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미술 현대화의 과제

불교는 인도 및 동아시아 전역에 걸쳐 물질문화(物質文化)의 꽃을 피웠고, 그 꽃은 바로 불교미술이다. 불교가 동아시아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불교미술은 기왕의 종교미술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하고 또 영향을 주기도 하면서, 외연도 넓어지고 양적으로도 더욱 풍성해졌다. 필자는 불자(佛子)로서 불교미술을 대할 때 ‘좋다’ ‘좋지 않다’를 판단하지 않는다. 불자로서 불교미술을 마주할 때는 부처님을 대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필자에게 불교미술은 감상이나 분별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미술사 연구자로서 바라볼 때는 견해가 조금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필자 역시 해당 불교미술의 제작 배경이나 특징은 무엇이며,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 발원자는 누구인지, 어디서 어떤 경로를 통해 영향받았는지 등에 대해 궁금증을 갖고 그 내력과 가치를 밝혀내려 애쓴다.

우리는 불교미술을 미술품으로 바라봐야 할지, 아니면 불교의 예배 대상으로 바라봐야 할지 고민에 부딪힐 수 있다. 물론 이런 고민할 필요 없이 그냥 각각의 역할에 맞춰 바라보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건 그렇지 않다. 각각의 역할에 따라 바라보는 방식이 다를 수는 있지만, 누가 뭐래도 불교미술의 원래 기능은 불교의 예배 대상이므로 종교적 기능을 떼어내 심미적 기능만을 두고 이야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불교미술이 지닌 종교적 기능을 성공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필수 불가결의 요소가 바로 심미적 기능이니,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결코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고 ‘불상의 종교적 기능을 극대화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법이 바로 심미적 기능’이라거나, ‘아름다운 불상만이 종교적 감흥을 일으킨다’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종교 예술품은 무엇보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종교적 심성을 불러일으키도록 해야 한다. 최고의 예술품은 아니어도 적어도 불교미술을 바라보는 예배자에게 종교적 심성이 생기도록 기본적인 심미적 기능을 충족시켜야만 종교 예술품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종교적 기능과 심미적 기능을 모두 갖춘 한국의 대표적인 불교미술을 추려 이야기해 보려 한다.

한국의 불교미술은 어떤 흐름으로 전개되었을까. 이 글은 삼국시대에 처음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온 이후 조선시대까지 대표적인 불교미술은 어떤 모습이었으며, 그 특징은 어떠하며, 어떻게 흘러갔는지 알아보려는 것이다. 삼국, 통일신라, 고려, 조선 등 각 시대 불교미술의 특색은 저마다 다르며, 같은 시대 안에서도 종류마다 또 다르다. 통상 불교미술 연구자들은 각 시대의 불교미술을 크게 네 가지 범주로 나누어 연구한다. 네 가지는 바로 불상, 불화, 불구(佛具), 건축이며, 불탑과 승탑은 건축에 포함하여 살핀다. 이 네 가지 구성은 불교미술에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어서 전 시대에 걸쳐 빠짐없이 조성됐다. 그러나 아쉽게도 시대에 따라 남아 있는 양상이 다르다. 이를테면 삼국시대는 불상과 석탑, 사리장엄구 등은 있지만, 종이나 천에 그려진 불화, 나무로 지은 건물은 사라지고 없다. 종이, 천, 나무 등은 다른 재질에 비해 상대적으로 오랜 시간을 버텨내기 어렵기도 하거니와 수많은 전란을 거치며 대부분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목조건물은 고려시대가 되어야 겨우 찾아볼 수 있다. 너무나 유명한 안동 봉정사 극락전(1366년 중수),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1376년)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조선, 그 가운데서도 특히 임진왜란 이후인 조선 후기가 되면 앞서 말한 네 가지 종류의 불교미술이 모두 골고루 남아 있다. 조선의 불교미술이 현존 불교미술의 80% 이상을 웃도니, 이 땅에 남아 있는 대부분의 불교미술은 조선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국시대부터 시대순으로 대표작을 엄선하여 그 특징을 간추려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경계 없는 삼국시대 불교미술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불교미술은 불상과 석탑이다. 아쉽게도 불교 신자들이 드나들었던 삼국시대 사찰은 모두 사라지고 절터만 남았다. 황룡사지, 미륵사지가 대표적이다. 이런 상황이니 당연히 삼국시대 건축은 탑을 제외하고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탑도 나무로 만든 목탑은 다 사라지고 돌을 재료로 한 석탑만 달랑 3기가 남았다. 바로 백제의 익산 미륵사지 석탑(639년경),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7세기), 신라의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634년경)이다.

삼국시대 불교미술 가운데 역시 남은 수량이 가장 많은 것은 불상이다. 삼국시대 불상은 작은 금동불부터 암벽 면에 새긴 마애불까지 매우 다양하지만, 대표작을 꼽으라면 서슴지 않고 금동반가사유보살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그림 1, 2). 반가사유상은 의자에 앉아 오른발을 왼 무릎 위에 올린 반가부좌 자세로 오른손가락을 뺨에 대고 사색에 잠긴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잘 알려진 대표작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사유의 방’을 차지하고 있는 2구다. 화려하게 장식된 관을 쓴 상(국보 제78호, 이하 ‘78호 반가상’)과 삼산(三山) 모양의 관을 쓴 상(국보 제83호, 이하 ‘83호 반가상’)이다. 2021년 11월 19일부터 문화재 지정 번호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지만, 이 글에서는 두 반가사유상을 구별하기 위해 편의상 옛 번호를 그대로 사용하여 부른다.

‘78호 반가상’과 ‘83호 반가상’은 한국의 불교조각 가운데 특별하다. 이 두 상을 제외하고는 삼국시대에 이 정도 크기로, 이만큼 완성도 높은 상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두 상의 재료가 동이라는 점은 더욱 놀랍다. ‘78호 반가상’은 구리 91.8%, 주석 6.4%, ‘83호 반가상’은 구리 94.9%, 주석 4.1%를 녹여 제작했는데, 내부는 모두 비어 있다. 이렇게 금동불인데 내부가 비도록 제작하는 방법을 중공식(中空式)이라고 하는데, 기술력이 매우 발달해야 가능하다. 이 두 상은 한국 고대 불교조각의 기념비적인 작품이지만, 아쉽게도 이 두 작품에 대한 어떤 문헌 정보도 남아 있지 않다.

이 두 상의 제작국은 어디일까? 우선 ‘83호 반가상’이 신라에서 제작되었음을 의심하는 연구자는 없다. 그러나’78호 반가상’은 여전히 연구자 간에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다. ‘78호 반가상’의 제작국은 백제 혹은 신라로 의견이 엇갈린다. 이 상에서 백제의 모습도, 신라의 모습도 모두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의 미술사 연구자는 삼국시대 불교미술을 살펴볼 때면 늘 고구려, 백제, 신라의 불교미술을 나누어 그 특징을 살피려 한다. 필자 역시 과거에는 그랬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같은 문화적 기반 위에 성립되었지만, 풍토에 따라 각각 다른 지역적인 양식을 보여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흔히 고구려 불교미술은 당당하고 강인하며, 백제는 세련되고 부드럽고 온화하며, 신라는 단순화, 추상성을 그 특징으로 꼽는다. 선택의 여지 없이 모든 학생이 배워야 하는 정규 교과과정의 교과서에도 고구려, 백제, 신라 불교미술의 양식 특징은 위와 유사하게 적혀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 불교미술에서는 각 나라가 얼마나 서로 다른 양식적 특징을 지녔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매우 한정된 자료만 남아 있는 삼국의 불교미술만으로는 그 답을 찾아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다. 6세기 후반 백제와 신라가 중국의 남조, 북조와 고르게 교류했던 것도, 또 삼국 간에도 교류가 빈번했던 것도 삼국시대 불교미술의 ‘경계’를 허무는 일에 적지 않게 이바지했다. 이런 이유로 과연 우리가 생각했던 것만큼 각 나라의 특징이 확연히 드러나는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삼국 간의 문화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때는 6세기이다. 황룡사 창건 가람의 기와 역시 백제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할 때 신라 진평왕이 여러 기술자인 백공(百工)을 보내 미륵사 건립을 돕도록 했으며, 신라에서는 황룡사 구층목탑을 건립할 때 백제의 장인 아비지(阿非知)를 초빙하여 200명의 소장(小匠)을 이끌고 작업을 주관하게 했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바로 이 시기에 삼국에서 이 두 반가사유상이 제작됐다. 그래서 ‘78호 반가상’의 제작국 추정은 더욱 어렵다. 반면 ‘83호 반가상’은 의심의 여지 없이 신라에서 제작했다고 여기며, 작품성도 단연 으뜸이다. ‘83호 반가상’을 신라 제작이라고 보는 이유는 바로 봉화 북지리 반가사유상(이하 ‘북지리 반가상’) 때문이다. ‘북지리 반가상’은 상반신은 깨져 없어지고 하반신만 남았는데, 하반신의 높이만도 175cm에 달하는 커다란 상이다. 상반신까지 잘 남아 있었다면 전체 높이는 3m가 넘었을 것이다. ‘북지리 반가상’은 봉화의 한 사찰에 본존상으로 봉안되었던 틀림없는 신라의 반가상이다. ‘83호 반가상’과 ‘북지리 반가상’이 매우 닮아서 ‘83호 반가상’이 신라에서 제작했다고 보는 것이다.

반가사유상이 한국 불교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특별하다. 600년을 전후한 시기에만 유행하다 사라졌으며, 또 3m에 달했을 거대한 석조반가사유상이 있는 데다가 이처럼 금동으로 만든 최고의 걸작 반가사유상이 있기 때문이다. 금동으로 상을 만드는 일은 절대 쉽지 않다. 특히 반가사유상처럼 손을 뺨에 대고 한쪽 다리를 올린 복잡한 자세의 상은 더욱 어렵다. 그런데도 ‘83호 반가상’은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한 조형을 갖추어서 석굴암 조각과 함께 신라미술의 정수를 보여 준다. 머리에는 세 개의 산이 연이은 모양의 관을 쓰고 있고, 머리 뒤쪽에는 광배를 꽂았던 촉이 남아 있다. 고요한 눈매에 입가의 온화한 미소가 특징이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상체에는 천의(天衣)를 걸치지 않고 두 줄의 간결한 목걸이만 표현되어 있다. 하체는 군(裙)이라고 부르는 치마를 두르고 있는데, 왼쪽 무릎 위에 올린 오른 다리 밑으로 흘러내리는 치맛주름이 풍성하게 묘사되어 있다. 왼발이 딛고 있는 연꽃 모양 발 받침은 없어졌는데, 신라의 것으로 본떠 새로 만든 것이다.

사실 6~7세기에 큰 크기의 금동상을 만드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금동불은 크기와 상관없이 밀랍을 이용해 상을 만든다. 금동불 제작의 필수품인 구리와 소량의 주석, 그리고 주조할 때 필요한 밀랍 역시 구하기가 쉽지 않다. 주석은 우리나라에서 구하기 어려워 대부분 중국으로부터 수입에 의존했을 가능성이 크다. 밀랍은 토종 벌집의 찌꺼기를 정제해 만든 천연 밀랍을 사용했는데, 천연 밀랍은 온도, 습도에 따라 쉽게 물러져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비용도 많이 들고 주조하기도 어려울뿐더러 금속불이다 보니 큰일이 나면 먼저 피해를 입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신라의 대형 금동상은 반가사유상, 백률사와 불국사의 금동불상을 제외하고는 1238년 몽골 전란으로 이 땅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600년 무렵 백제와 신라인이 눈을 돌린 ‘돌’이라는 재료는 경제적이면서도 내구성이 강해 오래도록 보존되었고, 금동불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남아 지금에 이른다. 이러한 장점은 ‘돌’이 삼국 불교미술에서 가장 선호하는 불상 재료로 자리 잡게 되는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돌’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탑도 마찬가지다. 한반도에 불교가 유입된 이후 600년 무렵까지 건립된 탑은 대부분 목탑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곧 나무의 취약점을 알게 되었고, 이를 대체할 재료로 선택한 것이 바로 ‘돌’이다. 돌 가운데도 전국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화강암에 눈을 돌려 석탑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탑을 조성하게 되었다. 바로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과 경주 분황사 석탑이다(그림 3). 우리나라 최초의 석불이나 마애불도 대략 이 무렵 시작됐다. 그 유명한 백제의 서산 용현리 마애삼존상이나 경주 남산의 장창골 석조미륵삼존상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황룡사와 같은 신라 왕경의 주요 사찰에는 구리와 약간의 주석을 섞어 주조한 5m 높이의 거대한 금동석가불입상이 이미 봉안돼 있었다. 그렇지만 7세기 신라인은 이와 별개로 경주 남산의 화강암으로 눈을 돌려 석불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남산은 길이가 남북 8km, 동서 4km에 달한다. 신라인은 그다지 크지 않은 남산의 곳곳에 불상과 탑을 조성해 두어 60여 개 계곡 가운데 21개 계곡에서 불상이나 탑을 만날 수 있다. 돌을 잘라 환조의 석불로 제작하여 적당한 장소에 봉안하기도 하고, 편편한 바위가 있는 곳에는 마애불을 새겨넣은 것이다.

 

국제적인 통일신라 불교미술

삼국시대에 축적된 기술력은 통일기 신라에 꽃을 피웠다. 뛰어난 기술력 위에 중국 당나라와 빈번한 교류로 국제성까지 갖추게 되었다. 682년 경주 감은사 동 · 서 삼층석탑(이하 ‘감은사 탑’)과 탑 안에서 발견된 사리기는 단연 으뜸이다. 감은사탑은 한국 최초의 쌍탑이다. 물론 3년 전인 679년에 경주 사천왕사에 나무로 지은 쌍탑이 최초의 예이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감은사탑은 높이 10미터의 웅장한 외형도 훌륭하지만, 탑에서 발견된 사리기는 한국을 대표한다. 동탑과 서탑의 2층 탑신에서 각각 1기씩 사리기가 발견됐는데, 사리외함의 네 면에 부착돼 있던 사천왕상은 당의 영향을 받아 잘록한 허리에 몸이 휘어진 삼곡(三曲) 자세가 특징이다. 몸에는 당의 갑옷인 명광개(明光鎧)를 걸쳤지만, 머리에 투구는 쓰지 않았다. 발아래는 사천왕상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생령(生靈)도 있다.

통일신라 불교미술 가운데 가장 ‘국제적’이라고 서슴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은 역시 석굴암의 조각이다(그림 4). 8세기 중 · 후반에 제작된 석굴암은 치밀한 구조, 40구에 달하는 조각 등 어느 것 하나 새롭지 않은 것이 없다. 한반도에서는 암석의 석질이 너무 단단해서 인도나 중국과 같은 장엄한 석굴의 구현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인도나 중국에서 석굴사원을 본 누군가가 신라에서 ‘석굴의 재현’이라는 아이디어를 제공하였을 것이다. 이를 위해 신라인들은 석굴을 뚫기보다 훨씬 더 어려운, 돌을 잘라 쌓아 올리는 인공석굴 조성 방법을 택하였다. 751년부터 공사 기간만 20여 년을 훌쩍 넘긴 점만 보아도 당시 공사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석굴암은 동아시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독특한 구조를 지녔다. 방형 평면의 전실(前室)과 짧은 복도, 그리고 원형 평면 위에 반구형 천장을 구축한 주실(主室)이 기본 구조이다. 이 가운데 가장 특별한 것은 원형 평면에 반구형 천장을 얹은 주실의 형태이다. 방형 평면은 흔하지만, 원형 평면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런 특별한 구조를 두고 외부 어디에선가 아이디어를 들여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같은 구조를 중국 석굴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찾을 수 없으므로 그 너머의 지역, 예컨대 인도나 아프가니스탄과 관련되었을 개연성이 높다고 본 것이다.

필자는 원형 평면위에 반구형 천장을 얹은 석굴암의 구조를 신라의 횡혈식석실분에서 찾는다. 횡혈식석실분의 천장 역시 석굴암과 마찬가지로 반구형 천장이기 때문이다. 설령 석굴암과 같은 석굴의 아이디어를 인도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얻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쌓을 수 있는 기술력이 없다면 석굴암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석굴암을 마치 봉분처럼 흙으로 덮어 횡혈식석실분과 외관이 크게 다르지 않게 보이도록 한 것도 어쩌면 신라 고분을 염두에 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석굴암의 구조는 신라 횡혈식석실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겠지만, 이를 인식하고 수용하여 만들어낸 결과물은 특별했다. 신라인은 횡혈식석실분을 축조했던 경험과 기술을 바탕으로 그토록 바랐던 불교 석굴을 재현하기에 이른 것이다. 다시 말해 불교 석굴이라는 아이디어는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었겠지만, 이미 구조가 익숙했고 기술력이 충분했기 때문에 독자적이고 종합적인 사고가 발휘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이는 신라 횡혈식석실분의 들여쌓기 천장의 경험, 첨성대를 비롯해 다보탑, 석가탑에 이르기까지 돌을 다뤘던 기술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독창성은 석굴암의 구조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석굴암 안에는 불, 보살, 불제자, 신중(神衆) 등 40구의 존상이 위계에 따라 배치되어 있다. 석굴암의 조각은 중국 당나라 성당기(盛唐期) 불교조각의 영향을 받았지만, 중국의 예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치밀하고 체계적이며 섬세하게 조각되었다. 특히 원형 주실의 정중앙에 놓인 본존불상은 화강암으로 만든 조각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정교하고 비례가 완벽하다. 중앙 본존불과 주위의 권속이 어우러져 자아내는 장엄함은 보는 이를 압도시키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석굴암의 조각은 세계 최고 수준의 국제적 걸작이라고 일컫기에 손색이 없다.

석굴암과 함께 조성된 불국사의 두 탑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다보탑은 석굴암과 축조 기술은 다르지만, 다보탑과 석굴암, 이 두 기념비적 건조물은 8세기 중엽 신라인들의 돌 다루는 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분명히 알려준다. 불국사는 10km나 떨어진 경주 남산의 돌을 치석해서 두 탑을 세웠다. 불국사의 두 탑, 석가탑과 다보탑은 8세기 중엽 탑 축조 당시의 명칭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붙여진 것이며, 원래 명칭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논란 중이다.

 

경덕왕(재위 742~765) 대 불교미술은 석굴암을 정점으로 절정에 달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또 다른 걸작은 역시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이다(그림 5). 경덕왕은 성덕왕을 위해 황동 12만 근을 희사하여 종을 주조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당시 불교미술을 만드는 기술은 뛰어났지만 경덕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고, 경덕왕의 아들인 혜공왕(재위 765~780) 7년, 즉 771년 12월 14일에 이르러서야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 이름 붙였다. 성덕대왕신종의 무게는 18.9톤가량이며, 높이 3.66m, 구경 2.27m에 달한다. 조성 후 봉덕사에 걸렸기 때문에 사찰 이름을 따라 ‘봉덕사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범종 가운데 가장 크고 아름다운 소리로 유명하다.

통일신라 하대인 경문왕(재위 861~875) 대는 불교미술이 제2의 전성기를 맞는다. 특히 비로자나불이 9세기 중엽부터 전국적으로 유행했다. 철불, 석불, 금동불 등 재료도 다양하다. 정확한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는 불상도 적잖다. 대표적으로 불상의 높이만 2.73m인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859년)을 비롯해 대구 동화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863년경),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865년), 봉화 축서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867년경), 그리고 최근에 국보가 된 합천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 2구(883년경)가 있다.

2015년 강원도 양양 선림원지에서 출토된 9세기 중엽의 금동보살입상도 빼놓을 수 없다(그림 6). 보살상의 높이가 38cm, 대좌 높이가 14cm가량이니, 광배를 제외한 높이만도 52cm인 커다란 크기의 금동보살입상이다. 광배까지 합하면 그 크기는 더욱 커진다. 지금까지 한국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통일기 신라(668~935) 금동보살입상이며, 정확한 출토지를 알 수 있는 발굴품으로는 최대 크기의 보살상이다. 크기도 크지만, 대좌와 광배도 잘 보존되어 있고 상의 도금도 그대로 있어 보살상의 가치가 매우 높다. 특히 조성 당시 먹으로 그린 수염이 그대로 남아 있고, 목걸이를 비롯한 각종 장식, 왼손에 쥔 정병까지 모두 별도로 제작하여 몸에 걸친 상태로 발견되어 학계를 놀라게 했다. 현재 한국에 남아 있는 금동불 가운데 원위치를 명확히 알고 있는 예가 별로 없다는 점, 조각 솜씨가 매우 뛰어난 점 등을 감안하면, 이 금동보살입상은 우리나라 불교조각사 연구에서 매우 귀중한 기념비적인 시각 자료이다.

 

전국으로 확산한 고려의 화려한 불교미술

통일신라 불교미술이 당시 왕경이었던 경주가 중심이었다면, 고려시대(918~1392) 불교미술은 전국으로 확산한다는 특징이 있다. 다만 당시 왕경이었던 개경의 불교미술이 남아 있지 않아 확인하기 어렵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래도 개경을 제외한 지역의 불교미술은 비교적 잘 남아 있어 전체적인 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 고려의 불교미술 역시 1170년 무신 집권의 시작을 기점으로 고려 전기(918~1170)와 고려 후기(1171~1391)로 나눈다.

고려 전기를 대표하는 불상은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사 경내에 서 있는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하 ‘관촉사 상’)이다. 이 보살입상은 968년에 시작해 1006년에 완성했다고 하니 조성하는 데 37년이나 걸렸다. 화강암을 쪼아 만들었으며, 높은 원통형 보관(寶冠) 위에 얹은 보개(寶蓋)를 포함해 전체 높이가 18.12m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 머리 위에 높이 솟은 원통형의 표면이 거친 것을 보면 지금은 사라졌지만, 원래는 금속 재질의 화려한 보관이 덧씌워져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 이 거대한 관촉사 상에 대해서는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 물론 관촉사 상을 조성했을 당시의 기록이 아니라 조선의 기록이지만 말이다. 하나는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이고, 다른 하나는 1743년에 관촉사에 세워진 〈관촉사 사적비〉이다. 이 두 기록을 통해 관촉사 상이 고려 광종(재위 949~975) 19년(968)에 혜명 스님이 왕명을 받아 조성하기 시작해 37년 만인 목종 9년(1006)에 완성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수도인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논산에 왜 광종은 이토록 거대한 상을 조성했을까? 연구자들은 이 보살상이 세워진 광종 대가 왕권 강화책, 호족 억압책이 활발히 진행되던 때임을 주목한다. 광종이 왕권을 강화하고 안정시키기 위해 후백제의 마지막 격전지인 이곳 논산에 거대한 크기, 머리 위의 독특한 방형 보개를 지닌 보살입상을 세웠을 것으로 추정한 것이다.

 

1085년에 세워진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智光國師塔, 이하 ‘지광국사탑’)을 빼놓을 수 없다. 국보 지광국사탑은 문종(文宗, 재위 1046~1083) 대에 왕사(王師)와 국사(國師)를 지냈던 해린(海麟, 984~1070)의 사리를 모신 승탑이다. 지광국사탑과 지광국사탑비는 지광국사가 입적한 지 15년 만인 1085년에 건립되었다. 지광국사탑은 대표적인 반환 문화재로, 1912년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같은 해에 다시 반환되는 등 우여곡절이 많은 탑이기도 하다. 지광국사탑은 2016년에 국립문화재연구원으로 옮겨져 대대적인 수술을 받고 112년 만에 원주 법천사지로 돌아왔지만, 법천사지의 원래 자리에 세울 것인지, 아니면 법천사지 옆의 유적전시관으로 이운할지는 아직 결정되지 못했다. 지광국사탑은 지광국사 해린의 승탑이지만 불탑의 형식을 지녔다는 점에서 특별하게 여긴다. 특히 탑의 몸돌에 조각된 사리 운송 장면은 다른 승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장면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승탑의 형태가 화려하고, 지광국사의 장례 비용을 당시 인근 조창인 원주창에서 부담하고 있는 점 등을 미루어 보면 고려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 후기에는 아미타 신앙이 크게 유행했다. 아미타 신앙이 유행하면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도 함께 유행했다. 고려 후기의 관음보살을 이야기하면서 고려 불화를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대략 170여 점의 고려 불화가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 현존하는 숫자도 가장 많고, 예술적으로도 가장 뛰어난 불화는 역시 수월관음도이다. 높이 4m가 넘는 일본 사가현 가라쓰(唐津) 가가미진자(鏡神社)가 소장하고 있는 〈수월관음도〉는 1310년에 그려졌다(그림 7). 또 1323년에 그려진 〈서구방 수월관음도〉는 서구방이라는 제작자의 이름을 알 수 있어 유명하다. 〈가가미진자 수월관음도〉보다는 크기가 작지만, 크기가 165.5×101.5cm이니 웬만한 사람 키만 하다.

통상 관음보살상은 온 세상의 중생을 구제하는 역할을 지녔지만, 수월관음은 이와 함께 수행자를 위한 지도자의 성격도 갖는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여행을 하던 선재 동자에게 수행의 지침을 알려주는 53명의 선지식(善知識)이 있었다. 이 가운데 28번째로 등장하는 보살이 바로 수월관음보살이다. 관련 내용은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찾을 수 있다. 〈입법계품〉은 깨달음의 여행을 떠난 선재 동자가 첫 번째 선지식인 문수보살에서 시작해 차례로 53명의 선지식을 방문하여 보살행에 대한 문답을 통해 공부한 후 마지막으로 보현보살에게서 진리를 깨닫는다는 내용이다. 관음보살이 《법화경》에서는 고통에 빠진 중생을 직접 구제해주는 역할로 등장한다면, 《화엄경》에서는 진리에 이를 수 있도록 조언해주는 인도자의 성격을 보여 준다. 또 《화엄경》 〈입법계품〉에는 관음보살이 인도 남쪽 해안의 보타락가산(補陀落迦山)에 살고 있다고 했다. 관음보살이 보타락가산에 머물고 있다는 내용은 《화엄경》 〈입법계품〉에만 언급되어 있다. 〈수월관음도〉의 기본 구성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 《화엄경》 〈입법계품〉을 따랐지만, 화면에 등장하는 버드나무 가지, 정병, 새, 대나무 등은 경전 내용에는 없다. 한편 고려 후기에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이국적인 불교미술이 등장하기 시작한다(그림 8).

잘록한 허리와 전신을 덮은 화려한 장신구만으로도 이 상들이 얼마나 이국적인지 바로 알아챌 수 있다. 이국적인 보살좌상은 국립춘천박물관, 호림박물관, 그리고 파리 기메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복부 위의 꽃을 중심으로 방사선으로 펼쳐진 화려한 장신구는 가부좌를 튼 양다리를 덮고도 남아 대좌 위까지 걸쳐졌다. 잘린 양 팔뚝 위에도 팔찌가 장식되어 있다. 양어깨에 숄처럼 걸쳐진 천의의 자락도 양팔과 함께 사라졌지만, 그 끝자락만은 연꽃 대좌 위에 남았다. 국립춘천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보살좌상은 강원도 회양군 장연리의 금강산에서 출토된 상인데, 기메박물관 상과 매우 닮았다. 크기도 같아 이 두 보살상은 원래 중앙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배치되도록 제작했으리라 짐작된다. 춘천박물관 상이 아미타불 왼쪽의 관음보살상이었을 테고, 기메박물관 상은 오른쪽의 대세지보살상일 것이다. 다행히 온전하게 남아 있는 춘천박물관 상을 통해 기메박물관 상의 원래 얼굴을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다.

이 두 보살상의 이국적인 모습은 어디서 왔으며, 언제 만들어졌을까? 고려 후기에는 원나라에서 유행한 티베트 보살상의 영향을 받아 이와 같은 이국적인 상이 새롭게 등장했다. 이 보살상이 출토된 금강산은 아미타 신앙의 중심지로서 많은 사찰이 존재했던 곳이며, 특히 고려 후기에는 원 황실이나 고려의 친원 인사들이 발원한 불상이 제작되어 봉안되던 곳이었다. 이 상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이 이국적인 보살상들은 고려가 티베트, 원의 국제 양식을 공유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이다.

 

원의 티베트 양식이 고려에 유입되었음을 알려주는 또 다른 사례로 경천사지십층석탑(이하 ‘경천사지탑’)이 있다. 13.5m의 아자형(亞字形)과 방형(方形)의 평면구조를 지닌 독특한 형식의 탑이다. 1층 탑신 이맛돌에 1348년 3월에 이 탑을 세웠으며, 그 목적은 “원나라 황실과 고려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 바람과 비가 순조롭고 국태민안과 불법이 날로 널리 퍼져 나아가 모든 중생이 불도를 이루기를 바란다”라고 적었다. 즉 고려 충목왕은 경천사에 탑을 세우면서 일체의 여래와 일체의 불교 법회를 고려 땅에 재현하기를 희망했고, 이를 통해 나라와 모든 중생이 불국토에 살기를 바랐다. 경천사지탑을 세운 지 119년 후인 1467년에는 서울 탑골공원에 재질, 크기, 모양이 쌍둥이처럼 닮은 원각사지십층석탑을 세웠다. 원각사지십층석탑은 한국 역사상 최후의 호불 군주인 세조(재위 1455~1468)가 즉위 10년을 맞이하여 경천사지탑을 모본으로 해 도성 중심부에 세운 탑이다.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불심의 발현, 조선시대 불교미술

억불정책이 조선의 전 기간에 걸쳐 지속되었지만, 조선 말기까지 불심은 꺾이지 않았다. 정치적 이념과는 별개로 정종(재위1398~ 1400), 문종(재위 1450~1452), 세조(재위 1455~1468)를 비롯해 효령대군(1396~1486), 안평대군(1418~1453) 등 왕실 인사들도 적극적으로 불교를 신봉했다. 왕도 그러하니, 왕실의 여성은 말할 것도 없었다. 왕실 여성은 물론이고 조선 여성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독실하게 불교를 믿었다. 규제가 제법 엄격했던 조선 초기에도 모든 왕비는 여전히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물론 그중에서도 더욱 독실한 왕비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태조비 신덕왕후(?~1396), 태종비 원경왕후(1365~1420), 세종비 소헌왕후(1395~1445) 등이 그러했으며, 왕의 후궁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왕후나 왕후의 어머니, 후궁, 대군의 처 등 왕실의 여성이 중심이 되어 각종 불사를 하니 처벌하기 곤란했고, 그러니 금령은 무시되기 일쑤였다. 조선의 불교미술 역시 선조가 승하한 1608년을 기준으로 조선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살펴본다. 조선 전기는 1392년부터 1608년까지, 조선 후기는 1609년부터 1900년까지이다.

조선 전기에 왕실 인사들이 발원한 불상이 적잖았겠지만, 아쉽게도 대부분이 소실되어 기록으로만 남아 있다. 기록으로만 남은 불상은 정종이 발원한 화장사 석가불상(1400년), 효령대군 발원 관악산 연주암의 약사미륵삼존상(1429년) 등이다. 실물로는 세조, 예종, 효령대군 등이 함께 발원한 1466년 경주 왕룡사원 목조아미타불좌상이 대표적이다.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불상을 꼽으라면 단연코 1458년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다(이하 ‘흑석사 상’ 그림 9). 1458년 의빈 권씨(1383?~1468)가 중심이 되어 명빈 김씨, 태종(재위 1400~1418)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 등 275명이 함께 흑석사 상을 조성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의빈 권씨는 태종의 후궁이었다. 본격적인 억불정책을 시행한 왕이 바로 태종이지만, 그의 후궁 의빈 권씨는 태종의 사망 후에 비구니가 되었다. 흑석사 상 조성 당시 의빈 권씨는 당시 나이가 75세였으며, 출가한 지는 햇수로 37년이 지난 때이다. 비구니 출가 후 많은 불사를 하고 싶었겠지만, 1419년 세종(재위 1418~1450) 즉위 후 시행된 강력한 억불정책으로 의빈 권씨는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다. 1450년 세종 승하 후 문종(재위 1450~1452)을 거쳐 세조가 즉위하고 4년 되던 해에 만든 불상이 바로 흑석사 상이다. 스스로 ‘호불(好佛)의 주(主)’라고 칭했던 세조의 시기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1458년 의빈 권씨가 중심이 되어 명빈 김씨,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 등 275명이 함께 흑석사 상을 조성했다. 상의 높이는 72cm로 크지 않지만,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우수한 불상이다. 흑석사 상은 당대 최고의 장인이 모두 힘을 모아 조성한 조선 전기 최고의 불상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나고 조선 후기에 이르러 폐허가 된 사찰을 재건하면서 수많은 불교미술이 사찰마다 조성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불교미술 가운데 대부분이 이 시기의 것이다. 석가모니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미륵불, 지장보살, 관음보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불교미술이 수천 점 남아 있다. 화승도 대략 1천여 명이 알려져 있으며, 유파만도 수십 개다. 불교조각만 놓고 보면 재질도 다양하다. 재료는 나무로 만든 상이 가장 많지만, 돌도 적지 않다. 특히 주목할 만한 재료는 17세기 중엽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불석(佛石, 혹은 沸石, Zeolite)이다. 알려진 불상 가운데 조각승 나흠(懶欽)이 만든 1648년 양산 통도사 약사전 석조약사여래좌상이 시기적으로 가장 이른 사례이다. 불석은 경주 동해 해변의 불석산에서 채석되는데 뽀얀 색을 띠는 데다가 조각하기도 쉬워 조각승들이 특별히 애호했다(그림 10). 잘 깨지는 단점도 있다. 이런 이유로 불석으로 만든 불상들은 예외 없이 양손을 몸에 붙이고 있다. 손은 돌출되어 있어 가장 먼저, 그리고 쉽게 깨지기 때문이다.

불석으로 만든 불상은 배로 이동하기 쉬운 지역에서 발견된다. 특히 배로 실어 나를 수 있는 해안선 부근의 사찰에 주로 봉안되었으며 경상북도, 경상남도는 물론이고 전라남도, 심지어 제주도에서도 발견된다. 불석으로 만든 불상을 어디서 조각했는지도 궁금증 가운데 하나이다. 방법은 두 가지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는 사찰에서 원석을 직접 구입한 후 조각승을 초빙하여 조각한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불석 산지에서 조각을 마친 후에 봉안 사찰로 이운하는 경우이다. 필자는 후자의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불석으로 불상을 제작하려면 불상 크기의 2배 정도의 원석이 있어야 제작할 수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10kg 불상이라면 20kg의 원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원석을 가지고 사찰에서 직접 제작하려면 2배 이상이 되는 무게의 돌을 운반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이런 이유로 가능한 한 손상되지 않도록 양손을 최대한 몸에 붙여 조각한 후 사찰로 이운하여 봉안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 흥미로운 재료인 불석은 조각승도 특별했다. 두 개 유파, 즉 현진파와 승호파가 큰 활약을 했다.

한국의 불교미술은 불교가 처음 공인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삼국시대 불교가 도입된 후 걸작 반가사유상을 제작했고, 통일기 신라에는 석굴암이라고 하는 동아시아 최고의 기념물을 탄생시켰다. 불교를 국교로 삼은 고려시대에는 남아 있는 불상의 수는 적지만 고려 불화만으로도 얼마나 화려했는지 충분히 입증하고도 남는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에도 왕실에서도 꾸준히 불교미술을 제작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 재건 과정에서 수많은 불상을 만들어내며 명맥을 잘 유지해 오늘에 이르렀다. ■

 

임영애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주대학교 교수를 거쳐 현재 동국대학교 문화재학과, 동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동국대 박물관 관장과 불교학술원 문화재연구소 소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을 맡고 있다. 《금강역사-간다라에서 신라로의 여정》 《서역불교조각사》 《교류로 본 한국 불교조각》 등 저서 다수와 100여 편의 국내외 논문을 발표했으며 석굴암에 대한 연구서를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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