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권 불교학의 기둥을 세우다

1. 서언

인순(印順, 1906~2005) 대사는 20세기 100년을 중국, 홍콩, 대만 등지에 머물면서 불교학 연구, 저술 및 출판, 강의, 후학 양성 등에 매진했다. 대사는 출가 수행자이면서 불교학자이고 동시에 스님과 일반인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일생을 지냈다. 대사가 중국과 대만의 현대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겼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인순 대사는 중국 근대불교를 이끌었던 고승 중의 한 사람인 태허 대사의 인생불교(人生佛敎) 가르침을 바탕으로 인간불교(人間佛敎) 사상을 제시하고, 삶 속에서 이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이를 대만 불교계에 전파하면서 불광산사, 자제정사 등 대만 신흥 불교단체의 성장과 활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인순 대사의 행장은 재단법인 인순문교기금회(印順文教基金會)의 홈페이지(www.yinshun.org.tw-
/yinshun/biography.html)에 비교적 소상히 게시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나 상세하게 확인할 수 있으며, 반훤(潘煊)이 저술한 《인순도사전(仁順導師傳)》(2009)에도 상술되어 있다. 이들 자료의 분석을 통해 인순 대사의 행장은 1949년 44세를 기준으로 그 이전은 중국 대륙에서의 활동 기간이었으며 그 이후는 홍콩과 대만에서의 활동으로 크게 구분해 볼 수 있었다. 또한 대사의 100년에 걸친 행장을 세분화하면 1906년 출생과 성장기, 1930년 25세의 출가수행 및 경전 공부 과정, 1939년 34세 이후의 교육 및 연구 활동기 등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교육 및 연구 활동기는 중국 대륙에서의 승가 교육과 연구 활동, 1949년 44세에 홍콩으로 이주 후 3년간의 활동, 그리고 1952년 47세부터 대만에 정착한 이후의 활동으로 세분할 수 있다.

인순 대사의 일생이 중국 대륙과 홍콩, 대만 등 여러 지역을 이주하면서 다이내믹하게 전개된 것은 당시의 정치 사회적 격변기 때문이다. 대사는 1932년 일본의 공격으로 만주사변이 시작되면서 중국 대륙의 여러 곳을 전전하였고, 1949년 국공내전이 국민당의 패퇴로 이어지면서 홍콩으로 이주하였다. 홍콩에서 3년여를 머문 뒤 다시 세계불교우의회(世界佛教友誼會)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대만으로 이주한 이후 약 53년간을 대만불교를 포함하여 화교권 중국불교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 글에서는 인순 대사의 행장을 크게 일곱 부분으로 세분하여 분석하였다. 그리고 인순 대사의 저술에서 나타난 인간불교 사상과 그것을 통해서 남기고자 했던 메시지를 살펴보고자 했다.

2. 인순 대사의 행장

1) 성장 과정과 교회학교 교사 활동

인순 대사는 1906년 저장성(浙江省) 하이닝현(海寧縣)의 농촌에서 태어났다. 저장성 인근에는 관음성지로 유명한 보타산과 낙가산이 있으며 하이닝현이 속해 있는 항저우시에는 영은사 등 고찰이 즐비하다. 대사는 1911년 6세에 서당에 입학하였으나 다음 해인 7세에 신창진(新倉鎮)으로 가서 초등소학교에 입학했다. 10세에 초등소학교를 졸업한 뒤 집에서 약 반년을 독학하다가 협성진(硤石鎮) 공립 개지고등소학교(開智高等小學校)로 진학했다. 이때 선생님들로부터 ‘매우 출중하다’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작문 실력을 인정받았다. 

1918년 16세에 고등소학교를 졸업한 인순 대사는 학교 인근에 있던 중국 한의사 집에서 사사하며 공부했다. 이 시기에 대사는 도가의 《단경(丹經)》, 음양오행과 관련된 《술수(術數)》 《노자(老子)》 《장자(莊子)》를 비롯해서 기독교의 구약(舊約)과 신약(新約) 등 다양한 서적을 읽었다. 이때 대사의 부친은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여 교회부설 사립초등학교에서 초등학생을 지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이를 계기로 대사는 교회부설 소학교에서 1929년 24세가 될 때까지 교사직을 맡게 되었다.

1928년 23세가 되었을 무렵 불행하게도 모친이 작고하고 이어서 작은할아버지까지 별세하자 비통함이 매우 컸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28년 아버지까지 사망하면서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이 당시 인순 대사는 자신이 이해한 부처님의 가르침과 현실 불교계 사이에 괴리감이 있음을 인식하였다. 그리고 불법을 공부하고 진리를 탐구하여 순수한 불법(佛法)을 전하고자 하는 원력을 세움으로써 출가 결심이 더욱 확고해졌다.

2) 출가와 수행, 그리고 경전 연구

1930년 25세에 즈음하여 북평보리학원(北平菩提學院)의 원생모집 광고를 보고 입학시험을 보고자 떠났다. 그러나 보리학원 개학이 무산되면서 떠돌다가 보타산(普陀山) 복천암(福泉庵)에서 청념 화상(清念 和尚)을 은사로 출가자의 삶을 시작했다. 그리고 천동사(天童寺)에서 예욱산 스님(禮昱山 上人)을 의사부(義師父)로, 원영(圓瑛) 노스님을 계화상으로 모시고 구족계를 수지했다. 다음 해인 26세에 은사인 청념 화상의 지원을 받아 하문(廈門) 남보타사(南普陀寺)에 있는 민남불학원(閩南佛學院)에 편입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다양한 글쓰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에는 대성 법사(大醒 法師)의 추천으로 고산 용천불학원에서 가르침을 받게 되었으며, 고승 대덕인 허운(虛雲)과 자주(慈舟) 장로를 만날 수 있었다.

1932년 27세에는 민남불학원 원장대행 대성법사의 명으로 같은 반 학생들에게 《십이문론》을 강의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인순 대사는 더욱 내실을 기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불정산(佛頂山) 혜제사(慧濟寺)로 가서 대장경을 열람하며 스스로 새로운 불교 공부를 시작했다. 불정산은 주산열도에 있는 보타산에 속해 있으며, 중국불교 4대 명산 중의 하나로 알려진 관음성지이다. 보타산에는 청나라 건륭 연간에 보제사(普濟寺), 법우사(法雨寺), 혜제사(慧濟寺) 등 3개의 큰 사찰과 조음동(調音洞)을 비롯한 88개의 암자, 148개의 기도원이 있었던 명승지였다. 인순 대사는 혜제사에서 독학으로 경전을 공부하면서 〈불법의 위기와 그 구제[佛法之危機及其救濟]〉라는 글을 지었다. 그리고 수배(守培) 법사가 ‘유식 신구 2역을 논박한 글’에 대해 견해를 달리한다는 글을 쓰기도 하였다. 

1934년 29세에는 무창불학원(武昌佛學院)으로 가서 반년 동안 삼론종 관련 장소(章疏) 등을 열람하고, 설동사(雪竇寺)에서 처음으로 태허 대사(太虛大師, 1890~1947)를 친견했다. 태허 대사는 중국불교총회를 조직하고, 1921년부터 《해조음(海潮音)》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는 등 중국불교의 세계화를 위해 노력한 고승이다. 태허 대사는 선(禪)과 유식(唯識)에 능통하며 불교와 자연과학의 조화와 유식철학을 제시하였다. 

인순 대사는 3년여의 대장경 열람을 마친 후 1936년 31세에 불교의 참뜻을 몰록 깨닫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보타산을 떠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대사는 불교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새로운 인사들과 만나고, 새로운 법의(法義)에 진입할 수 있었으며 이때의 공부가 향후 수십 년간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무창불학원 연구반을 개석하고 태허 대사의 명을 받아 〈삼론(三論)〉을 지도하였다.

3) 한장교리원 강의와 저술 활동

1937년 중국은 일본의 침략에 맞서 항일전쟁을 시작했으나 난징이 함락되는 비운을 맞이했다. 무한(武漢)까지 위험에 처하자 인순 대사는 도반인 지안(止安) 법사와 함께 의창(宜昌)을 거쳐서 중경(重慶)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사천성四川省) 진운산(縉雲山)에 위치한 한장교리원(漢藏教理院)에서 법존(法尊) 법사를 만나 교학에 관련된 깊이 있는 토론을 벌일 수 있었다. 한장교리원은 태허 대사가 1930년 설립한 현대적인 승려 교육기관이었다. 인순 법사는 이곳에서 법존 법사와의 만남에 대해 “수행과정의 가장 수승한 인연”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때 주계무(周繼武) 거사의 《기신론정오(起信論正謬)》에 대해 총평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1939년 34세에 인순 대사는 한장교리원에서 강의를 시작했으며, 태허 대사가 임어당의 저서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吾國與吾民)》을 보내면서 불교와 관련된 내용 중 잘못된 점을 바로잡을 것을 당부하자,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우리 민족과 불교(吾國吾民與佛教)》라는 소책자를 만들어 동학들과 나누어 보고, 각계각층에 책자를 기증했다. 이 소책자가 인순 대사가 생애 처음으로 출판한 첫 번째 저술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때 동학인 법존 법사가 새로 해석한 《밀종도차제광론(密宗道次第廣論)》을 윤문하였다.

1940년 35세에는 귀양(貴陽) 대각정사(大覺精舍)에 주석하면서 《유식학탐원(唯識學探源)》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인순 대사가 불교 교학과 관련하여 진지하고 체계적으로 집필한 첫 번째 저작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해 겨울에 다시 한장교리원으로 돌아가서 연배(演培), 묘흠(妙欽), 문혜(文慧) 등의 법사들을 처음 만나 교류했다. 이들은 입적할 때 까지 인순 대사와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제자이면서 동시에 도반들이었다.

1941년 36세에 한장교리원 1학기 수업에서 앞의 세 스님들을 위해 《섭대승론(攝大乘論)》을 강의했으며, 후에 이 강의 내용과 토론 자료들을 모아서 《섭대승론강기(攝大乘論講記)》를 만들었다. 이때의 연구가 ‘인간불교’ 사상의 제1편인 〈불재인간(佛在人間)〉의 주요 내용으로 자리 잡았다. 같은 해 추석 전날에는 탈진하여 의식을 잃기 전까지 염불 수행을 하며 특이한 경계에서 자신의 깨달음을 점검하였다. 건강을 회복한 인순 대사는 사천성 합강(合江)에서 법왕학원을 설립한 연배(演培) 스님의 초청을 받았다. 연배 스님은 인순 대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법왕학원을 개원하였으며, 이때 대중들로부터 ‘인순도사(印順導師)’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그해 연말에는 〈법해탐진(法海探珍)〉을 발표하면서 대승의 3계통으로 ‘성공유명(性空唯名)’ ‘허망유식(虛妄唯識)’ ‘진상유심(真常唯心)’ 등 세 가지 원리를 제시했다. 

1942년 37세에 인순 대사는 《인도의 불교(印度之佛教)》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대사의 사상을 대표하는 첫 번째 저술이며 정문학사(正聞學社) 명의로 중경에서 발행했다. 태허 대사는 이 책을 읽고 나서 〈인도불교에 대하여(議印度之佛教)〉를 발표했고, 인순 대사는 존경의 답신으로 이에 화답했다. 법왕학원에서는 ‘중관론’ 송을 강의하였으며, 《청년의 불교와 불교의 청년》 《청년불교운동소사》 《청년불교참방기》 《잡화잡기》 등을 저술하였으며, 대사의 강의를 연배 법사가 기록하여 책으로 만든 《금강반야바라밀경강기》 등도 발간되었다.

연배 법사는 인순 대사의 강의를 기록하여 출간하는 데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중관론송강기》는 인순 대사의 중관사상을 설명하는 핵심 저술로 평가받고 있다. 이 시기에 태허 대사와의 교류도 계속되었다. 태허 대사는 〈인도불교를 다시 논의하다〉라는 글을 썼으며, 인순 대사는 〈무쟁지변(無諍之辯)〉을 지어 공경하는 마음으로 답신을 보냈다. 한장교리원의 속명(續明) 법사 등과 서신을 통해 대승을 논의한 후 〈대승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大乘是佛說論)〉로 내용을 수정하였다.

1944년 39세에 인순 대사는 묘연(妙欽) 법사와 함께 〈중국불교사략(中國佛教史略)〉을 저술했다. 대사는 법왕학원의 임기 3년을 원만하게 회향하며 한장교리원으로 되돌아갔다. 이후 한장교리원에서는 아함경을 강의하였는데 이 내용이 불교개론의 일부분으로 사용되었으며, 그밖에도 ‘정치경제와 불법(佛法)’ 등을 강의하였는데 이 내용은 《유식학탐론(唯識學探源)》에 포함되었다. 

1945년 40세, 태허 대사가 발행하는 월간지 《해조음(海潮音)》에 한장불학원에서 강의한 〈아함강요(阿含講要)〉를 1년간 게재하고 그 장려금으로 《진한시대의 불교》를 간행할 수 있었다. 1946년 41세, 27만 자에 달하는 《섭대승론강기》를 간행하고, 무창불학원 세원도서관(世苑圖書館)에서 ‘불교를 부흥시키는 담론에 따른 불교학 연구’라는 주제로 특강을 했다. 

1947년 42세, 인순 대사는 항주 옥불사에서 태허 대사를 친견할 수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태허 대사는 얼마 후 입적했다. 대사는 《태허 대사 입적 백일제문》을 쓰고, 《태허 대사전서》 편찬의 주필로 참여하면서도 《중국불교사략》 등 다수의 책을 발간했다. 

1948년 43세에는 응민원(應閩院) 성원(性願) 법사의 초청으로 계단의 증명법사가 되었다. 이로써 인순 법사는 불교계를 대표하는 스승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도 《불교의 대두와 동방인도》라는 책을 간행하였으며, ‘유식과 불교의 특색’ 등과 관련된 글을 쓰는 등 다양한 저술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4) 홍콩 이주와 전법 활동 전개

1949년 44세, 국공내전이 발생하면서 인순 대사는 중국 대륙을 떠나 홍콩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당시 대사는 하문(廈門) 남보타사(南普陀寺)에 대각강사(大覺講社)를 설립하여 강의를 시작하였으나 법방(法舫) 법사가 홍콩으로 건너오기를 재촉하면서 숙소와 생활 기반을 제공하자 속명(續明), 상각(常覺), 광범(廣範) 등의 스님들과 함께 피신했다.

1950년 45세, 인순 대사는 홍콩에서 《반야바라밀다심경강기》 《혁명시대의 태허대사》 등 7권의 저서를 발간했다. 그리고 홍콩 신계(新界)지구에 있는 정업림(淨業林)에서 속명, 상각, 인준(仁俊), 오일(悟一) 스님 등과 함께 주석하면서 《불멸기년결택담(佛滅紀年抉擇談)》 《정토신론(淨土新論)》 《대승기신론강기(大乘起信論講記)》 등을 저술했다. 

3년간 홍콩에 머물던 인순 대사는 1952년 47세에 중화민국의 중국불교회를 대표하여 일본에서 개최된 세계불교우의회(世界佛教友誼會) 제2회 대회에 참여하였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대만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5) 대만 이주와 해외 홍법 활동(40~50대)

대만에 정착한 인순 대사는 1953년 48세에 태허 대사가 운영하던 불교 잡지 《해조음》의 사장을 맡게 되었으며, 이후 20년간 재임했다. 그해에 대사는 복엄정사를 창건하였고, 〈불교와 인류평화〉를 비롯한 다수의 글을 쓰고 일부는 책으로 발간했다. 그리고 복엄정사(福嚴精舍)에 승려교육을 담당하는 독립학단(獨立學團)을 설립하였다. 이 시기에 함께 수학한 인순 대사의 제자들 중에는 인해(印海), 묘봉(妙峰), 융근(隆根), 진화(真華), 환생(幻生), 정종(正宗), 수엄(修嚴), 통묘(通妙) 등의 스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1954년 49세에 인순 대사는 낙생요양원(樂生療養院)의 환자들을 병문안하고, 병원의 불당건립을 후원하였다. 그리고 선도사(善導寺)에서 강의하면서 〈나의 종교관〉 〈일반도덕과 불화도덕〉 등 다양한 글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성원(性願) 법사의 초청으로 필리핀으로 건너가 홍법(弘法) 활동을 전개했다. 

이 일은 인순 대사가 아시아 각국으로 전법교화 활동에 나선 첫 번째 해외순방이 되었다. 대사는 1955년 2월 3일부터 7일간 마닐라 대승신원사(大乘信願寺)에서 〈불교의 재부관(財富觀)〉 〈신교(信敎)와 신앙불교〉 〈참회의 진의(眞義)〉 〈인간에서 성불로 가는 길〉 등의 제목으로 설법하였다. 그리고 마닐라 불교거사림회, 세부 화교중학교 등에서 거사들을 위해 거사법(居士法)을 설하였으며, 대만으로 돌아와 타이베이 선도사에서 ‘필리핀 불교 만담’을 주제로 강의하였다. 

1956년 51세, 인순 스님은 선도사의 초빙을 받아들여 주지로 취임하고 진산식을 봉행했다. 1957년 52세부터 인순 대사는 해외 활동을 확대했다. 부처님 열반 2,500년을 기념하기 위한 태국의 행사에 참여하고 총리를 예방하였다. 이어서 캄보디아의 프놈펜을 방문했다. 이 해에 삭발 은사인 청념 스님이 입적하여 대만 복엄정사에 봉안했다. 그리고 신주 여중불학원을 설립하여 학장직을 맡게 되면서 선도사 주지를 사퇴했다. 

1958년 53세에는 다시 필리핀 마닐라를 방문하여 홍법 활동을 전개하였고, 대만의 성원사(性願寺)와 화장사(華藏寺) 등 두 사찰의 연합주지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신원사(信願寺)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능인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 학교는 후에 초등학교와 중학교로 개편되었다.

1959년 54세, 왕전(王田) 선광사(善光寺)에서 새해를 맞이하면서 《성불의 길(成佛之道)》을 탈고하여 다음 해에 출판했다. 그리고 그해 말 〈불법을 발양하여 세계적인 신문화를 조성하다〉라는 글을 썼다. 1960년 55세, 필리핀 포교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서 일반인을 교육하는 능인학교를 설립하였고, 대만에서는 승려 교육기관인 혜일강당을 사찰과 함께 설립했다. 

1961년 56세, 혜일강당을 완공하여 개원하고, 〈불교와 교육〉 등 다양한 내용의 글을 계속 발표하였다. 그리고 국립정치대학 교육연구소 초청으로 ‘불교의 마음에 대한 심리학적 철학적 의의’라는 주제로 5주에 걸쳐 특별 강연을 하였다.

1962년 57세, 혜일강당에서 《대보적경》에 관해 특강을 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추후 《보적경강기(寶積經講記)》를 출판했다. 혜일강당에서는 매일 약사법회(藥師法會)를 봉행하였으며, 국립대만대학에서 ‘불교학의 양대 특색: 대승공의와 일대기덕(一代耆德)’에 관해 특강을 했다.

1963년 58세에는 태국 종교청에서 대만에 승가방문단을 특파하여, 이들 일행 4명이 혜일강당을 방문하여 상호 교류가 확대되었다. 1964년 59세, 혜일강당에서 《변법법성론(辨法法性論)》을 강의한 후 이를 바탕으로 책자를 발간했다. 이 해에 혜일강당 주지를 사퇴하고 그 뒤를 인해 법사가 계승했다. 그리고 이병남(李炳南) 노거사가 보리의원(菩提醫院)을 건립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중 스님들과 논의하여 50만 위안을 지원하기로 결정하는 등 대사회적 활동도 확대하였다.

6) 박사학위를 취득한 인순 대사의 홍법 활동

인순 대사는 1965년 60세에 접어들면서 일본, 미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외국을 방문하여 국제적인 홍법 활동에 주력하였다. 이 시기에 가장 먼저 한 일은 일본 승려 후지요시 츠가이(藤吉慈海) 교수의 예방을 받고 정토교의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했다. 이때의 토론 내용을 후지요시 츠가이 교수가 일본의 인도학불교학 대회에서 발표함으로써 일본 불교학계에 인순 대사의 ‘정토신론(淨土新論)’을 소개할 수 있었다. 중국문화학원에서는 인순 대사를 대학부 철학과 교수로 임용함으로써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불교학개론》과 《반야학》 등을 강의할 수 있게 되었는데, 중국 불교계 최초로 대학교수가 된 비구승이었다. 당시 대사는 두문불출하는 폐관수행 기간 중이었으나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불교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폐관수행을 1년 만에 파하는 결단을 내렸다.

1966년 61세, 황진(黃陳) 굉덕건(宏德建) 거사가 보은소축(報恩小築)을 신축하고 인순 대사가 장기간 주석할 수 있도록 하였다. 타이중 보리병원에 태허 대사 기념관이 완공되면서 인순 대사는 〈태허 대사 전략(太虛大師傳略)〉을 지었다. 1967년 62세에 인순 대사는 교육부장관을 역임한 장기운 거사가 설립한 중국학술원의 철학교수로 초빙되어 ‘태허 대사의 보살심행’ ‘입세(入世)와 불학을 논함’ 등의 주제로 강의를 담당했다. 이로써 인순 대사는 중국문화원 철학교수, 중국학술원 철학교수 등을 역임하였으며, 젊은이들과 접촉하면서 불교학 발전의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인순 대사는 보은소축의 묘운난야(妙雲蘭若)에 주석하면서 틈틈이 《묘운집(妙雲集)》 편찬을 시작하여 4년에 걸쳐 완성하고 이를 출판하였다. 이 책은 인순 대사가 《반야경》 《보적경》 《승만경》 《약사경》 《중관론송》 《섭대승론》 《대승기신론》 등의 경전을 강의하면서 기록한 내용과 《불법개론(佛法槪論)》 등 총 24종의 저술을 망라하고 있다. 이 전집은 상 · 중 · 하 3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편은 경(經)과 논(論)의 강기(講記) 등 7권, 중편은 10만 자 이상으로 독자적 저술인 《중관금론(中觀论論)》 《성불도(成佛道)》 등 6권, 하편은 각종 유집(類集)으로 11권이 포함되어 총 24권이다. 그리고 1968년 63세의 인순 대사는 45만 자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저술 《설일체유부의 논서와 논사에 관한 연구》를 출간하였다.

인순 대사의 국제적인 홍법 활동은 싱가포르로도 이어졌다. 싱가포르불교회는 인순 대사를 초청하여 특강을 개설하였으며, 이때 대사는 ‘불교는 구세의 인(仁)’ ‘인심과 도심 별설’ 등의 주제로 강의하였다. 그리고 1969년 64세에 말레이시아의 홍법원 초청으로 방문하여 설법하였다. 10년 후인 1979년 74세가 되었을 때는 말레이시아 광종(光宗) 법사 일행이 대만으로 와서 인순 대사에게 18일 동안 매일 1시간씩 《입아비달마론(入阿毘達磨論)》 강의를 들었다.

재가불자를 대상으로 한 홍법 활동은 주로 재가오계와 보살계 수계식 참여를 통해 이루어졌다. 1970년 65세에 가의(嘉義) 천룡사(天龍寺) 심일 화상(心一 和尚)의 초청으로 수계식을 주관하였으며, 이때 《돈황본 육조단경》과 관련된 연구를 시작했다.

인순 대사의 사상과 홍법 활동이 일본 불교학계에 소개되고,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 저술은 28만 자에 달하는 방대한 《중국선종사(中國禪宗史)》였다. 이 저술은 일본학자 우시바 효진(牛場玄眞)에 의해 일본어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73년 68세에 일본 대정대학(大正大學)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이로써 인순 대사는 교수직을 역임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중국 최초의 비구승으로 평가받았다. 

1977년 72세에 말레이시아 금마륜(金馬崙) 삼보사(三寶寺)에서 봉행한 수계식에서 전계대화상으로 초청받아 성황리에 원만하게 봉행했다. 1978년 73세에도 대만 송산사(松山寺)에서 봉행한 삼단대계 수계식에서도 수계화상을 역임했다. 그리고 1984년 79세에는 화련(花蓮) 자제의원(慈濟醫院) 착공식에 참석하여 비구니 증엄 스님의 의료사회사업을 지원했다.

인순 대사가 60대와 70대에 저술한 주요 출판물은 《중국 고대 민족 신화와 문화의 연구》(1975), 《대수긴나라왕소문경게송강기》(1975), 《왕생정토론강기》(1976), 《초기대승불교의 기원과 전개》(1981), 《여래장 연구》(1981), 《잡아함경론회편》(1983) 등이다.

7) 80세 이후의 저술과 홍법 활동

80세 이후에도 인순 대사의 저술 활동과 홍법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노환으로 인한 어려움은 극복하기 어려웠으나 잘 견뎌내었다. 85세에 뇌 이상으로 대만대학병원으로 긴급 이송 후 수술을 받은 인순 대사는 대갑(大甲) 영광사(永光寺)에 주석하였다. 그리고 1991년 86세에 대만 복엄정사를 재건하여 완공하자 수계사로서 재가 보살계 수계식을 직접 봉행했다. 1993년 88세에도 위중하여 입원 치료 후 퇴원하기도 했으며, 1999년 94세에도 화련의 자제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잘 극복했다. 

인순 대사는 1994년 89세의 노구를 이끌고 9월 6일부터 29일까지 제자 후관(厚觀) 법사 등을 대동하여 지난날 출가하여 수학하고, 홍법의 인연이 있었던 중국 대륙의 사찰과 주요 인사들을 차례로 방문하였다. 이때 대사는 남보타사(南普陀寺), 민난불학원, 천동사(天童寺), 설두사(雪竇寺), 보타산에 있는 보제사(普濟寺), 복천암(福泉庵), 예제사(慧濟寺), 법우사(法雨寺) 그리고 상해 옥불사를 비롯하여 북경, 항주, 해녕 등 머나먼 길을 마다치 않고 찾아갔다. 그리고 묘심(妙湛) 노스님, 제자인 후학(厚學) 스님, 중국 재가불교의 거두인 조박초(趙樸初), 곽명(郭朋) 등도 직접 찾아가 만났다. 

1995년 90세를 기념하여 법고산문교재단과 불교청년문교재단은 공동으로 ‘인순 대사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하여, 대사의 구수를 축하했다. 1997년 92세에 혜일강당 중건 낙성식에 참가하였으며. 재단법인 인순문교재단이 신죽(新竹) 현 죽북(竹北) 시에서 공식 출범했다. 2000년 들어 95세의 노구를 이끌고 자제공덕회의 정사정사(靜思精舍)에서 머물면서 관음전 낙성식을 주관하고, 화우정사(華雨精舍)에서 인순 대사 출가 70주년을 축하하는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2001년에는 복엄불학원(福嚴佛學院)을 대학부 4년, 연구소 3년 등의 교육과정으로 개편하였다. 

2002년 97세에는 《인순법사불학저작집》의 디스크판 제3판이 발간되었다. 복엄정사 창건 50주년 기념일에 인순 대사가 직접 축사를 하였으며, 복엄정사 50주년 회고전을 참관하였다. 2004년 99세 인순 대사의 백세 숭수(嵩壽)를 축하하기 위해 대만의 주요 사찰 연구소 등이 연합하여 공동으로 인순 장로와 인간불교 관련 불교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하고 논문집을 발간했다. 그리고 2005년 6월 4일 100세에 화련 자제병원에 입원, 심막 수술을 진행하였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입적하면서 중국불교의 빛이 되어 세간을 떠났다. 

80세 이후 입적할 때까지도 인순 대사는 많은 책을 출판하였으나 대표적으로 《유심법해(遊心法海) 60년》(1985년), 《공의 탐구》(1985), 《인도불교사상사》(1988), 《대지도론의 저자와 그 번역》 일역본 (1993), 《화우집(華雨集)》(1993년) 5책, 《인간불교논집》 《중국불교논집》(2002) 등이 있다.

3. 인순 대사의 인간불교 사상과 전승 

인순 대사는 대장경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불교학자이며,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글을 발표하고 이를 책자로 출판한 저술가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그리고 인순 대사는 불교철학자이면서 사상가로도 평가받을 만한 고승이었다. 대사가 남긴 가장 중요한 화두는 ‘인간불교(人間佛敎)’였다. 

인순 대사의 ‘인간불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스님은 태허 대사였다. 태허의 ‘인생불교(人生佛敎)’의 개념은 그가 주장한 불학의 세 가지 측면에 기반을 두고 있다. 즉 현실의 인생을 중시하는 인생 불학, 과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한 과학 불학, 대중의 역량을 결집하는 실증 불학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태허는 1913년 상해 정안사에서 불교의 3대 혁명을 주장하였는데 그 내용은 불교 교리를 새롭게 해석하는 교의(敎義) 개혁, 승단을 개혁하는 교제(敎制) 개혁, 불교재산을 합리적으로 관리하는 교산(敎産) 개혁 등이다. 

이러한 태허의 인생불교 사상을 수용하고 발전시킨 인순 대사는 〈불재인간(佛在人間)〉이라는 글에서 “죽음과 귀신, 영생 등 인간이 아닌 인간 외적인 권위에 매달리는 전통불교의 폐단을 벗어나 ‘인간’이 중심이 되는 불교”를 주장했다. 즉,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인간의 견실함과 인간 그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인간불교로 규정하였다. 인순 대사는 동서양의 종교적 행태를 비판하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혜, 덕행, 용맹이라는 세 가지 덕목을 발전시켜 불성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순 대사의 인간불교는 인간 개개인의 ‘자기 강화(强化)’와 ‘자기 정화(淨化)’를 성취하는 불교를 주장한다. 

태허 대사는 중국 호북성 무창불학원(1922년), 복건성 민남불학원(1925년), 사천성 한장교리원(1932) 등을 설립했는데, 인순 대사는 이들 불학원에서 경전을 연구하고 승려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통해 후학을 배출하는 데 열중했다. 이때 인순 대사에게 배웠던 불학원 출신 스님들이 중국 근대불교를 변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인순 대사의 인간불교 사상은 불광산사의 성운 스님과 자제정사의 증엄 스님 등과 같은 후학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성운 스님은 세계불광청년회를 설립하고, 전 세계에 300여 개 도량을 건립하고 5개 대학을 설립하면서 인간불교의 실천에 나섰다. 증엄 스님은 자제정사를 중심으로 세계 각지에서 봉사, 의료, 교육 및 문화 개발 등 4대 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증엄 스님은 “인순 대사를 만난 것은 불교 수행을 하는 동안 받은 가장 큰 가피”라고 회고하면서 인간불교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인순 대사의 기고 활동은 1931년 26세에 ‘삼시교를 선택하다’라는 의미의 〈결택삼시교(抉擇三時敎)〉를 시작으로 1993년 88세에 화우정사(華雨精舍)에서 〈초기 대승과 재가불교〉를 집필할 때까지 62년간 지속되었으며 약 220여 편의 글이 남아 있다. 그리고 출판된 단행본은 1940년 35세에 구이양 대각정사에 주석하면서 《유식학탐원(唯識學探源)》을 시작으로 1993년 88세에 화우정사에서 《평범한 일생》 증정본을 간행할 때까지 53년간 약 30여 권에 달한다. 주요 단행본은 불학원에서 각종 경전을 강의한 내용을 제자들이 기록하여 출판하고 교재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저술들은 강의 기록이라는 의미로 강기(講記)라는 제목을 붙였다. 인순 대사가 강의한 경전류는 《아함경》 《묘법연화경》 《보적경》 《약사경》 《승만경》 《금강경》 《중관》 《유식학》 《섭대승론》 《대지도론》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인순 대사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은 《중국선종사》인데, 일본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으며 이 책의 출판을 계기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도불교사상사》 《성불의 길》 《성공학탐론(性空學探論)》 등도 인순 대사의 인간불교 사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인순 대사의 기고문, 논문, 저술 등은 분야별로 정리하여 《묘운집》 《화우집》 《인간불교논집》 등에 포함해 출간하였다.

 

4. 결어

현대 중국 및 대만 불교계에 끼친 인순 대사의 영향력은 결코 가벼이 평가할 수 없다. 대사는 중국 전통불교를 현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이를 대만 불교계에 전파시켜 신흥 불교단체가 형성되는 데 기여하였다. 그리고 그의 사상은 대만의 여러 스님에 의해 현실사회에서 구현되었고, 해외 홍법 활동을 통해 국제화로 나아가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불교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경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미래세대가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며 솔선수범하는 지도력을 갖춘 수행자가 등장해야 한다. 또한 후학들이 활동할 수 있는 사찰과 교육기관도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인순 대사는 중국 대륙의 여러 불학원에서 강의하였고, 홍콩과 대만으로 이주하면서 승려 교육기관인 혜일강당 등의 불학원을 설립하고, 사찰들을 창건했다. 또한 다양한 경전들을 강의하면서 재해석하여 인간불교의 사상적 체계를 구축하고 그것을 저술로 남겨 후학들이 더욱 발전시킬 수 있도록 지적 초석을 놓았다. 

인순 대사의 인생 100년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면 건강하지 못한 몸이었으나 한시도 쉬지 않고 경전 공부와 후학 지도, 저술 활동, 그리고 설법을 통한 전법교화에 몰두했다는 점이다. 대사는 색신에 대한 탐착을 벗어났으나 100년을 살았고, 말길이 끊어진 자리에서 그의 생각이 허공에 말없이 사라지지 않도록 활자로 남겼다. 

인순 대사는 인간불교를 제창하는 이유에 대하여 “현대사회에 적응하고 미래의 진보 시대에 더 잘 적응할 수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

 

김응철 sam1528@hanmail.net 

경기대학교 행정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행정학 박사). 주요 저술로 《재가불자가 되는 길》 《둥근 깨달음 천수경》 《부처님 직제자들의 수행과 포교 이야기》 등과 논문 다수. 현재 중앙승가대학교 교수, 문화치유명상단체 동명 이사장.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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