마나 자유로울까?

세속을 살아가는 한국인 중에서 십악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지극히 드문 것 같으니 대다수 시민은 곧 중생이다. 오늘날의 ‘시민 중생’은 2천 년 전 인도의 중생보다 더 사나워 보인다. 그리고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온 뒤 1천 수백 년이 지났건만 남북한 어디를 둘러보아도 우리 민족에게서 분노의 기질이나 폭력이 조금도 줄어든 것 같지 않다. 수많은 불교 유적지나 사찰은 보이지만, 우리 문화나 의식 구조에 스며든 자비와 비폭력 정신은 찾을 수가 없다. 자비를 말하면서도 수백만 마리 동물을 생매장시킨 육식산업 구조에 변화는 별로 없다.

한국의 텔레비전과 신문은 폭행, 강간, 살인, 자살 관련 뉴스와 더불어 욕설과 막말을 연이어 보도하고 있다. 2012년 3월 15일 통계청에 따르면, 전체 범죄 발생건수는 2000년 이후 정체 상태를 보이고 있지만, 2010년 발생한 형사범죄(재산범죄, 강력범죄, 위조범죄, 공무원범죄, 풍속범죄 등)는 45만여 건으로 지난 2000년보다 58%, 20년 전인 1990년과 비교하면 무려 248% 급증했다.

형사범죄 중 강력범죄로 분류되는 살인은 2000년 964건에서 2010년 1,262건, 강간은 2000년 6,982건에서 2010년 19,939건으로 10년 만에 3배 가까이 늘어났다. 폭행상해는 2000년 49,838건에서 2010년 180,365건으로 증가하여 10년 전보다 360% 이상 폭증했다(〈헤럴드 경제〉 2012. 3. 15). 한국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31.2명으로 세계 1위이다. 타인에 대한 공격과 자신에 대한 공격이 좀 다르지만 양자가 흔히 공존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최고의 자살률은 강력범죄의 증가와 함께 우리 사회에 폭력이 널리 퍼져 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이다. 위증과 무고(誣告) 역시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수백 배 많다는 통계 앞에서 한국은 거짓말공화국이 되었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형사범죄들은 대개 십악의 하나이거나 그 변형이다. 십악 가운데 하나인 절도는 재산범죄로 되고, 살생은 살인으로 되고, 거짓말은 심하면 사기죄로 변하며, 이간질과 욕설은 명예훼손죄나 모욕죄가 될 수 있고, 음란 행위는 강간을 낳는다.

한국의 시민 중생은 부처님 당시의 인도 중생보다 더 폭력적으로 보인다. 그들이 더 폭력적으로 된 데는 최소한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군사부(君師父) 일체의 종말이고, 다른 하나는 인터넷의 반복 사용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민주주의가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뿌리를 내리면서 국가에는 절대 군주나 독재자가, 가정에는 가부장이 많이 사라졌는데, 그 결과 왕이나 가부장에 의한 직접적, 구조적 폭력은 줄어들었다. 그런데 국가 폭력(권력)의 자리에, 수평 관계에 있는 시민 중생 간의 막말, 폭행상해와 강간 등이 들어섰다.

요즈음 중·고등학교에는 존경하는 선생님도 무서운 선생님도 없고 엄한 규율마저 사라졌다. 학생들은 그 빈 공간을 서로 간의 욕설과 폭력으로 채웠다. 남성 가장이 주로 폭력을 행사했던 가부장제라는 구조적 문화적 폭력은 줄어들었지만 부부간의 폭력은 증가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군사부일체의 종말과 함께 폭력은 분산되고, 폭력 행위자의 비율은 높아진 것, 결국 일 인당 시민 중생의 폭력은 증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두 번째 이유는 인터넷을 자주 사용하는 것이다. 미디어 혁명과 인터넷 시대가 어마어마한 정보―주로 감각적 쾌락을 주는 정보―를 주는 탓에, 오늘날의 중생은 주의가 산만해지고 집중력을 잃었다. 니콜라스 카(Nicholas Carr)의 《천박한 자들(The Shallows)》에 따르면, 인터넷과 SNS 매체에 대해 사용자들은 습관적으로 신속하게 반응하면서, 고요하고 주의력 깊은 마음을 상실하고, 깊은 생각, 공감과 동정심을 잃게 되었다. 사람의 뇌는 물리적인 고통에 대해서는 빨리 반응하지만, 상대방의 심리적 도덕적 상황을 이해하고 느끼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넷의 반복적인 사용으로 깊은 생각, 공감과 동정심이 줄어든다면, 언어폭력이나 물리적 폭력이 느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2. 승가공동체는 청정하고 자비로운가

한국의 시민 중생은 2천 년 전의 인도인에 비해 더 사나워진 것 같다고 했다. 그렇다면 한국의 승가공동체는 삼독이나 십악으로부터 청정하고 자비로운가? 최근 일어난 도박 동영상과 상호 비방전을 보면 우리의 승단은 청정하지도 자비롭지도 않은 것 같다.

5월 중순을 지나가는 지금 우리 사회는 두 가지 사건으로 눈이 아프고 귀가 따갑다. 하나는 통합진보당의 경선 부정과 폭력 사태이다. 진보라는 이념을 걸고 한국 사회를 진보시키겠다고 나섰으면서도,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형세가 불리할 때는 폭력도 동원했던 일이다. 이념을 구두선 정도로 생각하면 정치의 진보는커녕 자신도 변화시킬 수 없다. 진보 이념도 우리의 마음과 몸 깊숙이 박혀 있는 욕망과 분노를 줄이는 것과 깊이 관계가 있고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몸의 훈련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우리 불자를 참으로 아프게 하는 것은 종단의 알 만한 스님까지 연루된 도박사건, 이를 동영상으로 찍어서 폭로한 일, 동물을 학대하는 모습 등과 같은 것이다. 진위는 차차 밝혀지겠지만, 일부 출가승들이 현대판 십악을 범한 의혹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다는 점이다. 통합진보당의 경전 부정과 출가자들의 도박사건 사이에 있는 공통점은 권력욕과 거짓말,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념과 행위의 불일치이다. 청정 출가 승단에서 비도덕적 추문은 치명적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대체로 폭력이 따른다.

일부 출가자들은 왜 수시로 돈을 걸고 따먹기를 다투는 도박을 하는 걸까? 그들에게도 출가의 목표는 수행과 교화일까? 출가수행의 목적에 대한 의식은 희미하고, 생산하지 않아도 돈은 들어오고 시간은 남아도니 심심해서 도박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일간지들이 ‘스님도박’이 아니라 ‘승려도박’이라고 표현한 것은 사건의 정곡을 찌르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존경받을 만한 ‘스승’이 아니라 그저 머리 깎은 무리일 뿐이라는 것이다.

한 생각이 퍼뜩 일어난다. 현재 출가자들 중에 부처님의 출현이 인류사에 축복이라는 인식도 없고, 수행과 교화를 인생의 목표로 세우지 않는 분들이 있다는 생각이 일어난다. 그들에게는 발심도 절절한 사무침도, 무상심도, 한마디로 자신과 세상에 대해 실존적 고뇌가 별로 없는 것 같다. 이들은 지계와 파계 사이에서 평생 맴도는 것보다 근기와 소질대로 사는 것이 더 이롭지 않을까? 이렇게 ‘아름다운 환속’에 대해 상상해 보는 것이다. 이런 환속은 퇴굴이나 실패도 아니고, 수치의 길도 아니다. 이는 승가에는 자비를, 자신에게는 관대함을 보이는 일이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되찾는 일’이다. ‘똑바로 가다가 옆으로 가는 것’도 한소식이 아닌가. 세상이라고 해서 속물만 사는 곳도 아니다. 이순신 장군을 보아라. 무신으로서의 절절함이 있어서 나라를 사랑하여 우리 역사에 불멸의 인물이 되지 않았던가.

출가자가 타락하는 또 다른 이유가 세상에 대한 관심 때문일까? 대승불교와 참여불교 정신이, 타락한 세속 정치나 십악을 범하는 중생을 닮게 한다면 그런 대승은 포기하는 편이 낫다. 12세기 지눌 스님이 개경을 떠나서 남쪽으로 떠났던 까닭을 아시는가? 그 까닭은 당시 풍진 속에 빠져서 도와 덕은 닦지 않고 옷과 밥만 축내는 출가자들이 위로는 도를 넓히지 못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이롭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조계종도들은 피눈물로 참회한다고 하고, 재가불자들은 상심하거나 낙담하고 더러는 분노한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승가공동체는 계율을 엄격히 세워서 청정한 승가상을 확립해야 한다. 자자와 포살을 통해 자기 허물을 뉘우치고 수행자로 거듭 나야 한다. 특히 비도덕적 행위를  부추기는 나쁜 동영상, 폭력 게임 등에서 멀어져야 한다. 거기에는 수많은 유혹과 해악이 있기 때문이다.

재가불자들이여! 상심은 되어도 다른 사람의 위로는 기다리지 말자.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다. 어떤 종교에서도 출가자와 신도는 서로 닮는 법이다. 계율을 지키고 지혜와 자비를 갖춘 출가자가 있는 곳에 무지하고 무자비한 신도가 있기 어렵고, 눈 밝고 착한 신도가 있는 곳에 타락하고 사나운 출가자는 나오기 어렵기 때문이다.

필자에게 누구를 위로할 만한 자격 같은 것은 없다. 하지만 수행과 교화에 전념하는 수행자들, 종도로서 이번 사건에 대해 아무 대책이나 역할을 제시할 수 없어서 그저 막막하고 답답한 심사를 달랠 길 없는 분들, 그리고 한동안은 세상의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 하는 분들에게 한 말씀 드린다. 용기를 내어 수행과 교화를 지속하시기를.

한국의 ‘시민 중생’ 사회에는 십악이 흔하고, 일부 출가공동체는 돈과 권력다툼으로 타락했다. 이런 시절인연 위에 눈물을 뿌리는 수행자가 있다면, 그 눈물은 자비에서 온 것이고 한국불교를 살리고 인류를 구하는 눈물일 것이다. 지혜와 자비를 갖춘 부처님과 같은 분이 우리 주변에 출현했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다. 사바세계가 십악으로 타락했을 때는 승속이 함께 부처님에게서 해탈의 지혜를 찾아야 한다. 아! 구원은 우리 자신 속에 있다. 그리운 건 중생이 아니라 우리 속의 중생을 구원할 진정한 수행자다. 


 2012년 6월
허우성(본지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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