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미술 현대화의 과제

― 불전미술(佛傳美術)을 중심으로

 

1. 불전미술(佛傳美術)의 탄생

고대 인도 불교미술의 특징은 불탑(佛塔)의 조영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석가여래의 성도지인 인도 보드가야 상징물은 하늘에 닿을 듯한 거대한 불탑과 그 안에 모셔진 석가여래 성도상이다. 불당(佛堂)을 갖추고 있는 보드가야 대탑은 5세기경 건축물이고, 그 안에 모셔진 석가여래 성도상은 10세기경에 제작된 것이다. 세계 각지의 불교도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바로 깨달음의 성지인 보드가야이고, 보드가야의 상징은 석가여래의 사리를 봉안한 불탑과 불상이다.(그림 1)

필자는 지난 2월에 보드가야를 방문해 일행들과 함께 불탑 안 석가여래 성도상에 가사 공양을 올렸다. 인도 성지순례 과정에서 세 번 가사 공양을 올렸는데, 보드가야 대탑 안 석가여래 성도상과 쿠시나가르의 열반당 안 열반상 그리고 석가여래께서 오랫동안 안거를 보내셨던 기원정사의 향실(香室)에서였다. 석가여래의 일대기에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성지를 순례하면서 가사를 공양 올리고 그곳에서 기도한 경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명을 주었다. 성지순례는 석가여래의 일대기를 찾아가는 여정이며 석가여래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과정이다. 

인도의 8대 성지는 바로 석가여래 일대기에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장소이다. 성지에는 고대로부터 거대한 불탑이 건립되었고 불탑 표면에는 석가여래의 일대기를 돌에 새겨 표현하였다. 고대 인도 초기에는 석가여래의 일대기와 전생 이야기를 불탑에 새겨 성지 순례객들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후대로 오면서 인간 석가여래의 일대기보다는 5세기경 보드가야 대탑에서 보듯 대승불교의 상징인 불상과 보살상으로 대체되었다.

인도 불교미술의 특징은 불탑을 장엄한 주제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고대 초기 불탑에는 주로 석가여래의 일대기인 불전과 전생 이야기인 본생담이 채택되었고, 대승불교 미술이 활발해지는 3세기경 이후에는 차츰 불상과 보살상 등으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중앙아시아의 석굴 벽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초기 중앙아시아 석굴 벽화의 주제는 석가여래의 일대기와 전생 이야기였지만, 차츰 경전의 내용을 표현한 변상도로 전환되어 갔다. 

불탑은 석가여래의 사리를 봉안할 목적으로 건립한 것이고, 불상은 석가여래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고대 인도 불교미술의 핵심은 석가여래의 사리를 봉안한 불탑이었고, 불탑에는 석가여래의 전생담이나 일대기가 설화 미술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설화 미술을 불전미술(佛傳美術)이라고 하며, 우리나라의 경우는 팔상도(八相圖)로 정립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2023년 12월 22일부터 2024년 4월 14일까지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과 공동으로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경까지 남인도의 초기 불교미술품 97점을 전시하는 특별전을 개최한다. 이때 출품되는 유물은 석가여래의 일대기를 표현한 불전미술이 중심을 차지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인도 불교미술의 특징을 탑과 탑을 장엄한 불전미술에서 찾고자 하며, 석가여래의 일대기에 관한 불전미술 도상이 인도에서 시대에 따라 어떠한 변화를 보이는지를 살펴보겠다. 우리나라에서 개최하는 최초의 남인도 불교미술 특별전은 고대 인도 미술의 특징을 접할 좋은 기회이다. 

이 논문에서는 인도 불전미술의 시대에 따른 변화와 지역적 표현 특징을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2세기까지 북인도 · 중인도 · 남인도를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인도 불전미술은 기원전 2세기경 슝가 시대 바르훗(Bharhut) 대탑에 표현되기 시작해 쿠샨 제국의 간다라 미술에서 2~3세기경에 전성기를 맞는다. 이후 4~7세기경 굽타 시대에는 불전 도상의 정형화가 이루어지는데, 석가여래의 일대기 가운데 중요 장면이 4상(四相), 5상(五相), 8상(八相) 등으로 압축되고 8대 성지 순례와 관련한 불전미술이 주류를 형성한다. 이러한 경향은 8~12세기 팔라 시대에도 지속되어 석가성도 장면을 중앙에 두고 7상을 좌우와 상하로 배치해 전체적으로 팔상도를 조각으로 구현해 냈다.

 

2. 인도의 불탑 장엄과 불전미술

고대 인도의 불교미술은 석가여래의 사리를 봉안한 불탑과 불탑을 장엄한 불전미술에서 찾을 수 있다. 불교의 교주인 석가여래의 생애와 본생(本生)에 관한 설화는 일찍부터 불탑을 장엄하는 주제로 자리 잡았다. 인도의 고대 불탑 가운데 슝가왕조 때 건립된 기원전 2~1세기경의 바르훗 대탑(그림 2)은 제작 시기가 가장 오래된 불탑이고, 기원전 3세기경 마우리아왕조 때 초창되어 1세기경 안드라 또는 사타바하나왕조 때 증축된 산치(Sanchi) 대탑은 탑신, 탑문, 난순(欄楯, 탑 주변을 두른 울타리) 등이 잘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온전한 불탑이다.

중인도 불탑에 표현된 불전은 인간의 형상으로 석가여래를 표현하지 않는 특징을 보인다. 즉 무불상 시대의 불전미술로 보리수, 법륜, 불족적(佛足跡), 빈 대좌, 삼보표(三寶標), 산개(傘蓋), 경행석(經行石) 등을 사용해 석가여래를 표현하였다. 또한 석가여래의 생애 가운데 지역별로 일어난 사건을 집합적으로 연출해 간다라 불전미술과는 차이가 있다.

1세기에서 4세기경 북인도의 간다라 지역과 남인도의 아마라바티(Amaravati)와 나가르주나콘다(Nagarjunakon-da)에서는 탑과 불상 조성이 활발하였다. 간다라의 많은 사원지에는 석가여래의 사리를 봉안한 불탑을 중심으로 봉헌탑이라 일컫는 소탑(小塔)이 대탑 주변에 배치되었다. 현재 간다라의 대탑에 불전미술이 배치된 예는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소탑의 기단에는 확인되고 있다. 특히 현재 파키스탄 라호르박물관의 시크리(Sikri) 탑(그림 3)과 인도 콜카타 인도박물관의 로리안 탕가이(Loriyan Tangai) 출토 불탑, 파키스탄 북쪽에 위치한 스와트 지역의 붓카라 1 사원지의 봉헌탑에는 간다라 불전미술의 배치 상태를 알 수 있는 유물이 현존한다. 

간다라의 불전미술은 주제가 확인된 것이 120여 종류가 될 만큼 인도 고대 불전미술 가운데 가장 많은 작품이 남아 있다. 고대 인도 불전미술의 보고는 간다라 불전미술이며 현재는 대부분 단편으로 파키스탄과 세계 여러 나라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간다라의 경우 크기가 작고 단편이지만 종류가 많다는 점은 중인도의 바르훗, 보드가야, 산치를 비롯해 남인도의 아마라바티와 나가르주나콘다와는 다르다.

남인도의 대표적인 고대 불교 유적은 아마라바티와 나가르주나콘다 사원지이다. 남인도의 크리슈나강 하류 오른쪽 언덕에 위치한 아마라바티 불탑과 익슈바크왕조의 수도였던 곳에 남아 있는 나가르주나콘다 불탑에서도 많은 불전미술이 수습되었다. 남인도의 두 불교 유적에서 발견된 불전미술은 간다라와 마찬가지로 1세기에서 4세기경에 제작된 것이 대부분이다. 

 

남인도의 불탑과 불전미술과의 관계는 불탑에 부착된 탑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남인도의 경우는 그림 속에 그림이 있듯이 대탑 표면에 탑을 부조(浮彫)로 새겨 부착했기 때문에 조성 당시의 불탑에 불전이 어떻게 배치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남인도에서는 석가여래의 일대기를 압축한 3상도, 4상도, 5상도 등이 출현하였다. 남인도 불전미술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의 형상으로 석가여래를 표현하는 방법과 상징을 사용하여 표현하는 방법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굽타왕조(320~520)의 불탑과 불전미술의 배치는 현재로서는 잘 알 수 없다. 굽타 시대에 제작된 불전미술은 대형의 패널 형식으로 남아 있지만, 불탑에 어떻게 장엄되었는지는 남아 있는 예가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탑 또는 건축물에 배치된 굽타 시대 불전미술의 단편은 콜카타 인도박물관에 남아 있는 유물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첫 설법지 녹야원 입구에 위치한 사르나트 고고박물관에는 8상이 한 장면에 표현된 유물이 남아 있어 굽타시대에 팔상도가 정착된 것을 보여준다(그림 4). 인도에서 팔상도의 제작은 성지순례와 관련된 것으로 탄생(誕生, Lumbini), 항마성도(降魔成道, Bodhgaya), 초전법륜(初轉法輪, Sarnath), 취상조복(醉象調伏, Rajagaha), 원후봉밀(猿猴奉蜜, Veshali), 도리천강하(忉利天降下, Sankassa), 천불화현(千佛化現, Savatthi), 열반(涅槃, Kusinara)을 표현하고 있다. 

굽타 시대의 불전 가운데 가장 많이 현존하는 것은 석가여래가 사위성에서 이교도들을 교화하는 신변(神變) 장면이다. 이 가운데서도 천불화현이 주류여서 간다라에서 쌍신변(雙神變)를 표현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팔라 시대(750~1174)는 석가여래의 항마성도상을 중앙에 크게 배치하고 좌우와 석가여래상 위에 7상(七相)을 배치한 8상이 정립되었다(그림 5). 성도와 열반을 세로로 배치하고 탄생, 초전법륜, 취상조복, 원후봉밀, 도리천강하, 천불화현을 좌우로 배치한 특징을 보인다. 팔라 시대의 팔상도는 8상을 한 장면에 모두 표현한 것과 각 장면을 단독으로 표현한 경우로 크게 구분되며, 봉헌 소탑에 8상을 배치하기도 하였다. 

팔라 시대 8상의 화면 구성은 5세기경에 제작된 사르나트 고고박물관의 불전 8상처럼 매우 간략하게 표현되었다. 즉 주인공인 석가여래만 크게 표현하고 주제와 관련된 것만을 나타내 고대 인도의 초기 불전미술에서 불전 경전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또한 석가여래와 함께 연기법송(緣起法頌)으로 추정되는 내용이 함께 표현되었고, 보관을 쓴 석가여래가 등장하는 특징을 보인다. 

 

3. 인도의 불전미술 표현 방법

바르훗(Bharhut) 대탑

바르훗 대탑은 1873년에 영국 고고학자 커닝햄(A. Cunningham)이 발굴했고, 1879년에 발굴 보고서가 간행되었다. 1874년에는 탑 유구가 모두 콜카타 인도박물관으로 이관되어 현재 복원 · 전시되어 있다. 대탑의 조성 시기는 기원전 150년경이며 현존하는 불교미술의 최초 예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바르훗 대탑의 난순과 탑순에 표현된 불전미술은 원형의 구획과 방형 틀 안에 본생(本生)과 불전(佛傳)을 부조로 표현하였다. 한 화면 속에 시간이 다른 이야기를 함께 표현한 이시동도법(異時同圖法)을 사용하고 있다. 특히 원형의 테두리 밖에는 불전 주제를 표현한 브라흐미 명문(銘文)이 새겨져 불전 도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바르훗 대탑의 불전 표현법의 특징은 상징으로 석가여래를 표현한 것으로, 보리수와 불족적 등으로 석가여래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석가여래의 일대기보다는 전생담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다. 

 

산치(Sanchi) 대탑

중인도 말와(Malwa) 지역에 위치한 산치 대탑은 기원전 3세기경 아소카왕에 의해 건립되었고, 기원전 1세기경 슝가왕조 때 중축되었고, 탑문은 1세기경 사타바하나 또는 안드라왕조 때 건립되었다. 크기는 기단 직경이 36.6m이고, 탑신 정상까지의 높이는 16.5m이며, 난순(欄楯)의 높이는 3.1m이다. 난순은 목조 건축의 흔적이 남아 있고, 바르훗 대탑이 난순에 불전과 본생을 표현한 것과 달리 산치 대탑의 난순에는 설화가 표현되지 않은 점이 다르다(그림 6). 

말와 지역을 포함한 서인도의 지배권은 사타바하나왕조 제3대 사타카르니왕(Satakarni, 1~2세기경)에 의해 확보되어 고대 미술의 융성기를 맞이했다. 산치 대탑이 위치한 말와 지방은 고대 상업도시로 번영한 베스나갈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상인들이 많은 후원을 하였다. 현재 산치 사원지에는 탑, 불전, 승원 유적이 남아 있다. 산치 대탑의 탑문은 방형 기둥 위에 3개의 가로 부재가 배치된 구조이며, 기둥과 가로 부재의 앞 뒷면에는 불전과 본생이 부조되어 있다. 

산치 대탑 근처에 있는 제3탑(그림 7)은 석가여래의 제자인 사리푸트라(사리불)와 마하목갈라나(대목건련)의 사리를 봉안한 승탑이다. 제3탑의 건립 시기는 기원전 1세기 슝가왕조이며, 난순은 없고 1기의 탑문만이 현존하는데, 탑문의 제작 시기는 산치 제1탑인 대탑보다는 늦다.

산치 제2탑은 기원전 2세기 말경 건립된 것으로 산치 사원지에서 가장 오래된 탑이다. 기단 직경이 14.3m로 크기는 산치 대탑에 비해 작다. 1851년 영국 고고학자 커닝햄이 발굴했는데, 이때 아소카왕 때 활동했던 고승 10명의 이름이 새겨진 석제 사리기가 수습되었다. 산치 제2탑은 난순만 있고 탑문은 없다. 난간 기둥과 난순에는 간소한 장식 문양이 평판적으로 표현되었고, 불교적 내용은 적고 민간 신앙과 관련된 소재가 주로 표현되었다.

 

산치 대탑에 표현된 불전미술의 특징은 바르훗 대탑과 마찬가지로 상징으로 석가여래를 표현한 점이다. 기원 전후 1세기경부터 쿠샨 제국의 영역이었던 북인도인 간다라와 중인도에서는 석가여래를 인간의 형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인도에 위치한 산치에서는 석가여래를 상징으로 표현한 전통을 고수했는데, 석가여래의 출가 제자는 표현하지 않은 점이 특징이다.

산치 대탑의 불전은 시간순으로 석가여래의 일대기를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일어난 지역별로 배치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예를 들면 동문 기둥에는 석가여래의 성도지인 보드가야에서 일어난 사건이 집중적으로 표현되었다. 즉 우루빌바 마을의 석가여래, 보드가야 대정사의 참배, 화신당 안 독룡조복, 네란자라강을 건너는 기적, 빔비사라왕의 석가여래 방문 등이 배치되고 있다.

산치 대탑에는 다양한 주제의 불전이 표현되었고 바르훗 대탑에 비해 본생 미술의 비중은 감소하였다. 또한 산치 대탑에는 석가여래의 일대기뿐만 아니라 아소카왕과 관련된 설화를 표현한 점이 주목된다. 특히 용왕이 지키는 석가여래의 사리와 관련된 라마그라마 탑(Ramagrama stūpa)에 관한 에피소드가 가장 유명하다.

간다라의 시크리 탑과 인도박물관 소장의 탑

쿠샨 제국이 꽃피운 간다라 미술은 고대 인도 불전 연구에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간다라 불전미술은 인도 고대 불전미술 가운데 가장 많은 유물이 남아 있고, 불전 주제는 120여 종류가 해석되었다. 간다라 불전미술은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불탑을 장엄하는 목적으로 제작되었고, 본생부터 석가여래의 열반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주제가 표현되었다. 특히 본생과 불전을 연결하는 매개로 연등불수기(燃燈佛授記)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간다라의 불탑은 대형 불탑과 소형의 봉헌 스투파로 구분된다. 대형 불탑에 불전미술이 배치된 상태는 현재로서는 잘 알 수 없고, 중 · 소형의 불탑을 통해 불전의 배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파키스탄 라호르박물관 소장의 시크리 출토 불탑과, 인도박물관 소장의 로리안 탕가이 출토 탑을 들 수 있다. 

라호르박물관 소장의 시크리 불탑은 승원의 불당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전체 높이가 3m에 달한다. 간다라의 대형 불탑은 바르훗 대탑과 산치 대탑에 설치된 탑문과 난순이 없다. 따라서 불전은 주로 탑신에 직접 부착되었기 때문에 바르훗이나 산치 대탑의 불전 패널보다 규모가 작은 것이 특징이다.

라호르박물관에 소장된 시크리 불탑의 표면에는 총 13장면의 불전이 배치되었다(그림 8). 도솔천상의 보살, 연등불수기, 범천권청, 원후봉밀(猿猴奉蜜), 제석굴 설법 등을 표현해 간다라 인들이 선호했던 불전의 내용을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탑신 위 하르미카(Harmika)에는 불전 4상(四相)을 표현해 간다라에서도 석가여래의 일대기 가운데 중요한 사건과 성지(聖地)를 연결하려는 움직임을 살필 수 있다. 

현재 파키스탄 라호르박물관 불교미술실 중앙 홀에는 시크리 사원지에서 옮겨온 불탑이 전시되고 있다. 불탑 드럼(Drum) 부분에는 불전 13장면이 배치되어 있다. 이야기의 전개는 다음과 같다.

① 과거 연등불로부터 석가여래가 될 것이라는 수기를 표현한 〈연등불수기〉, ② 인간 세상에 하생할 때가 가까워지자 태어날 장소와 시기 등을 신들과 의논하는 〈도솔천상의 석가보살〉, ③ 농경제(農耕祭)에 참여했다가 약육강식의 세계를 경험하고 염부수 아래에서 첫 선정에 든 석가보살을 표현한 〈수하관경(樹下觀耕〉, ④ 보리수 아래로 향하는 석가보살을 본 칼리카 용왕이 과거불이 성도했을 때와 상황이 같은 것을 직감하고 그의 성도를 예언하고 찬탄한 〈칼리카 용왕의 찬탄〉 → ⑤ 풀 베는 청년 솟띠야가 석가보살이 깔고 앉을 풀을 보시하는 〈솟띠야의 길상초 보시〉 → ⑥ 성도한 석가여래께 두 상인이 바친 음식물을 담을 발우를 사천왕이 바치는 〈사천왕봉발(四天王奉鉢)〉 → ⑦ 범천이 석가여래께 설법을 청하는 〈범천권청〉 → ⑧ 제자들에게 둘러싸인 석가여래 → ⑨ 어머니 마야에게 도리천에서 설법하고 내려오신 〈도리천강하〉 → ⑩ 사위성에서 망고를 재배하는 과수원의 문지기 딸 암라팔리가 석가여래께 보시하는 〈암라팔리의 망고원 보시〉 → ⑪ 제석천이 마가다국 왕사성 근처 굴에서 명상에 든 석가여래께 설법을 청하는 〈제석굴 설법〉 → ⑫ 사람을 잡아먹는 아타비카를 석가여래께서 교화한 〈야차 아타비카의 귀의〉→⑬ 원숭이가 석가여래께 꿀을 공양 올리는 〈원후봉밀〉 등이다.   

 

로리안 탕가이 사원지는 쿠샨 제국의 수도였던 페샤와르와 스와트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영국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콜카타 인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그 가운데 일부가 인도박물관의 간다라실에 전시되고 있다. 로리안 탕가이 출토 불탑은 크기가 약 150cm의 소탑이다. 이 탑의 기단부에는 석가여래의 탄생과 출가에 관한 불전이 남아 있다. 현존하는 장면에는 육신의 탄생과 새로운 정신의 탄생을 의미하는 출가 관련 불전이 표현되어 있다.

남인도의 아마라바티 대탑

아마라비타 대탑은 크리슈나강 하류 오른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으며, 18세기 말에 발견되어 19세기에 엘리엇과 바제스에 의해 발굴되었다. 바렛은 파괴되기 전에 실시된 보고와 부조 중 대탑에 부착된 탑 모습을 근거로 대탑을 복원했다(그림 9). 아마라바티 대탑의 기단은 원위치에 남아 있는데 직경은 약 50m에 달한다. 

남인도의 아마라바티 대탑은 바르훗과 산치 대탑에 설치된 탑문 대신에 사방에 장출목을 조립한 기둥을 배치했고, 5개의 아야카(Ayaka) 즉 열주(列柱)를 추가했다. 탑신과 난간 사이의 요도(繞道)는 4m이며, 난간의 높이는 약 3.5m이다. 현재 아마라바티 고고박물관에는 대탑의 모형이 전시되고 있다.

남인도의 아마라바티와 나가르주나콘다 사원지에서 출토된 불전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상징과 인간 형상을 한 석가여래가 공존한다는 점이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사건을 연이어 표현하거나 3상, 4상, 5상 등으로 압축한 불전이 조성되고 있다. 

 

4. 인도의 불전미술과 8상

쿠샨 시대 간다라의 4상

쿠샨 제국은 현재 파키스탄 페샤와르를 수도로 정하고 1세기경부터 4세기경까지 북인도와 중인도의 일부를 지배했다. 쿠샨 제국 때 불교미술은 획기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는데 바로 석가여래의 모습을 인간의 형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불상의 탄생은 쿠샨 제국의 영역이었던 간다라와 마투라에서 동시에 발생한 것으로 인식되어 왔지만, 현재는 마투라에서 발생해 간다라에 영향을 주었다는 새로운 학설이 제기되어 기존의 학설을 수정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간다라 지역에서는 불탑의 방형 하르미카에 표현된 불전에서 초기적인 4상(四相)을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라호르박물관 소장의 시크리 탑의 하르미카에 표현된 탄생, 성도, 첫 설법, 열반 장면을 들 수 있다. 시크리 불탑의 하르미카에 표현된 불전 4상과 주제는 약간 다르지만 간다라에는 불전 4상이 표현된 예가 많이 남아 있다.

간다라 불전미술은 비교적 상세하게 표현된 것과 달리 불전 4상의 장면은 매우 단순화된 것이 특징이다. 이 같은 흐름은 마투라를 비롯해 굽타왕조 및 팔라왕조 때까지 불전 8상의 표현법으로 계승되었다. 

 

쿠샨 시대 마투라의 5상과 8상

마투라는 고대 종교 도시로 융성했는데 쿠샨 제국의 남쪽 경계선에 위치하고 있다. 마투라에는 쿠샨 제국의 왕 초상을 모시는 신전이 있어 이곳에서 출토된 왕의 초상이 현재 마투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마투라는 간다라와 함께 불상의 탄생지로 알려졌었지만, 현재는 마투라에서 불상을 조성하기 시작해 간다라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

마투라 지역에서는 간다라와 달리 불전의 조성이 성행한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단지 불탑에 부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 남아 있으며, 불탑에 8상이 표현된 예가 남아 있다. 탄생, 성도, 첫 설법, 도리천강하, 사천왕봉발, 제석굴 설법, 사위성 신변, 열반 등 불전 8상이 표현되어 있다. 굽타 시대에 정착한 8상과는 차이가 있지만 탑 표면에 석가여래의 일대기를 압축해서 표현하려는 전통이 형성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굽타 시대인 5세기경에 이르러 불전 8상으로 정착하게 된다.

마투라 지역에서는 간다라와 달리 3상, 4상, 5상, 8상 등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마투라의 라지가트에서 출토된 불전 5상은 탄생, 성도, 도리천강하, 초전법륜, 열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투라에서도 제석굴 설법을 탑문에 서사적으로 표현한 불전미술이 현존하고 있다. 그러나 간다라에 비해 적극적으로 불전을 3상, 4상, 5상, 8상 등으로 압축해 표현하기 시작한 것을 현존 유물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남인도의 3상과 4상

남인도의 아마라바티와 나가르주나콘다에서 발견된 불전은 세로 또는 가로로 긴 방형의 패널에 표현되었다. 아마라바티 대탑지에서 출토된 불전은 중요 사건을 전후한 에피소드가 한 세트로 구성되거나, 석가여래의 불전 가운데 중요한 사건을 3상 또는 4상으로 표현한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남인도의 불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세로로 긴 방형의 패널에 새겨진 것으로 불상이 조성되기 시작한 이후에도 여전히 상징을 사용해 석가여래를 표현하고 있는 점이다. 

특히 석가여래의 열반 장면은 간다라에서 창안된 사자(死者)로서 옆으로 누운 도상은 수용하지 않았다. 열반 장면은 언제나 탑을 배치해 상징으로만 표현하고 있다(그림 10).

굽타 시대의 3상, 4상, 5상, 8상

앞에서도 간략히 살펴보았듯이 굽타 시대에는 8상 한 패널에 표현된 형식이 정착되었고, 마투라나 남인도와 마찬가지로 3상, 4상, 5상 등이 표현되었다. 8상 가운데 한 가지 주제가 한 장면에 자세하게 표현하는 것도 유행하였다. 사위성 신변을 대표하는 천(千) 분의 부처님으로 변신한 천불화현(千佛化現)은 8상 가운데 하나로 굽타 시대에 정형화되었다.

콜카타 인도박물관과 사르나트 고고박물관에는 4상 또는 5상으로 표현된 불전미술이 여러 점 소장되어 있다. 태몽과 탄생 · 성도 · 첫 설법 · 도리천강하 · 사위성 신변을 표현한 5상, 성도 · 첫 설법 · 도리천강하, 탄생 · 성도 · 첫 설법 · 열반을 표현한 4상 등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팔라 시대의 8상

팔라 시대에는 불전 8상이 새로운 형태로 정형화되었다. 사르나트 고고박물관 소장의 불전 8상은 5세기경 제작되었는데 8상이 모두 동일한 크기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팔라 시대의 8상은 중앙에 석가여래 성도상을 크게 배치하고, 좌우로 6상은 작게 표현하였으며, 중앙의 상단에는 열반상을 중앙 석가여래 성도상보다는 약간 작게 표현하고 있다. 성도상과 열반상을 세로로 배치한 특징을 보인다.

팔라 시대에는 팔상을 한 장면씩 별도로 표현하기도 했는데 석가여래의 크기를 상대적으로 크게 해 예배상으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또한 보관형 성도상이 출현한 것도 이 시기 불전 8상의 특징이다. 

 

5. 정반왕에 대한 인식과 표현

인도와 중국의 불교미술 특징은 석가여래의 아버지 정반왕에 관한 인식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석가여래가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절을 하는 정반왕을 인도 불전미술에서 표현했다면, 중국인들은 효를 강조해 아버지 정반왕의 관을 메고 장지로 향하는 석가여래의 모습에 주목하여 정반왕에 관한 인식 차이를 보였다. 간다라 불전미술 속 정반왕과 중국 쓰촨성 보정산 석굴의 조각에는 당대인들의 정반왕에 대한 인식이 잘 표현되어 있다. 

아들 싯다르타 태자에게 예를 표하는 정반왕

부처님의 일대기에서 특히 중요시되는 몇 장면이 있는데, 잠부나무(閻浮樹) 아래에서 첫 선정에 잠긴 사건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부처님의 탄생지인 룸비니는 주로 벼농사를 짓는 농경 사회였던 것 같다. 봄이 되면 파종에 앞서 올리는 농경제(農耕祭)는 한 해 살림살이를 결정짓는 행사였는데, 싯다르타 태자는 아버지 정반왕과 함께 그 행사에 참석했다.

농경제에 참석한 싯다르타 태자는 잠부나무 아래에 앉아서 밭갈이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흙덩이가 부서지면서 벌레가 나오자 까마귀가 벌레를 쪼아 먹고, 또 지렁이가 나오자 개구리가 지렁이를, 뱀이 개구리를, 공작이 뱀을, 매가 공작을, 독수리가 매를 잡아먹는 광경을 태자는 목격했다. 

약육강식의 광경을 보게 된 태자는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어, 나무 아래에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데 집중해 색계의 제1선정(色界初禪)을 성취했다. 다른 나무의 그늘은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변하고 있는데, 태자가 앉아 있는 잠부나무 그늘만 정오가 지났는데도 둥근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반왕은 ‘밥때가 다 되어 가는데 어찌하여 태자가 궁 안으로 돌아오지 않는가? 내가 즉시 가서 태자를 만나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수레를 타고 나갔다. 밭 가는 곳에 이르러 여러 곳을 돌아보다가 잠부나무 아래서 삼매에 들어 있는 태자를 발견했다. 이때 해는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져 모든 나무 그늘이 해를 따라 옮겨갔는데, 오직 태자가 앉아 있는 나무의 그늘만은 옮겨 가지 않고 태자를 덮고 있었다. 

이것을 본 정반왕은 곧 생각했다. ‘지금 나의 태자가 큰 위덕을 가졌구나. 해가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져 모든 숲의 그늘이 다 해를 따라 옮아갔는데, 오직 태자가 앉아 있는 나무의 그늘만은 아직까지 태자를 가린 채 옮겨 가지 않는구나.’ 정반왕은 기쁜 마음이 치솟고 공경심이 생겨서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여 태자에게 예를 표하고 삼매로부터 깨어 일어날 것을 청했다.

간다라 불전미술 가운데 〈염부수 나무 아래에서 첫 선정에 든 석가보살〉은 시크리 불탑의 13장면 가운데도 포함되어 있다. 윗부분은 손상이 있지만 농부가 두 마리의 소를 이용해 밭은 가는 장면, 아버지 정반왕이 우슬착지(右膝着地)하고 합장한 채 아들에게 예를 표하는 장면, 염부수 아래 선정에 든 석가보살이 잘 표현되어 있다. 정반왕은 일부 손상되었지만 윤곽은 남아 있어 도상을 파악하는 데 무리가 없다. 

잠부나무 아래에서 첫 선정에 든 태자를 표현한 불전미술은 간다라를 비롯하여 여러 나라에서 만들어졌는데, 파키스탄의 페샤와르박물관 소장품이 유명하다. 잠부나무 아래에 앉은 인물은 싯다르타 태자로 장신구를 걸친 채 깊은 선정에 들어 있다. 태자가 앉은 대좌에는 오른쪽 끝에서부터 채찍을 든 농부와 땅을 갈아엎는 두 마리의 소, 불이 피어오르는 향로, 합장하고 서 있는 두 사람, 무릎을 꿇고 합장한 채 아들을 바라보고 있는 정반왕이 있다(그림 11의 점선 원 표시 부분). 

이 작품은 이야기 중심의 불전미술에서 단독의 예배상으로 이동하는 과도기에 있는 것으로, 불전은 대좌에 작게 나타나고 예배상으로서 석가보살은 크게 표현되었다.

농부의 쟁기질과 석가보살의 첫 선정만 표현된 예도 있고, 첫 선정에 든 석가보살과 예를 표하는 정반왕만 표현된 경우도 있다(그림 12). 첫 선정에 든 아들 앞에서 경의를 표하는 정반왕과 일산을 든 그의 시자, 반가사유 자세의 싯다르타 태자와 마부 찬나 등이 표현되어 있다. 〈첫 선정에 든 석가보살〉에서 나타나는 반가사유 자세를 취한 석가보살 도상은, 한반도에서 7세기경 삼국시대에 유행한 반가사유상 도상의 기원이 된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정반왕의 관을 메고 장지로 향하는 석가여래

중국 쓰촨성에는 많은 석굴이 남아 있지만 가장 유명한 석굴은 대족석굴(大足石窟)이다. 중국의 4대 석굴 가운데 하나로 북쪽에 돈황석굴이 있다면, 남쪽에 대족석굴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대족석굴 가운데 대표적인 석굴은 보정산 석굴(寶頂山 石窟)이다. 이 석굴은 우리나라 임시정부가 있었던 충칭시에서 160km 떨어진 대족현(大足縣)에 자리잡고 있다. 보정산 석굴은 조지봉(趙智鳳) 스님의 주도하에 남송 때인 1174년에 석굴을 조성하기 시작하여 1252년에 완공되었는데 석굴 조성에 70여 년이 걸렸다. 

보정산 석굴에는 다양한 변상도가 새겨져 있는데 이 가운데 효와 관련된 것으로는 《대방편불보은경》과 《부모은중경》 변상도가 있다. 2016년 2월 20일 이곳을 방문한 필자는 보정산 석굴의 다양한 변상도 속에서 정반왕 아들로서의 석가여래를 만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석가여래는 죽음을 앞둔 아버지 정반왕의 이마에 손을 얹고 안쓰럽게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돌아가신 아버지 관을 메고 화장터로 향하고 있었다. 여느 집 아들과 다름없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석가여래였다(그림 13). 

보정산 석굴의 임종을 앞둔 아버지 정반왕을 위로하는 석가여래와, 정반왕의 관을 메고 장지로 향하는 석가여래의 에피소드는 《불설정반왕반열반경》에서 찾을 수 있다.

왕사성 기사굴산으로부터 급히 이복동생 난다, 사촌동생 아난다, 아들 라후라와 함께 카필라성으로 온 석가여래께서 임종을 앞둔 아버지 정반왕을 위로하고 있는 모습이다. 침상에 누운 아버지 정반왕이 “바라옵건대 여래께서는 손으로 내 몸을 만져서 나로 하여금 편안함을 얻게 하소서. 병에 시달리니 아픔을 참지 못하겠습니다. 목숨이 장차 끊어지는 것은 돌이킬 수 없지만, 이제 마지막으로 세존을 보니 고통과 한(限)이 곧 없어졌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보정산 석굴에는 석가여래께서 직접 아버지 정반왕의 관을 메고 가는 장면도 표현되어 있다. 《불설정반왕반열반경》에 석가여래를 대신하여 사천왕이 정반왕의 관을 멨고, 석가여래께서는 “몸소 향로를 잡고 관 앞에 서서 장지로 가셨다.”고 기록된 것과는 다르다. 

석가여래와 함께 두 명이 정반왕의 관을 메고 가는데, 전각형의 관 앞에는 ‘관여(棺轝)’라고 기록되어 있다. 석가여래의 뒤에서 관을 메고 가는 두 명은 “세존께서 사천왕들에게 부왕의 관을 메도록 허락하자 네 천왕들은 각기 사람의 모양으로 변화하여 손으로 관을 들어 어깨에 멨다”는 《불설정반왕반열반경》의 사천왕 가운데 두 명으로 생각된다. 

정반왕의 관을 메고 앞장서 걷고 있는 석가여래의 머리에는 두 줄기의 큰 빛이 표현되었고, 그 사이에 ‘큰 효자인 석가불께서 친히 부왕의 관을 메다(大孝釋迦佛 親擔父王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석가여래의 앞뒤에는 3명의 인물이 있는데 모두 출가수행자의 모습인 것으로 보아, 난다와 아난다 그리고 라훌라로 추정된다. 관을 메고 장지로 향하는 석가여래의 모습은 중국화된 불교의 단면을 나타낸 것으로, 효를 강조하는 유교 사회에서 불교가 뿌리내리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간다라 불전미술에서는 아들에게 절하는 정반왕을 표현한 반면, 보정산 석굴에서는 임종을 맞은 아버지를 찾아 뵙고, 아버지 정반왕의 관을 메고 장지로 향하는 모습에서 효를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도와 중국 그리고 우리나라 불교미술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불교가 수용되는 나라의 문화와 불교의 융합으로, 특히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효를 불교에서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가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

 

유근자
덕성여대 사학과,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동국대에서 〈간다라 불전도상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간다라에서 만난 부처》(공저), 《조선시대 불상의 복장기록 연구》 《조선시대 왕실발원 불상의 연구》 등이 있다. 2022년 불교평론 뇌허학술상 수상. 현재는 간다라의 석가여래 일대기를 표현한 불전미술과 조선시대 불상의 복장 기록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이며,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초빙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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