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미술 현대화의 과제

-  사찰 조형물 현대화의 현장

절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들

절에는 왜 가는 것일까. 절이 하는 기능은 무엇일까. 자문자답할 때가 있다. ‘절하는 집.’ 절은 ‘절하는 집이다’라는 소박한 답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절이 품고 있는 기능은 절하는 집 외에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승려가 불상을 모시고 불도(佛道)를 닦으며 교법을 펴는 집이라는 사전 설명이 명쾌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고개를 젓게 하는 것이 오늘의 절이다. 세상이 복잡하니 절도 단순할 수가 없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절에서 찾고 싶어 하는 것을 주어야 한다.

21세기에 한국의 절은 전환기를 맞았다. 절에 사는 사람이나 절을 찾는 사람이나 모두 새 방향을 찾고 있다. 이 시대가 절에 요구하는 성격과 기능이 복잡기묘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신앙의 힘이 약화되고 관광지로서의 매력이 강화된 것을 그 한 특징으로 들 수 있겠다. 말하자면 절하러 절을 찾기보다는 놀러 절을 찾는 이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지난 5월부터 사찰 문화재 관람료가 없어지면서 절 입장객이 증가 추세인 것이 그 한 방증이다.

사찰은 현재 문화재청이 관리하는 전통 문화유산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대한불교조계종이 어림한 바에 따르면 현 대한민국 문화유산의 70%가 불교 유적이다. 그래서 문화재청 1년 예산의 70%는 사찰에 줘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만약, 지난 세월 한반도에 남아 있는 절집을 스님들이 지키지 않았다면 다 허물어지고 사라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문화유산을 양으로 환산하고, 돈으로 지키겠다는 생각은 구태의연하다.

201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이란 이름으로 7개 사찰이 등재됐을 때 그 등재 이유는 명확했다.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형과 무형의 문화적 전통을 지속하고 있는 살아 있는 불교 유산이다.” 이제 이 유형과 무형의 문화적 전통, 그 어제를 담아 내일에 전해야 하는 소임이 오늘 사찰을 지키고 있는 이들의 어깨를 무겁게 누른다.

최근 절집에 새롭게 등장한 변화의 바람 하나가 현대미술과의 접합이다. 사찰 조형물이 현대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 몇몇 현장에서 문화유산의 전통은 전해서 통해야 하는 것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실상사 ‘지리산 프로젝트’

‘가을, 실상사는 미술관이 됩니다’라는 표어에 혹해서 서울 강변역 동서울터미널로 달려갔다. 지난 9월 22일 오전 10시 30분, 시외버스로 출발해 오후 3시 개막식에 맞춰 간신히 도착했다. 운전기사님에게 “실상사 앞에서 내려주세요.” 부탁했는데도 깜빡하신 탓에 한참을 거슬러 가을 길을 걸어 올라갔다.

일주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눈을 사로잡는 미술품이 줄을 선다. 걷다 보면 만나는 미술 작품들이 그대로 마음을 사로잡는다. 실상사를 찾는 이들이 “언제부턴가 실상사에 문화유산 말고도 볼 것이 많아졌어요.”라고 말하는 까닭을 금방 알 수 있다. 실상사 곳곳에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예술작품이 켜켜이 빛과 바람을 품으면서 절을 찾는 이들에게 저마다의 의미를 담고 다가온다.

실상사 ‘지리산 프로젝트’는 10년 전인 2013년 6월 씨를 뿌렸다. 온 세상에 가득한 부처님의 크신 공덕을 어떻게 찬탄할까 고민하던 몇 사람이 내린 결론은 이러하였다. “문화예술은 세상 모든 존재가 나의 부처님임을 찬탄하는 아름다운 불사입니다.”

그리하여 ‘실상사 우주 예술집’을 가꾸는 실상사 문화 불사(文化 佛事)가 탄생했다.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상임대표인 도법 스님과 그 주변에 모여든 예술인들이 손을 맞잡이 일궈낸 생명평화의 길, 구도의 모습이다. 특히 예술이 가진 성찰의 힘이 그 자체로 또 하나의 법문이라는 도법 스님의 뜻이 중심이 됐다. 사찰은 불교 신자들에게는 신행의 공간이지만 나아가 모든 사람에게는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전통문화를 배우고 현대의 삶을 치유하는 열린 문화공간이라는 생각이다. 갈수록 더 살기 힘들어져 가는 세상에서 지치고 병든 사람들이 치유의 힘을 회복하도록 하는 일, 즉 문화 불사야말로 대승적 실천이자 보살행이라는 것이다.

지난 3년여, 코로나19 등 여러 사정으로 띄엄띄엄 몇 가지 작은 퍼포먼스 진행으로 이어가던 ‘지리산 프로젝트’는 올해부터 다시 본 궤도를 찾았다. ‘지리산 프로젝트 2023’의 주제는 ‘정의도 빛나고 평화도 빛나라’였다. 김준기(광주시립미술관장) 예술감독은 올 주제를 선정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주제를 통해 한국 근현대 역사가 만들어낸 이분법적인 진영 대립 구도를 극복하고자 하는 예술적 시도들에 집중해보고자 합니다. 이는 동시대 사회와 예술의 최전방에 위치한 ‘정의’와 ‘평화’를 다루고자 함이며 정의, 즉 법(Dharma)의 추구는 곧 평화의 실천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실천의 과정으로서 지리산의 생명평화 사상과 결합한 다양한 예술 형식을 새로이 모색하고자 하며, 전시 기간 중 ‘정의와 평화’를 주제로 학술 세미나를 개최하여 이 두 개념에 대한 심층적 토론을 이어 나갈 것입니다.”

절집 마당과 공양간, 선재집 내부 곳곳에 설치된 미술품은 실상사를 찾은 이들에게 저마다 정의와 평화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지리산 실상사 감로도-우리는 평화를 원하는가〉를 그린 이영실 작가는 동학의 발원지인 경주의 흙과 실상사가 있는 지리산의 흙을 더해 21세기 감로도를 완성했다. 김화순 작가는 걸개그림 형식을 빌린 〈불어라, 생명평화의 바람〉을 내놨다.

이날 문화 불사를 빛낸 것은 산내마을 아이들과 주민으로 구성된 합창단이 부른 〈천년의 품속에서〉 공연이었다. “내가 언제까지 살지 모르지만/ 우리 함께한 날들은 빛났지/ 천년을 지켜온 넓은 품에서/ 내가 잠시 쉬었다 간다네.”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맑고 투명한 목소리, 어른들의 투박하고 둥근 목청이 어우러진 노래는 푸른 가을 하늘로 높이 울려 퍼졌다. 그 음악 속에서 그림들을 돌아보자니 문득 강상중 도쿄대 명예교수가 쓴 글이 떠올랐다.

시대와 마음의 병을 어떻게 치유할까, 길을 찾아온 나에게 그림은 살아갈 힘을 주는 일종의 빛이었다. 제 자신을 한없이 녹아내리게 만들었던 형언할 수 없는 감동, 그것이야말로 미로 속에서 방향감각을 잃은 인간에게 마지막 남은 비장의 카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 왜냐하면 제아무리 뛰어난 성능의 컴퓨터라 하더라도, (……) 감동만큼은 절대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생성형 AI의 시대, 챗봇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이 시대에 사찰 조형물이 주는 감동이야말로 절이 존재해야 하는 새로운 명분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관과 박물관과는 다른 그 무엇이 절에는 이미 켜켜이 쌓여 있으므로.

 

무각사 ‘로터스 아트 스페이스 기획전’

전남 광주 무각사는 최근 들어 이 지역을 여행하는 이들 사이에 ‘문화유산 맛집’으로 이름났다.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사찰 건축 형식, 도심 속 고즈넉한 산책 휴식 공간 조성, 1년 내 미술품을 감상할 수 있는 갤러리 운영 등으로 입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눈썰미 좋은 이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는 사진만으로도 꼭 한번 가보고 싶은 핫 플레이스로 손꼽힌다.

무각사는 1980년대까지 수십만 전역 군인들이 법문을 듣고 신행 활동을 하던 군(軍) 법당이었다. 상무대가 전남 장성으로 이전하면서 상무지구는 광주의 새로운 중심지로 발전했고, 1997년 무각사도 시민들이 즐겨 찾는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1972년 창건돼 콘크리트가 노화된 건물 상태로는 도심 포교당으로 제구실을 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러 중창 계획이 세워졌다.

새 마스터플랜의 핵심은 예향 광주와 호남의 전통문화를 향유하는 중심지였다. 격년으로 열리는 광주비엔날레와 디자인비엔날레, 여기에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더해져 광주는 아시아에서 손꼽는 현대 예술의 국제 거점이 되었다. 이에 따라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문화예술인들이 속속 광주를 찾고 있으나 그들이 한국의 전통문화를 즐기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크게 부족했다. 이런 수요를 감안해 무각사는 기존의 사랑채와 로터스갤러리(Lotus Gallery) 개축에 더해 국제문화교류관을 신축함으로써 지역 요구에 부응했다.

 

무각사에서 가장 파격으로 다가오는 공간은 일주문을 들어서면 오른편에 있는 로터스 아트 스페이스(LOTUS ART SPACE)다. 2010년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방혜자 작가 초대전으로 문을 연 로터스갤러리는 2018년 지하창고를 개조해 한층 쾌적한 전시관으로 재개관하면서 한국 문화계에서는 드문 결단을 내렸다. 이 전시장을 한 작가에게 1년 내 맡기는 것이다.

이런 특별한 안목을 지닌 결정권자가 청학 주지 스님이다. 갤러리 한쪽 벽면을 널찍한 통창으로 설계해 갤러리 안으로 이끼 정원과 대나무 숲을 끌어들인 미감이 돋보인다. 비 오는 날, 창밖에서 춤을 추는 대나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쾌해진다니 더 말해 무엇 하리.

이 공간의 가치를 더 끌어올리고 있는 것은 올해 처음 열두 달 전시를 끌어가고 있는 화가다. 무여(無如) 문봉선 씨는 ‘올해의 작가’로 선정된 뒤 1부 수(水)를 시작으로 목단(牧丹), 연(蓮), 죽(竹), 난(蘭) · 석(石), 송(松)을 주제 삼아 수묵화의 먹 향 짙은 세계를 사철 선보였다.

청학 스님은 문봉선 작가의 수묵화에서 불자의 수행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을 발견해서 그를 첫 작가로 점지했다고 한다. 마지막 전시로 소나무 수묵화를 내놓은 작가의 변은 이러하다.

“나는 지난 30여 년간 우리 산천에 묵묵히 뿌리박고 서 있는 소나무를 관찰하고 그려왔습니다. 어쩌면 우리 소나무야말로 우리나라의 풍토와 기후가 만들어낸 비대칭, 비정형, 비상식, 그리고 겸손, 인내, 당당함 등을 두루 겸비한 진정한 목신(木神)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화가가 소나무 한 그루를 그렸다는 것이 결국 차 한 잔을 마시거나 한 끼의 밥을 먹는 일처럼 다반사의 일로 넘길 수도 있겠지만, 자신만의 화법을 개창하여 새로운 송백(松柏)의 정신을 시대의 팍팍한 마음 밭에 심을 수만 있다면 이것 또한 더없이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닐까 위안해 봅니다.”

무각사는 또 ‘광주비엔날레 국제 큐레이터 코스’를 진행해서 조형물의 외형뿐 아니라 내면의 이론을 다지는 행사도 기획해 외국 미술계에서도 주목받았다. 불교적 정신, 만남과 인연, 명상, 치유 등을 주제로 관람객을 맞이하는 프로그램을 수시로 개발해 수행과 예불 공간을 다각도로 활용하는 묘를 보여주고 있다. 국내외 사찰 관계자들과 문화 전문가들에게 무각사가 광주에서 꼭 들러야 할 답사 필수 코스로 자리 잡은 배경에는 이런 노력들이 있다.

 

전등사 ‘가람 불사’와 창작단

강화도 전등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절로 유명하다.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에 창건됐다고 전해지니 1,600여 년의 역사가 서린 고찰이다. 그 무게 덕일까. 전등사에 들어서면 이리저리 들어앉은 절집 자체가 현대 미술품 뺨치는 조형미를 자랑한다.

이 사찰에 2012년 새로운 공간이 문을 열었다. 무설전과 갤러리 ‘서운’이다. 미술에 애정이 두터운 장윤 회주 스님이 평소 교류하던 한국 미술계 전문가들과 머리를 맞대고 마련한 현대 미술의 요람이다. 일종의 복합문화공간인 무설전에서는 예술과 불교가 만나 새 꽃을 피운다. 올해로 개관 11년 차를 맞아 이 분야의 선두 개척자로서 전등사의 자랑이 되고 있다.

이 문화 불사를 원만히 이루어낸 중심에 창작단이 있다. 정영목 서울대 서양화과 명예교수, 윤범모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등이 기획자로 나서 해마다 한국 현대 화단의 대표 작가 10명씩을 초대해 전등사를 위한 신작을 제작했다. 그 명단만 훑어봐도 이 창작단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강경구 · 곽남신 · 김용철 · 김태호 · 민정기 · 박병춘 · 서용선 · 오원배 · 윤동천 · 이만익 · 정종미 · 황인기 · 황주리 씨 등이 참여해 2023년까지 모두 268점의 전등사 컬렉션을 구성했다.

불상 조성을 맡은 조각가는 김영원 씨다. 서울 광화문 세종대왕상의 작가로 이름난 김 씨는 무설전의 주불인 석가모니불과 협시불, 천불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내놓았다. 그는 기존 법당에 모신 석가모니불과 그 장식이 단청과 개금으로 너무 무거워지는 것을 경계해, 무설전의 불상을 모두 백불(白佛)로 했다. 젊은 방문객들이 밝고 경쾌한 느낌을 받도록 조율한 것이다. 기획을 맡은 윤범모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전등사 창작단의 정신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한마디로 21세기 새로운 불교미술의 출발입니다. 시대정신을 담은 사찰 불사의 시작이랄까요. 일본 절에 가보면 시대 변천을 느낄 수 있는 다양하고 많은 양의 불교 미술품이 보관돼 있습니다. 일본 절이 우리와 성격이 다르기는 합니다만 행사가 열릴 때마다 새로운 조형물을 만들어 일종의 업그레이드를 하는 전통이 부러운 적이 많습니다. 우리도 시대변화에 발맞춘 경쾌하고 힘 있는 가람 불사가 많이 나와야 합니다. 그 조형물이 또 몇십 년 지나면 문화유산이 되는 것이지요.”

 

정선군 정암사 연례 ‘회화전’

강원특별자치도 정선군 정암사는 적멸보궁으로 유명하다. 정암사 옆 계류 지역에 열목어가 서식해 천연기념물 지정도 받았다. 그만큼 빼어난 역사성과 자연환경을 자랑한다. 여기에 수마노탑이 2020년 6월 25일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되면서 문화유산을 활용해 지역발전에 한몫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정선 함백산 역사 · 문화 · 예술마을’ 계획의 구심점으로 나서는가 하면, 미래 자산으로서 ‘에코 뮤지엄’을 조성하는 밑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올해 3회째를 맞은 ‘2023년 정선 정암사 회화전’은 이런 큰 틀 아래서 진행되는 대표 행사다. 수마노탑 국보 승격이 계기가 돼 해마다 정암사 현지 워크숍을 곁들여 젊은 미술인을 초대하고 있다. 2021년 ‘시공의 인연을 보다’, 2022년 ‘자연과 사람의 기억’에 이어 올해는 ‘정암사,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주제로 서울과 정선을 잇는 순회전시를 열었다.

천웅 주지 스님은 굳이 절에서 회화전을 여는 까닭을 이렇게 설명했다. “수마노탑이 표상하는 자장율사의 세계관과 그것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배경인 정선의 자연, 그리고 사람들의 삶을 대중에게 익숙한 회화의 양식을 빌려 표현해보고 싶었습니다.”

이런 기획 의도는 3년이라는 짧은 시간 속에서도 알찬 결실을 맺고 있다. 회화전이 입소문이 나면서 단순한 전시 행사가 아니라 사찰과 지역의 원형을 탐구하는 과정이면서 지역의 아이콘을 생산하는 공정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또 정선군민에게는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고 있다.

수마노탑 국보 승격 때부터 든든한 지원을 해온 최승준 정선 군수는 “이 회화전을 밑거름 삼아 앞으로 정선군의 문화예술 가치 확산과 향토 문화 창달을 위한 노력이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정선군이 더욱 고무된 일은 올해 부처님오신날 봉축등으로 수마노탑이 선정돼 서울 광화문 광장에 설치되면서 그 아름다움이 널리 선전돼서다.

사찰이 현대미술과 관련을 맺으면서 얻을 수 있는 부수 효과를 잘 보여주는 곳이 정암사다. 수마노탑이 원동력이 되어 3년여 초대된 40여 명의 젊은 미술가들이 지속해서 절과 관련을 맺으며 새 응원군이 된 까닭이다. 전국 각 지방자치단체는 최근 들어 과소 인구, 저출생, 노령화의 세 가지 난제를 안고 고심하고 있다. 이를 타개할 대안 동력 중 하나가 바로 문화유산이다. 지역에 사는 ‘생활 인구’가 줄어든다면 문화유산을 찾아 그 지역을 자주 방문하고 사람들과 연을 맺는 ‘관계 인구’를 늘리는 방안이 좋은 대책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수마노탑과 해마다 열리는 회화전은 관계 인구 다변화에 이미 효과를 내기 시작했다.

올해 전시 초대작가인 김지은 씨(추계예술대학원, 동양화)는 관계인구의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정암사에는 각자의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이 사계절 찾아옵니다. 그 이야기가 함축된 시간을 간직하는 장소여서 더욱 고민하며 색을 칠했습니다. 자유를 추구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지키는 사람이 많아지고 그들의 다양한 시선으로 빛나는 세상을 그려봅니다.”

 

성파 종정이 꾸려온 전통문화 복원과 향유

이제까지 다룬 불교미술 현대화는 절집 중심이었다. 하지만 한 개인이 사찰 하나가 일군 것 이상으로 이 분야에서 새 길을 낸 예가 있다. 조계종 종정 성파 대종사가 그 주인공이다. 성파 종정은 21세기 사찰이 나아가야 할 새 방향을 실천하는 데 파격이면서 혜안을 보여준 인물로 꼽힌다.

성파 스님은 한국 현대 불교사에서 상당히 이색적인 캐릭터를 보여준 학승(學僧)이자 예술승(藝術僧)이라 할 수 있다. 한국 불교미술사에 면면히 내려오는 화승(畵僧)과 조각승(彫刻僧)의 전통을 뛰어넘는 자유분방함이 성파 종정이 개척한 예술 세계다. 전통과 토착을 기초로 하지만 그 예술이 뻗어나가는 길은 전위적이면서 경계를 뛰어넘는다. 종정 스스로 밝혔듯이 그는 전통문화를 살려내 온 국민이 알고 향유할 수 있도록 제공하고 싶은 욕심이 큰 대적(大賊)이다.

“신화장구지(新花長舊枝)”는 성파 스님이 즐겨 인용하는 문구다. 그는 이 한마디를 내걸고 사찰이 우리 민족 정신문화의 구심점이 돼야 한다면서 몸소 자기를 굽고 그림을 그렸다. 신화장구지는 ‘새 꽃은 묵은 가지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우리 민족이 창조하고 지켜온 문화유산의 뜻을 압축하고 있다. 현재는 늘 과거에 빚을 진다. 관고찰금(觀古察今)의 정신을 견지하는 일은 아마도 사찰이 조형물을 현대화하면서 제일 먼저 지켜야 할 수칙일 것이다.

성파 종정은 통도사 주지 시절에 사경(寫經)과 도자기를 시작했다. 주지가 도자기를 구우니까 절 안팎에서 ‘수행이나 하지, 쓸데없는 일을 벌인다’고 말이 많았다고 한다. 한데 이 도자기 작업 덕분에 최초 성보박물관을 통도사에 짓게 되었다. 도자기 굽는 주지 스님 얘기를 전해 듣고 1983년에 절을 찾은 주영복 당시 내무부 장관이 사찰에 박물관이 없어 문화유산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건의사항을 바로 수용한 것이다.

주지를 마치고 서운암으로 물러난 성파 스님은 물 만난 고기처럼 예술의 길로 매진했다. 도자 불상 삼천불을 조성했고 16만 도자대장경을 만들었다. 평화 통일을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도자대장경은 굽는 데 꼬박 10년이 걸렸고, 순서대로 정리하고 장경각을 지어 모시는 데 다시 10년 세월이 흘러갔다.

이후로 쪽물을 들인 감지(紺紙) 천연 염색, 전통 한지인 고려 장지 복원, 산수화와 옻칠 민화 분야로 장르 불문 예술 종목을 넓혀가니 스님 특유의 무소불위 시절이 이어졌다. 성파 스님은 이 과정에서 불상이나 탑 등 유형 문화유산에 치우쳐 있던 불교미술을 종이 제조법이나 염색 등 무형 문화유산으로 넓히는 성과를 올렸다. 성파 스님의 정신과 기량을 따르는 후계자들이 절집에서 육성되기를 기대한다.

절에서 지금 우리가 만나고 싶은 것들

2023년 한국사회에서 절은 이제 불교라는 특정 종교의 틀을 넘어서는 상생과 치유의 공간으로 변모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고 있다. 현대 문명에서 불교가 차지하는 위상의 변모도 한 원인이지만, 자연 속에 자리한 문화유산으로서의 사찰을 즐기려는 일반인의 태도 변화가 더 큰 요인일 것이다. 특히 코로나19로 숨죽였던 3년여의 시간, 폭염 시대라는 새 규정이 상징하는 기후변화, 날로 잦아지는 지진과 홍수,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전쟁에 대한 공포 등 인류 문명에 대한 반성이 커지면서 장구한 문화유산을 지닌 사찰은 불안한 사람들 마음을 달래줄 공간으로 그 역할을 넓혀가는 중이다.

위에서 살펴본 몇몇 사찰은 이러한 흐름에서 현대미술을 활용하고 있는 예라 할 수 있다. 불상과 벽화, 불화와 범종 등으로 대표되는 기존 불교미술의 전통을 확장하면서 이미지 시대에 부응하는 시각예술을 폭넓게 수용하는 사찰의 모습은 문화유산을 활용한 미래 전략으로서 평가받는다.

오늘의 세계에서 돌아보면 사찰과 그 공간이 품은 문화유산은 인류를 제 본성으로 돌려줄 일종의 백신(vaccine)이다. 몸과 마음에 면역체를 만들어주고 독소를 약화시키는 무궁무진한 항원이다. 문화유산은 많을수록 좋다. 사찰 조형물 현대화는 시대의 요구이면서 현실을 직시한 불교 교단의 거듭나기로 더 넓게 퍼져나갈 것이다.

한국미의 수호자였던 혜곡 최순우 선생은 ‘함께할 수 없는 아름다움은 때로 아픔이 된다’고 했다. 사찰 조형물 현대화로 새로 태어난 문화유산을 국민 모두가 즐길 수 있도록 한껏 개방하고 홍보하는 태도도 오늘의 절에 요구되는 덕목이 된다. ■

 

정재숙
문화재청장을 지낸 언론인이다. 고려대에서 교육학과 철학, 성신여대 대학원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문화유산을 비롯한 문화계 주요 분야에서 취재와 함께 정책 자문도 하고 있다. 한겨레신문에서 사회부, 문화부 기자 등을 지내고 중앙일보에서 문화에디터와 논설위원, 문화전문기자 등을 역임했다. 엮은 책으로 《나를 흔든 시 한 줄》, 지은 책으로 《전몽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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