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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문명과 자본주의 그리고 불교 / 박경준
[59호] 2014년 09월 01일 (월) 박경준 편집위원, 동국대 교수

   
가톨릭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다녀갔다. 교황은 방한 기간 중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는 평소 가난한 사람들을 배제하는 현대 자본주의를 ‘새로운 형태의 독재’라고 비판한 것과 맥이 닿아 있다. 노숙자가 숨지면 뉴스가 안 되지만 주가가 2포인트만 떨어져도 뉴스가 되는, 이 비정상적인 세상을 질타하는 그의 방한은 불교와 자본주의와 관계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돌아보면 지구촌의 오늘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유엔개발계획(UNDP)의 보고에 따르면, 70억이 넘는 세계 인구 가운데 약 절반은 겨우 생존할 정도로 근근이 살아간다. 그중 약 10억여 명은 비참할 정도로 가난하고 수명도 짧다. 특히 아프리카의 극빈국들 중에서 하루 1달러 미만의 수입으로 연명하고 있는 사람이 4억 명에 육박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사람들이 탐욕을 절제하지 못하고 재물과 권력을 향해 치닫는다. 상업주의 대중 소비문화의 시대 조류에 편승하여 끝없이 감각과 향락을 좇는다. 이들은 향락주의의 영원한 짝인 허무주의의 늪에 빠져 공허와 상실감으로 알코올과 마약, 폭력과 자살에 호소한다. 그런가 하면 문명의 이기와 물질적 풍요에 함몰된 이성은 우리의 문명구조와 생활 패턴이 얼마만큼 잔혹한 희생을 담보로 유지되고 있는지 돌아보지 않는다. 성장의 신화와 진보의 허상에 집착하여 무절제하게 자연을 개발해 온 결과, 마침내 환경위기와 생태위기에 직면하고 있는데도 그렇다.
물질주의 문명의 폐해와 양극화의 심화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1902~1985)은 자본주의를 ‘경제’에 국한된 시스템으로만 파악하지 않는다. 그에게 자본주의는 ‘사회질서를 이용하여 생존하고, 국가와 거의 대등한 지위에서 맞서기도 하고 공모하기도 하는 존재’이며, 사회구조를 지탱해주는 문화의 역할로도 이용된다. 또한 여러 지배계급과 결탁하기도 한다. 지배계급은 자본주의를 방어함으로써 자신을 방어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브로델은 자본주의에 대한 분명한 정의를 유보하면서, 다만 자본주의를 ‘독점이윤을 따라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는 카멜레온과 히드라 같은 존재’로 바라본다.

그러면 불교는 현대의 이러한 자본주의를 어떻게 보는가.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지만 여러 가지 경설(經說)을 종합하면 대략 다음과 같은 특징이 발견된다.

먼저, 불교는 일반인들이 생산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독려한다. 불교는 욕망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경제적인 생산활동에 대해서도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인 입장을 취할 것이라고 보는 것은 선입견이다. 초기경전은 출가수행자가 아닌 재가자는 재화의 획득과 증식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벌들이 꿀을 모으는 것처럼 근면과 정려로써 생업에 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기술의 습득을 통해서 생산성 증대를 꾀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한 마디로 돈 버는 데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이 곧 성장제일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과잉생산과 과잉소비 체제로 인한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로 지구의 위기가 심각한 상황에서 성장만이 해답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둘째, 재화를 창출하고 부를 축적함에서 반드시 도덕적이고 올바른 수단과 방법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사람들을 속이거나 폭력 등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면 안 된다.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과 결탁하여 사업을 독점한다거나 담합을 통해 소비자에게 피해를 안겨주는 등의 행위는 결코 정당한 생산활동 내지 경제활동이라고 할 수가 없다.

셋째, 불교에서는 합리적이고 적절한 수준의 이자 수입을 인정한다. 초기경전은 ‘확대 재생산을 지향하는 계획적이고 합리적인 지출의 원칙’인 사분법(四分法)을 제시하며 수입의 4분의 1은 타인에게 빌려주어 이자 소득을 올리라고 설한다. 이것은 중동 지역의 종교들이 원칙적으로 이자 수입을 금기시하는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이자 수입을 인정하며 적극적인 경제활동을 권장하는 불교의 입장은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삼는 ‘자본주의’와 확실히 유사한 점이 있다. 그래서 ‘불교가 지구상 최초로 자본주의 이념을 발전시킨 종교’라고 말하는 불교학자도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불교가 ‘오늘의 자본주의’를 그대로 옹호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넷째, 자신이 번 돈이라 할지라도 마음대로 쓰면 안 되고, 바르게 써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바르게 재물을 구하여 스스로 얻은 것을 남에게도 대어 주고 자기도 쓰며, 또한 널리 베풀어 복도 지으라.”고 했다. 이는 오늘의 카지노 자본주의 또는 천민자본주의에 반대되는 가르침이다. 불교는 ‘질병’과 ‘빈궁’의 고통을 매우 심각하게 인식한다. 그러한 인식 위에서 병자와 빈자를 적극적으로 돌봐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보시와 자비도 현실적으로는 이들 병자와 빈자를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더욱이 불교의 무아(無我)사상은 근본적으로 ‘나’도 없고 ‘내 것’도 없음을 말해 준다. 내가 번 돈이 곧 ‘내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릴 때 그 돈이 가장 값지게 쓰일 곳이 어딘지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다섯째, 불교경제학은 행복의 경제학이다. 돈을 정당한 방법으로 벌고 그렇게 번 돈을 나와 남을 위해 바르게 쓰더라도, 재물에 대한 탐욕이 남아 마음의 평정과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직 불완전하다. 적당한 물질적 충족은 정신적 충족의 필요조건이 되겠지만, 필요 이상의 물질은 오히려 정신을 황폐화하여 진정한 행복을 감소시키고 고통을 증가시킨다. 그러므로 《테라가타》는 “지혜로운 사람은 설령 재산을 잃는다 해도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지만, 지혜가 없는 부자는 한순간도 진정으로 살아있다고 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여섯째, 불교는 가난의 문제를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보지 않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구조적으로 접근하라고 한다. 다시 말해 국가는 적절한 재분배정책을 통해 사회적 평등을 실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구라단두경》은 국가가 빈궁한 농부에게는 생산기반을, 상인에게는 자금을, 고용인에게는 임금을 지급함으로써 올바른 방향으로 재화의 균등한 분배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는 국가가 경제 문제를 풀어감에서 단지 ‘시장의 질서’에만 의존하지 않고, 특수한 상황에서는 시장에 개입할 수도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일본의 경제학자 이노우에 신이치는 이러한 불교경제학의 특징을 ‘자리이타가 원만한 경제학’ ‘평화의 경제학’ ‘지구를 구하는 경제학’이라는 세 가지 슬로건을 통해 설명한다. 그는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에서 영감을 얻어 그 나름의 불교경제학을 정립하였다. 그는 《지구를 구하는 경제학: 불교로부터의 제언》이라는 책에서 앞으로 우리가 어떤 산업의 적절성을 평가할 때는 최소한 세 가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곧 (고용효과와 같은) 경제적 가치, 환경적 가치, 그리고 사회적 가치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여기에 ‘정신적 가치’를 추가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불교경제학에서 ‘경제적’이라는 단어의 개념은 단순한 ‘재화의 양’이 아니라 ‘총체적 삶의 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총체적 삶의 질은 정신적 행복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이렇게 보면 불교는 자유와 평등을 똑같이 중시하는 종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불교적 자유는 단순히 시장에서 돈을 모으는 자유가 아니고, 불교적 평등은 단순한 외적 소유의 평등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자유가 이기적 욕망만을 추구하는 일차원적 자유에서 이타적 자비를 동반하는 이차원적 자유로 전환하지 않을 때 반드시 평등의 도전을 받게 된다. 또 사회주의적 평등이 타율적·형식적 평등에서 자율적·본질적 평등으로 바뀌지 않을 때 반드시 자유의 도전을 받게 된다. 오늘의 자본주의는 동기론적으로는 자유주의지만 결과론적으로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불교의 가르침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게 될 것이다. ■

2014년 9월

박경준(편집위원, 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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