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포스트휴먼 시대의 도래와 불교

허1. 포스트휴먼 시대

허남결 동국대 교수

    -‘동물로의 전환(animal turn)’이 왔다

그동안 분야별로 혹은 국지적으로 발전되어 오던 과학기술은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서로의 기술을 융복합하는 가운데 폭발적인 시너지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의 획기적인 발전이다. 인공지능의 발달과 응용 가능성은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꿀 만큼 실로 무궁무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소 이른 감이 없지 않으나 인공지능이 인간의 자연 지능을 완전히 초월하는 이른바 ‘특이점(singularity)’의 도래를 걱정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고 있을 정도다. 

그런 점에서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포스트휴먼(post-human)은 다양한 기술의 발전 때문에 나타나는 새로운 인간형”1)이라고 일단 정의해 볼 수 있겠다. 이와 유사한 개념으로 ‘트랜스휴먼(trans-human)’도 사용된다. 철학자 닉 보스트롬(Nick Bostrom)은 이 두 용어를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인간이 겪게 될 변화의 단계별 차이로 설명한다.

그의 이해에 따르면 인간은 “휴먼(현생 인류)-트랜스휴먼-포스트휴먼”의 변화 단계를 거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포스트휴먼의 단계에 도달하면 지금의 우리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유형의 인간존재가 등장할 것으로 예측한다. 이와 관련된 논쟁은 다양한 관점에서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논의의 편의상 ‘포스트휴먼’이 ‘트랜스휴먼’을 포함하여 “현생인류로서의 인간이 크게 변모한 존재 일반을 가리키는 말”로 받아들이고 넘어가기로 한다. 그렇더라도 ‘포스트휴먼’이란 말이 성급하게 오남용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 없지는 않다. 어쨌든 포스트휴먼 시대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인공지능 로봇과 같은 비인간(nonhuman) 사물과 인간(human)의 관계를 인문학적 시각에서 되묻는 일이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인간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도덕적인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동물의 지위나 권리도 자연스럽게 언급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 포스트휴먼 시대의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이러한 인식과 관심의 변화를 학자들은 ‘동물로의 전환(animal turn)’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모든 영역에서 인간 중심의 사고(anthropocentrism)를 넘어서려는 사상과 운동을 함축하고 있는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의 인식과 맥락이 맞닿아 있다. 알다시피 “트랜스휴머니즘, 포스트휴머니즘 담론이 등장하고 널리 확산되면서, 동물-인간-기계의 관계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중략) 이런 일련의 지성사적 흐름을 회고하면서 동물과 인간 사이의 차이를 근본적으로 다시 숙고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다시 말해 동물의 권리와 지위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인간의 윤리적 문제와 인간존재 자체에 대한 사고영역을 확장하면서 ‘인간다움’의 판단 기준을 다시 숙고하게 만들기에 이르렀다.” 

이 글은 포스트휴먼 시대를 살게 될 우리가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에 대한 시론적인 생각을 간략하게 정리해 본 것이다. 논의의 과정에서 불살생계와 윤회의 도덕적 의미에 대해서도 살펴볼 예정임을 밝혀둔다.

 

2. 인간과 동물의 경계

    -고통과 통증을 공유하다

사람들은 인간을 동물보다 우월한 도덕적 주체로 여기는 한편, 동물을 인간보다 열등한 객체적 존재로 규정해왔다. 인간종과 동물종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본 것이다. 리처드 라이더(Richrd D. Ryder)가 제안하고 피터 싱어(Peter Singer)가 본격적으로 사용하면서 유명해진 종차별주의(speciesism)란 개념은 인간종과 동물종의 차별을 효과적으로 비판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종차별주의는 곧 도덕적 인간중심주의(moral anthro-pocentrism)의 한 속성이기도 할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 즉, 인간의 조건에 초점을 맞춘 인간적 혹은 인간중심주의적(a humanist/anthropocentric) 접근과 인간적 관점을 비인간(동물의) 세계를 완전하게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보는 포스트휴먼(a posthuman)적 접근이 있다. 우리는 전자의 입장을 너무 오랫동안 그리고 너무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전통적인 동물관에 도덕적인 반성의 계기를 제공한 사람이 바로 피터 싱어였다.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의 쾌락주의적 전통을 계승한 공리주의자 피터 싱어에 따르면 인간과 동물은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감수능력(感受能力)을 공유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면 우리는 동물을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는 이유와는 별도로 결코 차별해서는 안 될 강력한 도덕적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 그것은 동물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좋은 느낌과 나쁜 느낌을 동시에 지각할 줄 아는 감정적이고 감각적인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이성의 소유자라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유정물(sentient beings)의 핵심적인 생명현상으로 파악된다. 피터 싱어의 말을 빌리면 “동물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것이 과학적 이유건, 철학적 이유건 이는 마찬가지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다른 동물이 고통을 느낀다는 것 또한 의심해서는 안 된다. 동물들은 고통을 느낄 수 있다. (중략) 동물이 느끼는 고통(또는 쾌락)이 인간이 느끼는 동일한 양의 고통(또는 쾌락)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은 어떤 경우에도 도덕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이러한 피터 싱어의 인식은 우리가 동물을 도덕적으로 차별할 중요한 근거를 없앰과 동시에 동물을 도덕적 고려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충분한 이유를 제공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감각적 동물의 경험적인 사실을 가지고 도덕의 형이상학적 근거를 허물어버렸다. 당연히 수많은 찬반 논의가 뒤따랐다. 이는 공리주의의 순발력이자 한계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피터 싱어의 소박한 원칙은 확실히 유용했다. 그 후 동물권 논의가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은 이를 입증하고도 남는다.

피터 싱어는 고통을 가리키는 말로 ‘suffering’과 ‘pain’이라는 단어를 번갈아 가며 사용한다. 대체로 전자는 ‘정신적인 고통’을 가리키고 후자는 ‘신체적인 고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감각기관의 보유자들인 인간과 동물은 둘 다 신경계를 통해 전달되는 쾌락과 고통의 감정을 신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느낄 줄 아는 자연적 존재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과 동물은 도덕적으로 동등한 지위와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피터 싱어의 기본 시각이다. 인간에게는 동물이 가지고 있지 못한 특별한 무엇이 있다는 관념을 잠시 접어둔다면 피터 싱어의 말에 귀를 기울여볼 가치가 있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동물도 쾌락과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가 채식주의자로 살기로 한 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선택이었다. 공리주의에 대한 이론적인 지적을 떠나 단순 · 소박한 원리의 현실적 실천은 공리주의의 유연한 장점이 아닐 수 없다. 채식주의의 실천자로서 그는 최소한의 생활경비를 제외한 수입 대부분을 사회단체에 기부한다. 

그러나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피터 싱어의 주장이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비인간 동물을 그들 자신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도덕적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통과 쾌락의 감각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인간과 동물은 도덕적 지위와 권리를 동등한 수준에서 함께 공유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인간과 동물은 말 그대로 평등한 도덕적 자격을 갖는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고려해볼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고 본다. 물론 쾌락과 고통의 감수능력 외에도 인간과 동물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다만 그런 것들은 전통적으로 인간의 관점에서 인간 중심적으로 동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반영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할 뿐이다. 인간이 아닌 동물들을 둘러싼 익숙한 도덕적 쟁점들은 이런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정당화되거나 합리화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위대한 이성의 소유자이기 이전에 평범한 감각의 소유자라는 불편한 진실을 일깨운 것은 공리주의의 무모한 용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알려져 있다시피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1975)은 동물에 대한 인식을 제고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에 의하면 “지능이나 인격, 또는 합리적 이성 등 그간 동물과의 비교 우위로 여겨졌던 인간적 특성들”은 인간과 동물의 이익을 동등하게 고려하는 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공리주의자인 그가 말하는 ‘이익’은 대체로 ‘고통의 회피’ 및 ‘쾌락의 향유’와 관련된 것으로 파악된다. 피터 싱어는 자신의 이런 도덕적 입장을 가리켜 ‘이익 동등 고려의 원리(the principle of equal consideration of interests)’라고 명명했다. 이 원리는 특별한 것이라기보다는 인종이나 성별과 관계없이 한 가지 도덕 규칙을 똑같이 적용하라는 상식적인 주문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원리의 설득력과 실천력은 결코 만만치 않다. 바로 위에서 우리는 그 이익을 쾌락과 고통의 감수능력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익 동등의 원리는 “기본적인 이익 또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 인종이나 성별뿐만 아니라 종에 상관없이 똑같이 대우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원리는 간단하나 실천은 쉽지 않다. 여기서도 우리는 공리주의의 매력과 함께 결함도 발견한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의 말을 패러디하면 붓다의 지혜와 자비를 갖춘 사람만이 진정한 공리주의가 될 수 있다. 그는 예수야말로 진정한 공리주의자일 것이라고 말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동물로의 전환’이 시작되고 인간 중심적 역사의 패러다임이 바뀌게 된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인공지능과 같은 새로운 성격의 과학이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이제 전통적인 휴머니즘은 트랜스휴머니즘이나 포스트휴머니즘이라는 전혀 다른 사유 체계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거기에는 인간 외에도 기계와 동물이 주어로 등장한다. 이는 과학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고유 영역이라고 여겨져 왔던 부분이 기계나 동물과 같은 비인간 사물로도 대체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가운데 인간과 동물의 경계도 허물어져야 한다는 인식의 공감대가 생겨났다. 유전공학의 눈부신 발달도 인간과 동물의 간격을 크게 좁혀 주었다. 인간과 동물의 유전자는 생각만큼 큰 차이가 없으며 이러한 생물학적 유사성은 동물과 다른 인간만의 차별성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이와 더불어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와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과 같은 철학자들도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재설정하고 나섰다. 이런 시대적 환경의 변화가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당연한’ 차별에서 ‘필연적인’ 상생과 공존의 길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이어서 사랑과 공포의 감정에 바탕을 두고 형성된 인간과 동물의 유대가 각종 차별과 역경을 헤쳐나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는 실증적인 연구사례를 살펴보기로 한다.

 

3. 인간과 동물의 유대

   -역경과 차별을 극복하다

우리나라에도 반려동물(companion animal)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 1,500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이는 인구의 약 3분의 1이 어떤 형태로든 인간이 아닌 동물과 서로의 감정을 주고받으면서 일상의 상당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인간과 동물은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의지하는가 하면, 누군가로부터 받은 상처와 외로움을 위로받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들은 서로를 가족의 구성원으로 여기고 유대의 감정을 깊이 나눈다. 인간은 동물의 이름을 부르고 동물은 몸짓으로 대답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과 동물은 상대방에 대한 희로애락의 기분을 숨기지 않는다.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고 머리와 피부관리도 마다하지 않는다. 철 따라 예쁜 옷도 사서 입힌다. 늙고 병들면 죽음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안락사를 시키고 유해는 동물 납골당에 안치한다. 여기서 보듯이 동물을 대하는 개인의 인식과 사회적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정치와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점차 커질 전망이다. 인간과 동물은 서로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할 때가 되었음을 자각할 시점이 온 것 같다.

철학이나 역사학뿐만 아니라 의학도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해 학문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심리신경내분비학(psycho-neuro-endocrinology)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과 동물은 끈끈한 감정의 유대를 통해 자신들이 처한 역경(adversity)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인간뿐만 아니라 사람과 반려동물 사이에도 강력한 유대감이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 사이의 긴밀한 유대와 친족의 감정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가족의 개념도 인간으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동물도 포함될 수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다인종 가정(multispecies household)이라는 말도 여기서 생겨났다. 미국 가정의 약 60%가 개나 고양이와 같은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으며 서로에 대한 감정의 깊이가 다른 인간 가족에 못지않을 정도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인간 주인은 부모가 되고 동물 친구는 자식의 역할을 하면서 집안을 화기애애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함께 사는 동물에게는 말하고 싶을 때가 있는 모양이다. 동물도 인간에게 상처받고 학대받은 경험을 다른 인간 주인의 보살핌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되찾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서로에게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며,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때로는 연인의 감정을 품을 정도로 서로에게 의존하게 되기도 한다. 인간은 다른 인간을 아프게 하지만, 동물은 같은 인간을 아프게 하지 않는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 형성된 사랑의 감정과 사회적 유대감은 역경을 겪는 과정에서 자동차의 범퍼(buffers)와 같은 역할을 한다. 역경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완충재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또한 상처의 회복을 돕는다. 인간은 종종 비인간 동물과도 강력한 유대를 형성할 수 있다. 이는 사람들이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현대인들이 직면하는 역경과 고통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예컨대, 친밀한 사이에서 일어나는 가정 폭력이나 데이트 폭력은 피해자들에게 마음의 상처와 좌절감을 안긴다. 가해자는 폭력을 수단으로 피해자를 지배하고 통제하려고 한다. 여기에는 선천적인 폭력 성향 못지않게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과 같은 사회적인 원인도 영향을 미친다. 가정은 전쟁터가 되고 어린아이는 울부짖는다. 절망에 빠진 피해자들은 마지막으로 반려동물을 찾는다. 그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대화하는 가운데 많은 위로를 받는다고 한다. 최근에는 이와 관련된 질적인 연구가 쏟아지고 있다. 

가정폭력을 겪고 있는 성인이나 어린이들은 한편으로는 반려동물에게 한없는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심한 공포와 죄책감에 시달린다고 한다. 폭력의 가해자들이 희생자들의 친구가 되어준 반려동물에게도 폭언과 폭력을 일삼기 때문이다. 친구나 가족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가정 폭력의 피해자들이 일관되고 신뢰할 만한 감정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대상은 오로지 반려동물뿐이다. 가해자들은 자신에게 절대복종을 요구할 뿐 반려동물에게 위로받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그럴수록 폭력의 희생자들은 반려동물에게 심리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가해자들은 자기편이 아닌 반려동물을 학대하고 심지어는 죽이기도 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폭력의 희생자들은 어쩔 수 없이 가해자와 계속 살 수밖에 없게 되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그래도 가정폭력의 위안처이자 유일한 쉼터는 반려동물의 몫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주택문제가 심각하지만, 미국에서도 임대료 부담이 증가하면서 주거환경이 크게 나빠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택문제는 미국인들이 감당해야 할 중요한 역경 가운데 하나다. 더욱이 수입의 30%를 집세로 지불하는 미국인들에게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일도 쉽지 않은 모양이다. 집주인들이 반려동물이 있는 세입자들을 차별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예 세를 주지 않거나 비싼 임대료를 책정하는 일도 잦고 여차하면 쫓겨나는 일도 많다는 것이다. 새집을 찾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고 반려동물을 버릴 수도 없는 곤란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주거 불안정은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더욱 악화하였다. 일부 자치단체에서 반려동물이 있다는 이유로 집세를 올리거나 내쫓는 일을 금지하는 법령을 만들었지만, 시행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다고 한다. 집주인은 법령을 어기지 않고도 반려동물이 없는 사람에게 세를 놓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미국에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은 살 집을 얻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반려동물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세를 얻었다가 나중에 발각되어 위약금을 물고 퇴거당하는 일도 빈번하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저소득층이거나 유색인종인 경우가 많은데 반려동물이 있다는 이유로 더 차별당하는 것이 현실이다. 집주인은 위생이나 주거시설의 손상을 염려하지만, 세입자는 가족과 같은 반려동물과 함께 살 수 없다는 절망에 시달리다가 노숙자가 되는 경우까지 있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다양한 상황에서 반려동물에게 의존도가 높은 개인들은 그들과 헤어지기보다는 차라리 그들과 함께 사는 삶을 선택함으로써 적지 않은 불이익을 감수하기도 한다. 이처럼 인간과 반려동물의 유대는 삶의 선택에도 영향을 미칠 만큼 강력하다. 인간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마음의 상처를 유일하게 믿을 만한 친구인 반려동물을 통해 위로받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역이나 문화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성소수자가 받는 차별도 심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을 표현하는 용어로 ‘LGBTQ+’가 사용된다. 레즈비언과 게이, 트랜스젠더와 퀴어 그리고 그 외의 성소수자들을 모두 망라하는 개념이다. 최근에는 무성애자까지 이 그룹에 포함시키는 것이 추세인 것 같다. 이들이 받는 사회적 스트레스는 상당하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성소수자들을 혐오하는 적대자들의 공격에도 항상 노출되어 있다. 성소수자들은 고용의 차별과 주거의 불안정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구로부터도 소외당한다.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편견과 선입견은 정말 고통스러울 것이다. 의식의 개선이 많이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외롭고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관련 연구에 의하면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성소수자들이 절대적으로 많으며 이들이 반려동물로부터 얻는 이익과 위험도 객관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성소수자들은 대부분 반려동물로부터 건강한 정체성을 회복하고 일상적인 삶을 영위할 힘을 얻게 된다고 말했다. 크고 작은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데도 반려동물과의 유대가 큰 도움이 된다고 증언했다.

미국에서는 아직도 인종주의의 흔적이 남아 있어 흑인들에게 개를 키우지 못하도록 하는 정서적 반감이 존재한다고 한다. 미국에서 개는 원래 인종 탄압의 도구로 사용되던 동물이었다. 노예의 주인들은 흑인들을 위협하고 통제하며 심지어 죽이기 위해 사나운 개를 길렀다. 그 여파인지 개를 반려동물로 삼는 백인의 비율은 70%, 흑인은 30%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지금도 인종차별 반대 집회에는 개를 몰고 나온 백인 경찰을 흔히 볼 수 있다. 개에게 물려 다치거나 죽는 흑인 시위자도 많다. 못생기고 사나운 핏불(pit bull)과 같은 혈통의 개는 흑인의 이미지와 겹치면서 위험한 개로 분류되어 사육이 금지되거나 걸핏하면 안락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인종주의의 맥락에서 보면 개는 억압자들이 만든 트라우마와 고통의 원천임과 동시에 피억압자들에게는 위로와 지지의 잠재적 원천으로도 인정받는 중의적인 성격을 갖는다. 개를 반려동물로 키우는 유색인들은 인터뷰에서 개들과 교감하고 있으며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주거나 동반관계가 됨으로써 상호 이익을 주고받는다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인종주의가 개의 사육과도 연관이 있을 정도로 그 뿌리가 매우 깊은 것 같다. 이 외에도 반려동물은 이웃과의 소통창구가 될 수 있으며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역경 속에서도 사회적 약자들은 반려동물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한다는 보고가 이어지고 있다. 이 연구의 의의는 인간과 동물이 말 그대로 동반자(companion)의 관계로 서로에게 버팀목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있다는 점이다.

 

4. 불교와 동물의 지위

    -불살생계와 윤회의 의미를 사유하다

불교의 불살생계(不殺生戒)는 윤리학의 역사에서 놀라운 성취 가운데 하나라는 평가를 받는다. 오계의 첫 번째 항목인 이 맹세는 다양한 형식으로 진술되고 있지만 대체로 ‘의도적인 살생(intentional killing)’을 하지 말라는 도덕적인 명령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대상은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체다. 당연히 동물도 포함된다. 좀 더 일반적인 수준에서 말하면 불살생계는 다른 존재들에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해악을 끼치지 말라는 도덕적 권고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비폭력의 정신을 포괄적으로 함축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인간의 살생과 함께 동물의 살생은 악업을 받아 다른 동물로 환생하거나 지옥에 떨어져 상응하는 고통을 받는 것으로 묘사된다.

비폭력과 자비를 강조한 붓다가 베다의 동물 희생제를 강력하게 비판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베다의 제사는 야만적일 뿐만 아니라 브라만들이 희망하는 목적도 달성할 수 없는 한낱 무모한 의식에 불과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붓다의 이런 인식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유지되어 왔다. 오계의 첫째 조항이 변함없이 불살생계임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불살생계는 다른 생명체에 대한 전면적인 비폭력(ahiṃsa)의 정신을 함축한다. 《자타카》에는 살생과 그것의 업보를 일깨우는 붓다 전생의 에피소드들이 나온다. 그리고 상윳따 니까야에는 더 자극적인 장면들이 등장한다. 동물을 살상했던 사람들은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지는 고통을 겪거나 날카로운 칼로 난도질당하는가 하면, 화살에 꿰이고 바늘에 찔리는 고통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장면이 나타난다. 

이들의 고통은 전생의 악업이 완전히 소멸될 때까지 지속된다. 하지만 베다와 브라만의 경전들에서는 동물들의 도살을 그릇된 행동으로 규정하는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희생제에 사용되는 동물을 신성하게 여기면서도 동물들의 피로 제사를 지내고 그 고기를 나누어 먹었다. 불교는 무엇보다도 뭇 생명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윤리적 자각에서 출발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훗날 대승 보살의 자비 사상으로 자연스럽게 계승, 발전되었다.

대승불교 경전인 《대반열반경》에는 살생과 관련된 세 가지 수준의 위중함이 설명되어 있다. 위중함의 정도가 가장 낮은 살생은 곤충이나 동물을 죽이는 것이다. 중간 단계의 위중한 살생은 인간존재를 죽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심각한 수준의 살생은 자신의 부모나 아라한, 독각(獨覺), 혹은 보살과 같은 깨달은 존재를 죽이는 것이다. 《경장》에 의하면 이와 같은 살생 행위는 모두 지옥으로 떨어지는 업보를 받는다. 그들 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은 지옥의 형태와 머무는 기간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뿐이다. 중국불교에서도 동물을 살상하는 사람은 불행한 환생으로 고통받게 된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이처럼 테라바다와 대승불교의 중요한 경전들은 한결같이 동물을 살상하는 행위는 그릇된 것이며 극단적인 대가를 치러야 할 업보를 받게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지옥의 존재와 그것의 형이상학적 의미는 불교 우주론의 핵심적인 부분으로서 불자들에게 공덕을 쌓도록 안내하는 도덕적 지침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말하자면 불살생계와 윤회사상의 강조는 대중들을 교화하는 훌륭한 방편이었다. 악업을 저지르면 그에 따르는 처벌을 면할 수 없다는 공포심의 조장은 불교윤리의 유용한 전략 가운데 하나다. 사람들은 현재의 행복보다 미래의 불행을 더 두려워한다. 동물의 살생은 지옥에서의 환생을 예약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만큼 무서운 말은 없을 것이다. 동물을 살생하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법문을 들은 불자들은 누구나 붓다의 불살생계를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을까 싶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에 대한 자비심의 강조는 대승불교 윤리의 핵심이다. 보살은 곧 자비의 화신(化身)으로 규정된다. 《입보리행론》의 저자인 산티데바는 보살들에게 동물들이 세상의 고통과 불행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한다. 그 이후 지금까지 자비심은 불교윤리에서 가장 기본적인 품성으로 간주된다. 

《자타카》에는 다양한 형태의 동물로 살다가 나중에 인간이나 미래의 붓다가 되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여기서 동물과 인간은 허물없이 말을 주고받으며 서로 연민(karuṇā)의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물과 인간은 처음부터 한동네에 살던 의좋은 남매였다. 동물에게 위해(危害)를 가하는 것은 곧 다른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다. 또한 육식을 금지하고 채식을 주문하고 있는 《능가경》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윤회의 긴 사슬 속에서 한 번이라도 너의 어머니, 아버지, 형제, 누이, 아들, 딸, 혹은 친인척 관계가 아니었던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어느 때에는 다른 형태의 생명을 받아 짐승이나 가축, 새, 태생(胎生) 혹은 (지금의) 너와 관계가 있는 어떤 존재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중략) 붓다의 진리를 수행하고자 하는 보살마하살(Bodhisattava-Mahāsattava)이 어떻게 자신과 똑같은 본성을 가진, 살아 있는 다른 존재의 살(flesh)을 먹을 수 있단 말인가?” 실로 가슴에 와닿는 비유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이 동물을 도운 유명한 사례 가운데 하나인 대승불교의 위대한 스승 아상가(Asaṅga)의 에피소드도 흥미롭다. 어느 날 동굴에서 선정에 들었다가 나온 아상가는 구더기로 뒤덮인 종기를 앓고 있는 병든 유기견을 발견했다. 구더기가 개의 살점을 파먹고 있었다. 아상가는 당장 개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었다. 동시에 구더기들에게도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불살생의 첫 번째 계율을 어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상가는 이 딜레마를 자기 자신의 살점 한 조각을 베어내 구더기에게 던져 주는 것으로 해결했다. 그가 구더기들의 먹이가 될 핏덩이를 헝겊 위에 올려놓자마자 개의 고통은 즉시 사라졌다. 구더기들이 아상가의 싱싱한 살점으로 몰려갔던 것이다. 그 개는 미륵보살의 현신(現身)이었다. 

이 퍼즐은 아상가의 덕성을 시험하기 위한 하나의 테스트였던 셈이다. 《자타카》에는 배가 고파 자기 새끼를 잡아먹으려고 했던 암호랑이 이야기가 나온다. 이 광경을 보고 불현듯 자비심이 일어난 보살은 자신의 몸을 던져 암호랑이의 먹이가 되는 대가로 불쌍한 새끼 호랑이들의 목숨을 구해준다. 이와 비슷한 교훈을 담고 있는 동물 관련 에피소드들은 다른 대승 경전들에도 많이 나온다. 

오늘날 동물을 학대하거나 살상하는 행위는 실정법으로도 금지되어 있다. 이는 동물 권리 캠페인의 의미 있는 성과라고 본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우리 불자들의 도덕적 선택은 가능하면 단순 소박한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불살생계의 대원칙을 따르면서도 피터 싱어의 ‘이익 동등 고려의 원리’ 수준에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고려’하되 각각의 상황에 맞는 ‘대우’를 해주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취지에 따른다면 우리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동물윤리의 실천은 치킨과 생맥주 그리고 삼겹살과 소주의 양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는 시도가 아닐까 싶다. 이처럼 윤리적 행동은 작은 실천을 통해 표현되는 것임을 잊지 않는 불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5. 포스트휴먼 시대

    -인간과 인공지능이 동물과 공존하다

우리는 마치 현재를 건너뛴 채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포스트휴먼이나 포스트휴머니즘을 일상적인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 같다. 더러 트랜스휴먼이나 트랜스휴머니즘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와 관련된 담론들은 최근 들어 포스트휴먼이나 포스트휴머니즘이란 개념으로 수렴되고 있는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트랜스휴먼이나 포스트휴먼이 되기에 앞서 그냥 오리지널 휴먼으로 살다가 삶을 마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포스트휴먼 시대의 특징인 초연결사회는 이미 실현되고 있으며 인공지능과 같은 과학기술도 빠른 속도로 응용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벌써 포스트휴먼 시대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트랜스휴먼과 포스트휴먼에서 ‘휴먼(human)’에 방점이 찍히지 않고 ‘트랜스(trance)’나 ‘포스트(post)’에 강조점이 찍힌 미래의 인간에 대한 논의라면 현재의 인간은 그 존재 의미를 의심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트랜스휴먼이나 포스트휴먼도 ‘휴먼’이 중심이 되어 “그들을 견제하고 또한 그들과 공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의 논의일 때 의미를 갖게 된다는 말이다. 

포스트휴먼 시대의 주인은 인간만이 아니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쓴다면 포스트휴먼 시대에는 인간과 인공지능 로봇과 동물이 도덕적으로 동등한 권리와 지위를 누리는 평등한 사회가 될 것이다. 포스트휴먼 사회에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동시에 인간과 기계의 관계 설정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것으로 설명된다.인공지능이 발달하여 자율성을 갖는 로봇이 등장한다면 그에게 도덕적 지위와 권리를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인간과 동물의 도덕적 관계가 먼저 재정립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동물은 인간과 쾌락 및 고통의 감각을 공유하는 유정물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로봇이 감각과 감정을 갖는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동물은 이미 우리와 함께 자연생태계의 당당한 일원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우리는 동물에게 그들이 받아 마땅할 도덕적 지위와 권리를 되돌려주어야 한다. 불교에서도 동물은 생명 순환의 한 단계로 살생이나 유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존재로 이해되고 있다. 동물의 살생은 지옥과 더 나쁜 단계의 환생을 초래하게 될 뿐이다. 불교에서 인간과 동물은 처음부터 사이좋은 동네 친구였다. 

그런 점에서 불교와 포스트휴먼 시대의 관계는 낯설지 않으며27) 동물과 상생하고 공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유 체계임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고 본다. ■

 

허남결 hnk@dongguk.edu
동국대학교 대학원 윤리학과에서 박사학위 취득. 서양윤리학 및 불교윤리학 전공. 영국 더럼대학 철학과 객원연구원 역임. 《존 스튜어트 밀-생애와 사상》 《공리주의 윤리문화 연구》 《불교와 생명윤리학》 등의 저서와 《불교의 시각에서 본 AI와 로봇 윤리》  등 다수의 역서와 논저가 있다. 현재 동국대학교 윤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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