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화 연구 중요성 강조한 승려 학자

근대불교학의 도입과 대승비불설

일본의 대승비불설의 문제는 불교가 아카데미 내에서 근대적인 학문으로 정립되어 가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서구의 불교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 방법으로 문헌적 역사적인 연구가 도입됨에 따른 것이다. 불교에 대한 전통적인 수학은 수행과 신앙을 위한 불교 성전에 관한 훈고학적인 연구였다. 

대승불교에 대한 비불설은 에도시대에 최초로 토미나가 나카모토(富永仲基)의 《출정후어(出定後語)》에서 제기되었지만, 당시의 풍조 속에서는 단지 배불논서(排佛論書)로 수용되는 것에 그쳤다. 나카모토는 ‘가상(加上)’이라는 원리에 입각하여, 일체의 교법은 앞엣것 위에 뒤엣것이 부가되어 변화 발전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것을 기초하여 인도, 중국, 일본을 거쳐 전해지는 가운데 불교의 발전을 고찰하였다. 고찰의 결과로 석가의 직설은 초기의 아함부(阿含部) 경전 몇 장으로, 이후에 가상되어 차례로 대승교의 여러 설이 발전해 왔다고 하였다. 이러한 고찰은 논리적으로 보면, 지극히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당시에는 단지 배불론으로 인식되어 불교의 각 종파에서는 호법론적인 입장에서 반박하였다. 

근대 서구의 학문 방법론을 접하고 서구 불교학의 관점을 수용함으로써 과학적이고도 이성적인 태도를 강조하면서 대승의 비불설을 주장한 이가 아네자키 마사하루(姉崎正治, 1873〜1949)이다. 그는 《불교성전사론(佛敎聖典史論)》(1899) 서문에서, “오늘날 불교의 침체는 실로 그 사상가의 비이성적 전승에 맹종하여 다른 것을 돌아보지 않는 것에서 초래”한 것이라 하였고, “불교사상의 비과학적인 것은 대승불설론이 가장 심하다”라고 하였다. 

이는 근대에 학문을 하는 태도로서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현신불(現身佛)과 법신불(法身佛)〉(1904)에서는, 대승불전(大乘佛典)이 비판받고 있는 근거로서 대승불전은 ‘사료’로서 정확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명확하게 스승과 제자의 일상생활이 쓰이고 그 생활 속에 나타난 신앙 도행의 살아 있는 발자취를 전하는 아함부 불전과 오직 신화 장식에 힘쓰며 경문 찬탄에 여념이 없는 자칭 대승불전 중 어느 것이 사료로서 정확한가는 공평한 두뇌라면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여, 대승불전은 사료로서 정확하지 않음을 나타내고 있다. 나아가 불타 중심의 신앙을 잊고, 마침내 그림자 같은 공중누각의 불교가 된 것은 역사와 신앙 두 측면에서 모두 비웃음을 살 일이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들은 역사적인 면에서 대승불설을 비판하는 것은 물론 신앙적인 면에서도 대승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문헌비평을 통해 ‘원천’으로서의 불타신앙을 말하고 있다. 순수한 불교를 상정하고, 대승을 ‘원천’에서 멀어진 변질 혹은 타락으로 바라본 것이다. 그는 《근본불교》(1910)라는 책자에서, “불교의 원동력은 실로 불타의 심령적 자각에 있고, 그 흥룡은 불타의 인격적 힘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그 결과 대승불교는 물론 남방불교도 비판되었는데, ‘동방의 불교’는 그 ‘근저’를 잊은 것이라면 ‘남방의 불교’는 ‘지엽적’인 것이 불교의 현상이라고 한 것이다.

근대 서구의 과학적인 학문 방법론을 수용하여 역사적인 면에서는 대승비불설을 주장하면서도 교리적인 측면에서는 대승불설을 주장하는 이가 무라카미 센쇼(村上專精, 1851~1929)이다. 무라카미는 정토진종 대곡파의 승려로서, 하라 탄잔(原坦山)의 뒤를 이어 도쿄대학의 인도철학 강사가 되었고 오타니(大谷)대학 학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1890년부터 강의를 시작하여 1923년까지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도쿄대학에 재직하면서 이 대학의 불교학을 대표해왔다. 

그의 《불교통일론》 《대승불설론비판》 등이 대승비불설론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불교통일론》(1901)에서 그는 일본의 ‘통종파적 교리사’ 실현과 ‘종파의 합동’을 기도하는 작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불교통일론》 제1편 〈대강론(大綱論)〉의 부론에 해당하는 〈대승불설에 관한 비견(鄙見)〉 〈불신(佛身)에 대한 비견(鄙見)〉 등의 논지가 세론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나는 실제의 불타는 석가 한 사람이라는 설을 믿는 자이다. 기타 제불 제보살은 이상(理想)의 추상적 형용일 뿐, 구체적 실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근대의 역사적 관점을 수용하여 불타는 오직 인간 석가 한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기반으로 “나는 대승비불설을 단정한다”라고 하고 있다. 또한 다시 대승이 불타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 대승의 불타들과 보살들은 실제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점과 함께, “대승경론 유래의 역사가 신화, 괴담이라 역사적 사실로 참고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들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개발적 불교’로서 대승이라는 개념을 제안함으로써 대승불교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개발적 불교란 ‘석가로부터의 직접성’은 역사적으로 주장할 수 없지만, 그 ‘사상의 연속성’으로서 불교 신앙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 사상의 연속성은 ‘일정한 궤도’를 지킨 것으로 상정되면서 이를 통해 대승불교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그 이후 《대승불설론비판》(1903)에서, 신앙은 교리라는 말로 대체하면서 역사와의 관계를 대등한 위치에 두었다. 즉, “역사와 교리는 본래 밀접하여 서로 떨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하여도, 또한 역사를 떠나 교리가 독립해 있고, 교리를 떠나 역사가 독립해 있어서 서로 방해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대승비불설이 역사 방면에서 성립하는 것과 대등한 비중으로 대승불설을 주장한다. 곧 “대승비불설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문제로서 교리 문제가 아니다. 교리 방면에 있어서는 한 사람도 대승이 불설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자가 있을 수 없다. 만일 교리적 관찰로 하자면 대승은 실로 진실한 불설(佛說)로서 소승보다도 한층 더 수승한 것으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소승은 응화신(應化身)의 설이고, 대승은 진보신(眞報身)의 설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후카우라 세분의 대승비불설 비판

후카우라 세분(深浦正文, 1889~1968)은 1889년 나라(奈良)현의 불교 사원에서 태어났다. 정토진종 본원파의 승려이며, 나라에 있는 법만사(法滿寺)의 주지를 역임하였다. 류코쿠(龍谷)대학 연구과를 졸업한 후 인도로 유학하였으며, 후에 류코쿠대학 교수가 되어 유식과 구사를 강의하였다. 퇴임 후에는 서본원사(西本願寺) 권학(勸學)을 역임하였다. 해외특명 포교사로서 아메리카, 캐나다, 하와이에서 포교 활동을 하는 등 불교 보급에 진력하였다. 법상 유식을 전문으로 했지만, 그에 머무르지 않고 넓은 영역에 걸쳐 연구를 수행하였다. 1968년 향년 79세로 임종하였다.

후카우라는 일찍부터 대승불설 · 비불설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었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소책자가 불교문제신서(佛敎問題新書) 시리즈 제1권으로 출판된 《대승불설비불설의 문제(大乘佛說非佛說の問題)》(1963)이다. 이 책자의 서론에서 그는 “대승불설 · 비불설의 문제는 단순히 학문상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신앙상에도 관계를 미치므로, 불교학도로서 누구나 그것을 추구하고 확실한 견해를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다”라고 피력하고 있다. 

종전(終戰) 직후 국민 일동은 패전의 허탈 상태에서 종교의 무용을 주창하기도 하고, 전시에 호조를 타던 신도(神道)의 무리가 불교의 대두를 두려워하여 당시 각 종단 교리의 근본을 이루는 대승 경전은 불설이 아닌 무가치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에 성전의역(聖典意譯)에 종사하고 있던 후카우라는 오하라(大原) 교수와 상의하여 이러한 근심스러운 경향을 바루고자 하였다. 그래서 문서포교의 일환으로 《현대인의 종교적 의문에 대한 해답(現代人の宗敎的疑問の解答)》이라는 소책자를 발행하였는데, 그 가운데 대승비불설론에 대해서도 문답 형식으로 설명하였다. 

이에 대해 문학박사 이토 요시켄(伊藤義賢)은 후카우라가 정토진종의 승려로서 모든 학자의 잘못된 대승비불설론을 제대로 반박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그러자 후카우라는 신자들을 의혹의 구렁텅이에 빠뜨려서는 안 된다는 사명감에서 신자들이 망설이지 않고 이 문제를 명료하게 터득할 수 있도록 거듭 해설하는 《대승불설비불설의 문제》를 저술한 것이다. 이 책자가 대상으로 하는 독자는 전문 연구자라기보다는 일반인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는 정토진종의 승려로서 종교인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있다. 

먼저 경전의 성립사를 개관하고, 대승불설 · 비불설 문제를 다룬 과거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후카우라는 불설의 시비와 진위 여부는 교단이 상좌부와 대중부로 분열한 때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대중부 계통의 진취적인 사상 면면들의 교법들을 대승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소승 쪽은 불설의 언행록풍(言行錄風)인 성질이고 대승 쪽은 불설의 형이상학풍인 성질이다. 언행록풍의 것은 평면 묘사적으로 서술되어 그 사상이 유현심오(幽玄深奧)할 수 없으나, 형이상학풍은 입체 묘사적으로 서술되어 사상도 크게 유현심오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는 각각 그 몫을 하고 있고 장점이 있으므로, 결코 그 사이에 우열이 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대승불설자들(무착, 진나, 호법, 견혜 등)이 불설을 변호하고 있으나, 불설이라고 주장하는 이유가 너무나 빈약하고 낮아서 도저히 수긍할 수가 없다고 하고 있다. 그 이유는 비불설자의 공격은 주로 역사적인 사항 즉, 붓다가 직접 설한 것인지 아닌지에 관해 말하고 있는데도, 변호는 오로지 교리적인 사항, 즉 대승의 교리가 우수함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으로 응답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카우라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대승이 비불설임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소승의 경전도 과연 부처님이 직접 설한 법 그대로인가라는 의구심을 내보인다. 그리고는 소승의 경전도 부처님 설법 그대로의 속기(速記)가 아니며, 특히 현류(現流)의 소승 경전의 경우는 종종 후대의 사상이 찬입윤식(竄入潤飾)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불설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교리적인 관점으로 논의하는 것은 어떠한가라고 묻는다. 교리 사항으로 본다면 대승은 불설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승이라 칭해지는 본질은 부처님이 증오한 우주의 실체, 즉 진여(眞如)로 명명되므로 부처님을 밖으로 두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이미 대승이 불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또한 교리 사항으로 다루게 된다면 그것은 필경 신앙 사태와 관련되지 않을 수 없다. 신앙 사태와 관련이 되는 것은 결국 종교적인 것이 되어 분별 여부는 논리를 초월하여 직관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점에서 역사적 사실에만 입각하여 불설임을 논증하려고 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는 정토진종의 교리적 사항으로서 《대무량수경》이 불설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석존이 법을 깨닫고 설한 것은 숲의 나뭇가지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 설하지 않은 방광(方廣)의 법은 무명 천재들의 감응에 의해 대승의 경전으로 설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으로, 대승을 비불설이라고 결론짓고서 그것이 곧 학적논거(學的論據)에 입각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종교의 경전을 다루는 태도로서 매우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또 대승을 불설로서 그것을 이론화하기 위하여 무법(無法)한 역사적 입증에 초조해하는 것도 또한 방도를 벗어난 것이라고 한다. 그러한 논의는 경전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것에 아무런 의의도 가지지 못하는 빗나간 갈등으로, 진정으로 종교적 판별[味識]을 희구하는 점에서는 그러한 형식적인 논의를 넘어 바로 불의(佛意)의 내용 자체에 직참(直參)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보았다.

 

후카우라의 세분의 학문 연구 방법론

후카우라 세분의 불교 연구 방법론은 그의 저서인 《신고 불교방법론(新稿 佛敎方法論)》(1963)에 잘 나타나 있다. 책 서문에는 출판에 이르기까지의 경위를 자세히 밝히고 있는데, 저자가 불교 연구를 시작했을 무렵에 느꼈던 생각들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당시에 불교의 연구 방법이 다른 어떤 분야보다 뒤떨어져 있어서 아무런 신선함도 느낄 수 없었다고 한다. 류코쿠대학에 봉직하면서 불행도지(不幸島地) 선생의 권장이 동기가 되어 대학의 특수 강의로 처음 시작한 것이 《불전연구법(佛典硏究法)》이었다. 그 후에 《불전연구법》과 함께 엮은 것이 《불교연구법》이 되었고, 다시 중판(重版)의 요구에 부응하여 새롭게 수정 보완한 것이 《신고(新稿) 불교연구법》이다. 

책의 서론 부분에서, 과거의 연구 방법을 반성하면서 자신이 이 책을 저술하게 되는 동기를 서술하고 있다. 예부터 지금까지 해온 불교의 연구가, 단순히 문자를 훈고(訓詁)하는 데 그치고, 게다가 질서를 세워서 교의(敎義)의 핵심을 파악하려 하지 않고, 안타깝게도 주석해의(註釋解義)에만 빠져 사상의 중추에 육박하는 태도가 결여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관계로 새롭게 불교에 대한 연구 방법을 강구하여, 부당한 노력과 무의미한 수고를 피하고 진정으로 불교 자체의 진수에 도달하도록 이끌려고 한다는 것이 저술의 동기라고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본 책자는 불교의 초학자를 위한 안내서임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학술이론을 강조하여 전문적인 분야로 들어가려는 것은 아니라고 하고 있다. 단지 불교 연구상의 실제적인 방법을 서술하고 천심(淺深)과 차서(次序)를 드러내는 것임을 밝힌다. 

후카우라가 지향하는 불교 연구의 방법은 자료를 중심으로 크게 문헌과 예술 두 방면에서 찾고 있다. 즉, “무릇 불교를 폭넓게 연구하고자 하면, 주요 자료를 우선 문헌과 예술, 두 방면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 만약에 이 두 방면을 제외한다면 불교 연구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른바 문헌이란, 모든 불교 관계 문서를 의미하는 것으로, 장경(藏經)과 그 외의 불교 관련 서적을 포괄한다. 이른바 예술이란 모든 불교 관계 회화, 조각, 건축 및 의례 등을 총괄해서 지칭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불교예술로 여겨지는 모든 것들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문헌자료와 예술자료의 관계에 대하여는 “이것들은 모두 직간접적으로 가장 필요한 자료이고, 그중에서도 특히 문헌은 예술을 분명하게 하고, 예술은 문헌을 확실하게 하니, 그러므로 연구 효과가 더욱 증대된다”라고 하고 있다. 단순한 문헌연구만이 아닌 예술의 영역까지도 포함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폭넓은 연구가 될 수 없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교 연구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문헌에 있다고 보고, 불교 연구법 중에 문헌자료에 의하여 불교 연구를 하는 실제적인 방법을 서술하고 있다.  

후카우라는 문헌자료를 통한 연구를 크게 장경(藏經), 불전(佛傳), 교사(敎史), 교리(敎理) 등 네 가지 항목으로 분류하였다. 그 가운데 장경은 불교 교설의 총서집성(叢書集成)을 말하는 것으로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의 삼장에 대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이어서 불전(佛傳)은 역사상으로 나타난 인격적인 석존에 대한 연구는 물론 부처론으로서 역사를 초월한 이상적인 부처를 연구 대상으로 한다. 

교사(敎史)는 불교의 사적인 연구를 말하는 것이다. 사적 연구는 합리적이고 정확한 해명을 요구하는 것으로, 사실의 인과관계를 양지할 수 있고 또한 발달 변천을 캐낼 수 있다고 하였다. 과학적 연구 또는 합리적 연구는 이 사적 연구에 주안점이 있다고 피력한다. 하지만 종래 불교의 연구는 이러한 사적 연구는 등한시하고 오로지 교리 위에 문구(文句)의 훈고 해석을 행하고, 가능한 사적 관계에 유의하여 비판 의견을 낸다면 일률적으로 불손(不遜)하여 모독(冒瀆)이라 부르면서 그 죄과를 올리는 형국이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반면에 서구의 불교 연구는 과학적 연구에 입각하여 불교 연구에서도 무엇보다도 먼저 사적 연구에 착수한다고 하였다. 이제 학계의 진전에 따라 사적 연구의 중요성이 인증되고 있다고 자평하고 있다. 

이와 함께 교사의 범위는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으나, 서구 학자들은 남방불교의 소승교와 북방불교의 대승교로 나누어 주로 연구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불교의 역사적인 변천 사실이 가장 현저하게 나타나는 지역으로 인도, 실론, 중국 및 일본 등을 들고 있다. 특히 인도, 중국, 일본 등을 삼국불교라고 칭하면서 그 전파 사실이 유구하고 유포 지역이 광대하며 동시에 교도 신자들이 열성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이들 지역을 중심으로 변천 발달을 연구하여 사적 연구의 길잡이로 삼는다고 하였다. 

교리(敎理)는 불교 연구 중에서도 제일 주안점을 이루는 것으로, 장경과 불전 그리고 교사를 연구하는 것은 교리의 진면(眞面)을 명확히 파악하기 위한 예비적 연구라고 보았다. 장경의 연구는 곧 교리에 따라 세워지는 성전(聖典)의 유래, 조직 등을 밝히는 것이며, 불전(佛傳)의 연구는 교리에 따라 흘러온 본원(本源)인 부처의 기전(記傳), 사상 등을 다루는 것이며, 또한 교사(敎史)의 연구는 교리의 전파와 홍포 그리고 변천과 발달의 흔적을 연구하여 그 내용과 교섭을 상세히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모든 연구는 교리 연구의 원만을 기하기 위한 수단이라 볼 수 있다. 교리 연구는 크게 훈고적(訓詁的) 방법과 달의적(達意的) 방법이 있다. 훈고적 방법은 연구해야 할 전적(典籍)의 사사장구(詞辭章句)를 포착하여 그 의의를 논하고 용법(用法)을 내세우는 등 문자의 천착에 집착하는 방법이다. 달의적 방법은 연구해야 할 전적의 전체를 일관할 수 있는 사상 내용을 파악하여, 그 내용을 체득하는 데 힘쓰는 것이다. 이 둘의 방법은 서로 맞물려 연구되어야 연구의 완성을 기할 수 있다. 훈고적 방법은 달의적 연구를 적확(的確)하게 근거 짓는 것이며 달의적 방법은 훈고적 연구의 방향을 더욱 심오하게 진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교리의 연구는 개론의 연구에서 각론의 연구로 나아간다고 하고 있다. 

나아가 불교 연구에서 직접 보조학으로서 주요한 것들을 들고 있다. 언어학, 미술 및 미술사, 고고학, 지리학, 성음학(聲音學), 인명학(因明學), 경제학, 제도(制度) 연구, 역상(曆象) 연구 그리고 각 불교국의 문화를 들고 있다. 그 가운데 경제학은 불교교단의 경제 사정을 연구하는 것이며, 제도연구는 불교교단의 제도조직을 연구하는 것이다. 역상 연구는 천상(天象), 천력(天曆)에 관한 연구이며, 특히 밀교 연구에서 특히 그 중요성을 인정받는다. 즉 수법(修法), 기도(祈禱)의 길일양진(吉日良辰)을 결정하는 것과 같다. 

후카우라 세분의 연구 내용들은 대개 자신의 연구 방법론에서 보여준 것과 같이, 불교성전(佛敎聖典), 불전문학(佛傳文學), 유식학을 중심으로 한 교사(敎史), 교의(敎義) 등에 대한 연구이다.

  

 

후카우라 세분의 저술과 내용

후카우라는 일생 동안 50여 편의 논문류와 39권의 도서류를 저술했다. 그 가운데서도 연구 방법론에서 보인 장경(藏經), 불전(佛傳), 교사(敎史), 교리(敎理) 등의 연구 중에 대표적인 저술의 내용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장경의 연구에는 《불교성전개론(佛敎聖典槪論)》(1924, 1927), 《경전의 개요(經典の槪要)》(1926), 《승만경강화(勝鬘經講話)》(1935), 《반주찬(般舟讚)》(1035), 《유마경해설(維摩經解說)》(1939), 《유마경: 한화대조(漢和對照)》(1959) 등이 있다. 《불교대관(佛敎大觀)》의 제10편으로 〈불교연구법〉(1923)이 나온 이후, 그의 첫 번째 저술이라 할 수 있는 《불교성전개론》(1924)은 그가 류코쿠대학교 불교학 강좌의 특수강의로 강술한 것을 바탕으로 일반 독자를 위해 적절히 가감하여 정리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는 경전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로 경전의 성립, 전파, 조직, 내용, 가치, 종류 등에 관하여 비평적인 연구를 시도하였다고 한다. 그는 한역 경전이 질량 면에서 여타의 경전보다 백미(白眉)의 가치를 지니고 있고, 경전 지식을 일반에 보급하기 위해서 한역 경전을 중심으로 서술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목차를 살펴보면 빨리어 경전, 범어 경전 등이 원본 경전으로서 설명되고 있고, 역경 경전으로서 한역 경전은 물론 서장역, 몽고역, 만주역, 구주역(歐洲譯), 일본역까지도 소개, 설명하고 있다.

불전(佛傳)에 대한 연구로 《불전문학물어(佛傳文學物語)》(1961)가 있다. 서편(序篇)에서 석존 출세 당시의 인도와 본생담 등이 서술되고 태자편(太子篇), 구도편(求道篇), 성도편(成道篇), 설법편(說法篇), 만년편(晩年篇)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불전(佛傳)에 대한 연구는 그가 불교 연구를 시작할 때부터 문서포교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불교를 대중들에게 보급하기 위해서는 평이하면서도 분명하고 흥미로워서 독자들이 싫증 내지 않으며, 가능한 일반에 가까운 것을 다루고 그것에 더하여 표현이 유창하여 한 번에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결국 그것은 문학작품의 성질이 뛰어나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불교의 교리가 교주 석존의 자각으로부터 유출된 것인 이상, 석존의 숭고한 인격을 중심으로 불전문학(佛傳文學)이 서술되고, 그의 숭고한 인격으로부터 나온 교법은 경전문학(輕典文學)으로 서술되고, 나아가 그의 교법의 정신이 각지로 전파되어 문화적으로 영향을 끼쳐 국민정신에 감화되어간 문화문학(文化文學)으로 서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세 가지로써 불교 대중 보급의 완전을 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전문 자료를 찾아갈 필요성과 경전 연구에 몰두하면서 경전문학이 먼저 나오게 되었는데, 1929년에 출판된 《불교문학물어(佛敎文學物語)》이다. 《불교문학물어》는 불교로서의 종교적 가치와 문학으로서의 예술적 가치를 함께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불교 지식을 일반에 보급하기 위하여 집필하였다고 하고 있다. 

《불교문학물어》는 그 이후 1993년에 개정 보급하였고, 1941년에 보정판 보급, 1952년에는 《신고불교문학물어(新稿佛敎文學物語)》로 출판하였고, 1970년에는 《불교문학개론》으로 출판하였다. 

그리고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국민 의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면서 국민에게 불교 정신이 영향을 미치는 것을 터득시킬 필요성에 의해서 불교문화를 저술할 필요를 절감하였다. 그래서 저술한 것이 《불교문화물어(佛敎文化物語)》(1941)이다. 이는 경도부교육회(京都府敎育會)의 부탁으로 동기 학술강좌에서 〈일본 정신과 불교(日本情神と佛敎)〉라는 제목으로 강술한 것을 기회로 점차 증보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후에 다시 1965년에서 1966년에 《신고불교문화물어》(상 · 하)로 출판하였다. 

《불전문학물어》는 최초의 의도와는 달리 《불교문학물어》 《불교문화물어》가 나오고 류코쿠대학을 정년퇴직한 후에 착수한 것이다. 그것도 부인 잡지의 의뢰로 시작하였으나 도중에 신병으로 중도에 멈추었다가, 산중에서 병을 다스려 가며 쓰고는 쉬고 쓰고는 쉬면서 완성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인도 유학 중에 행한 불적 순례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밝히고 있다. 

유식학을 중심으로 교리 부문에 《유식론해설(상 · 하)》(1933~ 1934)과 1936년 수정 재판한 《유식론해설》이 있다. 1933년에 최초로 엮은 《유식론해설》은 스스로 유식론을 연찬하고 있었는데, 계유(癸酉)의 안거(安居) 중에 용곡학상(龍谷學庠)에서 강의하라는 존명을 받고 강의용으로 《유식삼십송》 본송 해설을 중심으로 엮은 것이다. 최초에는 제3능변(第三能變) 중 3성분별문(三性分別門)까지 상권으로 내고 이어서 하권으로 낸 것이다. 교사(敎史)와 교리(敎理)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유식학연구 상권》(敎史論, 1954)과 《유식론연구 하권》(敎義論, 1954)에서 이루어진다.

교사론에서는 인도, 중국, 일본 삼국의 교회사(敎會史)와 교리사적 발달을 서술하고 있다. 〈인도편〉은 유식의 선구 사상, 대승불교 흥기와 유식의 대성(大成), 청변과 호법 그리고 계현과 지광의 논쟁 유무를 논하고 있다. 〈중국편〉은 지론종과 섭론종의 성립과 특징, 법상종의 성립과 전통 그리고 법상교의의 특징을 논하고 있다. 〈일본편〉은 법상종의 일본 전래와 남북 양사(兩寺)의 전통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교의론은 〈종요편(宗要篇)〉 〈판교편(判敎篇)〉 〈만유편(萬有篇)〉 〈연기편(緣起篇)〉 〈전생편(轉生篇)〉 〈중도편(中道篇)〉 〈수도편(修道篇)〉 등으로 구성하고 있다. 교의론은 유식의 교리를 총망라하여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 성상학(性相學)으로서 빠지지 않는 것으로 《구사학개론》이 1951년에 저술되었으며, 1969년에는 3판이 발행되었다. 구사학은 기계(器界), 유정 등의 문제 즉 세계관, 인생관 등에 대한 정밀한 해석은 불교 천문학, 불교 인간학 등의 학문적 세계를 개척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부록으로 붙인 ‘육합석의 요지’는 불교 연구의 기초로서 연구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았다. 그 외 예술적인 부문과 관련해서 1951년 저술한 《종교와 예술(宗敎と藝術): 취미수필(趣味隨筆)》이 있다. 

후카우라 세분, 그는 불교의 사원에서 태어나 불교의 가정에서 자라났으며, 불교 학교에서 배우고 불교의 학업을 닦았다. 그는 승려로서, 학자로서 불교의 대중 보급에 힘썼으며, 유식학은 물론 불교문학과 불교문화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 ■

 

김치온 
동국대 행정학과, 동 대학원 불교학과 졸업(석사 · 박사). 위덕대 겸임교수 역임. 주요 논문으로 〈불교논리학의 성립과 전용 연구〉 〈청변과 호법의 공유논쟁에 대하여〉 〈규기의 이행이불성설과 소분일체에 대한 고찰〉 등이 있고, 저서로 《역주 조선불교통사》(공역), 《돈오대승정리결》(역서), 《인도 그리고 불교》 등이 있다. 현재 대한불교진각종 진각대학 교수,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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