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사회화 꿈꾼 인도불교학 중흥자

1. 근대불교의 영욕 속에서

근대 일본불교는 음과 양이 교차한다.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세워진 신정부에 의한 폐불훼석(廢佛毁釋)으로 불교계는 절치부심의 심정으로 범교단적인 개혁을 단행한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인재 양성이었다. 불교계는 유럽의 학문 체계를 받아들여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간다. 고대에 유입된 불교가 중세를 거치면서 일본열도에 토착화를 이뤄갔듯이. 이처럼 일본 불교학이 세계적인 학문의 대열에 들어선 것은 근대의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부심 또한 높았지만 오만한 부분도 있었다. 동아시아불교의 중심이 일본임을 자화자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나아가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입헌군주제는 부국강병을 통해 네오오리엔탈리즘(neo-orientalism)적인 제국주의로 치달았다. 불교계의 각종 각파는 불법의 대의를 무너뜨린 소위 전시교학을 세워 백성들을 대외전쟁의 도구로 삼았다. 국가 신도의 하부구조로 편입된 불교계의 국가주의는 일본이 태평양전쟁으로 패망에 이르기까지 멈출 줄을 몰랐다. 전후에 살아남은 불교인들, 특히 불교학자들은 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가 근대 일본불교를 평가할 때, 이러한 콘텍스트를 바로 보아야만 불법과 역사 간의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바른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여기서 이야기할 기무라 타이켄(木村泰賢, 1881~1930)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근대 일본불교는 학문적 성과가 풍요로울지라도 역사적 측면에서는 냉정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기무라의 일생은 제국 일본의 거대한 국가적 자장(磁場) 속에 있었다. 국민국가의 일원으로 불교사상의 보편성에 대한 이해는 깊었지만, 고통받는 개별적인 타자에 대한 의식은 잘 보이지 않는다. 여타의 불교학자들처럼 일본 중심주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이와테현의 조동종 사찰인 동자사(東慈寺)에서 성장한 그는 현재 고마자와대학의 전신인 조동종대학을 졸업하고, 동경제국대에 입학한 다음 해인 1904년 군대에 소집되었다. 육군 간호병으로 만주의 야전병원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셰익스피어에 관한 책과 사전을 포함한 독일어 서적을 가져갔다. 전쟁터에서 독일어를 몸에 익힌 그는 대학에 복학해서 본격적인 학문의 길을 걸었다.

당시 동경대에는 쟁쟁한 불교학의 거봉들인 다카쿠스 준지로, 이노우에 데츠지로, 아네사키 마사하루, 무라카미 센쇼, 마에다 에운 등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근대 초기 일본의 서구 유학생이자 대정신수대장경과 남전대장경을 기획하고 간행했으며, 범어학 강좌를 개설한 다카쿠스 준지로의 영향이 컸다. 그의 문하에서는 기무라 이외에도 우이 하쿠주, 오다 도쿠노, 츠지 나오시로 등의 준재들이 나왔다.

기무라는 조교수 시절인 1914년 다카쿠스 준지로와 함께 《인도철학종교사》를 펴냈다. 당시 인도철학 연구서는 아네사키 마사하루의 《인도종교사고(考)》나 이노우에 엔료의 《외도철학》에 불과했다. 리그베다 시대로부터 브라흐마나와 우파니샤드 시대, 그리고 6파철학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상고시대를 논하고 있다. 치밀한 문헌 연구의 성과였다.

이노우에 데츠지로는 일본 최초의 철학 교수였으며, 무라카미 센쇼는 인도철학과의 초대 교수였다. 기무라는 일본 종교학 연구의 토대를 놓은 아네사키 마사하루 등 여러 선배의 골수를 고르게 이식받았다. 인도철학 연구를 위해 1919년부터 2년여 동안 영국에서 빨리성전협회(PTS)를 창립한 리즈 데이비스를 비롯한 서구 불교학자들과 학문적으로 교류했다. 귀국 후 동경대에서 처음으로 독립한 인도철학 강좌의 담임교수에 임명되었다. 본격적으로 인도불교 연구에 돌입한 그는 일본 최초로 1922년에 《아비달마론 연구》를 출판,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원제목은 ‘아비달마론 성립 과정에 관한 연구: 특히 주요한 45종의 논서에 대해서’이다. 아비달마 연구는 원전에 대한 이해가 깊어야 하며, 당시 익숙하지 않은 풍토에서 어려운 연구과제였다. 대승불교권에서는 소승불교에 대한 폄훼로 연구가 소홀했다. 그는 빨리어 논장과 한역의 소승논장을 비교하며 논서들과의 관계를 철저하게 규명했다.

기무라의 아비달마 연구의 특징은 설일체유부를 중심으로 아비달마 불교의 발달사관을 사상적으로 정립했다는 점에 있다. 그는 붓다의 설법을 기준으로 첫째, 계경(契經)의 형태를 띤 것으로 아함경 둘째, 경에 해석을 가한 논으로 《법온족론》과 《집이문족론》, 셋째, 아비달마의 독립으로 《시설론》에서 《발지론》까지, 넷째, 아비달마론 강요서로서 심론계 강요서, 《입아비달마론》 《구사론》 《순정리론》 《현종론》 등의 4기에 걸친 시대적 변천을 이야기한다. 당시 일본 불교학은 문헌 실증 중심의 연구가 중시되고 있었으며, 기무라는 이를 보다 깊이 파고들었다고 할 수 있다. 발달이라고 하는 것 또한 근대의 과학적 사유의 한 형태이다. 그는 연대기 설정에 다소 무리가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종류와 시기 등을 고려함으로써 추후의 총체적 연구를 염두에 두고자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1924년 《해탈로의 길》을 출판하여 대중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생명관에서부터 출발하여 절대생명, 해탈론, 선의 종류와 철학적 의의, 자력과 타력, 원시불교에서 대승불교로, 현대생활과 불교, 운명과 자유 등을 논하고 있다. 당시 일본은 1910년대부터 1920년대 전반기에 걸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 민주주의적 경향을 추구하는 다이쇼 데모크라시(大正 Democracy)의 시대였다. 러시아혁명, 국내의 쌀 파동, 제1차 세계대전 등을 거치면서 노동조합, 농민조합 등의 조직적 사회운동도 활발해졌다. 또한 수평운동, 여성해방운동 등의 차별철폐운동이 일어나고, 민중문화나 프롤레타리아 문화운동도 부흥했다. 이러한 시기 기무라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며, 주체적인 인간형 수립으로 새로운 문명을 건설할 것을 주장했다. 불교의 사회화, 불법의 민중화를 꿈꾸었던 것이다.

1929년에는 《해탈로의 길》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진공으로부터 묘유로》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그는 대승불교는 반야의 지혜에 의거한 진공묘유가 핵심이라고 간파한다. 대승정신에 기반하여 불법을 현실에서 어떻게 실천하며 현실 불국토를 건설할 것인가를 논하고 있다. 다이쇼 말기인 1923년에는 관동대지진으로 사회가 혼란에 빠지고, 1925년 치안유지법 공포로 국가주의가 강화되고 있었다. 금융공황과 공산당원 검거, 그리고 대외전쟁으로 사회적 어둠이 짙어지는 상황이었다. 불법(佛法)은 이러한 사회적 폐쇄성에 정신적인 위안인 동시에 죽음을 극복하는 동력이 되었다. 불교인들은 잡지를 발간하고, 방송활동을 하며,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면서 사회개조를 주창하기도 했다. 불교의 유구한 역사에 정통하며, 쉬우면서도 명료한 언어로써 대중들에게 불법의 정채(精彩)를 드러내는 활력 넘치는 기무라의 언어가 대중의 마음을 흔들었다.

지금까지 거론된 책 외에도 기무라는 《인도육파철학》 《불교의 여성관》 《소승불교사상론》 《인도사상사》 《대승불교사상론》 《대승열반경강요》 《원시불교로부터 대승불교》 등의 저서와 일본어 번역서인 《아미달마대비바사론》 《이부종륜론》 등을 출간했다. 불교의 종가(宗家)인 인도철학을 학문적 반열 위에 올려놓고, 대 · 소승불교를 연구함으로써 불법의 연속성과 확장성을 확인했으며, 한계에 처한 근대문명에 대해 불법에 의한 활로를 개척했다. 그것은 또한 대승불교를 계승한 일본불교의 전통을 근대적 가치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게 할 것인가라는 과제의 수행이기도 했다.

 

근대의 불교 연구자들이 그렇듯 기무라 또한 열정적으로 연구하며, 그 성과를 민중과의 소통 창구로 활용했다. 그의 연구는 사회의 불교운동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자본주의로 피폐해진 인간성과 제국주의가 판치는 세계전쟁으로 도탄에 빠진 사회를 구제하는 길은 불교 외에는 없다는 생각은 전 불교 지식인들의 공통된 고민이었다. 비록 국가에 종속된 불교계였지만, 문명의 한계를 직시한 불교인들은 다양한 형태로 근대 불교학이 양산하는 지식을 발판으로 사회 구석구석에 불음(佛音)을 전파하고자 했다. 기무라 또한 불교에 대한 민중의 기대와 희망을 가슴에 품고 학문의 장에서 일관된 자세로 연구하고 기술했다. 그런 그가 안타깝게도 학문적 절정의 나이인 50세 되던 1930년에 협심증으로 예고도 없이 사바세계를 떠났다.

 

2. 신대승불교의 건설

기무라는 불교학계의 논쟁뿐 아니라 사회적 논쟁의 중심에 뛰어들기도 했다. 먼저 잘 알려진 학계의 논쟁으로 1922년 영국 유학 중에 펴낸 《원시불교사상론》에 등장하는 연기설을 둘러싼 논쟁이다. 근대에 연기설에 관한 논쟁은 2차에 걸쳐 있다. 1차는 기무라를 둘러싸고 벌어진 우이 하쿠주, 아카누마 치젠, 와츠지 데츠로와의 논쟁이다. 제2차는 사이구사 미츠요시, 후나바시 잇사이, 미야지 카쿠에에 의한 논쟁이다. 전자는 삼세양중 인과설에 대한 기무라의 독자적인 해석을 둘러싼 것이다. 후자는 사이구사 미츠요시가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12지연기의 이법을 깨달았다는 점을 부정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기무라는 《원시불교사상론》의 구성을 1편 대강론, 2편 사실적 세계관, 3편 이상과 그 현실로 나누고 3편의 5장에서 12연기에 대한 해석을 내리고 있다. 그는 연기 사상은 붓다가 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정한 것만이 아니라 대승불교 또한 중요한 교리 내에서 이를 출발점으로 한다고 본다. 그리고 기존의 12연기설은 순관인 무명으로부터 노사에 이르기까지를 환관(還觀)으로, 이의 반대인 역관으로 노사에서 무명에 이르기까지를 왕관(往觀)으로 보고, 삼세에 걸쳐 일어나는 삼세양중인과에 대한 분석적 관찰의 방법을 제시한다. 이에 따라 대승불교의 다양한 사상도 발생한다고 본다. 그런데 기무라는 이 윤회의 최초 인자인 무명을 맹목의지의 작용으로 보고 내심의 갈등을 겪으며 극복하는 길이 해탈이라고 한다. 각각 전통과 문헌에 의한 해석을 취한 아카누마 치젠과 우이 하쿠주의 비판에 대응하면서도 근대적 인간관에 대한 해석을 가하고자 했다.

기무라의 시대는 이처럼 불교 내부적으로 치열한 논쟁이 일어나는 동시에 서구로부터 유입된 사조의 범람으로 사회의 혼란이 가중되기도 했다. 마르크시즘이나 사회주의, 또는 이에 의거한 반체제나 반자본을 외치는 진영에 대해 국가는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무정부주의나 종교부정론도 일어났다. 특히 종교신문인 〈중외일보〉는 종교 진영과 반종교 진영의 논쟁의 장이기도 했다. 당시 사회주의 운동가였던 사노 마나부는 《마르크스주의와 무신론》(1927)을 통해 종교비판에 불을 지폈다. 〈중외일보〉에서는 핫토리 시소, 가미치카 이치코, 오야 소이치 등의 종교부정론자들에 대항하여 기무라를 포함한 야부키 세이이치, 다카시마 베이호, 후루노 키요토 등의 종교옹호론자들의 치열한 논쟁이 일어났다. 1930년대 초에 반종교투쟁 동맹준비회에서는 〈반종교투쟁〉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기도 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한 반종교적 동향은 일본 종교의 반민중성이나 국가주의적 전통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중세에 독창적인 불교 세계를 구축한 일본불교는 근세에 막부정권에 예속됨으로써 국가종교의 지위를 누리기도 했다. 이는 천황제를 복원한 근대국가에 의한 불교 탄압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기무라는 일본불교의 민중적 전통과 더 나아가 불교의 근원 속에 내재된 불법의 대중적 효용성을 발견함으로써 시대의 분열과 정면으로 마주한 것이다. 특히 대승불교 사상을 통한 문명의 활로 개척은 평생의 이념적 목표였다.

그는 《대승불교사상론》에서 소승과 대승의 구별을 다음과 같이 본다.

“멈춤이 없는 고뇌를 반복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윤회에 대해 대승과 소승은 그 뜻을 달리한다. 소승에서는 윤회를 지식(止息)하는 것을 사상으로 삼지만, 대승은 윤회에 의지함으로써 깨달음의 무한한 향상을 바라보며 영원에 걸친 수행이 가능하다. 따라서 수행의 입장에서 본다면, 윤회를 보살의 본원 표현의 필수조건으로 보는 것에 다다른 것이다.” 대승보살이 고뇌의 연속인 윤회 속에서 수행하는 이유는 오직 이타행을 위해서다. 하여 대승의 출가든 재가든 자각각타를 이상으로 삼고 윤회를 통해 공덕을 쌓아나가야 한다. 기무라는 이처럼 초기불교의 사상을 대승의 열린 시공간으로 안내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소승에서 대승으로의 사상 전환의 핵심은 진공묘유다. 《해탈로의 길》에서 종래에 반야의 세계관을 무우주론, 허무주의로 귀착시킨 것은 그 진의를 벗어난 것이라고 한다. “공(空)은 결코 허무의 공이 아니고 부정과 부정을 더해서 최후에 도달한 묘유적 공관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즉, “《반야경》에서 말하는 진공묘유, 제법실상의 사유다”라고 하며, 《반야경》에 나타난 진여사상은 “인식론적으로는 실로 부정 후의 긍정으로 출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스즈키 다이세츠가 《금강경》의 공의 논리를 “A는 A가 아니므로 A이다”라는 부정의 논리라고 본 것과 같은 의미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반야의 주된 뜻을 공관에 의한 무집착주의의 촉진에 있다고는 하지만, 이는 결코 소극적 은둔 생활을 목표로 하는 무집착의 수양을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와는 다르게 처처에 무애자유의 정신생활을 발휘한다는 의미다. 한마디로 대승의 철학적 세계관은 진공묘유의 4자에 있다. 묘유의 계기점은 인격 활동이며, 대승의 덕목인 6바라밀에 나타난다. 그는 반야사상을 현실적 세계에 실현한 인물로 《유마경》에 등장하는 유마거사를 든다. 《법화경》은 진공을 가장 구체적인 묘유를 발휘하는 것으로 설하고 있다. 《화엄경》은 일법계의 묘용으로써 대일여래의 현현에 다름이 아니다. 즉, 묘용을 우주의 범신론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아미타경》이나 《무량수경》에서는 염불로써 극락왕생하는 것을 주장하여 반야사상을 벗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역사와 의리의 관점에서 볼 때, 진공의 체현자인 광명무량과 수명무량의 붓다의 구제 작용이 미래에 작동한 것으로써 해석해야 한다.

기무라는 이렇게 진공묘유가 대승사상의 요체임을 확신하고 있다. 이로써 “진공으로 현상을 타파하는 동시에 묘유로써 높은 규범에 의거한 생활로 전진하고, 더하여 다시 진공에 의해 그것을 해탈하고, 또한 한층 높은 규범 생활로 전진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세상과 함께 무궁한 향상으로 전진해가는 곳에 마침내 진공묘유를 배경으로 하는 부주열반(不住涅槃)의 사회화가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한다. 부주열반은 대승보살이 이 사회를 극락으로 만드는, 전진하는 역사의 장이다. 기무라는 불교야말로 인간의 질곡을 딛고 한계상황을 돌파하고자 나온 종교라고 간주한다. 삶의 목적을 깨달음이라고 강조한 그는 운명을 전환시키는 불법을 통해 새로운 종교운동인 신대승불교를 건설하자고 주장한다.

《해탈로의 길》 제3장은 현대생활에서 불교가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논한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신대승불교의 필요성을 이야기한다. 유럽 기독교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점차 종교, 특히 기성 교단에 대한 대중의 열정은 소멸되어 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안한 인간의 심리와 구원의 본능은 종교를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다고 본다. 이에 그는 신종교운동을 내세운다. 여기에 걸맞은 미래의 종교로서 네 가지 조건을 든다.

첫째, 과학의 분명한 성과와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 종교는 과학 영역 위에 있지만 과학의 이하가 되어서는 안 된다. 미신과 정신(正信)의 구별이 여기에 있다. 건전한 종교는 전인적인 지정의 삼 방면의 요구에 호응되어야 한다. 둘째, 이를 위해서는 교리 조직에 철학적 배경을 필요로 한다. 종교 교리의 최고 형식은 내재적 초월신교를 말하는데 종교의 철학적 배경은 바로 그것이어야 한다. 자신을 초월하는 동시에 참된 자신에게 귀결되는 길을 철학적 사변이 열어줄 것이라고 본다. 셋째, 건전한 종교의 실생활에 파급되는 힘으로써 환희의 정(情)을 일으키는 동시에 끊임없는 노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어야 한다. 만족과 노력이 하나가 되어 무궁한 이상을 향해 자신을 완성시키고 해탈해 가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넷째, 적용의 범위로써 보편적이어야 한다. 승속, 남녀, 일본인과 외국인에게도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이러한 네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이 바로 대승불교의 정신이다. 마침내 이상적인 종교는 대승의 정수에 기반한 것이라고 한다. 영원한 생명을 파악하고, 보살도를 도약의 힘으로 삼아 개인을 완성시키는 동시에 사바세계를 정화하는 정(淨)불국토를 만드는 것, 그의 말대로 하자면 ‘생성의 정토’를 이루어 가는 것, 그것이 곧 신대승불교 운동이다.

최고의 종교적 가치를 가진 대승불교지만, 현재는 그 가치를 상실하고 있다. 그는 일본만큼 대승불교를 발달시킨 나라는 없을 것이라고 본다. 기무라는 대승불교의 사상이 일본의 국가정신과 결합하여 국민정신의 기초를 놓았다고 한다. 실제로는 동아시아 전체가 대승불교의 요람인 동시에 어느 나라든 전통의 계승자로서 군림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일본의 경우, 국가신도와 같이 국가공인 종교가 되고자 했다. 국가종교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단가제도에 의지했던 과거의 영화(榮華)를 누리고자 했다. 기무라는 이러한 견해와는 격을 달리하면서 일본의 불교를 개조하여 세계 정신계에 제공해야 한다고 하며, 이것이 일본문화의 세계화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있는 그대로의 일본불교가 아니라 빛과 그림자 중에서 그림자를 제거한 불교 본연의 세계로 돌아가 시기상응(時機相應)의 불교로 변모시킬 것을 주장한다. 인습의 속박으로부터 탈피하여 “살아 있는 현대생활의 정수를 확립해야 한다. 그리고 불교의 대이상(大理想)을 가져와 빛을 부여하고, 생활에 눈뜨면서도 여러 면에서 한계에 다다른 일본은 물론, 나아가 세계를 상대로 이상의 실현을 구현하는 곳에 불교의 새로운 생명이 용솟음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초기 및 대승불교의 사상을 철견하고, 불교의 서진(西進)을 예측하며, 불교로써 자본주의 문명의 한계를 돌파하고자 하는 그의 예지와 주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경청할 가치가 있다.

 

3. 불법을 등에 업고

기무라는 학내외의 불교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1919년에는 법학자 오노 세이치로, 윤리학자 시라이 시게노부와 함께 동경대 불교청년회를 결성했다. 학내의 불교청년운동의 중심이 된 이 단체는 사회적으로 큰 기대를 모았다. 근대가 가져다준 자유주의, 자본주의, 국가주의, 전체주의 등의 다양한 사조 및 체제를 바라보며 불교의 역할을 모색하던 조직이었다. 불교 전통을 재발견하면서 근대과학과 사상에 보조를 맞추면서 민중을 계몽하는 역할도 해냈다. 그 목표는 불교정신의 현대적 전개였다. 공개강연, 법률상담, 건강상담 등을 진행하며, 기관지 《불교문화》를 발간했다. 기무라의 사후에는 《불교성전》을 출판하여 수만 부를 판매하기도 했으며, 불교사상 강좌를 기획하여 시리즈를 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자유인이었다. 《인생의 길》에서 외면으로는 자연에 의해, 내면으로는 맹목의지에 의해 우리는 속박되어 살아간다고 한다. 그럼에도 “보살도의 정신을 따라가면, 우리 내면 깊은 곳에는 영원히 동경하는 무한의 통일과 자유와 광명을 구하고자 하는 요구가 기다리고 있다”고 하며, 그것이 바로 숭고한 이상인 불성이자 보리심이라고 한다. 그 특징은 보살심인 자리이타동사(自利利他同事)다. 보살심의 출발점인 영원무궁한 생명의 이상인 불성은 일체의 중생을 포함한다. 또한 세계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진다. 정토교학에서 말하듯 예토(穢土)만을 싫어하여 하루라도 빨리 적정무위의 열반에 들어가고자 하는 것은 소승의 나한(羅漢)과 다름이 없다. 왕생극락을 이루는 왕상회향(往相廻向)과 더불어 그곳 극락의 모습을 모형으로 하여 이 땅을 극락화하기 위해 사바세계로 돌아오는 환상회향(還相廻向)이야말로 진정한 보살도라고 역설한다.

기무라는 후학들에게 자신의 철학을 세울 것을 강조했다. 츠네미츠 코넨의 《메이지의 불교인》(1969)에 의하면, 기무라는 후학들을 지도할 때, 문제 전체를 관통하는 견해를 갖도록 했다고 한다. 그리고 논문을 쓸 때는 되도록 재료를 버릴 것을 주문했다. 물론 그 자신은 원전 자료와 선행연구를 철저히 독파했다. 사실 학지(學知)라는 것도 깨달음에 이르는 하나의 길에 다름이 아니다. 따라서 그는 해독한 원전을 자기 나름대로 독창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했다. 그리고 영혼의 자유를 구가하는 조사들처럼 자유자재로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조화와 중도를 취하며 담담하고도 활력 넘치게 기술해갔다. 그의 논조의 명료성과 설득력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다. 한 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도 그가 늘 불법은 현대어로 설명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 것처럼, 오늘날에 읽어도 여전히 현대적인 감각을 갖춘 것처럼 느껴진다.

근대일본의 불교학은 원전의 힘이다. 근대를 거치면서 종학을 확립하고, 교육체계를 확립한 이면에는 문헌실증주의의 영향이 컸다. 서구로부터 인도 원전의 연구방법을 도입하여 일약 세계적인 반열의 인도철학 및 불교학을 수립한 것도 원전주의에 기반 것이다. 나아가 대정신수대장경을 비롯한 여러 대장경을 근대에 편찬하여 불교학 연구의 튼튼한 기반을 조성한 것도 일본 불교학의 공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측면에서 봤을 때, 그 수준은 세계적이며 세계 불교학을 이끄는 한 축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 불교학은 문헌의 한계를 돌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고학처럼 원자료에 몰입된 연구는 학문적 체계화에는 일약 공신의 지위를 누렸지만,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잇는 상상력에는 큰 제약을 가져왔다. 오늘날 일본 불교학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이것이다. 기무라야말로 이러한 한계를 일찍이 내다본 인물이다. 원전에 충실하며, 원전을 뛰어넘어 불교의 근본정신과 역사를 통찰하고 현재와 미래의 불교를 건설하고자 했다.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주효한 생각이다.

나아가 그는 불교학을 객관화하고자 했다. 불교의 성격을 밝히기 위한 종교학, 철학을 중시하고, 기독교의 신학적 관점을 참고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대 학문과의 조우를 통해 불교를 과거에 묶지 않고 인류 보편학으로 확장하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 동아시아의 불교는 깊은 신행으로 삶과 밀착되어 있다. 현실을 피안으로 안내하는 길잡이로서 기능하고 있다. 이를 파악한 그는 과거에 묻힌 불교나 관념적인 불교학이 아니라 활발발(活潑潑)한 생동감 넘치는 현실의 불교학으로 이끌어 갔다. 그의 모습에서 선 수행자의 임운등등 등등임운(任運騰騰 騰騰任運)의 무애자재의 경지를 보는 느낌이다.

기무라의 시대는 불교의 계몽주의가 최고조에 달하던 시대였다. 일본의 최대 교단인 정토진종 내에서 기요자와 만시가 그랬듯이 개혁을 통해 시대적인 교단으로 거듭나고자 했다. 또한 불교철학을 주장한 이노우에 엔료가 세운 철학관을 중심으로 활동한 신불교동지회는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사카이노 사토시, 와타나베 카이쿄쿠, 다카시마 베이호 등의 불교인들이 주동하여 금주 금연, 폐창(廢娼)운동은 물론 기관지 〈신불교〉를 통해 불교의 사회참여에 앞장섰다. 기성 교단의 구습 타파와 미신불교를 배척하고, 건전한 신앙을 기반으로 인류의 도의나 정의, 인도의 가치를 드러내며 사회의 근본적인 개선에 노력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재가 불교인들의 활동도 왕성했으며, 불교 공동체나 신불교 교단도 발생했다. 기무라의 사후인 1930년대에는 세노오 기로를 중심으로 신흥불교청년회가 자본과 국가주의의 배격, 제국주의와 전쟁 반대, 노동자와 농민의 보호 등을 외치며, 격렬한 몸짓으로 사회 깊숙이 들어오기도 했다. 불교학의 역할 또한 이러한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던 시대였다.

기무라는 자신의 학문을 불교 사회화의 도구로 활용했다. 학문적 지속성을 견지하며, 그 학문에서 파생된 언어를 지렛대 삼아 불교 본연의 세계로 직입한 것이다. 그는 불교가 일관된 세계를 가지고 있음을 역사를 초월하여 알고 있었다. 소승이든 대승이든 공적영지의 광명인 지혜를 구비한 붓다 이래 불교는 하나의 세계관 속에서 영속적으로 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원시불교사상론-특히 대승사상의 연원에 주의하여》(1922)의 서문에 “우리의 견해를 따르자면, 붓다 자신의 입장은 소위 순소승도 아니며, 순대승도 아니었던 것과 동시에 소승으로도 대승으로도 형성될 수 있던 방향을 구비했던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가 불교를 연구한 것은 이러한 붓다의 대 · 소승의 전 역사와 미래의 불교를 관통하는 세계관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신대승불교를 주장하는 것은 붓다의 일관된 가르침에 의해서였다. 이를 위해 붓과 말로써 불교 계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불교가 문명 치유를 위한 약재로써 널리 파급되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죽음과 마주하는 그 순간까지 불법의 생명이 붓다오르도록 혼신의 힘을 다했다. 지금쯤은 사바세계 어딘가에서 붓다와 하나가 된, 그 숙명의 업을 또다시 이어가고 있으리라. ■

 

   

원영상 wonyosa@naver.com
원불교 교무, 일본 교토불교대학 문학박사. 주요 논문으로는 〈일본불교의 내셔널리즘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그 교훈〉 〈근대일본의 화엄사상과 국가〉 〈소태산 박중빈의 불교개혁사상에 나타난 구조고찰〉 등과 저서로 《아시아불교 전통의 계승과 전환》(공저) 등이 있다. 현재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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