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포스트휴먼 시대의 도래와 불교

1. 들어가는 말 

이범수 동국대 교수

1967년 12월 3일 세계 최초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흉부외과 의사 크리스천 네이틀링 버나드(Christiaan Neethling Barnard)는 인간의 심장이식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이 수술에는 무려 30명의 의료진이 참가했으며 수술 시간만 9시간이 걸렸다. 인공심폐기의 발명에 힘입어 1950년대에 신장이식, 1960년대에는 간이식에 성공한 이후, 개심(開心) 수술의 시대를 연 것이다. 뇌사 이전의 심장 정지를 죽음으로 확정했던 시기, 심장이식 수술은 자신의 심장을 떼어 내 죽은 사람을 부활시킨 상징적인 사건이다. 트랜스휴먼은 물론 포스트휴먼의 탄생을 예기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인간에게는 살고 죽는 문제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므로, 그의 죽음도 사회적 사건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사회공동체 구성원으로서 구성원의 죽음을 이해하고 타당화하는 과정은 사회의 존속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과제였다. 따라서 그동안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을 이해하는 개념적 범주로 도덕규범, 사회문화적 됨됨이, 의미, 그리고 그것에 근거한 가치관 등을 준규로 삼아 왔다. 그중 천부적(天賦的)인 자질로 자처하는 인간의 정신적 특성 특히 이성 및 그에 기원하는 도덕적 능력은 인간이 다른 생물보다 우월하며 존엄성을 지닌 존재임을 나타내는 징표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해부학에 눈뜬 인간은 신(神)의 영역인 인간의 속을 열고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인간의 몸을 마치 레고 블록 다루듯이 모듈(module)화하여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이 이미 죽은 동류의 배를 갈라 장기의 모듈화를 개시한 순간, 인간 개조의 꿈은 인간 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험은 오래전 죽은 시신에서 출발하여 엄청난 발전을 거치며 인류 문화에 총체적인 영향을 주고 있으며, 현대에 들어서는 과거 그 어떤 시기보다 인간의 정체성에 급진적인 변화의 충격을 가하고 있다. 

모순처럼 들리겠지만 사람들은 가능한 한 오랫동안 죽음을 피하고자 필사적으로 진력해왔다. 특히 그들은 죽음과 노화를 막기 위해 축적해온 온갖 기술과 수단을 동원하여. 유전자 변형, 세포 조작, 인조 장기 등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최근 들어서 일부 다급한 사람들은 오래 살 수만 있다면, 죽지 않을 수만 있다면 지금의 몸이 생물학적 유기체로 남아 있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고 기세등등하게 떠벌리고 있다. 그들은 발전하는 기술과 트랜스휴먼과 포스트휴먼이라는 미래 공동체에  기꺼이 자신을 통합할 것이라고 단언하기까지 하는 실정이다. 

시대가 표상하는 삶과 죽음의 문화는 그 사회가 내걸고 있는 가치체계와 전략을 현현(顯現)한다. 현대 과학기술은 사회적 체계로서 인간의 삶 전반을 변혁하는 것을 넘어 이제는 자연 생명체로서의 ‘인간’ 개념 자체의 변경까지 종용하고 있다. 이를 통해 현대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인간 스스로에 대한 정체성과 개념의 혼란은 눈앞에 떠올라 성가시게 구는 비문(飛紋)처럼 우리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다. 따라서 아직은 먼 얘기로 와닿지 않지만 거대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존재처럼 다음과 같은 의문을 중심으로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과연 우리는 포스트휴먼은 과연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탄생하는가? 포스트휴먼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포스트휴먼의 존재 목적은 무엇일까? 포스트휴먼의 존재를 지탱하는 개념(격)은 무엇일까? 포스트휴먼에게 인격과 죽음이란 말의 적용은 적당한 것인가? 포스트휴먼에게 종말(죽음)은 어떤 의미일까? 포스트휴먼은 죽음을 어떻게 이해할까? 포스트휴먼에게 종말이 오는 것일까? 포스트휴먼에게 종말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 그리고 있다면 죽음의 가능 조건은 무엇인가? 아니면 죽음 말고 다른 방식이 있다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하지만 필자가 이러한 의문을 담아내기에 부족함이 많아 우선 이 글을 통해 포스트휴먼의 탄생과 존재함, 발전 과정과 현황, 종멸(終滅) 일부를 중심으로 그리고 그에 대한 불교적 대응 방안으로 사유를 확장해보고자 한다. 

 

2. 포스트휴먼의 생멸(生滅)과 문화변동 

1) 휴먼의 생사문화

인구학적 자료에 따르면 인류 역사 이래 인간의 평균수명은 약 3배 정도 증가했다고 한다. 고대 로마 시대의 평균 기대수명이 23년 정도였는데, 현재 경제선진국의 평균 기대수명은 75~80세이다. 이러한 기대수명의 증가는 생물학적 변화라기보다는 위생, 의료, 교육, 영양과 같은 사회경제적 조건이 변했기 때문이다. 산업화된 지역에서는 유아나 아동의 사망률은 점진적으로 줄어들었고 죽음과 관련된 위험은 점차 노년 인구로 이동했다. 현재 노인들의 죽음은 주로 암이나 뇌졸중, 퇴행성 질환 등의 노화 관련 질환 때문에 발생한다.

근대에 들어면서 인류의 기술 발달이나 자연생태 환경 변화, 새로운 종교의 등장, 전쟁과 같은 역사적 사건 등이 재래의 생활방식에 심대한 영향을 주고 세계관과 생활관을 재편성하면서 인간의 수명을 괄목하게 연장하고 있으며, 삶과 죽음의 문화는 전혀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인간에게는 생존 경험을 통해 집약한 지혜나 정보를 후대에 전승하는 공통적 성격이 있다. 특히 인간은 삶을 살아가며 경험하는 추상적 의미나 관념을 상징적 사물로 표현하거나, 사물을 추상적 의미나 관념으로 전환하여 표현하고 전수하는 능력을 갖춘 존재이다. 인간은 이러한 능력을 발휘하여 삶의 경험을 경제, 정치, 과학, 도덕, 문학, 예술, 종교 등의 결과물들인 문화로 결집해왔다, 이것은 사회구성원들이 우선 당대(當代)의 시대 상황에 적응하며 죽음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경험한 총체적인 삶의 내용을 유형화한 것으로, 가장 확실하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여 지키기로 한 공동 약속의 합의물이자 결과물이다. 

인간은 수많은 전략과 지혜를 짜내 삶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었지만, 육체의 생물학적 한계인 죽음 앞에서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인간은 끊임없이 주변에서 발생하는 죽음 사건들에 의해 인간이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육체적 한계를 지닌 존재이고, 죽음에는 어떤 전략과 지혜도 소용없음을, 그리고 죽음은 삶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요소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삶을 보는 관점은 살아 있는 생물체로서 육체를 어떻게 보는가에서 시작된다. 반면에 현실적으로 죽음과 만나게 하는 실체는 주검이므로, 바로 죽음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문제는 주검을 어떻게 보고 다루는지 하는 지점과 연관된다. 그러한 과정은 이후 죽음과 주검 앞에서 우리는 생명관, 철학관, 영혼관 등으로 죽음에 관한 영역을 확장할 수 있다.

인간의 죽음과 주검의 처리 방식은 사회적 변동에 의해 한 사회 내에 서로 다른 문화가 병존할 때 지배계층의 것으로 흡수되거나, 아니면 지배계층이 인정하는 방향으로 변환하거나, 다른 모습으로 변신한다. 인류 역사에서는 이러한 사회문화적 통합을 계기로 등장하는 새로운 지배계층과 체재가 자신들의 이념 구현을 위해 내부의 다양한 하부문화나 외부의 이질적인 문화 요소의 재편 과정을 반복적으로 이행한다. 

죽음과 연관된 문화 영역은 인간 삶의 일부이므로,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삶과 죽음의 문화는 개개의 하부문화적 특성이나 요소들을 하나로 수렴하거나 또는 새롭게 재창조되는 계기를 맞게 되는 문화접변 또는 문화변동이 비일비재하다. 

죽음이라는 생물학적 한계상황을 통해 인간은 존재의 실상과 미래 운명을 가늠할 수 있었다. 인간이 죽음을 인식함으로써 숙명을 보는 관점이 정리되었음은 여타 생물들과 구별되는 실존적 삶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는 바로 인간이 문화적인 방식으로 삶을 영위하고, 그가 경험한 생사문화적 방식으로 후대에 전승하는 단계로 진입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그들은 전수한 선대(先代)의 지혜 보고(寶庫)인 문화유산을 후세에 전승하면서 또한 그 일부는 경험적으로 재현될 수 없는 내용으로 자리 잡기도 하지만, 후대의 숨결을 받으면 새로운 환경과 어울려 새로운 의미로 되살아나곤 한다. 

2) 포스트휴먼의 생멸6)

2013년 《포스트휴먼》을 출판한 유럽 철학자 로지 브라이도티는 소위 ‘인류세’라고 불리는 현시대를 비인간, 반인간, 포스트휴먼 등에 대한 담론과 표상이 확산되고 중첩되는 포스트휴먼 조건으로 규정한다. 인간은 기술과 과학을 활용하여 결핍 상태에서 벗어나 불행과 질병을 극복하거나 치유하는 복지를 구현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과정에서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생물학적 조건을 초월하기 시작한 인간을 ‘트랜스휴먼(transhuman)’이라고 하고 ‘포스트휴먼’으로의 진화를 선언하게 한 원조로서 인간의 이성을 발판으로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킨 근대 휴머니즘을 엿볼 수 있다. 트랜스휴먼은 현재 인류를 증강함으로써 포스트휴먼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존재이고, 포스트휴먼(posthuman)이란 현재 인류의 생물학적 능력을 뛰어넘는 능력을 갖추어 현재 기준으로는 인간으로 분류될 수 없는 인간 이후의 존재를 뜻한다.

그는 포스트휴먼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한계지점을 포스트휴먼이 죽음을 극복하게 될 시점으로 잡고 있다. 그는 포스트휴먼이 ‘질적인 비약’을 완성하는 시점이 오게 되면 인간과 동등한 존엄을 논의할 수 있는 상태를 넘어서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는 휴먼이 죽음을 극복하는 시점을 인간과의 종적(種的) 차이를 이루는 지점으로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휴먼과 인간의 종적 차이를 이루는 지점이 될 것이고, 종적 차이는 분명 차별의 정당한 근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동행 후 각자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휴먼과 포스트휴먼의 운명은 인간향상(human enhancement)이라는 표제 아래에 새뮤얼스가 말하는 인간의 인과적 본질, 즉 개체발생과 동시적 메커니즘에 개입에 연유한다. ‘향상’이라는 표현은 과학기술의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인간 유기체가 갖는 인지나 감정적 기능, 신체적 능력, 건강 수명과 같은 기초적인 능력들을 개선하거나 강화시키고자 하는 시도를 일컫는 말이다. 혹자는 정상적인 기준을 넘어서는 수준의 개선을 목표로 하는 개입만 향상으로 간주하고, 정상적인 기능에 문제가 생긴 질병을 치료하거나 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소극적 개입의 의미를 담고 있는 ‘치료’나 자연적 변이의 범위 내에서 인간 유기체의 기능 향상을 위한 적극적 개입과 향상을 구분하기도 한다. 

생명공학의 새로운 기술들은 우선 이들 메커니즘의 작동 과정에 개입함으로써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형적(phenotype) 특성들의 변화를 꾀한다. 유전자 조작이나 선택을 통한 맞춤 아기(designer baby)의 탄생은 개체발생의 메커니즘에 개입함으로써 최종적으로 발현되는 표현형적 특성이나 모습을 바꾸려는 것이다. 퇴행성 질환이나 사지 마비와 같은 신체장애 극복과 정신적 · 육체적 능력의 인위적 향상과 관련된 생명공학이나 프로스테시스 기술은 동시적 메커니즘을 개선하고 향상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포스트휴먼 시대에 도달하는 한 가지 분명한 방식은 기술을 통해 인간의 능력을 급격하게 향상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향상(human enhancement)이란 다양한 기술공학적 수단을 통해 인간의 인지적, 정서적, 신체적 능력을 통상적 범위를 넘어서는 수준까지 향상시키는 것을 말한다. 

만일 포스트휴먼의 인지적, 정서적, 신체적 능력이 인간의 통상적 범위를 넘어서 유기체적 신체를 가진 존재에 이르게 된다면, 그 존재는 지금까지의 인간이 갖춘 조건과는 다른 별개의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사이보그로서 뇌의 영역마저 정보를 업로드하는 유기체적 인간과 상관없는 신체를 가진 존재라면, 지금까지의 뇌사나 심장사 등을 죽음의 판정 기준으로 하는 인류와는 다른 종말의 개념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인류는 죽음의 설정에서 생명의 탄생과 종말, 그리고 인간다움을 삭제해 본 적이 없었다. 인간의 향상을 향한 추동이 과연 상정한 포스트휴먼의 경로를 밟아 나갈지, 그러한 예상과 움직임을 포용할 사유가 과거로부터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취했던 태도와 연관 지을 수 있을지는 포스트휴먼이 장차 어떠한 갈래로 존재의 숙명을 정할지에 달려 있을 듯하다. 그에 대한 궁구(窮究)는 초연결-포스트휴먼 시대를 앞둔 향후에 의미 있는 작업이 될 수 있다. 

 

3. 포스트휴먼의 존격(存格)과 쇠멸(衰滅) 불안

1) 존격(存格)과 존엄

우리는 벌써 ‘연결되어 있고 지능화되어 있는 기계의 도움 없이는 사회적 일상의 영위가 불편해지고 어려워지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거기서 인류세는 머지않아 자기산출 능력을 갖춘 유사 인간 종(posthomo sapiens)의 등장을 앞두고 있다. 생명과학 기술은 생명의 탄생과 유지 및 종결 방식에 지속적으로 개입하면서 ‘인간의 생명이란 무엇이고 포스트휴먼은 어떤 존재인가? 어떤 존재이길래 휴먼과 트랜스휴먼에 이어 포스트휴먼으로 존재할 이유가 있나?’라는 근본적 성찰을 요구받고 있다. 우리는 다 함께 ‘인간다움’ ‘인간의 존엄성’ ‘인격’이라는 인간의 본질을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 시대는 인간의 노동을 기계적으로 대신하는 단순한 로봇을 넘어 이제 정보통신 기술과 생명과학 기술 그리고 인공지능 기술이 융합함으로써 등장한 사이보그는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인간상과 맞닥뜨리게 하고 있다. 인간다움의 핵심인 이성과 감성, 상상, 직관조차 갈수록 디지털을 기반으로 표현되고 기술적으로 해명되고 있다. 사람에 따라 정도 차이만 있을 뿐 우리는 이미 ‘21세기형 사이보그’라고 할 수 있다. 문명과 기술의 관계를 문명사적 차원에서 고찰하는 작업은 이러한 현실에서 시의적이며 인문적 의의가 충분하다고 판단된다. 일종의 ‘지구 생명권’을 제기한 셈이다. 만일 인간 생명에 대한 특권이 해체되고 지구를 생명권이라는 차원에서 다시 포착하는 관점이 널리 지지받을 수 있게 된다면 포스트휴먼과 생명의 관계 설정 문제도 실존적 화두로 부각될 것이다. 마정미는 포스트휴먼이 갖게 될 유기체적 특성에 주목하여, 포스트휴먼은 정체되어 있거나 고정되어 있는 특정한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태를 새로운 기술에 의거하여 끝없이 변화시키는 생존 방식을 취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공자 등 유가들이 죽음을 대하는 밑천으로 갖고 들어간 도덕이라는 문명 장치는 여전히 유효하다. 여전히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이자 ‘이로움을 밝히는’ 존재이고, 아무리 기술 혁신을 ‘혁명적’으로 이뤄낸다고 해도 인간들이 욕망하는 바의 총합은 지구상에서 얻을 수 있는 재화의 총합보다 여전히 클 것이다. 비도덕적 세계관 소지자들도 계속하여 출몰할 것이다. 이는 초연결-포스트휴먼 시대가 지금까지의 인류 문명과는 그 틀과 결을 아무리 혁명적으로 달리한다고 해도,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사는 한 도덕을 방기하거나 소거할 수 없음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도덕이 계속 유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만 도덕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말은 도덕이 여전하게 요청된다는 뜻이지, 작금의 도덕 내용이나 체계, 질서가 고스란히 요청된다는 뜻은 아니다. 초연결-포스트휴먼 시대 도덕의 내용을 무엇으로 채울 것이며 도덕의 체계와 질서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지 등은 아직 열려 있는 주제이다. 

포스트휴먼 시대를 맞이하는 인간에게 주어진 주요 존격은 도덕적 존재라는 인간의 가치 이외에 다른 고유한 가치를 확보해야 할 것이다. 포스트휴먼이 기계적 사유로 접근할 수 없는 인간의 영역은 도덕과 ‘상상력’과 ‘직관’에 있다. 포스트휴먼의 사유에 포섭될 수 있는 인간의 영역은 인간의 창의성이 빚어낸 일관적이지 않은 가상적 사유에 있다. 가상적 사유는 사유 주체가 구성해낸 판단의 체계를 기존의 것들과 맞서는 방향으로 재설정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때 재설정 방식은 논리적 사유 체계를 넘어선 비인과적 절차를 통해 구성된다. 이는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서는 자기 사유를 의미하며 위기의 상황에서 유발되는 자기 염려의 일환이기도 하다.

하지만 포스트휴먼 사회의 양식이 바뀐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존재자만이 존재하는 사회가 아닌 이상 그 사회는 반드시 서로 간에 공통된 규칙을 구성해야 할 것인데, 그들에게 주어진 상황에 가장 큰 이익을 도출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것이 인간사회가 고려한 선(good)을 도모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기 사회에 필요한 문제들을 해소하는 실천을 필요로 할 것이다.

2) 쇠멸 불안과 초월 

생명체란 자기 욕구 실현을 위해 능동적으로 운동하는 생물, 즉 동물만을 지칭하기도 한다. 비근한 사례는 어원적으로 ‘생명체/생물’을 뜻하는 라틴어 ‘아니말(animal)’이나 독일어 ‘레베붸젠(Lebewesen)’이 흔히 ‘동물’을 지칭하는 데서도 볼 수 있다.

생명체와 자율 로봇 역시 개체성이 손상되는 상황에서 위험 신호를 받게 되고 이에 반응하는 것은 유사하지만, 로봇은 굳이 생명체가 느끼는 통증을 느낄 필연적 이유는 없다. 이 점에서 생명체와 초지능으로 대표되는 자율 로봇의 기본적 차이는 사고 능력이나 감정 혹은 의지이기보다는 ‘통증’에 있을 것이다. 이제 지구 생태계의 균형 잡힌 상태를 위한 각 구성원에 적합한 위상을 부여하고 그에 적합한 권리를 모색함에 있어서 중요하게 부각되는 하나의 준거점은 ‘신체적 통증’이 된다. 이 준거점을 통하여 ‘동물권’과 ‘로봇권’ 사이의 분화된 지위의 재구성이 가능해진다. 즉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자율 로봇에 ‘로봇권’이 인정된다면, 통증을 느끼는 면에서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동물에게 ‘동물권’은 무엇보다도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권리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죽음은 인간을 도처에서 위협하고 있고 삶의 에너지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데, 그 중대성은 죽음에 대한 부인(denial)으로 소모된다. 죽음에 대한 초월성은 인간의 경험에서 주된 동기가 된다. 가장 깊은 곳의 개인적 내적 현상, 우리의 방어, 동기, 꿈과 악몽부터 대부분의 대중적 거대 사회적 구조, 영구적 가치가 있는 업적, 신학, 이념, 공동묘지, 미라를 만들기 등 삶의 모든 것들이다. 가령 우리의 시간, 유희에 대한 중독, 신비로움의 구현에 대한 끊이지 않는 신념, 앞서가려는 인간의 본능, 지속적인 명성을 얻기 위한 갈구 등 모든 것이 포함된다. 죽음 불안, 죽음의 두려움, 인간의 공포(mortal terror), 유한성의 두려움 등이다. 철학자들은 존재의 약함(Jaspers), 비존재(non-being)의 두려움(Kierkeggard), 높은 가능성에 대한 불가능성(Heidegger), 존재론적 불안(Tillich)이라고도 했다. 

종교는 대부분 죽음을 넘어 영생을 약속한다. 현실의 죽음을 어떻게 해 볼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지금의 죽음이 곧 모든 것의 끝은 아니며 이후에도 또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다고 영생을 약속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의 죽음을 보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다. 

죽음을 삶의 완성으로 보는 보다 성숙한 유가의 관점은 태어남과 죽음을 ‘삶의 시작과 삶의 완성’이란 단선으로 엮었다. 곧 삶과 죽음을 하나의 존재자로 종합하였고, 그들을 중층적이지 않다고 본 것이다. 동시에 삶/생명을 중심으로 죽음을 본 것이기도 하다. 그 결과 삶의 완성 이후를 삶과 하나가 아닌 것으로 떼어낼 수 있게 되었다. 죽음 이후도 ‘삶’이라고 표현하며 천국, 극락 같은 세계에서의 영생(永生)을 제시하는 기독교나 불교에서는 이승의 삶을 죽음에 비해 특권화하지 않는다. 죽음 이후의 삶을 특권화하기 때문에 죽음을 ‘부활’이나 ‘해탈’과 같은, 궁극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종의 통과 과정으로 설정한다. 유가는 확실하게 ‘이승의 삶’을 시작과 끝으로만 본 셈이다. 그 결과 태어남에서 죽음에 이르는 전 과정이 삶을 중심으로 초점화되었다. 따라서 포스트휴먼이 자칫 지향하려는 영생의 삶이 단지 탐욕에 물들어 애초에 생명의 연장만을 추구한다는 단순한 동기가 휴먼의 삶에 비해 별로 달라질 게 없음을 반증할 수도 있다. 

 

4. 포스트휴먼의 쇠멸 유보와 자기결정 

1) 쇠멸 회피 유보와 슈퍼 지능 

유발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Homo Deus: A Brief History of Tomorrow)》에서 인간은 굶주림, 질병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죽음을 극복하고 마침내 노화와 죽음을 극복한 행복한 신, 즉 ‘호모 데우스’가 되려고 한다고 주장했다. 

요즘 사람들 특히 노년층은 항노화 관련 기술의 발달에 따라 ‘노년의 연장(prolonged senescence)’ ‘질병 상태의 압축(compressed morbidity)’ ‘노화의 둔화(decelerated aging), 노화의 저지(arrested aging)’의 국면별 관리하에 백수무강(百壽無疆)의 희망을 실천하고 있다. 영국의 노화학자 오브리 드 그레이(Aubrey de Grey)는 2005년 테드(TED)에서 ‘수명 탈출 속도(longevity escape velocity)’라는 개념을 통해 현대는 “수명연장 분야의 기술적 발전 속도가 점점 더 빨라져서 인간의 평균 기대수명이 해마다 1년 이상 증가하는 시점”에 도달했다고 주장했다.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과 테리 그로스먼(Terry Grossman)은 함께 저술한 《환상적인 항해: 영원히 살 수 있을 만큼 오래 살기(Fantastic Voyage: Live long enough to live forever)》에서 더 나아가 “자신들과 같은 중년 남자들이 120세까지 살 수만 있다면,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의족이나 의수와 같은 손상되었거나 상실된 신체 일부의 기능을 대신하는 인공적 장치를 일컫는 프로스테시스 장치들의 괄목할 만한 발전이다. 인공신장이나 인공심폐장치와 같이 신체 외부에 장착해 쓰는 장치들뿐 아니라 인공심장이나 인공혈관과 같이 신체 내부에 설치되는 인공장기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닉 보스트롬(Nick Bostrom)은 모든 심장질환을 치료할 경우에 7년, 모든 암을 치료할 경우 3년, 이 둘을 결합할 경우 대략 8~9년의 기대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고 본다.

죽음을 유보하기 위한 노력은 약물과 외과적 수술 외에도 우리 몸의 안과 밖을 연결하는 여러 기계 장치들의 도움으로 사이보그화의 확장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간과 기계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진행되는 인간-컴퓨터 인터페이스에 관한 연구는 외과적 차원을 넘어 정신적 차원의 사이보그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SC)와 웨이크포레스트대학교의 연구팀은 두뇌의 메시지를 복제하고 재생산할 수 있는 메모리칩을 만들었으며, 이후 해당 메모리칩을 인간의 두뇌에 삽입해 기억을 되살리는 데 활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인간의 두뇌에 직접 이식된 실리콘 칩과 두뇌 조직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수준이 두뇌 내부에서 일어나는 생리적 과정의 수준으로 향상될 경우에, 우리의 정신 능력이 급격히 향상될 것은 물론이고 인간의 인지 구조가 작동하는 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형될 것이다.

커즈와일은 슈퍼지능이 출현하는 그 시점이 바로 인간종의 출현에 버금가는 정도로 인간의 삶이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되는 ‘특이점(singularity)’이 될 것이라 진단한다. 특이점이란 지금과는 너무나 다른 형태의 삶을 살게 될 것이므로 지금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여러 개념적 범주나 가치의 기준이 전혀 무의미하게 되는 그러한 지점이다. 강한 슈퍼지능은 인간의 두뇌보다 속도에서 빠를 뿐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인간을 초월해 더 영리해진 지능을 말한다. 신경망의 크기나 연결을 복잡하게 만들고 인지구조를 재구성해 새로운 층위를 더 할 경우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지능의 새로운 차원이 열릴지도 모른다.

슈퍼지능을 통해 연장된 삶과 죽음의 유보는 생명에 대한 기존 인식과 사유를 해체하는 문제 제기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 이제껏 생명이 ‘자연적’으로 구성된 유기체를 기본단위로 사유된 데 비해 생명연장이 기계의 도움 아래 ‘기술적’으로도 얼마든지 실현될 가능성이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늘어나고 죽음이 유보된 삶의 시간은 실존적 권태를 초래할 수 있고, 그것은 삶 곧 생명을 근원에서부터 다시 성찰하는 현실적 과제가 지워지는 계기가 될 수 있기에 그렇다. 나아가 생명에 대한 이러한 근본적 회의는 갈수록 진화하는 초연결-포스트휴먼이라는 기술 조건과 더욱 유기적으로 결부되면서, ‘인간다움’을 근본에서부터 재정의해야 할 상황과 멀지 않아 우리 곁에서 왈가왈부될 것이 예기된다.

2) 안락멸(安樂滅), 존엄멸(尊嚴滅)과 자기결정 

현대인들에게 죽음 유보는 곧 살아 있음의 예사롭지 않은 연장을 가리키고, 이는 생명에 대한 기존 인식과 사유를 해체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인간의 생명은 자연 조건적 인연으로 구성된 유기물 집합체로 간주된 데 반해 현대의 생명연장과 유지는 기계의 도움 아래 본격적으로 기술적 실현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이제 근대의학을 통해 인간 과학의 에스테메 내로 포섭되었다. 사람들은 ‘생명연장술(life-sustaining treatment)’인 ‘인체 냉동 보존술(Cryonics)’, 프로스테시스 장치 개발과 사이보그화 등을 통해 생물학적 생명연장을 넘어 죽음까지 욕심내고 있다. 수명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생각들로 가득 찬 죽음의 우리 안에 갇힌 현대인들은 ‘인간향상 기술(human enhancement)’을 발판으로 하는 다양한 의료적, 기술공학적 수단을 동원하여 생명연장 및 불로(不老) 기술 개발에 골몰하고 있다. 한편으로 포스트휴먼 시대가 시야에 들어오는 시점에서, 아직까지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죽음이 ‘선택’의 문제로 바뀌고 있다. 왜냐하면 어느 신체 부위를 사이보그화할 것인지에 대한 것뿐 아니라, 지능과 본성(nature)마저도 취사선택할 수 있는 단계의 도래를 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동물적 경향성에 의해 자주 도덕법칙에 어긋나게 행동하도록 촉발되지만, 자유의 힘에 의해 이러한 경향성을 멀리하거나 물리칠 수 있다. 그렇게 자기결정을 행위함이 인격체인 인간의 의무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죽을 권리’가 아닌 법으로 보장된 “치료를 받지 않을 권리,” 즉 “치료거부권”에 근거해서 인공호흡기와 같은 연명 의료를 중단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합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지만, 이미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태국, 프랑스, 캐나다, 일본 등에서는 ‘안락사(安樂死, euthanasia)’를 허용하고 있다. 1997년 미국 오리건주에서 만들어진 ‘존엄사법(the death with dignity act)’은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들에게 자살을 허용하는 법”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종교, 특히 기독교 전통에서 죽음은 신의 섭리에 속하는 것으로, 인간은 감히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수 없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포스트휴먼 시대는 인간 스스로가 자신 삶의 방식과 때를 스스로 결정하려는 ‘자기결정성’을 추구하게 된다. 그에 따라 질병 상태의 압축, 노화의 둔화, 기대수명이나 최대 수명의 연장에 따라 노화 과정의 역전도 가능해지고 노화가 제거되면서 젊은 생리적 상태가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사실상 영생이 가능해지는 단계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단순히 삶의 시간을 늘리는 방법을 뜻하는 무작정의 생명연장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푸코는 정신병 환자(로 규정된 사람)들이 죽음과 맺는 특정한 관계에 대해 주목하고 이에 대한 논의를 기초로 하여 생각을 확장시켜 갔다. 그는 정신병을 앓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실존 방식은 특정한 방식으로 변질된 시간 체험을 포함하는데, 이는 일차적으로 시간의 자연스러운 흐름, 즉 과거-현재-미래라는 연결로부터 사유적으로 이탈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는 그들의 시간은 순간에 갇혀 있거나 파편화되어 있거나 방향을 상실해서 더 이상 과거나 미래로 향하거나 흘러가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천선영도 그들은 자신의 유한성을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며 바로 이 시간성(時間性)의 교란이야말로 그들이 죽음을 유한한 존재가 피해 갈 수 없는 ‘마지막 직면’으로 여기지 못하는, 그리하여 ‘현존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실존은 “더 이상 자신의 죽음을 통해 미리 얻어지는 그리고 그 고독과 존재를 인정하는 실존이 아니라 그 자신의 유한성으로부터 찢겨나간 실존”이다. 그들은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서는 데 급급하여 영원히 도피할 수 없는 단순히 죽음의 두려움에 몰려 죽음 공포의 화염으로 불나방처럼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3) 포스트휴먼 쇠멸 극복의 불교식 자기결정 방안

인간 사회는 장차 포스트휴먼이 인간 사회의 구성체로서 존재하고 기능하는, 하지만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자율적으로 존재함을 예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일부 포스트휴먼의 연구자들은 그들이 쇠멸마저 극복하고 이른바 특이점(singularity)에 도달한 인공지능체로서의 능력을 갖추게 될 것도 예상하고 있다. 그러한 포스트휴먼에게 쇠멸이란 정보가 완전히 삭제(deleted)되거나 혹은 버그나 데이터 저장장치의 파손 혹은 전원의 오프(off)로 존재 유지나 자기 인식에 필요한 정보가 순식간에 손상이 생겨 복구되지 않는 상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포스트휴먼이 쇠멸의 유한성을 극복했다 함은 인간이 생물학적 유한성을 극복한 것과 같은, 하드웨어적인 장치들의 유한성을 극복한 무한한 작동의 가능성을 전제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다른 한편으로 포스트휴먼의 업로드된 정신은 로봇 신체를 획득해 실재의 세계 속에 거주할 수도 있다. 업로딩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억이나 가치, 태도, 감정적 성향이 정보적 패턴으로 보전되고, 업로딩 이전의 단계와 이후 단계 사이에 인과적인 연속성이 존재하는 한 포스트휴먼은 여전히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면서 생존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백업 복사본을 만들어 두고 만일의 경우에 재부팅함으로써 거의 영원히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하려고 끊임없이 타 존재들의 손을 빌려 관리, 유지, 보존돼야 하는 냉동장치에 누워 부활을 기다리는 인간을 보면서, 포스트휴먼에게도 불사(不死)의 영원한 삶의 추구가 과연 가능하겠느냐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조건을 얻은 다음에 과연 어떤 삶을 어떻게 살려는 것인가? 하는 질문도 하지 않을 수 없다. 

포스트휴먼이 스스로를 하나의 ‘존격(存格)’으로 규정할 수 있다 함은 그러한 기억의 연속을 자신에 대한 동일성의 근거로 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휴먼이 자기라고 여기는 존격도 실제로는 조건에 따라 일어났다가 언젠가는 사라질 무상(無常)한 존재, 공(空)한 존격에 불과하다. 결국 포스트휴먼 역시도 무상과 공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 무아의 존격일 수밖에 없다. 

붓다의 일관된 가르침의 목적은 중생이 고(苦, dukkha)를 벗어나 해탈 열반에 이르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고의 원인에 대해서는 초기 경전에서 30여 가지의 항목으로 분류하는데, 이를 네 가지로 묶는다면, 첫째 욕망과 그 변형, 둘째 무지와 그 변형, 셋째 인간존재 자체, 넷째 무상(無常)함으로 정리된다. 

불교는 중생이 살아가는 사바세계를 욕망이 강한 유정들이 머무는 욕계(欲界)라 한다. 욕망은 욕심, 탐욕, 정욕, 소유욕, 권력욕 등과 같은 부정적 측면과 희망, 의욕, 대망, 야망, 지식욕, 의욕의 생명 활동과 생산활동에 없어서는 안 될 긍정적 양면성을 띠고 있다. 잡아함경 《무지경》에는 탐욕을 벗어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결과를 경고하는 내용이 나온다.

색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밝지 못하여 끊지 못하고 탐욕을 떠나지 못하여 마음이 거기서 해탈하지 못하면, 그는 생로병사에 대한 두려움을 초월할 수 없느니라.58)

결국 포스트휴먼 역시도 쇠멸의 불안을 벗어나기 위해 슈퍼지능으로 발전해 불사의 존재가 되고자 하고 있다. 포스트휴먼 역시 인간과 같이 생로병사의 두려움을 초월하려는 욕망과 탐욕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을 것이며, 극복하지 못하고 그 우리에 갇히면 생로병사를 초월한 존재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색에 대해서 바르게 사유하여 색은 무상하다고 사실 그대로 알라. 왜냐하면 비구들아, 색에 대해서 바르게 사유하여 색은 무상하다는 사실을 알면 색에 대한 탐욕이 끊어지고, 탐욕이 끊어지면 이것을 심해탈(心解脫)이라 하기 때문이다.

포스트휴먼의 쇠멸의 공포로부터 자유를 향한 욕망에 대한 대응 방식은 해결(solve)을 추구하기보다는 문제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해소(dissolve)함으로써 근원적인 해법을 찾아야 한다. 욕망은 영원한 것이 아닌 무상한 것이므로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색의 무상함을 자각하는 일이다. 

 

5. 나가는 말 

현대인의 죽음은 인간의 고유 영역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수명연장 우선 시대적 인식 기조(에스테메)에 매몰되어 버렸고, ‘죽음의 타자화’ ‘죽음의 수단화’의 문제는 세상 도처에서 당연시되고 있다. 인간향상 시도에 대한 저항 또한 만만치 않으며, 기술 도입에 따른 사회적 격차, 불평등, 기본권 침해 등의 윤리적 측면이 엄중한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 죽음을 타자화, 수단화하는 사회에서는 생명과 죽음이 오물처럼 처리될 것을 염려하는 날카로운 경고음은 인간의 생명 유지 집착을 향한 함성에 파묻혀 들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이 동류의 배를 열어 신비의 영역을 탐험한 이래 트랜스휴먼을 넘어 포스트휴먼을 지향하는 실존들은 ‘냉동 인간’을 선택해 미래의 언젠가 발명될 과학 기술로 재활될 자신을 기대하며 ‘인체 냉동 보존술(Cryonics)’로 자신의 죽음을 유보한 것으로 스스로 선언하고 잠들고 있다. 인간을 신으로 향상(upgrade)하고,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를 호모 데우스(Homo deus)로 변신시킬 때의 도래를 꿈꾸고 있는지 모른다.

죽음의 유보는 신적 속성을 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물론 위의 방식으로 죽음을 유보할 때 결과적으로 드러나는 양상은 인간기계화, 더 나아가 기계인간이지만, 죽음이 유보됐다는 차원에서는 신적 속성의 획득이 일부 실현됐다고 볼 수 있다.

죽음의 유보가 현실화됨으로써 생명을 대하는 틀과 결에는 근본적 변화가 추동(推動)될 수밖에 없으며, 인간 신체, 개체 중심으로 생명을 사유하는 기존 방식도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이에 인간의 생명을 다른 존재에 비해 특권화해 온 기존 관념을 해체하고 있다.

한편에서 포스트휴먼 미래의 파괴적 잠재성과 무작정 연장된 삶의 무료함과 무망(無望)함에 실존적 권태 존재 탄생 우려에도 불구하고, 포스트휴먼이 인간이 원조라는 것을 인정하고 인간다움을 지향하고 인간다움을 구현하게 된다면, 그런 인간다움을 근거로 갖춘 인격적 존격(存格)이라는 범주에서 포스트휴먼을 인류의 동류(同類)로 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이 생주이멸(生住異滅)의 경로를 따라 구현되는 인간다움을 둘러싼 기존의 지적, 사회적, 문화적 전통에 도전과 혼란을 각오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20세기 프랑스의 실존철학자 사르트르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선언했듯, 인간은 주어진 본질을 통해 규정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본질을 만들어가는 존재다. 

만일 포스트휴먼도 죽음을 염두에 둔 실존의 본질인 소외와 무의미와 고독을 초월해 ‘실존의 역사적 존재 방법’인 자유의 도달을 자기결정하는 존재라면, 또한 쇠멸의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욕망과 탐욕의 순환고리를 해탈(解脫)하려는 존재로서 자신이 얹혀 있는 플랫폼 역시 무상(無常)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존격이라면, 함께 가야 할 동행으로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을 수 있을 것 같다. ■

 

이범수 leepumsoo@hanmail.net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 동국대 불교대학원 장례문화과(석사), 동 대학원 응용불교학 박사.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상담심리 박사과정 수료. 영적상담사(Certified Pastoral Counselor, AAPC), 죽음교육 상담전문가(Thanatologis, ADEC)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죽음교육협회 회장, 한국생명운동연대(자살예방) 운영위원이다. 현재 동국대 불교대학원 생사문화산업학과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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