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포스트휴먼 시대의 도래와 불교

1. 머리말

박수호 중앙승가대 교수

20세기 후반 생명공학, 유전공학, 인지과학, 정보통신 기술, 컴퓨터공학, 나노기술 등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비인간 주체가 사회적 영역으로 급속히 부상하였다. 인공지능, 로봇, 복제된 생명 등의 존재는 ‘포스트휴먼(post-human)’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이끌어냈다. 기계인간에게 인류의 생존을 위협받는 내용을 담은 〈터미네이터〉나 〈배틀스타 갤럭티카〉 같은 SF영화는 막연하게 떠오르는 포스트휴먼의 이미지를 구체화하는 수단을 제공하였고, 자율주행 자동차나 이세돌 기사를 압도한 알파고의 등장이 회자되면서 포스트휴먼은 현실이 되었다. SF영화에서 그려지는 포스트휴먼의 모습은 인공지능과 기계 육체를 가진 사이보그가 일반적이지만, 실제로 포스트휴먼은 인간과 기계의 결합을 통해 인간과 기계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자리하고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포스트휴먼은 ‘인간의 지적 능력이나 육체적 한계를 능가하는 인간 이후의 인간’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포스트휴먼의 등장과 관련 기술의 발전은 미래사회의 양상을 가늠할 수 있는 핵심 동력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 글에서는 포스트휴먼이 등장할 수 있는 조건이 된 기술적 배경을 먼저 간단히 살펴본 후에 포스트휴먼 현상을 설명하는 다양한 이론적 논의들과 주요 쟁점들을 정리하고자 한다.

 

2. 포스트휴먼의 기술적 조건

기계 혹은 기술은 인간의 능력을 강화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현재 인간의 지적 능력이나 육체적 한계를 능가하기 위해서는 컴퓨터를 비롯한 각종 기술공학적 장치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인간 능력의 확장이라는 차원에서 중요한 몇 가지 기술들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웨어러블(Wearable) 기술

웨어러블 기술은 우리 몸에 기기를 부착해 신체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개발된 기술이다. 이 기술의 개발은 1960년대부터 꾸준히 이어져 왔으며, MIT 연구진들이 개발한 HMD(Head Mounted Display)를 효시로 볼 수 있다. 이후 이 분야의 기술개발을 선도한 것은 스티브 만(Steve Mann)이다. 그는 1981년 배낭형 컴퓨터를 개발한 이후 머리와 손, 허리 등에 착용하는 형태의 컴퓨터와 안경 형태의 컴퓨터를 개발하는 등 웨어러블 기술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초기 웨어러블 기술은 군수산업 분야에서 주목하였다. 전투력 증강을 위한 군사기술로서 적극 개발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소형화 및 경량화라는 기술적 발전을 거쳤으며, 최근에는 네트워크 기술의 적용과 더불어 생명공학 기술이나 나노기술까지 가세해 기술적으로 크게 신장하고 있다. 동시에 군사 무기를 넘어 안경, 시계, 신발 등과 같은 제품으로 상업성을 강화하고 있다. 

컴퓨터나 기계장치를 몸에 휴대 혹은 부착하는 웨어러블 기술은 신체와 기계, 인간과 사물의 경계를 유지하면서 이들을 결합시킨다는 특징을 갖는다. 따라서 인간 정체성 문제를 촉발하지 않는 가장 거부감 없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2) 사이보그(Cyborg) 기술  

사이보그는 사이버넥틱스(cybernetics)와 유기체(organism)의 합성어로 기계인간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육체의 일부를 기계로 대체한 개조적 생명체인 사이보그는 기계와 인체가 유기적으로 통합된 새로운 존재이다. 

사이보그 기술은 신체의 확장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웨어러블 기술과 유사하고, ‘보철-강화-조작’의 단계를 거쳐 발전해 왔다. 보철의 단계는 의족, 의수, 의안 등 손상되거나 상실된 신체 부위를 복구하는 기술적 단계이다. 강화 단계는 인간 신체의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신체를 보완하는 기술 단계이다. 조작 단계는 유전자의 변형이나 대체를 통해 새로운 형질을 만들어내는 기술 단계이다. 최근에는 동물 복제에 이어 인간 복제까지 가능해지면서 복제 사이보그 단계로의 진전도 주목받고 있다.

사이보그 기술은 잠시 뒤에 살펴볼 인공지능 기술과 함께 로봇이라는 매개체에 통합되면서 포스트휴먼 시대의 디스토피아적 불안감을 부추긴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레플리칸트’ 같은 인조인간이 인공지능과 로봇, 사이보그 기술이 결합해 탄생한 비인간 주체의 예시라고 볼 수 있는데, 외견상 인간과 인조인간의 구분이 어려운 조건에서 이들이 인간과 적대할 경우의 위험은 상당한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3) 사물인터넷(IoT) 기술 

사물인터넷은 정보기술을 이용해 각종 사물을 지능적으로 연결시키는 기술로서 언제, 어디서나 인간의 직접적 개입 없이 다양한 개체들을 네트워크로 연결해 필요한 정보처리나 제어를 수행하는 기술과 서비스를 말한다. 사물인터넷의 핵심 기술은 무선 센서 네트워킹 기술로, 컴퓨팅 능력과 무선통신 능력을 갖춘 센서 노드가 응용 환경에 배치된 자율적 네트워크가 센서 노드로부터 얻은 정보를 무선으로 수집 · 제어 · 감시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사람을 통하지 않고 스스로 연결 기능을 촉진시키는 사물인터넷의 활용이 늘어날수록 인간관계에 사물이 개입할 여지가 커진다. 결국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기존의 인터넷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네트워크였다면, 사물인터넷은 사람과 사람의 연결을 넘어 세상 모든 것들을 연결하는 시대를 열고 있다. 

4) 인공지능(AI) 기술  

기존의 컴퓨터는 인간이 입력한 정보를 주어진 프로그램을 통해 가공하거나 처리하는 역할을 담당해 왔다. 처리하는 정보의 양이나 속도 등에서 인간보다 월등한 모습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인간이 입력한 정보를 사전에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가공한다는 점에서 컴퓨터는 인간의 지시를 이행하는 수동적 존재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다양한 기능을 자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나 앱을 활용하는 최신 컴퓨터는 정보 수집을 비롯해 외부의 자극이나 상황 변화를 독자적으로 인지 · 판단 ·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이 증가하고 있다. 알파고나 자율주행 자동차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인공지능 기술로 인해 머지않아 인공지능(AR)이 인간지능(HR)을 넘어서는 특이점(singularity)에 도달할 것이라는 전망도 곳곳에서 제기하고 있다.

사용자의 욕구나 성향을 파악해 음악을 선곡하고, 영화를 추천하는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AI는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에 널리 퍼져 있다. 인공지능을 이용한 건강 상담이나 원격진료, 이용자와 간단한 대화를 나누며 교감하는 지능형 소셜 로봇 등 상상 속에서 존재하던 미래적 삶도 이제는 현실로 구현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반기는 사람들이 있는 한편으로 일자리 축소 등 AI 시대의 사회 변화를 우려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인공지능 시대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기계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는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예기치 못한 위험을 두려워한다. 앞서 잠시 언급한 영화 〈터미네이터〉가 이러한 두려움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간과 인공지능 로봇의 관계에 대한 다수의 쟁점이 제기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들 신기술은 인간과 기계, 인간과 사물, 혹은 인간과 비인간의 결합을 촉진한다. 결합 과정은 크게 ‘인간(신체)의 외화(exteri-orization)’ 및 ‘기계(기술)의 내화(interiorization)’로 요약할 수 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면, 웨어러블 및 사이보그 기술은 기본적으로 인간(신체)을 기점으로 한 외화의 모습을 보이는 것에 비해, 사물인터넷 및 인공지능 기술은 기계(기술)를 거점으로 한 내화의 경향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연적인 것(natural)과 인공적인 것(artificial), 인간(human)과 비인간(nonhuman), 주체(subject)와 객체(object) 등의 이분법은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포스트휴먼의 등장이 초래하는 혼란의 근원적인 출발점은 이러한 이분법적 세계관이 더는 유효하지 않게 되는 세상과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근대적 인간 사이에 나타나는 문화지체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포스트휴먼에 관한 이론적 논의

포스트휴먼에 관한 다양한 이론적 사조들을 통칭하여 ‘포스트휴머니즘’이라고 부른다. ‘포스트휴먼’이라는 개념이 ‘휴먼’이라는 개념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포스트휴머니즘은 근대적 세계관을 관통했던 휴머니즘에 대한 이론(異論)들을 제기한다.

휴머니즘은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도발적인 선언처럼 중세 시기, 신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학문과 사상 체계를 벗어나 억압받던 인간성을 회복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인간 중심적인 사상으로 평가된다. 이런 휴머니즘이 계몽주의 철학과 만나면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위가 절대적인 보편가치로 정립되었고, 인간은 이런 사상적 토대 위에서 물질적, 문화적 풍요로움을 구가하였다. 여기에는 인간의 편의를 증진하기 위한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달도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산업혁명 이후 전개된 과학기술의 발전은 기계를 통해 인간의 신체적, 육체적 노동을 대신하게 함으로써 생산성과 편이성을 증가시켰다. 그리고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정보통신 기술을 필두로 생명공학, 유전공학, 컴퓨터공학, 인지과학, 나노기술 등의 발전과 이들을 하나로 융합시킬 수 있는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기계문명’이라고 언급해도 과하지 않을 만큼 기계 이용에 기반한 일상의 생활세계를 만들어냈다. 

이런 상황에서 앞에서 언급했던 기술적 변화들은 ‘인간의 기계화, 기계의 인간화’라는 포스트휴먼적 상황을 추동했다. 기계장치를 결합하거나 유전자를 조작한 인간의 몸은 순수한 인간의 육체보다 강하고, 컴퓨터의 도움을 받는 인간의 두뇌는 그렇지 않은 인간의 두뇌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이 계산하고 기억했다. 외관상 뚜렷이 구분되었던 기계도 점점 더 인간의 모습과 가까워지고 있고, 빅데이터에 기반을 둔 인공지능의 지적 능력은 단순한 연산과 기억을 넘어 자기 학습과 창작으로 확장되면서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주체로서의 위상을 갖춰가고 있다. 이처럼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상황에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요구됨에 따라 포스트휴먼 논의가 시작되었다.

포스트휴먼이란 용어는 철학, 윤리학, 미학 등 인문학은 물론이고, 사회학이나 정치학 등의 사회과학, 의학 및 기술과학과 같은 자연과학을 망라한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지만, 모두가 동의하는 개념 정의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서두에서 잠시 소개한 것과 같이 ‘인간과 기술의 결합으로 인해 나타나는 인간 이후의 인간’으로 이미지화하거나, ‘인간과 기술이 만들어내는 변화 속에 사는 인간’으로 유연하게 지칭하는 것이 많다. 이러한 인식의 밑바닥에는 현재의 인류와 다른 새로운 종의 인간이 등장할 것이라는 전망이 깔려 있다.

포스트휴먼에 관한 논의는 크게 트랜스휴머니즘과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으로 구분할 수 있다. 트랜스휴머니즘(Trans human-ism)에서는 포스트휴먼을 현재 인간이 가진 능력을 초월한 미래의 인간으로 간주한다. 즉, 기술을 통해 현재 인류보다 더욱 강화된 능력을 갖춘 인간이 포스트휴먼이라는 입장이다. 트랜스휴머니즘 계열에 속하는 이들은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을 통해 미래의 인류가 현재보다 향상된 능력을 지닌 새로운 종으로 변화 혹은 진화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트랜스휴머니즘이 주목하는 것은 첨단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아 인간 신체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이들은 기술을 이용해 인간의 육체적 · 지적 · 심리적 가능성을 강화하고, 인간이 노화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과학적 성과를 활용할 것을 적극 주장한다. 포스트휴먼은 기술을 통해 진화한 인류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모라벡이나 커즈와일 등 트랜스휴머니즘 계열의 연구자들은 인간과 기계, 인간과 정보의 융합을 통해 인간이 노화, 질병, 죽음, 공간 제약 등과 같은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고 포스트휴먼 단계로 진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포스트휴먼을 보다 진화된 형태의 인류로 생각하는 이들은 나약한 인간 육체를 기계와 결합된 강화된 육체로 대체하는 것에 긍정적이고, 〈공각기동대〉라는 SF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처럼 인간 의식을 컴퓨터에 업로딩하는 것과 같은 정신의 탈육체화를 꿈꾼다. 과학기술을 통해 인간의 완전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 중심적인 담론으로 평가할 수 있는 트랜스휴머니즘은 근대적 휴머니즘과 단절된 새로운 단계를 상정한다기보다는 증강된 휴머니즘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은 포스트휴먼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전망과 유토피아적 전망 모두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면서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 형성된 근대 휴머니즘의 인간 개념을 해체하고,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인간 개념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은 근대적 휴머니즘이 인간을 개념화하는 과정에서 소홀히 다룬 요소로 기술을 지목한다. 이들은 인간 개념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의 하나로 기술을 수용하고 인간과 기술의 구분을 부정한다. 인간이 기술과 구별될 수 없고, 인간이 기술을 포함한 구성물이라는 이들의 주장은 포스트휴먼을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구성되는 기술과 문화의 산물로 규정한다. 대표적인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 연구자인 헤일스는 포스트휴먼적 주체를 이질적 구성 요소들의 집합물이자 물질 정보의 총체로 보았다. 이 과정에서 헤일스가 강조하는 것은 더 이상 지배와 통제의 대상으로 제한할 수 없는 기술의 등장이다. 기존의 휴머니즘은 주체인 인간과 비주체인 기계를 구분하고,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는 정신적 존재인 인간이 그렇지 못한 기계를 전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스스로 학습하고, 사고하고, 결정할 수 있는 인공지능 기술로 인해 기계는 더 이상 지배와 통제의 대상으로 남아 있지 않음을 지적한다. 배드밍턴도 포스트휴머니즘이 인간 중심적 사고의 해체를 조장함으로써 고전적 휴머니즘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관심은 인간중심주의적인 인간과 기계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의 입장은 트랜스휴머니즘과 달리 포스트휴먼이 반드시 기계인간일 필요는 없다. 이들에게 포스트휴먼은 인간과 기계가 ‘지배-피지배’의 비대칭적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칭적 관계 속에서 공존하는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엄밀한 의미에서 ‘포스트휴머니즘’이라는 범주로 분류하기는 어렵지만, 포스트휴머니즘의 형성과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친 논의들이 있다. 바로 사이보그 이론, 행위자연결망 이론, 신유물론, 사변적 실재론 등이다.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이론은 포스트휴머니즘의 형성과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해러웨이가 사이보그라고 지칭하는 것은 과학기술에 의해 기계와 인간,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가 내파(해체, 연결)된 다양한 변형체들이다. 그녀에 따르면 기술에 의해 강화된 아이언맨도, 유전자 조작을 통해 탄생한 스파이더맨도 모두 사이보그이다. 결국 해러웨이는 기계인간이라는 특정 형태를 넘어 고정된 범주를 해체시키는 과학기술적 실험으로 만들어지는 모든 변형체를 사이보그로 규정한 것이다. 

행위자연결망 이론은 라투르, 칼롱, 로 등에 의해 제시된 사회과학이론이다. 이들은 사회의 변화는 항상 물질세계의 변화와 함께 이루어진다는 점을 들어 사회과학이 사회와 물질세계의 공동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과학적 사실이 인간들의 이해관계와 비인간적 기술의 협상 및 결합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며, 자연과 사회는 분리된 영역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요소 및 비인간적 요소들의 상호 연결망 속에서 존재함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각 요소가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밝혀야 하며, 이종적인 개체들 사이의 결합을 추적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행위자연결망 이론에서 행위자는 ‘어떤 행위를 하는 실체’, 즉 행위능력을 가진 존재론적 실체로서 인간과 비인간 모두를 포함한다.

신유물론은 포스트휴먼 시대의 유물론이라고 평가받는 이론이다. 신유물론자들은 물질을 내재적 생기를 지닌 어떤 것으로 인식하고, 물질성이란 물질을 능동적이고, 자기 창조적이고, 생산적이며, 예측할 수 없게 하는 성질로 규정한다. 신유물론은 존재하는 것들의 생기론(vitalism)적 물질성에 입각해 새로운 존재론과 행위론(agency)을 추구한다. 모든 것들을 물질의 관점에서 사유하는 신유물론에서 가장 중시되는 것은 물질에 내재된 물질성으로 관계망 속의 물질들이 저마다 행위능력을 가진다는 점이다. 즉, 행위자로서 연결된 다른 물질들에 영향을 주기도 하고, 다른 물질들의 행위로부터 영향을 받는 양면적 존재로 묘사된다.

하먼, 메이야수, 브레시어, 그랜트 등이 주장하는 사변적 실재론은 신유물론과 함께 사물의 존재성과 관련해 최근에 주시되는 새로운 철학적 사조이다. 사변적 실재론은 행위자연결망 이론이나 신유물론과 마찬가지로 인간 및 비인간 행위자를 대칭적으로 파악하며, 사물의 행위능력에 대해서도 인간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한다.

이상에서 간략하게나마 살펴본 포스트휴머니즘 이론의 핵심적인 공통점은 인간과 기계(혹은 비인간) 사이의 비대칭성과 이분법을 폐기하고, 인간과 기계의 상호연결과 공존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4. 포스트휴먼 시대의 쟁점

포스트휴먼 시대의 인류는 다양한 비인간적 존재와 교류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문제 해결 과정에서 끊임없이 비인간 주체를 소환하게 되며, 이런 상황이 되풀이되면 인간은 더 이상 비인간과 분리할 수 없어, 세상은 인간-비인간 복합체들의 활동 무대로 변모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 결과, 인간은 태생적인 유기체적 능력을 발휘하는 특권적 존재가 아니라 특정 연결망에 의해 구성-재구성되는 행위소의 하나로 전락하며, 사물은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반사적 존재에 머물지 않고 연결된 여타 행위소들과의 소통을 통해 상호 접변하는 주체적 행위자로 등극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인간과 사물, 사회와 자연이라는 이분법이 해체되어 만물이 세상을 움직이는 주관자로 탈바꿈하는 포스트휴먼 시대가 본격화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포스트휴먼 시대를 맞이하는 우리 인간들이 당면하게 될 쟁점들은 무엇이 있을까?

1) 인간의 본성과 존엄에 대한 회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일찌감치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정의하기는 했지만, 군집을 이루어 살아가는 생물이 인간만은 아니다. 개미나 벌과 같은 곤충부터 원숭이나 침팬지 등 영장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물들이 무리를 지어 살아간다. 그렇다면 여느 동물과 다른 인간만의 고유한 속성은 무엇일까? 

현생 인류의 학명은 호모 사피엔스이다.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어떤 이는 호모 파베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말은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호이징어는 호모 루덴스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지혜, 도구, 놀이라는 세 키워드 사이에 공통되는 것은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임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도구를 사용한다는 것은 목적과 수단을 판단할 수 있다는 의미이고, 놀이는 창의성을 전제로 한다. 지혜와 창의성은 생각하는 능력을 토대로 할 때만 가능한 속성이다.

그런데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의 고유한 속성이라고 여겨졌던 생각하는 능력이 비인간존재에게도 부여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인공지능은 계산하고 기억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학습하고, 판단한다. 소설을 쓰고, 작곡을 하고, 그림을 그리는 등 창작 활동에서도 인간과 차이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성취에 도달한 상태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기계와 다른 고유한 속성은 무엇일까? 있기는 한가? 일각에서는 종교성 혹은 영성을 인간과 기계의 차이로 이야기하곤 한다. 종교성이 인간의 궁극적 한계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인간의 완전함을 추구하는 트랜스휴먼적 관점에서 포스트휴먼은 종교의 필요성을 부정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영성을 인간의 자아 완성이라는 차원에서 규정한다면 인간과 포스트휴먼 사이에 차이는 없다고 생각한다. 

포스트휴먼 시대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한다. 유일하게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만물의 영장으로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인간만의 존엄한 권리가 있다는 근대 휴머니즘의 주장은 여전히 유효한가? 인간이 순수하게 이성적인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인간에게만 허락되었다고 믿은 권리가 뭇 생명들에 얼마나 폭력적이었는가를 물었을 때, 그를 부정할 수 있을까? 나의 존재가 다른 뭇 생명들에 의지하고 있다는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을 수용한다면, 인간과 비인간존재의 관계가 강조되는 포스트휴먼 시대에서 인간만의 존엄성을 강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2) 기계화된 신체의 허용 범위와 생명에 대한 인식 변화

기계에 의해 강화된 신체를 갖게 된 사이보그는 인간인가 혹은 기계인가? 사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엄밀한 의미에서 사이보그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퇴행성 관절염을 앓고 있는 환자들 중 다수는 인공관절을 삽입했고, 보청기나 인공심장 등 크고 작은 기계들을 몸 안에 이식한 이들도 많다. 그러나 이들을 사이보그라고 부르며 두려워하거나 경원하지는 않는다. 가족으로, 친구로, 이웃으로, 동료로 기꺼이 함께 살아간다. 그렇지만 자기 신체의 일부를 기계로 대체하는 것과 달리 기억이나 두뇌를 타인에게 이식하거나 안드로이드 로봇처럼 만들어진 인조인간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갖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생명에 대한 개념 변화도 당장 직면하고 있는 쟁점이다. 그동안에는 생명의 탄생에 인간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었지만, 의학과 유전자 조작 기술이 발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가타카〉라는 영화에서 단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유전자 조작을 통해 질병이나 신체적 능력을 사전에 디자인하고 관리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어디까지 유전자 조작의 범위를 인정해야 할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조인간은 생명이 있는 것일까?

3) 로봇과 인간의 관계

오랫동안 기계는 인간의 노동을 대신해 왔다. 전원 스위치를 내리지 않는 한 잠시도 쉬지 않고 노동한다. 그런데 로봇의 쓰임새가 산업현장을 넘어 가정으로까지 확장되면서 변화가 발생했다. 일본에서 있었던 애완로봇의 장례식은 로봇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1999년에 출시되어 2006년 단종되었던 애완로봇의 수리 서비스가 부품 부족을 이유로 중단된 이후 2018년 신형 모델이 출시되었는데, 일본의 한 사찰에서 구형 애완로봇의 합동 장례식이 거행된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로봇에게 애정을 느끼고, 존중했음을 의미한다. 영화 〈바이센테니얼맨〉의 주인공 로봇도 유사한 문제를 제기한다. 인간에게 사랑을 느끼고, 자신의 부품 수명을 연장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으로 인정받고, 사랑한 여인의 품에서 수명을 다하는 가사로봇 앤드루는 로봇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사회적 거리’라는 척도가 있다. 주로 이주노동자나 성소수자, 장애인, 전과자, 이방인 등 사회적으로 배제되는 사람들과 얼마나 가까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지를 묻는 척도이다. 예컨대 직장 동료, 상사 혹은 부하직원, 동네 주민, 친구, 배우자 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묻는다. 로봇을 어느 정도까지 수용할 수 있을까?

4) 로봇과 일자리

앞서도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로봇은 인간의 노동을 대신해 왔다. 인간의 육체노동을 대체하던 로봇은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하면서 점차 인간의 지적 노동도 대신하기 시작했다. 포스트휴먼 시대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면 인공지능 로봇이 대다수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심심치 않게 흘러나오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인다. 일자리를 빼앗긴다는 것은 생계를 위협받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보다 탁월한 포스트휴먼의 지적, 신체적 능력은 높은 생산성을 보이기 때문에 일자리 경쟁에서 인간이 비교우위를 보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일부에서는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최초 프로그래밍이나 데이터 레이블링, 콘텐츠 조정 등 인간 노동이 필요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로봇과의 일자리 경쟁은 없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인간의 노동과 로봇의 노동이 서로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병립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부분적으로 설득력 있는 주장이기는 하지만, 자동화가 가능한 대부분의 일자리는 생산성이 높은 로봇으로 대체될 가능성이 높고 대체가 어려운 노동은 높은 직무능력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일자리를 얻기가 쉽지는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일각에서 포스트휴먼 시대에서는 노동의 성격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을 고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기본소득을 지급함으로써 생계유지를 위한 고용노동이 아니라 인간의 잠재성을 실현하고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일을 중심으로 노동을 재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5) 포스트휴먼 사회의 새로운 질서 모색

포스트휴먼 사회는 인간과 비인간존재가 총체적으로 어우러지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사회 개념은 ‘인간’만을 구성요소로 인정했지만, 포스트휴먼 시대는 비인간존재의 주체적 활동을 배제할 수 없다. 이는 인간만의 사회가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존재의 상호의존과 협력을 통해 서로 공존할 수 있는 사회질서를 모색해야 하는 과제가 부여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내용은 인간의 역할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의 문제라고 판단한다. 인간과 비인간존재의 공존을 위해서는 인간중심주의를 내려놓아야 한다. 나아가 인간은 기계와 자연물 등과 함께 지구 생태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5. 맺음말

지금까지 거칠게나마 포스트휴먼의 등장을 초래한 기술적 변화, 그런 변화를 이해하기 위한 이론적 논의들, 그 과정에서 제기될 수 있는 여러 과제 등을 정리해 보았다. 포스트휴먼은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단계이다. 향후의 기술 발전과 사회문화적 요청에 따라 변화의 양상이 달라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가역적 변화임은 분명하다. 포스트휴먼과 포스트휴먼 사회에 대해 전망하고, 다양한 대안을 모색해야 하는 이유이다. 

포스트휴먼과 포스트휴먼 사회를 종교계가 어떻게 대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제안을 마지막으로 글을 맺을까 한다. 

우선 각 종교는 포스트휴먼 사회를 어떻게 교리적으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에 답을 찾아야 한다. 기독교에는 신(창조주)-인간(피조물) 관계가 인간(창조주)-기계(피조물) 관계에 전적으로 투영되던 근대적 휴머니즘의 시대에서 기계(피조물)에 압도되는 인간(창조주)으로의 전환이 예상되는 포스트휴먼 시대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딜레마가 존재한다. 인간을 강조할수록 포스트휴먼 시대(혹은 사회)에서 격리될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경우 연기론적 세계관에 이미 비인간 주체의 존재가 내재되어 있어 인식론적 저항은 약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극단적인 이질성을 조화롭게 수용할 수 있는 논리를 구체화하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종교의 기능을 기복과 사회통합으로 크게 구분할 때, 포스트휴먼 사회에서 종교의 기능은 어떻게 수행될 것인지를 예측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계에 압도되어 신의 구원을 기다리는 인간에게 기복은 대립적, 갈등적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욕망의 절제 혹은 억제를 통해 스스로를 구원하는 불교의 기복적 기능은 변화의 필요가 크지 않고, 인간-기계의 대립 관계를 상정하는 기독교보다 인간-기계의 공존 관계를 긍정하는 불교가 사회통합에 더 친화적일 것으로 기대된다. 따라서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윤리와 가치관을 개발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

 

박수호 foramita@naver.com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동 대학원 졸업(박사). 성균관대학교 및 덕성여대 연구교수 역임. 불교와 관련된 사회학적 연구 주제 발굴을 통한 불교사회학의 지평 확장과 포스트휴먼 사회와 불교 등으로 연구 관심을 넓히고 있다. 주요 논저로 〈행복요인으로서의 사회적 인정〉 〈종교정책을 통해 본 국가-종교 간 관계: 한국불교를 중심으로〉 등과 《한국의 종교와 사회운동》 《민주주의, 종교성, 그리고 공화적 공존》 등의 공저서가 있다. 현재 중앙승가대학교 불교사회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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