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과 성찰

《조론오가해(肇論五家解)》(2022년 연말 출간 예정)
《조론오가해(肇論五家解)》(2022년 연말 출간 예정)

《조론(肇論)》과 이 책의 저자인 승조(僧肇, 384~414) 스님의 이름을 1990년대 초반에 처음 들었다. 고려원에서 우리말로 번역 · 출간된 《조론(략주)》을 읽었다. 내용이 잘 이해되지는 않았다. 4세기 말 5세기 초의 중국이라는 시 · 공간에 살다가 ‘31세에 요절한 한 젊은 지성인’이 쓴 글이라는 점에 왠지 마음이 심하게 끌렸다. 고전 한문을 익혀 내용을 직접 파악하는 것이 제일 좋겠다고 생각했다. 북경에서 공부하던 2011년 봄 무렵 ‘중국어가 나름의 수준에 도달됐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한번 《조론》 읽기에 도전했다. 물처럼 흘러가지 못하고 막히는 부분이 더러 있었다. 《조론》을 설명한 상당히 많은 주석서들이 현존한다는 사실과 주석서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보다 분명하게 인식하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시대별로 중요한 주석서 한 권씩을 선택해 비교하며 읽었으나 막히는 곳이 여전히 막혔다. ‘《조론》 주석서들에 나타난 중국불교의 흐름을 정리해 보는 것도 의미 있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알다시피 번역은 힘들다. 피와 살 그리고 마음마저 깎아 먹는 작업이다. 세밀하게 살펴도 미진한 부분이 반드시 있다. “(번역은) 밥을 씹어 남에게 주는 것과 같아 맛을 잃어버리게 할 뿐 아니라 그 밥을 먹는 사람에게 구역질을 일으키게 한다[有似嚼飯與人, 非徒失味, 乃令嘔噦也].”고 구마라집 스님이 승예(僧叡) 스님에게 격(激)하게 말했던 의미를 이제는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그러나 번역이 아니면 다수의 사람들에게 내용을 전할 방법이 그나마도 없다. 《조론오가해(肇論五家解)》 역시 번역을 통해 등장한 책이다. 《조론오가해》라는 이름도 본래 없었다. 다섯 분의 스님들이 쓴 주석서를 함께 옮긴다는 의미에서 ‘오가해(五家解)’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론오가해》 가운데 위진남북조시대 남조 진(陳)나라의 혜달(惠達) 스님이 찬술한 《조론소(肇論疏)》를 번역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현존하는 주석서 가운데 시대적으로 가장 앞선 책인데다 문장도 어렵고 상당히 방대한 내용까지 들어 있었다. 열반학파, 성실학파, 섭론학파, 지론학파 등 위진남북조시대에 나타났던 거의 모든 학파들과 관련된 내용이 곳곳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당나라 원강(元康) 스님은 중국 고전과 훈고학 서적 등에서 인용한 적지 않은 문장들을 《조론소(肇論疏)》 곳곳에 심어 놓았다. 번역하는 내내 이들 문헌을 찾아 원문을 확인해야만 했다. 지금 전하지 않는 문헌도 있어 모든 인용문을 원문과 다 대조해 보지는 못했다.

북송(北宋)의 비사(秘思, 994~ 1056) 스님이 강설하고 정원(淨源, 1011~1088) 스님이 집해(集解)한 《조론중오집해(肇論中吳集解)》의 분량은 혜달 스님의 《조론소》나 원강 스님의 《조론소》에 비해 적은 편이다. 압축된 문장이라 우리말로 옮기기가 결코 쉽지는 않았다. 다섯 권의 주석서 가운데 한 권을 권하라고 한다면 원나라 문재(文才, 1241~1302) 스님이 기술한 《조론신소(肇論新疏)》를 추천하고 싶다. 방대한 내전(內典)과 교리에 근거해 《조론》을 풀어낸 솜씨가 탁월하다. 훌륭한 책이기에 ‘상당한 인내심’과 ‘정교한 사고력’을 갖고 도전해야 한다. 본인의 수행 경험이 담긴 감산(憨山, 1546~1623) 스님의 《조론략주(肇論略注)》는 간략한 말 속에 풍부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조론》을 보다 쉽게 설명한 점도 돋보인다. 《조론략주》를 제외한 나머지는 이번에 처음으로 번역됐다. 일본어나 영어 그리고 현대 중국어로도 옮겨진 적이 없다. 다섯 권의 주석서들을 각 책의 앞부분에 붙은 〈해제〉와 함께 읽으면 중국불교의 흐름을 대충이나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조론》과 《조론오가해》에 대한 나의 이해와 설명 그리고 번역이 모두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번역과 해제를 통하지 않고 내가 이해한 《조론》과 《조론오가해》를 설명할 다른 방법이 지금의 나에겐 아쉽게도 없다. 《조론》과 《조론오가해》의 논리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번역한 오류에 대해서는 강호에 흩어져 있는 현인(賢人)들의 가르침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고쳐나갈 생각이다. “부처님께 밥값 했다.”고 감히 외람되게 말할 수는 없으나,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쏟았기에 이런 식으로 《조론》을 이해하고 이런 식으로 《조론오가해》를 번역한 사람도 있다는 점을 기억해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겠다. 

올 연말에 출간될 《조론오가해》(전 6권 1질)가 반야 · 중관 사상과 중국불교를 이해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 된다면 번역 과정에 겪은 신고(辛苦)는 눈 녹듯이 사라질 것이다. 책의 번역 · 출간에 직간접적인 격려와 관심을 보여주신 모든 분께 〈물불천론(物不遷論)〉에 나오는 유명한 게송으로 ‘움직이지 않는 사의(謝意)’를 표한다.

 

旋嵐偃嶽而常靜,    회오리바람이 몰아쳐 산을 무너뜨리지만 항상 고요하고, 
江河兢注而不流,    강물이 경쟁하듯 물을 쏟아붓지만 흐르지 않고,
野馬飄鼓而不動,    아지랑이가 나부끼며 공중에서 휘감아 돌지만 움직이지 않고, 
日月歷天而不周.    해와 달이 하늘을 가로지르지만 도는 것이 아니다. 
既無往返之微朕,   이미 되돌아간 조그마한 흔적도 없는데 
有何物而可動乎?  어떤 사물이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조병활 불교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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