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기
본지 편집위원장
우리의 시간은 늘 찰나적이고 연기적이다. 지금 이 순간조차 온전히 붙잡을 수 없지만, 내게 주어진 오늘의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가면서도 지속성이라는 환상을 안겨준다. 다른 한편, 시간은 지금 머물고 있는 이 공간 속에서 수없는 연기(緣起)의 인드라망을 연출하며 삶의 복잡성과 복합성을 부른다. 언제까지고 지속될 것 같은 착각 속에서, 그 연기의 얽힘으로 인한 고통을 직시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때로 무심한 듯 살아내고 있는 자신이 문득 낯설어질 때가 있다.

그런 낯섦의 순간은 우리에게서 깨침의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시간의 찰나적인 흐름을 제대로 알고 바라볼 수 있다면, 붓다가 발견한 진리에 가까이 다가설 가능성 또한 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체로 그 순간조차 외면하는 반복적 일상의 회귀로 마무리하고 만다. 무명(無明)의 그림자와 인연의 습기가 만만치 않고, 아직 수행의 힘은 그것에 턱없이 미치지 못해 생기는 일이다.

시간의 찰나성을 염두에 둔다면 과거나 현재, 미래라는 말 자체는 임의적이고 피상적인 개념들일 뿐이다. 과거 또는 역사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어떤 시간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조차도 우리가 임의성과 작위성을 한껏 발휘하여 그어놓은 선의 한계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신기루 같은 것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걸림 없음[無碍]을 전제로 한다면, 생멸(生滅)의 흐름 속에서 과거를 말하고 미래를 예측하면서 현재를 사는 일 자체는 소중한 과업이자 과제로 다가올 수 있다.

한국불교에 대한 현재적 인식과 과제

‘한국불교’는 대체로 한국불교계라는 구체적인 대상과 함께 사상과 문화의 흐름 속에서 형성되어 현재에 전승되는 우리 불교라는 대상을 지칭한다. 이 두 대상은 당연히 서로 분리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일한 것은 아니다. 전자가 ‘대한불교조계종’으로 상징되는 현재의 불교계 전반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한국불교사상 또는 철학을 포함하여 그것이 현재에 살아 있는 양상 전반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21세기 초반 한국사회는 그 자체로 인식의 대상으로서는 지나치게 복잡하고 복합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한국불교계는 그 한국사회의 한 구성요소 또는 영역으로 존재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석가모니 붓다로 이어지는 심원한 가르침의 뿌리를 지니고 있어, 일정한 고유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특히 이웃종교인 그리스도교와 비교하면 전통에 스며들어 이제는 그것의 주요 요소이자 내용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우리 사회에서 불교가 주로 전통에 기반한 제도종교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 불교계에 관한 사회의 전반적인 인식은 대체로 부정적이지만, 다른 종교라고 해서 그리 나을 것은 없다. 기독교의 경우가 대형교회 세습과 극단적이고 이분법적 태도 등으로 인한 반감이 가장 많고, 그다음이 불교, 천주교 순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꾸준히 진행되어온 탈종교화 현상은 대표적인 제도종교가 보여준 부정적인 모습들에 대한 실망과 반감으로 인해 나타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불교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스님 멘토들의 긍정적인 영향력이나, 템플스테이에 대한 외국인과 타 종교인, 또는 무종교인의 호평 등이 분명히 있고, 이런 평가들은 한국불교가 어떤 일정한 역할을 해내고 있다는 느낌과 연결지어볼 수 있는 지점이다. 그럼에도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도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고, 청년과 어린이 불자의 비율이나 출가자가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이런 현상들은 일단 한국불교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일 수 있고, 또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라야 적절한 대안 모색도 가능해질 것이다.

이제 한국불교의 미래를 말하자

불교는 일차적으로 종교이다. 그것도 제도를 중심으로 정착한 대표적인 제도종교의 하나이다. 종교의 제도화는 그 종교가 지속되기 위한 필연적 결과물이지만, 자칫 각 종교의 창시자들이 주창했던 기본 정신과 지향을 상실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전락할 수 있다. 가끔씩 절과 교회에서 붓다와 예수를 찾기 어렵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그런 위험의 현실화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모든 제도종교의 미래는 그 제도의 허점을 직시하는 데서 단초를 마련해가야만 한다. 한국불교의 미래 또한 마찬가지다.

수행승들이여, 세 가지 추구가 있다. 세 가지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추구, 존재에 대한 추구, 잘못된 견해에 입각한 청정한 삶에 대한 추구이다.

— 전재성 역주 《추구의 경》 《쌍윳따니까야》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의 일반적인 양상을 감각적 쾌락과 존재, 잘못된 견해에 입각한 청정한 삶을 추구하는 세 가지로 구분하는 붓다는 그것을 똑바로 알기 위한 네 가지 선정(禪定)을 제안한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벗어나 사유와 숙고를 갖추는 첫 번째 선정, 사유와 숙고를 넘어서서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추는 두 번째 선정, 평정하고 새김이 있어 행복하다고 표현하는 세 번째 선정, 그런 표현마저도 벗어나 온전히 청정한 네 번째 선정 등이 그 넷이다.

한국불교의 미래는 21세기 초반 한국인들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린 세 가지 맹목적인 추구를 직시하고 극복할 수 있는 네 가지 선정을 구체적으로 제안하는 청정성과 실천력의 회복에서 비로소 찾아질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한 첫걸음은 우리 불교계가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어야 하고, 다시 그것이 시민사회와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에 대한 분석과 관계 재설정으로 이어져야만 한다.

시민사회는 ‘촛불’을 계기로 외부의 법과 제도라는 틀 못지않게 윤리와 심미성이라는 내적 기반이 절실히 요청된다는 인식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강자에 의한 약자 억압의 일상화와 성폭력과 생명경시에 대한 무감각, 삶의 의미 상실의 전면화 등이 우리 시민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부끄럽고 치명적인 문제들이다. 이런 문제들은 이제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수준으로 다가오고 있고, 무언가 근본적인 대책 마련과 실천이 필요함을 누구나 느낄 수 있게 되었다.

한국불교의 미래는 이런 요청과 필요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과 수용에서 그 출발점을 마련해야 한다. 우리 불교의 구성원 자체가 시민이고, 더 나아가 불교에서 이런 정신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사회의 지배적 삶의 양상에 대한 비판적 인식의 틀을 제안하면서, 불교계 구성원들 스스로 대안이 될 수 있는 삶을 살아내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 대안적 삶은 세상의 거센 흐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감각적 쾌락과 고정된 존재 양태, 절대자나 유전자가 결정하는 삶 같은 치우친 견해를 극복할 수 있는 평정하고 아름다운 삶일 것이다. 자신과 타자를 구분하지 않으면서 현재의 무명(無明)을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고, 타인의 잘못과 범계(犯戒)를 보고 오만해지지 않으면서 자비와 정의의 눈길과 손길을 동시에 펼쳐 들 수 있는 시민이자 보살이 곧 한국불교의 미래 자체이다. 새로운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런 출가와 재가의 보살들이 우리 불교계의 중심에 설 수 있는 때가 곧 오리라는 기대를 함께 가져본다. 그런 미래는 당연히 과거나 현재의 시간들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2018년 3월

박병기(본지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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