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 그리고 희론

서재영
본지 편집위원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물론 동물들도 의사소통을 하지만 인간만큼 섬세한 감정을 나누거나 정의와 진리 같은 추상적 개념을 주고받을 수는 없다. 언어가 있어 인간은 감정을 표현하고, 경험과 지식을 축적하여 후세로 전승할 수 있다. 2,600여 년 전 붓다의 말씀을 삶의 지침으로 삼을 수 있는 것도 언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바로 그 언어 때문에 온갖 번뇌와 분란에 빠져들기도 한다. 언어를 과신한 나머지 말이 곧 진리라고 착각하고, 말과 논리의 유희에 빠져들기도 한다. 흑백논리를 앞세워 논쟁을 일삼는가 하면 이분법적 사고에 사로잡혀 대립하고 갈등하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반니원경》에서는 “다투고 분노하는 마음을 멀리하라[去諍怒心]”고 했다. 대립하고 논쟁하는 마음을 멈추는 것이 팔정도의 ‘바른 생각[正思]’이라는 것이다.

물론 부처님도 일생에 걸쳐 수많은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능가경》에는 “나는 최정각을 이룬 그날 밤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고 했다. 부처님은 숱한 말씀을 하셨는데 왜 일자불설이라고 했을까? 아마도 그것은 여래의 말씀은 분별을 넘어선 말이고, 번뇌와 갈등을 잠재우는 말씀이기 때문일 것이다.

용수 보살은 《중론》의 서두에서 “부처님은 인연법을 잘 설하시어 모든 희론을 잠재워 주셨다.”고 찬탄했다. ‘희론(戲論)’이란 글자 그대로 ‘언어적 유희’ ‘논리의 희롱’으로 해석할 수 있는 말이다. 어쩌다 종합편성채널이나 신문을 보면 멀쩡하게 생긴 사람들이 쏟아내는 말과 논리가 온통 진영논리에 사로잡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현란한 솜씨로 말과 논리를 희롱하지만 그들의 말에는 대립과 갈등을 유발하고, 분노를 자극하는 에너지가 넘쳐난다. 용수 보살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위대한 것은 그와 같은 번뇌와 갈등을 부르는 희론을 잠재우기 때문이라고 했다.

용수 보살이 어려운 말과 난해한 논리로써 언어와 정면 승부를 통해 희론을 논파했다면 유마 거사는 오히려 ‘일묵(一默)’했고, 선사들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을 지향했다. 말의 길이 끊어진 곳, 사유의 길목이 차단된 곳, 날카로운 대립적 논리가 멈춘 곳에 진정한 평화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유는 선종에 영향을 미쳤던 노자의 가르침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지자불언 언자부지(知者不言 言者不知)”라고 했다. “아는 이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진리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동양의 문화는 대체로 언어를 경계하며 침묵을 숭상해 왔다.

언어도단과 침묵의 폐해

고요히 침묵을 지키면 희론에 휘말리지 않고, 번뇌에 시달리지도 않는 것은 자명하다. 그래서 수행자들에게 말과 논리는 경계의 대상이 되었고, 입만 벙긋해도 이미 본지에서 벗어난다는 ‘개구즉착(開口則錯)’은 수행자의 신조가 되었다.

이렇게 침묵이 숭상되면 날카로운 언어는 잠들고, 갈등의 논리는 해체되겠지만, 그에 따른 폐해도 뒤따른다. 침묵은 자신의 무지(無知)를 은폐하는 수단이 되고, 사실과 위배되는 오류를 묵인하게 되며, 대화와 소통을 가로막는 폐쇄적 문화를 낳기 때문이다. 번뇌를 잠재우기 위한 침묵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를 감추는 기제로써 침묵이 이용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런 문화 속에서는 건강한 논쟁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만약 학문의 영역에서 논쟁이 사라진다면 진실을 검증하는 절차가 사라지고, 학문적 진보도 기대할 수 없다. 아마존의 CEO 제프 베조스는 “비판받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체면상 선량한 척하기 위해 새로운 것을 할 수 없다.”고 했다. 경험하지 못했던 주장이나 새로운 내용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저항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두려워 새로운 것을 제기하지 않고 학문적 논쟁을 피한다면 학문의 진보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우리 학계를 돌아보면 치열한 논쟁 대신 점잖은 고담준론만 오가는 듯하다. 비판이 두려워 밋밋한 글쓰기에 익숙해져 있고, 논쟁이 귀찮아 논쟁적 글쓰기를 회피하고, 도전적인 의제를 던지지 않는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성실하지만 이미 아는 이야기, 모범적이지만 시비 걸 일 없는 내용, 매끄럽지만 쟁점이 없는, 영혼 없는 글쓰기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발표자는 정량적 연구 업적을 위해 의례적 발표를 되풀이하고, 토론자는 주례사와 같은 칭찬과 적당한 질문으로 논평을 대체하는 것이 미덕처럼 굳어져 있다.

이런 풍토는 건전한 논쟁을 가로막고 새로운 이론의 등장을 차단하기 때문에 학계는 지루한 담론 공간으로 변하기 쉽다. 최고의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불교의 비전을 제시하지도 못하고, 시대적 과제를 극복할 수 있는 참신한 대안을 내놓지도 못한다. 대개의 논문이 오로지 고답적인 주제만을 되풀이하는 연구 경향이 이를 반증한다.

물론 우리 학계에도 논쟁이 존재한다. 그런데 가끔 목격하는 논쟁이 감정싸움으로 번지는 것을 보곤 한다. 영국의 철학자 칼라일은 “남과 토론할 때 화를 낸다면 진리를 위하여 다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하여 다투는 것”이라고 했다. 학술적 담론 공간에서 논쟁은 사람과의 싸움, 감정의 표출이 아니다. 말과 논리를 놓고 싸우는 것이고, 논파되지 않는 진리를 담금질하는 연구 활동이다.

진리는 논쟁에서 태어난다

논쟁은 서로 다른 견해가 제기될 때 무엇이 진실인가를 놓고 다투는 것이다. 논쟁이 일어난다는 것은 그 주장이 아직 학계의 정설로 확립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따라서 논쟁은 무엇이 진실인가를 가리는 연구 일부분이다. 학술적 주제를 놓고 벌이는 논쟁은 내용의 핵심을 뚜렷하게 만들고, 논지를 명료하게 드러내며, 논리의 허점도 찾아준다. 따라서 논쟁은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글을 쓰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연구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러시아의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진실은 논쟁 속에서 태어난다.’는 점을 강조했다. 학문적 진리란 침묵이 아니라 건전한 논쟁 속에서 다듬어지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활발하게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연구 활동이 살아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학자들이 도반이 되어 함께 진리를 빚고 있음을 의미한다.

불교사를 돌아보면 불교사상 또한 그와 같은 논쟁을 통해 발전해 왔다. 논쟁은 불교를 분열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지만 십사(十事) 논쟁과 같은 논쟁이 있어서 교학은 치밀하게 다듬어지고, 행위규범도 정교해졌다. 특히 대승불교는 용수의 사례에서 보듯이 도발적이고 논쟁적인 의제들을 제기하면서 부상했다. 논쟁이라는 담금질이 없었다면 중관사상은 등장하지 못했을 것이므로 《중론》은 논쟁 속에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대 한국불교사에서도 이런 사례는 있다. 성철 스님이 제기한 돈점 논쟁은 정화운동에 몰입해 있던 수좌들을 일깨우는 천둥소리 같은 사자후가 되었다. 비구와 대처의 갈등 속에서 동서분주하던 출가자들에게 무엇이 바른 깨달음인가라는 질문은 출가의 본분사(本分事)를 깨닫게 했다. 말과 논리를 경계하는 선에서조차 논쟁은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 이번 호 《불교평론》에서는 ‘현대 한국불교 10대 논쟁’을 특집으로 마련하였다. 불교에서 말하는 반야의 진리는 분명 말을 떠난 곳에 있다. 하지만 불교학이 다루는 진리는 말과 논리의 영역 속에 있다. 그런 진리는 논쟁을 통해 논리적 정합성이 보완되고, 토론을 통해 학문적 완성도가 다듬어진다. 그런 맥락에서 ‘현대 한국불교 10대 논쟁’은 우리 학자들이 그동안 어떤 진리를 어떻게 빚어왔는가를 살펴보는 것이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 다루고 있는 10편의 논쟁들은 논쟁이 드문 우리 학계에서 대중의 이목을 끌며 흥미롭게 진행되었던 주제들이다. 이번 특집을 통해서 이들 논쟁이 가진 논점과 전개과정 그리고 과제가 무엇인가를 한눈에 볼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어떤 것을 논쟁의 주제로 설정하고, 불교라는 진리를 어떻게 담금질할 것인가를 되묻는 시간이 되리라 믿는다. ■

2015년 6월

서재영(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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