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성
본지 주간
인도의 종교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째는 제사(祭祀)의 길(Karmamarga)에 속하는 종교, 둘째는 신애(信愛)의 길(Bhaktmarga)에 속하는 종교, 셋째는 지혜(智慧)의 길(Jnanamarga)에 속하는 종교다. 제사의 길에 속하는 종교는 제사의례에 최고의 중점을 둔다. 여기서는 의례집행이 바르게 이루어지면 운명까지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제자(司祭者)들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신애의 길에 속하는 종교는 사람이 믿고 의지할 만한 인격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그 신을 믿고 사랑함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기대한다. 그러나 지혜의 길에 속하는 종교는 인간의 지혜에 최고의 중점을 두었다. 세계와 인생의 참모습을 지혜로써 파악하고 인간의 당위와 이상을 지혜로써 바르게 생각하려고 한다. 행복의 실현을 위한 방법 역시 초월적인 어떤 힘에 의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혜와 의지적 노력을 중시한다.

불교는 이 가운데 세 번째인 지혜의 길에 속한다. 제사의 길이나 신애의 길에 속하는 종교에서 볼 수 있는 제례주의나 신비주의 또는 무조건적인 믿음과 희생의 요구를 배척한다. 불교가 지혜의 길을 택한 것은 합리적 이성으로 판단할 때 제사의 길이나 신애의 길을 납득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지혜를 강조하는 불교는 다른 종교가 내세우는 교리와 판이한 데가 있다. 붓다가 사색을 통해 획득한 통찰지에 따르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세 가지 특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모든 존재는 잠시도 머물지 않고 변하는 현상을 피할 수 없고[無常], 변하고 또 변하기 때문에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존재할 수 없으며[無我], 무상과 무아를 바탕으로 하는 존재는 늘 불안하고 고통스럽다[皆苦]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헛된 꿈을 꾼다. 희생과 제사의 공덕을 쌓거나 신에 귀의하고 기도하면 운명이 바뀌고 죽어서도 구원되어 영생을 얻을 것으로 믿는다. 불교는 이에 대해 지혜의 눈으로 통찰할 것을 요구한다. 아무리 영원과 불사(不死)와 지복(至福)을 꿈꾸더라도 지상의 것치고 허망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러므로 지혜를 어둡게 하는 탐욕과 분노와 망상에 집착하지 말고 나눔[布施]과 낮춤[下心]과 버림[無着]을 실천해서 마음의 평화[涅槃]를 얻으라고 가르친다.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이라는 것이다.

붓다가 제시한 지혜의 길은 누구든 ‘눈 있는 자는 보고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할 수 있는 열린 지성의 길이었다. 인간의 미래나 운명을 절대적 타자에게 미뤄 놓고 제사나 믿음만을 요구하는 것은 맹목과 우치의 소산이다. 신의론 숙명론 우연론을 내세우는 삼종외도(三種外道)는 아무리 진리라고 주장해도 허위다. 문제는 그럼에도 사람들이 지혜의 길을 가려 하지 않고 우치한 인생관과 세계관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릿대 구멍으로 하늘을 보려는 지식인, 종교인일수록 더하다. 이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는 ‘먼저 눈뜬 사람[覺者]’이 짊어져야 할 책무다. 《법구경》 〈술천품〉에는 이들의 어리석음을 어떻게 일깨워주었는가를 알게 하는 몇 개의 게송이 있다.

비록 천 마디 말을 듣더라도/ 그 뜻이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면/ 한마디 바른말을 듣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만 못하리라(雖誦千言 句義不正 不如一要 聞可滅意)(100)

비록 천 마디 글귀를 외우더라도/ 그 뜻이 옳지 않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한 줄의 옳은 글귀라도/ 듣고 실천하는 것만 못하리라(雖誦千章 不義何益 不如一義 聞行可度)(101)

비록 많은 가르침을 외우더라도/ 바른 뜻을 모르면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한마디라도 바르게 알아듣고/ 그대로 실천해야 도를 얻으리라(雖多誦經 不解何益 解一法句 行可得道)(102)

요컨대 사람들이 집착하는 맹목적 주장이 과연 이치에 맞는지, 그 주장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따져보라는 것이다. 실제로 붓다는 제자는 물론이고 외도들과도 인간 고통 해결을 주제로 한 토론을 즐겨 했다. 그들의 의견 가운데 옳은 것은 솔직하게 인정해주었으며 설법을 할 때도 그 경험과 지식을 활용했다. 어떤 의미에서 불교는 이들과의 논쟁으로 교리를 정연하게 정립한 종교였다.

재가신자들의 의견도 일리가 있는 것이라면 언제나 경청하고 수용하는 자세를 취했다. 예를 들어 교단 운영 문제와 관련해 파세나디 왕의 의견대로 안거제도를 시행했다. 또 의사 지바카의 건의를 받아들여 수행자들이 깨끗한 승복을 입도록 했다. 반대로 아무리 오래된 전통이라 할지라도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라면 부정했다. 인간의 미래는 초월신이나 별자리에 속해 있지 않다고 말했다. 사람은 태생으로 귀천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단순한 선언이 아니었다. 세계와 인생의 밑바닥까지 살펴서 얻은 철학적 결론이었다. 이런 태도는 붓다가 열린 지성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붓다의 유일한 관심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에 있었다. 그러자면 불합리한 생각을 바로잡는 비판의식과 가치관의 혁명적 전환이 필요했다. 붓다는 그 방법을 말했고 많은 젊은이가 이에 동의하고 불교 교단에 귀의해 왔다. 이들은 대부분이 ‘양가(良家)의 자제’였다. 양가의 자제란 지성과 교양을 갖춘 명문가 출신이란 뜻이다. 붓다의 10대 제자인 사리풋타, 목갈라나, 카트야나, 카사파, 아난다 같은 사람들은 요즘 기준으로 보아도 뛰어나 지성인이었다. 뒷날 불교의 역사를 이끌어 간 것도 지성적 승려들이었다. 불교사에 빛나는 용수, 세친, 마명, 원효, 의상, 휴정과 같은 인물들은 당대를 대표하는 지성인들이다.

이러한 전통을 계승해온 불교는 세계 지성사에서 유례가 드문 크고 거룩한 ‘지성인 집단’이었다. 이들은 소크라테스를 이어받은 플라톤의 아카데미, 공자를 내세운 유가학파와 같은 높은 수준의 지성과 철학으로 진리의 실천과 역사의 진보를 위해 헌신했다. 유신(有神)종교와 낡은 제도의 억압구조 앞에 사성평등을 주장하고 연기적 관계론에 입각한 자비의 강조는 인류의 정신문명사에 남긴 큰 족적이다. 특히 현대사회의 화두인 갈등과 전쟁, 자원고갈과 환경파괴와 같은 문제에 대한 불교의 메시지는 매우 강렬하다.

세계 지성들이 불교를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불교의 주장이나 가르침이 언제 어디서나 완전무결한지는 재검을 요구받기도 한다. 지나친 금욕의 강조는 반인간적이며, 모든 것이 무상하고 허무하다고 말하는 것은 역사의 진보를 부정하는 반사회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교단의 운영 문제, 윤리 문제 등에 대한 세속사회의 시비도 있다. 남에게 말하기 전에 자기 발밑부터 돌아보라는 의미였다.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반복된 배불론은 이런 문제를 적극적으로 설명해달라는 지식인들의 비판적 질문이다.

돌아보면 불교는 그동안 세상으로부터 이런저런 충고를 많이 받아왔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불교는 세상에 더 유익한 종교로 발전했다. 반대로 귀를 막고 바른말을 외면하면 역사와 사회로부터 소외되었다. 불교 또한 세속사회를 향해 수많은 유익한 충고를 해왔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길인가에 대한 설법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자기를 돌아보게 하는 명상수행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도와주기도 했다. 그렇다면 요즘은 어떤가. ‘불교가 세상을 걱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불교를 걱정하는 일이 많다’는 말이 자주 들린다. 충언역이(忠言逆耳)라 했다. 귀에 거슬려도 새겨들을 말은 새겨들어야 한다. 불교가 합리적 지성을 바탕으로 한 열린 종교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이번 호 특집은 ‘한국 역대 지성의 불교인식’이다. 역대 지성들이 불교를 어떻게 보았는가는 그 시대의 불교 수준을 반영한다. 오늘의 한국불교에 참고할 점이 많았으면 한다.

2015년 12월

홍사성(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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