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미술 현대화의 과제

1. 불교미술의 현대화 문제

삼국시대 이래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불교미술은 한반도의 대표적 조형 활동으로 시대를 이끌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현대사회에 들어 불교미술은 과거의 영광에만 머물러 있다는 느낌이다. 오늘의 불교미술에서 시대정신은 실종된 듯하다. 한마디로 찬란했던 불교미술의 전통은 오늘날 창조적으로 승계되지 않고 있다. 무엇 때문에 낙후된 모습조차 벗겨내지 못하고 있을까.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전통 불교미술을 공부하면서, 또 평단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는 입장에서 우리 불교미술의 미래를 염려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위와 같은 문제 제기에 대한 반응이 별무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문제점을 지적하고, 또 대안을 제시해도, 변화의 주체가 반응하지 않으면 별무효과이기 때문이다. 이에 다시 한번 각도를 달리하여 짧은 생각을 정리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창의성과 시대정신이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선 문제 제기의 하나로 불교미술이란 용어의 적합성부터 논의할 필요가 있다. 과거 불교미술의 전성기에는 굳이 조형 활동 앞에 불교라는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았다. 물론 ‘미술’이란 용어는 근대기의 산물이다. 여기서 문제 삼고 싶은 것은 주류로서의 조형 활동이다. 불교 운운의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았던 시대와 수식어가 필요한 시대와의 간극을 고려하게 한다. 전성기의 조형 활동은 그 자체가 불교적 산물이었다. 오늘날 전문화와 세분화 현상은 범주의 갈래를 더욱 분화시키면서 구체적 수식어를 필요하게 한다. 이제 불교미술은 여러 종교미술의 하나로 가치가 전도되었다. 그래서 경쟁 구도 안의 하나라는 처지를 방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전성기의 조형 활동보다 더 치열한 각오와 실천이 중요하다. 그러나 오늘의 불교계는 이와 같은 의식조차 제대로 서 있는지 의문이다.

일반적으로 종교미술은 봉안용, 교화용, 장엄용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크게 보아 신앙과 장엄의 역할이다. 불교미술은 무엇보다 종교성 즉 봉안용을 비롯해 사찰 장엄이나 불교적 생활 용구 등으로 다양하게 펼쳐져 왔다. 여기서 봉안용 미술이라는 특성을 무엇보다 고려하게 한다. 불상의 경우, 32상 80종호처럼 불교 도상학을 존중해야 한다. 불보살을 조성하면서 교리와 배치되게 조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상학에 의거한 조형물이기는 하지만 시대와 지역 혹은 공간에 따라 작가의 창의력은 발동하게 되고, 이는 시대 미감과 직결된다. 한마디로 8세기의 조형감각과 21세기의 조형감각은 다를 수밖에 없다. 21세기에 8세기의 조형물을 그대로 복제하는 행위는 창작활동과 무관하며, 오히려 시대 미감에 퇴행하는 행위다.

21세기 한국 불교미술, 특히 사찰의 시각 현실을 살펴보면 무엇보다 21세기 시대정신의 부재를 확인하게 한다. 전통사찰은 문화재보호법 등 관련법에 따라 임의대로 현상을 변경할 수 없겠지만, 새롭게 조성하는 그 많고도 많은 이른바 ‘불사(佛事)’ 현장의 경우, 미래를 담보하기는커녕 과거지향적 현실을 지적하게 한다. 사찰에서 시대 미감을 바탕으로 한 오늘의 조형 활동은 불가능한 것일까. 언제까지 과거에 매몰되어 과거 복제에만 급급해야 할까. 과거지향의 정체된 종교라 한다면 젊은 세대의 외면을 자초하는 것과 다름없다. 현재 한국 불교계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오늘의 시대정신’을 선도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신자 숫자의 감소만 걱정한다. 오늘의 젊은 세대는 종교에 관심 없다. 그들을 자극하고 유혹하는 요소는 도처에 넘치고 있다. 아무리 훌륭한 법문이라 해도 젊은 세대와 연결할 고리가 마땅치 않다. 붓다의 말씀을 외면하는 젊은 세대에게 그나마 관심을 갖게 하려면 ‘방편’을 활용해야 한다. 바로 예술이라는 그릇이다. 예술 그릇에 불법(佛法)을 담아 제공한다면 포교에도 커다란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런 포교의 실용성만을 위해서라도 오늘의 불교계는 환골탈태해야 한다고 본다. 새롭게 조성되는 사찰 환경은 현대적 감각에 맞는 시각 현실로 바꾸어야 한다. 여기서 미술이란 장르의 역할은 너무 크다.

 

2. 깨달음과 아름다움

불교미술을 통하여 우리는 최소 두 가지 개념을 얻을 수 있다. 바로 깨달음과 아름다움이다. 깨달음은 불교의 궁극적 가치인 해탈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깨달음의 세계에 대한 접근은 쉽지 않다. 그래서 많은 방편이 활용되기도 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미술이란 분야다. 미술의 가치로 아름다움을 들 수 있다. 아름다움이란 조형적 산물을 통하여 깨달음의 세계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필자는 오래전 한국 근현대 시기의 주요 불교미술 작품을 모아 특별전을 기획한 바 있다(2002). 그때 전시 제목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깨달음과 아름다움’이었다. 이 전시는 서울을 비롯해 전국을 순회하면서 현대판 불교미술의 새로운 경지를 안내하고자 했다. 전시 구성은 김복진의 불상 작품이나 정종여의 의곡사 괘불부터 현역 화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꾸몄다. 복제 중심의 전통적 장인의 산물은 고려하지 않고, 창작 중심 작가의 불교적 작품에 비중을 두었다. 의외로 불교 사상을 기본으로 하여 작업한 작가의 숫자는 많았다. 이들 작가의 작품을 통하여 두 가지의 열쇠말을 얻었다. 바로 깨달음과 아름다움이다.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갔지만, 지금 보아도 싱그러운 주제가 아닌가 한다. 깨달음과 아름다움. 불교미술이 지향해야 할 목표지점, 바로 깨달음과 아름다움이 아닌가.

필자는 장편 시집 《토함산 석굴암》을 출판한 바 있다(2015). 대한민국 조형물 가운데 최고봉의 하나로 토함산 석굴암을 꼽은 결과의 산물이었다. 석굴암은 문헌자료의 영세성 때문에 창건과 구조 등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8세기 통일신라의 대표적 조형물로 국제사회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필자는 석굴암은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문화 교류의 산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스 · 로마의 헬레니즘부터 간다라 문화, 중앙아시아 문화 그리고 중국 성당(盛唐) 시대의 문화 등이 종합적으로 모여 토함산에서 마무리된 결정판이라고 믿고 있다. 요즘 말로 국제 컨소시엄의 산물일 것이다. 인도 붓다가야 대탑의 정각상(正覺像)을 모델로 한 석굴암 본존상의 의의는 매우 크다. 하지만 토함산 석굴암은 귀족적이고 권위적인 분위기를 떨칠 수 없다. 토함산 석굴암과 비교하여 필자는 파주 용미리 석불의 의의를 비교한 바 있다. 민속적이고 서민적 인상 때문에 그렇다. 이 대목에서 불교 조형물의 다양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말여초의 선문구산 시대에 변방 지역의 철불 비로자나불상의 유행은 흥미롭다. 많고도 많은 불상을 통하여 대중은 자신의 눈높이에 맞는 신앙심을 챙겼다. 신앙의 다양성만큼 불상도 다양했을 것이다.

근래 박물관 전시로 대중적 인기를 모은 전시가 있다. 바로 ‘영월 창령사 터 오백나한’ 전시다(국립중앙박물관, 2019). 이 전시는 ‘당신의 마음을 닮은 얼굴’이라는 전시 부제처럼 우리 한국인의 진정한 얼굴 모습을 표현한 듯한 걸작 모음이다. 근래 관람한 그 많고도 많은 전시 가운데 필자를 가장 감동시켰던 전시의 하나였다. “깨달음이 그렇게도 아름다운 것인가. 오백나한이 오백 가지의 웃음으로 만고에 전한다. 고려 때 해탈의 염원을 담아서 거친 화강석으로 다듬은 나한의 얼굴이지만 그 웃음을 보는 순간에는 대리석으로 다듬은 비너스보다도 더 강한 빛을 본다.”(배기동 관장). 정말 그렇다. 깨달음의 아름다움을 듬뿍 담고 있는 창령사 터 석조 나한상들, 너무 감동적이다.

강원도 영월군 서면 신천리의 창령사 터에서 지난 2001년 발견된 오백나한상은 한국 불교조각의 역사를 다시 쓰게 했다. 본격 발굴 이후 국립춘천박물관으로 귀속된 관련 유물은 총 317점, 그 가운데 완형은 64점이었다. 높이 40cm 정도의 아담한 크기의 나한상. 여기의 나한상은 무엇보다 ‘이웃집의 착한 아저씨’ 같은 부담 없는 표정을 지니고 있다. 통일신라의 귀족적 취향의 불상과 비교하면 확실히 민간화된 소박한 솜씨다. 더불어 그들의 자세나 표정 또한 각기 다르다. 가사를 뒤집어쓴 나한이나, 거닐고 있거나 가부좌 튼 나한까지 실로 다양하다. 표정 역시 희비애락의 특성을 다 담아 다양하다. 기본적으로는 해맑은 얼굴, 꾸밈없는 표정이다. 정말 해탈에 이르면 이런 표정이 될까. 천진무구, 바로 그 자체다. 필자는 창령사 나한상을 통하여 창의성과 시대정신을 읽는다. 그렇기 때문에 21세기판 나한상을 원하는 것이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창령사 나한상을 통하여 깨달음과 아름다움을 얻을 수 있다면.

 

3. 불화의 그림자 표현 혹은 불교 미학

누군가 필자에게 질문했다. “왜 불화에는 그림자가 없는가?” 정말 불화에는 그림자 표현을 하지 않는다. 어떻게 열반의 세계에 음양이 있을 수 있을까. 양지가 있다면 음지도 있는 것. 그늘이 있다는 것은 아직 미명(迷明)의 세계라는 것. 어찌 불보살의 세계에 그림자가 있을 수 있을까. 깨달음의 세계에 그늘이 있다면 커다란 문제일 것이다.

서양화법에 명암법과 원근법이 있다. 그래서 과학적이라는 표현을 쓴다. 최소 동아시아 그림보다 서양 회화가 더 과학적이라면서 예찬하기도 한다. 과연 과학이라는 미명 속의 내용은 고정불변의 진리이기만 할까. 고구려 고분벽화를 원근법 입장에서 본다면 차라리 역원근법을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원근법은 고정 시점일 경우에 가능하다. 서 있는 자리에서 소실점을 향하여 가까운 곳은 크게 표현하고, 먼 곳은 작게 표현한다. 이는 고정 시점일 경우에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 전통 방식처럼 이동 시점일 경우는 다르다. 사물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기 때문에 원근법 같은 고정관념에 묶일 필요가 없다. 시점을 이동하면서 본질 표현에 비중을 둔다면 가까운 곳보다 오히려 뒷부분을 크게 표현할 수 있다. 이는 형식에 비중을 둘 것인가, 내용에 비중을 둘 것인가의 문제와 같다.

모든 불화의 표현은 주대종소법(主大從小法)을 지키고 있다. 여래나 보살은 화면 중앙에 위치하면서 크게 표현된다. 하지만 여래의 앞에 있다 해도, 그러니까 보는 이의 바로 앞에 위치해 있다 해도 권속은 작게 표현한다. 즉 주인공은 크게 그리고 그렇지 않은 권속은 작게 표현한다. 서양식 원근법과 달리 내용 중심으로 대소를 표현한다. 조선시대 기록화에서 신하보다 군왕을 더 크게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다. 이런 관점에서 원근법 문제를 살펴보면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수원 용주사에 단원 김홍도 작품 여부로 논란이 있는 불화가 있다. 여기에 명암법이 활용되어 약간의 입체감을 느낄 수 있다. 미술사학계는 용주사 불화를 두고 명암법 활용의 선진적 작품이라고 칭송하기도 한다. 물론 제작 시기 문제로 논란도 있었지만,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사항은 돌출성이다. 왜 용주사 불화 이후의 불화에서 같은 명암법 활용 사례가 보이지 않을까. 용주사 같은 명암법이 새로운 표현기법으로 각광받았다면 분명히 그와 유사한 작품들이 계속 생산되었을 것이다. 용주사 이후의 불화에 명암법을 차용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교리와 부딪히기 때문일 것이다. 불보살의 세계에 명암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일반인은 불화를 보면서 명암법 문제를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림자 유무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관습은 무서운 것이어서 당연히 그런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왜 불화에 그림자가 없는가.

불화와 그림자 표현 관계는 결국 불교 미학과도 연결된다. 불화에서 그림자 문제를 학문적으로 풀이할 수 있다면, 그래서 아름다움과 깨달음의 세계를 체계적으로 규명할 수 있다면, 바로 불교 미학의 역할이 부상된다. 하지만 이 부분을 결론부터 말한다면, 한국에서 불교 미학은 정립되어 있지 않다. 아니, 불교 미학에 관심을 두고 있는 학자조차 보기 어렵다. 그래서 오늘의 불교 예술계를 더욱 건조하게 하고 있다. 사실 한국 전통문화의 과반수는 불교문화가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국보, 보물로 지정된 다양한 문화재의 분포만 보더라도 불교문화의 비중을 주목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현실을 학문적으로 규명해 줄 불교 미학의 부재는 매우 안타깝다. 현재 대학에 미학과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한국 미학계를 보면 대부분 서양 미학 위주이고, 동양 미학이라 해봐야 중국 미학이 한 부분을 겨우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한국 미학’조차 찾기 어려운 현실에서 어떻게 불교 미학까지 요구할 수 있겠는가.

일본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의 존재는 참고 대상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불교학의 대가로 알려진 스즈키 다이세쓰(鈴木大拙)와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뒤에 야나기는 자신의 민예론이나 공예미학에 불교 사상을 접목할 수 있었다. 하기야 야나기는 일본이 세계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일본미술과 불교 사상이라고 주장한 바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런지 야나기는 두 분야를 적절하게 활용하여 자신의 이론적 토대로 삼았다. 특히 불교 미학 분야에서 그랬다.

미에 대한 불교적 정의는 1911년에 출간된 니시다의 역작 《선에 대한 연구》에서 더 발전했다. 이 책을 통해 그는 메이지 이래 일본 최초의 독창적이고 관념적인 철학자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 책은 진선미의 바탕이 되는 ‘순수경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순수경험’은 주체와 객체, 또는 감정과 논리가 명확하게 분리되기 전의 상태에서 순식간에 발생하는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경험이다. 불교 특히 선종은 이원론을 피하기 위해 이러한 태도를 취한다. 니시다는 이후 1923년에 쓴 〈예술과 도덕〉이라는 글에서 진선미는 예술과 도덕이 만나는 정신의 최고점 상태, 즉 ‘무아’ 상태에 놓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야나기의 ‘불교 미학’은 니시다만큼이나 스즈키에게 빚지고 있는데, 직접적인 영향은 스즈키에게 더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야나기가 자신의 ‘불교 미학’을 전개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였는데, 스즈키는 이미 1911년 정토종에 대한 첫 연구로 〈자력과 타력〉이라는 논문을 썼으며, 1943년에 《묘코닌: 종교 경험의 사실》, 1944년에 《일본적 영성》, 그리고 1948년에 《묘코닌(妙好人)》을 출간한다. 불교에 대한 스즈키의 사상과 해석이 없었다면 불교와 민예론의 통합을 꾀한 야나기의 시도는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야나기의 ‘불교 미학’은 공예의 세계에 스즈키와 니시다의 사상을 차용한 것이며, 불교의 핵심 용어로 그들의 사상을 발전시킨 것이다. 즉 직관(直觀), 즉(卽, 어떤 것에 합치되는 것을 뜻하는 관계), 불이(不二, 둘이 아닌), 미추미분(美醜未分, 미와 추의 이원성에서 해방), 자력도(自力道, 자력의 길, 자기 의존), 타력도(他力道, 타력의 길, 외부의 힘 또는 은총에 의존)와 같은 용어가 그 사례인데, 세 사람 모두가 이러한 용어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야나기는 무명, 무심, 불이, 타력과 같은 용어를 활용하여 자신의 민예론을 완성했다. 이 용어들은 모두 선불교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야나기는 조선시대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불이(不二)의 미’라고 주장했다. 진실된 아름다움, 거기에서 천진함과 순수함의 개념을 찾은 야나기식 백자 예찬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야나기는 “진정한 미는 미와 추의 구분이 없는 영역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미와 추의 구분 없음. 이는 불화에 그림자가 없는 이유와 견줄 수 있는 논리이기도 하다.

 

4. 창의성 관련 몇 가지 사례

현대 불교미술에서 가장 비중 있게 요구되는 사안은 바로 창의성이다. 과거 복제의 관행에서 우리 시대의 예술을 탄생시키려면 무엇보다 창의력을 존중해야 한다. 창작 중심의 예술, 이 얼마나 고귀한가. 창의성이라는 개념을 염두에 두고 몇몇 사찰에서 새롭게 시도한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강화 전등사 무설전의 경우

강화도 전등사는 고찰로서 관련 법규 때문에 경내에서 그야말로 삽질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는 가람이다. 여기에 대규모의 실내 공간이 절실했으나 새로운 전각을 건립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언덕비탈을 석굴처럼 파 넓은 공간을 만들었다. 불상을 봉안했지만 각종 행사를 개최할 수 있는 일종의 다목적 홀이다. 전등사의 장윤 회주 스님은 새로운 감각에 의한 건축을 추진했다. 그래서 미술대학 교수진으로 구성된 무설전 기획단을 가동했다. 이와 같은 거룩한 불사에 필자는 기획 담당으로 동참했다. 불상은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의 작가 김영원 교수, 불화는 동국대 오원배 교수, 천정의 연등 등 인테리어는 홍익대 이정교 교수가 맡았다. 우리는 수십 차례의 회합을 통하여 현대적 감각을 부여한 무설전 건설에 힘을 모았다. 전통성을 존중하면서 새로운 감각의 시도는 쉽지 않았다. 그러니까 불교 도상학을 존중하면서 새로운 감각을 불어넣기 어려운 작업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우리 시대 현대적 불사의 하나로 주목받고 있다. 전등사는 매년 가을 사고(史庫)에서 현대미술 전시를 개최한다. 종교와 무관한 글자 그대로의 현대미술 전시, 게다가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중요작가 중심으로 전시를 기획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시 개최뿐만 아니라 사찰에서 작품을 구입하여 소장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전등사는 국내 유일의 현대미술 컬렉션을 자랑하는 사찰로 부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여세는 사찰의 현대미술관 건립도 꿈꾸게 한다. 만약 현대미술관이 문을 연다면 젊은 세대에게 주목받는 명소로 부각할 것이다. 이와 같은 예술 그릇 즉 미술관은 포교에도 커다란 역할을 할 것이다.

 

남원 실상사의 창작 후불탱화

남원 실상사는 도법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선문구산의 하나로 역사적 가람이다. 실상사는 근래 현대미술가를 초대하여 다양한 ‘불사’를 이루었다. 실내외에서 현대미술 전시를 개최하는 지리산 프로젝트는 의미 깊은 행사다. 실상사는 이미 안상수 교수의 솜씨로 만든 ‘생명평화무늬’로 주목을 끌었다. ‘지금 여기 나의 참모습’에 대한 그림 곧 인드라망 무늬이기 때문이다. 약사전의 경우, 후불탱화를 이호신 화가의 창작으로 대신하는 파격을 보였다. 실상사가 위치한 지리산 풍경을 배경으로 하여 다양한 이야기가 곁들여진 내용의 현대 작품이다. 전통사찰에서 현대 작가의 창작품으로 후불탱화를 대신한 경우는 없을 것이다. 이는 새로운 시대를 예비하는 사찰의 혜안에 따른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도법 스님의 역할을 주목하게 된다.

 

붓다의 삶에 대한 신화적 기술은 신화가 지배하던 시절 불교가 널리 퍼지게 하는 데 기여했겠지만, 역으로 우리를 인간 붓다의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였습니다. 붓다를 범접할 수 없는 초월적 존재로 인식하게 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마치 소를 타고 소를 찾아 헤매듯이 지금 당장 붓다로 살기 위해 전력투구하기보다는 아득히 먼 훗날 도달하게 될 높은 경지의 붓다가 되기 위해 오늘을 소모하게 만들었습니다. (……) 오늘날 한국불교가 안고 있는 모순과 혼란 역시 신비화된 붓다와 깨달음, 불교와 수행에 대한 비중도적인 이해와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 적지 않습니다. 불교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지금 여기 현재의 삶에서 고통을 여의고 완전한 자유와 평화를 얻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 내 삶의 표본이 되고 이상이 되고 실현 가능한 목표가 되도록 하려면 깨달음으로 살았던 인간 붓다의 삶, 그 가운데서도 깨달음의 실천인 중도의 팔정도행으로 일관한 인간 붓다를 주목해야 합니다.

 

붓다로 살기. 이보다 더 훌륭한 말이 어디에 있겠는가. 실상사의 조형 활동 선도는 도법 스님의 철학과 맞물린다. 하기야 스님은 지리산 예술 둘레길 프로젝트로 선진적 사례를 남긴 바 있다. 지리산에 위치한 각종 종교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문화예술 활동을 지원하고 이끌었다. 필자도 자문위원으로 이 모임에 몇 차례 참석한 바 있는데, 회의 분위기가 너무 화목하여 놀라게 했다. 아마 대한민국에서 각종 종교 지도자들끼리 진정한 의미의 이웃처럼 평화를 누리는 유일한 지역 같아 보였다. 가톨릭 계통의 성심원에서 현대미술 전시를 개최하는가 하면, 작가를 위한 레지던시 프로그램도 운영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실상사는 경내를 미술전시장으로 삼아 다양한 현대미술품을 선보였다. 획기적인 사례의 하나로 기록될 만하다.

 

성파 종정 스님의 예술 불사

대한불교조계종의 성파 종정 스님은 독특한 위상을 지닌 독보적 존재다. 스님은 출가사문이면서 한국 전통 미술의 재료와 기법에 대한 연구와 실행으로 일가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지필묵 문화의 기본으로 전통 종이 만들기부터 사경과 산수화 그리기, 천연염색 보급과 전통 도자 기법에 의한 16만 대장경 불사, 최근의 옻칠 채색화 제작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채롭다. 필자는 2016년 한국문화예술진흥위원회 예술자료원의 구술사 프로젝트의 하나로 스님의 예술적 일대기를 정리한 바 있다. 당시 총설로 집필한 〈전통미술문화의 재료와 기법〉은 졸저 《한국미술론》(2017)에 재수록였다. 구술사 작업은 많은 이들로부터 감탄사를 이끄는 역할을 했다. 근래 스님은 대담집 《일하며 공부하며, 공부하며 일하며》(2023)를 출판한바, 이 책을 통하여 스님의 전통문화에 대한 신념을 육성으로 확인할 수 있다. 스님은 팔만대장경의 목판을 도판으로 제작하면서, 도자기를 통한 수행의 한 방편으로 활용했음을 알려주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법문은 울림이 크다.

도자기를 하면서 알게 된 것은 있어요. 흙이라도 도자기 만드는 흙은 굉장히 미세해요. 이게 말려놓으면 완전히 미세먼지라. 한량없는 숫자지. 이 한량없는 숫자를 낱낱이 하면 한량이 없고, 이걸 하나로 뭉치면 되는 거라. 하나가 많은 숫자로, 많은 숫자가 하나로 되는 거라. 이게 모으면 묘용(妙用)이라. 어떻게 이 많은 먼지 개체를 하나로 묶느냐. 이게 묘(妙)거든, 묘용이라고도 하고. 그것이 이제 물이라. 물에 넣어서 반죽을 하면 그 한량없이 많은 작은 가루들이 한 덩어리가 되는 거라. 이게 말하자면 화두라. 먼지처럼 한량없는 번뇌 망상을 화두 하나로 직결시켜 버리는 거라. 하나만 깨트려버리면 다 되는 거라. (……) 도자기가 된 것도 초벌구이가 있고, 재벌구이가 있거든요. 그중에 초벌구이한 것은 놔두면 도로 흙으로 돌아가. 그런데 재벌구이한 것은 흙으로 돌아가지 않아요. 그래서 나는 이걸 이토위옥(以土爲玉)이라 하지. 흙으로 옥을 만든다. 도자기는 옥이라 하는 거라. 굽기 전에는 흙인데. 일단 도자기가 완성되고 나면, 흙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금강불괴(金剛不壞)라. 무너트려지지 않는다는 말이라.

 

도자기 작업을 통하여 얻은 깨달음, 흙으로 옥을 만든다는 말씀이 인상적이다. 정말 일하며 공부하는 면모를 보여준다.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안내가 아닌가 한다. 스님은 근래 채색 옻칠 작업을 통하여 새로운 시도를 다양하게 하고 있다. 옻칠 작업은 우리 민족의 채색문화를 재인식하게 하면서, 재료학적 차원에서 신경지를 개척하는 시도이다. 흥미로운 점 하나. 조계종에서 예술가 기질의 스님을 종정으로 옹립했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불교의 변화를 실감하게 하는 위업이기도 하다. 예술적 포교를 주장하는 필자의 입장으로 이보다 획기적인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 종정 스님의 예술적 포교는 사회적으로 울림이 매우 클 것으로 믿어진다. 이는 예술 불사(佛事)라는 차원에서도 주목을 요한다.

 

5. 현대 불교미술의 진로 문제

현대 불교미술의 창작 주체는 결국 작가다. 창의력 있고, 게다가 독창적인 시대 미감까지 담보할 수 있는 유능한 작가의 활동은 그만큼 불교미술의 입지를 확장시킬 것이다. 이에 불교 사상을 기반에 두고 창작활동을 하는 미술가의 존재는 매우 소중하다. 물론 조계종 총무원 같은 기구에서 예술 지원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지원과 무관하게 불교적 세계관을 자신의 창작으로 연결시킨 몇 작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전통 채색화를 새롭게 시도하여 일가를 이룬 박생광, 그리고 까치 화가로 이름난 장욱진의 경우는 흥미롭다. 이들 작가의 활동은 불교미술의 진로 문제를 헤아리는 데 하나의 척도 역할을 할 것이다.

 

박생광 채색화의 새 경지

한국 현대회화사에서 박생광의 위상은 매우 독특하다. 그는 나이 70대에 이르러 전통 채색화를 기본으로 하여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노년에 이르면 젊은 시절 자신이 쌓은 ‘브랜드’를 단순 재생산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것도 화사하고 장식적인 화풍으로 인생의 말미를 정리한다. 하지만 박생광은 평생 갈고 닦은 화업을 종합적으로 귀결시켜 채색화의 새로운 세계를 개척했다. 이는 1970년대 이래 이른바 단색화 계열의 현대화 운동이 극성을 부리던 시기에 시작되었기에 각별한 의의가 있기도 하다. 박생광은 오방색 기저로 짙은 원색을 활용했다. 사실 한국 회화사의 주류는 채색화였다. 하지만 회화사 전공자들은 수묵 문인화 중심으로 회화사를 기술하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채색화의 비중이 약화된 감이 없지 않다. 물론 채색 전통에서 일제 강점이라는 식민지 시대의 상처를 간과할 수 없다. 해방 이후 채색 그림은 일본화 잔재라고 질시의 대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천경자의 경우처럼 채색 작품을 두고 일본화 혹은 서양화 같다는 비판도 없지 않았다. 박생광은 자신의 작품과 일본화의 연관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일본화를 잘 몰라서 그래요. 색채만 있으면 일본화로 생각하는데 그건 그렇지 않아요. 일본화의 특징은 골격 없는 부드러운 선, 도서민적인 나약성에 있지요. 안개 같다고나 할까. 그림이 생리적으로 약한 게 흠이지요.”

 

박생광은 일본화의 특징으로 골격 없는 부드러운 선과 나약성을 들었다. 한마디로 약한 게 흠이라고 생각했다. 이 말을 거꾸로 해석하면, 박생광 예술의 특징으로 삼을 수 있다. 즉 골격 있는 강한 선이다. 나약성보다 강렬함이 박생광 그림의 특징이다. 원색 구사 즉 청색과 적색 등을 과감하게 활용하면서, 박생광은 골격 즉 백색으로 윤곽선을 넣었다. 여기서 백색은 색채의 중화작용을 하면서 작품의 깊이를 더하는 역할을 한다. 박생광의 선은 강한 힘의 산물이다. 자세히 보면 손가락 길이로 짧게 잘라 선을 그어 힘을 주었다. 언뜻 보면 한 번에 내리그은 것 같지만 끊어서 짧게 짧게 이은 선이다. 이는 수묵 기법과 다른 채색의 효과를 살리기 위해서다. 채색은 반복되는 중첩의 붓질에서 깊이를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생광은 민족적 소재를 즐겨 그렸다. 전봉준이나 명성황후를 소재로 한 근대 역사를 비롯한 전통적 분위기 등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불교 소재의 새로운 해석은 특별하다. 화가는 청담 대종사와 동향의 동창생이었고, 그런 인연을 바탕으로 청담 초상화 대작을 여러 점 남기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급으로 토함산 석굴암을 소재로 한 작품을 주목할 수 있다. 그 외 인도 여행 이후 인도를 소재로 한 작품도 많다. 불교미술 전통의 새로운 접근은 박생광 예술의 특징이기도 하다. 홍윤식 교수는 박생광의 불교 영향을 정리하면서 무엇보다 선화(禪畵) 같은 선종 미술의 요소를 주목했다. 즉 속박에서 자유를 지향하는 선화의 특징으로 예배 대상이 아닌 감상으로의 전환, 추상화할 정도의 대담한 생략 기법, 피안이기보다 차안(此岸)의 미 추구, 불균제의 미, 남성적 의지 등. 설득력 문제는 별개로 친다면, 위와 같은 불교적 관점의 분석은 흥미롭다.

2023년 9월 서울 코엑스에서 개최한 한국국제아트페어(KIAF)의 특별전으로, 필자는 〈박래현과 박생광〉 전시를 기획했다(관련 논고는 도록 참조). 국제 행사에서 한국 채색화의 정수를 선보이고자 한 의도에서 마련한 특별전이었다. 이 전시를 관람한 국내외의 많은 관객은 ‘이색 체험’을 했다면서 놀라워했다. 그동안 국제무대에서 단색화가 어느 정도 주목을 받았으나, 이제 한국 채색화가 국제무대에서 경쟁력 있는 분야라고 믿게 했다. 아무튼 박생광 작품은 현대 불교미술의 미래를 가늠하게 하는 훌륭한 사례라고 여겨진다. 문제는 전통의 창조적 계승과 독창성 그리고 시대정신의 조화다. 세속 말로 구슬이 서 말이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제 구슬을 체계적이고도 창의적으로 꿰는 작업이 절실한 작금의 상황이다.

 

장욱진의 불교 소재 작품

국립현대미술관은 덕수궁관에서 장욱진 회고전 〈가장 진지한 고백〉(2023, 9)을 개최했다. 국민적 인기 화가 장욱진의 예술세계 전모를 한자리에 모은 대규모 전시였다. 장욱진 작품은 이른바 ‘손바닥 그림’ 즉 작은 규모의 작품을 특징으로 한다. 그것도 아동화처럼 보이면서 순진무구의 세계를 연상하게도 한다. 화가는 ‘심플’이라는 용어를 하나의 화두처럼 즐겨 되새겼다. 단순미는 장욱진 회화의 특징이다. 화가는 이런 고백을 했다.

 

“그림은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툭툭 튀어나온다. 마음속으로부터……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이 밝은 거울이나 맑은 바다처럼 순수하게 비어 있어야 한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잡다한 얼룩과 찌꺼기들이 많다. 기쁨, 슬픔, 욕심, 집념들이 엉켜서 열병처럼 끓고 있다. 그것을 하나하나 지워간다. 다 지워 내고 나면 조그만 마음만 남는다. 어린이의 그것처럼 조그만…… 이런 텅 비워진 마음에는 모든 사물이 순수하게 비친다. 그런 마음이 돼야 붓을 든다.”(1979)

 

화가의 말이 아니라 마치 선승의 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비운 마음, 그리하여 사물이 순수하게 보일 때 비로소 붓을 든다는 고백. 장욱진 예술의 특징이 이 말 속에 다 담긴 것 같다. 이번 회고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장욱진 예술의 바탕에 불교적 세계관이 있다. 하기야 화가는 젊었을 때 예산 수덕사에서 살아 본 경험도 있고, 게다가 부인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부인을 모델로 한 〈진진묘(眞眞妙)〉(1970)는 단순 명쾌한 필치로 마치 불상처럼 핵심만 표현한 작품이다. 화가는 이 소품을 일주일간 식음 전폐하고 그렸을 정도로 혼신의 열정을 다했다. 물론 장욱진은 〈팔상도〉 같은 본격 불교 소재 작품을 그렸고, 또 만년에 이르러 선화(禪畵) 같은 먹 그림도 상당수 그렸다.

장욱진의 법명은 통도사 경봉 스님에게 받은 비공(非空)이다. 화가 자신의 수필집 《강가의 아틀리에》(2017)에서 흥미로운 일화를 소개했다.

 

스님이 나를 보고 “뭘 하느냐?”고 물어서, “난 까치를 잘 그립니다.” 하고 대답했다. 스님은 “쾌하다”고 했다. 그리고 손수 나의 법명을 지어 주시었다.“장비공 거사. 깍깍, 나도 없고 남도 없는 상태,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부처의 모습을 본다(張非空 居士 鵲鵲 無我無人觀自在 非空非色見如來) (……) 무아무인관자재나 비공비색견여래는 나에게 과분한 듯하여 그렇게 되기를 구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구하는 길은 그림에서일 것이다.

 

장욱진을 일러 ’까치 화가‘라고 부른다. 장욱진은 까치를 즐겨 그렸고, 오죽하면 경봉 스님께서 무슨 일 하느냐라는 질문에 까치를 잘 그린다고 대답했을까. 거의 선문답 같은 대화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장욱진은 불교적 세계관을 기초로 하여 작업을 한 특이한 경우의 현대화가다. 그의 불교적 작품은 목판화 선집 《선(禪) 아님이 있는가》(국립현대미술관 문화재단 발행, 2023)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75년 김철순의 제안에 따라 장욱진이 출판용으로 제작한 현대판 선화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화가는 50여 점의 밑그림을 그렸고, 그 가운데 25점을 판각했다. 이 화집은 장욱진의 예술세계 혹은 불교적 인생관의 핵심이 간결한 필치로 요약되었다고 볼 수 있다. 덕수궁관의 장욱진 회고전은 이런 의미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강대철의 장흥 조각토굴

강대철 조각가는 주요 공모전에서 대상을 차지하는 등 활발한 창작활동을 펼쳤었다. 그의 사실주의적 조각 기법은 특출하여 대중적 관심을 이끌었다. 게다가 그는 성철 스님의 동상을 여러 점 제작하는 등 불교적 작품에도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런 작가가 1980년대 말 명상의 세계에 진입하더니, 2002년 개인전을 마지막으로 미술계는 물론 세속으로부터 자취를 감추었다. 2005년 전남 장흥 사자산 기슭에서 수행하던 그는 특이한 토질을 만나 ‘토굴 작업’을 시작했다. 강대철의 ‘장흥 조각토굴’은 이렇게 하여 탄생하게 되었다. 작가는 매일같이 7년 동안 토굴 작업을 했다. 일곱 개의 굴 길이만 해도 100미터가 넘었다. 이 토굴에 강대철은 다양한 환조 작품과 부조 작품을 다채롭게 ‘창작’했다. 정말 신기한 조형적 산물이었다.

 

첫 번째 굴을 파기 시작하면서 전체 홀에 대해 주제를 정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굴 작업이 두 평 남짓한 공간으로 확보됐을 때, 이 작업을 나라는 존재에 대한 정체성을 정리하는 계기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오온(五蘊)을 주제로 삼기로 했습니다. 현재의 ‘나’라고 의식되고 있는 물질적인 육체와 의식은 어떤 경계에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외부로부터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촉수의 역할을 하는 나의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는 왜곡되어 있습니다. 이미 어떤 가치관이나 기준이 형성되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여지는 정보를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저 깊은 무의식에 연결되어 있는 내 정보의 바탕들은 이미 온갖 분별심의 에너지로 뒤엉켜 있습니다. 그렇기에 내 삶은 분별로 인해 항상 분주하고 안정돼 있지를 못합니다. 이 내용을 굴을 들어서면서 마주 보이는 벽에 형상화하기로 했습니다. 위에서 여섯 가닥의 굵은 뿌리의 형상이 아래로 뻗어 내려오면서 여섯 갈래의 덩어리로 뒤엉킨 채 뭉쳐 있는 모양은 왜곡돼 있는 나의 육근(六根)을 표현한 것입니다. 굴을 들어서면서 오른쪽 입구 위에 해골을 새겨 넣었고 왼쪽 입구에는 뇌의 형상을 조각했습니다. 그 조각상 위로 잔뿌리들이 뒤엉켜 연결된 모습은 나(我)라는 현상계의 육체가 컴퓨터의 하드웨어 같은 존재로서 그 뿌리는 근원적으로 아뢰야식에 접속되어 있음을 상징했습니다. 뇌의 형상은 의식을 관장하는 메커니즘을 상징합니다. 위쪽 천정이라 할 수 있는 부분엔 연화 문양에 머물러 있는 의식도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에 닿아 있음을 소망 삼아 표현해 새겼습니다.

 

이런 식으로 강대철은 각각의 굴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독창적 공간을 만들었다. 작가는 공부 삼아 판 토굴이기 때문에 일반 공개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필자는 그동안 몇 차례 현장을 답사하면서 ‘예술 그릇’의 감동을 체험하기도 했다. 언젠가 이 토굴을 공개한다면 장흥의 명품 관광지로 부상될 것이다. 문제는 수행을 목적으로 한 조형적 산물의 새로운 탄생이라는 점이다. 기왕에 보기 어려웠던 새로운 시도, 그것도 금전과 명예와 무관하게 단순히 수행 목적으로 조성한 거대한 불사, 우리 시대의 창작 불교 미술품으로도 각광받을 것이다.

 

불교미술대전의 현주소

대한불교조계종은 〈대한민국 불교미술대전〉을 개최하고 있다. 이 공모전은 ‘오늘 불교미술의 현주소’를 알려주는 하나의 척도이기도 하다. 최근 제32회 전시를 열었지만, 죄송스럽게도 전시 내용의 진부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오늘의 시대 미감과 무관하고, 게다가 창의성과 거리가 먼 출품작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세기가 넘는 전시의 역사가 있으면서 무엇 때문에 시대와 동행할 수 없는가. 토함산 석굴암은 8세기의 조형물로 그 시대를 대표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를 대표할 불교미술은 무엇인가. 공모전은 창의력을 기본으로 한 미술 전시다. 초보자나 문화재 전승 목적의 경우, 과거의 작품을 복제할 수 있다. 하지만 대중 상대의 전시에 출품할 경우는 당연히 창작품 중심으로 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미술품을 만들어야 한다. 과거 복제는 복제일 따름이다. 이 대목에서 창의력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게 된다. 현대는 아이디어의 시대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

불교미술계의 반면교사로 이른바 민화 붐에 편승한 민화 동네를 들 수 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전반에 집중적으로 유행한 ‘민화’는 취미생활로 각광받으면서 전국적으로 수십만 명이 동참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문화 현상 가운데 가장 뜨거운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취미생활로 시작하다 일부는 전시 활동을 한다. 문제는 출품작 대부분이 과거 작품의 복제라는 점이다. 타인의 작품을 그대로 베껴 전시장에서 발표하는 행위는 표절이고 저작권 위반에 해당한다. 미술계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표절행위를 반복하고 있는 동네가 이른바 민화 동네다. 물론 민화라는 용어에 대한 문제 제기조차 해결책을 마련하지 않고 있어 안타깝기도 하다. 민화라는 용어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명명한 것으로 무명화가의 막 그린 그림이라는 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민화의 특색은 형식적으로 채색화이고 내용적으로 행복 추구 즉 길상이다. 그래서 민화라는 용어 대신 채색 길상화라고 할 수 있다. 불화나 민화는 다 채색화 계열이다. 현대 채색문화의 정립을 위해서는 획기적인 의식 전환이 요구되는 때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전시 활동은 창의력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왕 조계종 총무원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마디 더 제안하고자 한다. 예술계의 인재 발굴과 창작을 위한 지원 제도의 활성화 방안이다. 앞서 언급한 ‘예술 그릇 포교론’을 위해서도 절실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조계종 산하에 불교예술진흥원 같은 기구를 설립하면 얼마나 좋을까. 여기서 매년 역량 있는 예술가들을 선정하여 창작기금을 지원한다면, 그것도 오랜 세월의 성과가 쌓이게 된다면, 국내외에서 불교의 이미지는 사뭇 달라질 것이다. 한류의 시대가 아닌가. 만약 불교 사상을 기본으로 한 국제적 예술작품이 탄생한다면 한국불교의 위상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예컨대 영화 〈기생충〉이나 〈미나리〉 같은 이야기의 바탕에 불교가 있었다면, 그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한마디로 한류이건 아니건, 예술이라는 장르의 활용을 주장하는 것이다.

 

6. 미술 활동과 방편 그리고 그 너머

진짜 모습은 형체가 없고 법신(法身)은 무상(無相)하니 형체로는 불(佛)을 구할 수가 없다. 그러함에도 고해(苦海)의 미혹한 윤리와 번뇌의 고통에서 괴로워하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형상을 만드는 의식을 행하고 있다.

 

법신은 형체가 없으나 고해의 중생들을 위해 형상을 만든다는 것. 이 문장은 경북 상주 남장사 관음선원의 관음보살좌상(1701) 발원문이다. 하기야 깨달음의 길에 무슨 형상이 필요한가. 그래서 그랬을까. 인도의 초기불교 시대에는 불상을 만들지 않았다. 이른바 무불상 시대를 일컫는 것으로 거의 500년의 전통을 지켰다. 그 사이 신앙의 대상은 불탑이었다. 석가모니 열반 이후 500년 뒤 간다라 지역 등 기원전 1세기 무렵 불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불탑보다 불상이 신앙의 중심으로 부상되는 새로운 시대를 펼친 것이다. 하지만 남장사 발원문처럼 깨달음의 세계에 무슨 형상이 필요한가. 다만 고해에서 헤매는 중생을 위하여 하나의 방편을 쓸 따름이다. 이는 불교미술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던져 준다. 하기야 《금강경》에도 형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가.

불가에서의 파격은 신선한 경우가 많다. 깨달음의 길로 가는 길에서 고정관념의 혁파는 매우 소중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졸시 〈고수(高手)-불모(佛母)〉를 소개하고자 한다.

 

깨달은 이의 모습/ 깨달음의 근처도 가보지 않은 석공이/ 어떻게 불상을 만들 수 있겠는가// 불모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버리면서/ 불상을 깨 부신 분/ 드디어 자기 자신을 깨 부셨구나

 

깨닫지 않은 석공이 어떻게 깨달은 이의 모습을 만들 수 있겠는가. 위의 ‘고수’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결국 불교미술은 하나의 방편일 수 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의 세계로 가는 길목에서 하나의 안내원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 또한 보람찬 일이지 않을까. 결국 관점의 차이,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좀 거창할지 모르지만 이런 시각에서 생각해 보면 어떨까.

 

우주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얼마나 젊은 생물종인가를 깨달으면서 나 역시 약간의 안도감을 느낀다. 우리 종의 정확한 나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전문가들은 대부분 약 20만 년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학자들은 그 기간의 절반 정도라고 말한다. 아무튼, 지구 나이 45억 년이라는 상대적인 기간에 비하면, 우주론적인 관점에서 이것은 눈 한 번 깜빡하는 사이이다. 우리가 얼마나 젊은 생물종인지를 보다 잘 알아보기 위해, 이들 숫자를 길이로 바꿔보자. 45억 년이라는 크기를 사람의 키(180센티라고 하자)로 바꾸기로 하자. 이럴 경우, 20만 년은 대략 머리카락 한 올의 지름에 해당하는 크기가 될 것이다. 문자언어의 나이 6,000년은 머리카락 지름의 30분의 1에 해당하는 크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우리 인류가 아직도 앞으로 많은 진화를 하고, 현대의 과학과 기술이 그 속도를 높이는 데 도움을 주기를 희망한다. 생물종으로서 진화의 속도와 방향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인간의 호전적인 성향과 환경 파괴 때문에 위태로운 시점에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만약 우리가 사랑과 지식을 다시 연결하지 않고, 자비와 공(空)이 현실의 두 가지 보석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인류는 생물종으로서 운명이 다할 것이다.

 

자비와 공이라는 두 가지의 보석. 이것의 소중함을 재인식하면서 오늘 불교미술의 진로를 염려한다. 문제는 상상력, 더 구체적으로는 독창적인 작가의 출현이다. 작가의 존재 이유는 창의력이다. 거기다 시대정신과 동행하는 작가의 역할은 창조적 삶에 기여도가 클 것이다. 물론 유능한 작가의 출현도 중요하지만 그런 작가가 활동할 무대를 제공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사찰이 현대 예술의 진원지로 부각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신라의 원효가 그리워진다. 그는 무애(無碍)의 노래와 춤을 만들어 발표했다.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퍼포먼스의 대가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사상가 원효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수록된 원효 전기의 제목은 ‘원효불기(元曉不羈)’다. 여기서 ‘불기’는 굴레가 없다 혹은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원효의 생애를 압축한 표현이다. 그러니까 원효가 지은 무애의 노래와 춤과도 상통한다. 이제 현대 불교미술에서 원효 같은 거장이 나오기를 기원할 따름이다.

예술이라는 그릇에 담은 불교, 그런 시대의 새벽, 불교예술의 새로운 경지는 언제 열릴 것인가. ■

 

윤범모
미술평론가. 동국대학교, 동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문학박사). 뉴욕대 대학원 예술행정학과 수학. 사우스 플로리다대학교 연구교수, 가천대학교 미술대 교수 역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미술평론가 등단.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회장, 국립현대미술관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미술과 함께, 사회와 함께》 《오대산 통신-아하! 절에 불상이 없네》 《화가 나혜석》 《한국미술에 삼가 고함》 등 다수. 현재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명예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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