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전엔 절에 가면 사천왕상이 그렇게 무서웠는데지금은 어둑하고 습내 나는 천왕문을 지나면서도겁 하나 안 먹는 내가 좀 무섭다손가락을 살며시 오므린 금산사 거인 부처님그런 내가 못마땅한지 눈길 한번 주지 않으셨다그전엔 절 아래 마을에 접시꽃이 피었더냐허리 굽혀 물어도 봐주시더니 — 시집 《미풍해장국》(솔, 2021) 오성일 / 경기도 안성 출생. 2011년 《문학의 봄》으로 등단. 시집 《외로워서 미안하다》 《문득, 아픈 고요》 《사이와 간격》.
내 마음의 시
오성일
2022.03.11 00:01
-
당신은 깨진 항아리, 처음부터 깨지지는 않았지 오래전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으며 깨졌지그렇지 우리 집으로 시집와 살면서 깨졌지당신은 철테 두른 깨진 항아리남들은 모르지 당신만 알지마음까지 금이 가 있다는 것을그래도 당신이 있어 부뚜막이 있지 부엌이 있지 우리 집이 있지 내가 있지 세상이 있지 오늘이 있지 내일이 있지 — 시집 《걸어다니는 별》(천년의 시작, 2021) 이은봉 / 1983년 《삶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좋은 세상》 《봄 여름 가을 겨울》 《절망은 어깨동무를 하고》 《무엇이 너를 키우니》 《책바위》 《봄바람, 은여
내 마음의 시
이은봉
2022.03.11 00:00
-
-
-
-
전강 스님“스님, 득도(得度)하셨다는데, 해탈하기 전과 후가 어떻게 다릅니까?”전강 스님께 절을 올리고 앉자마자 대뜸 물었다.“누가 해탈했다고 해?”“사람들이 다 우리 전강 스님은 젊어서 견성(見性) 득도하셨고 대덕고승(大德高僧)들께 인가(印可)도 받았다고 합니다.”“쓸데없는 소리!”“머리에서 피가 날 정도로 용맹정진(勇猛精進) 끝에 깨달음을 얻으셨으니, 경지에 큰 변화가 있지 않았겠습니까?”보채는 아이처럼 더 칭얼거렸다.“한가한 소리 할 시간 있으면 공부해. 둘 다 벽 보고 돌아앉아. 가부좌 틀고 화두를 잡아. 화두가 뭐야? ‘이
사색과 성찰
신상철
2022.02.27 22:56
-
두견이 우는 날은 누군가 올 것 같아가슴을 비우고 기다린다— 정휴 스님 가을이라는데, 찐 가을이라고들 하는데… 유리창을 통해 볕살이 바안히 들어온다. 손바닥 위에서 햇살이 고물고물 논다. 11월엔 어딘가로 떠나볼까. 문득 도솔암 내원궁 오르는 석계가 그립다. 돌계단 한편에 발그레 물든 혹은 나처럼 머리에 서리 얹은 풀잎들의 마음자리가 더없이 쓸쓸하겠고 바스락대는 가랑잎의 가을을 와사삭- 밟고도 싶다. 도솔암 출입은 큰 아이가 대학 들어가던 정초이니 어언 20여 년, 신도도 아니면서 순전히 아이의 합격을 기원하는 기복이 목적이었다.
사색과 성찰
김추인
2022.02.27 22:55
-
-
한 생애가 텅 빈 항아리 같다폭풍처럼 몰아치던 파도도 고요해지고창문에 반짝반짝 별빛을 매달고 달리던야간열차의 기적 소리도 아스라이 잦아지고나의 한 생애여, 이제는 오직 적막한때는 부글부글 들끓음으로 가득 찼으나 한때는 한기 돋는 소소리바람에도 출렁거렸으나나의 한 생애여, 이제는오직 적막 — 시선집 《있으라 하신 자리에》(문예바다, 2021) 허형만 1973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비 잠시 그친 뒤》 《첫차》 《눈먼 사랑》 《그늘이라는 말》 등. 편운문학상, 영랑시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공초문학상 등 수상. 목포대 명예교수
내 마음의 시
허형만
2022.02.27 22:55
-
그렇게 가는 것이구나 서로를 위한 간격을 두고행여 누구라도 뒤처질세라부단한 인고(忍苦)의 날갯짓하면 더러 앞선 자가 힘들 때에는울음으로 힘을 보태는 염려(念慮)의 대열 멀고 험한 길 함께 가려며그래, 그렇게 가야 하는 것이구나 — 시선집 《아름다운 적멸》(동학사, 2021) 박호영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평론 등단, 《시와 시학》으로 시작 활동. 시집 《오두막집에 램프를 켜고》 《바다로 간 진흙소》 등과 평론집 《현대시 속의 문화풍경》 등. 한성대 명예교수.
내 마음의 시
박호영
2022.02.27 22:54
-
짐승들은 왜 머리를 깊이 숙이고새들은 할끔할끔 눈치를 보는지나는 왜 구걸처럼수없이 이마를 조아렸나 몰라.먹어야 하나또 한 끼 절을 하며 먹어야 하나.수저를 놓다가도그보다 더 고개를 들 수 없는 건말없이 먹을 걸 내주는 저 천지에부끄러워 저절로 그런지 몰라.— 시집 《나의 봄 우리 여름》(넓은마루, 2021) 홍우계198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옥가락지》 《마당에 뒹구는 반달》 《가라앉는 섬》 《바보꿀벌》 《백묵을 던지고》 등. 충북 보은고, 안양예고 등에서 교편생활.
내 마음의 시
홍우계
2022.02.27 22:54
-
어둔 밤 더듬더듬 새로운 길을 찾아간다어머니의 말씀은 “세상이 다 책상이다”사소한 바람까지도 허공 위의 책이다 강물이 흘러가는 물살에도 길이 있다민들레 꽃씨 나는 것을 허투루 보지 마라꿈이란 아무 곳에나 머무르지 않는다 — 시조집 《나비는 비에 젖지 않는다》(책만드는집, 2021) 최도선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겨울 기억》 《서른아홉 나연 씨》 《그 남자의 손》 등과 비평집 《숨김과 관능의 미학》 등. 《시와 문화》 작품상 수상.
내 마음의 시
최도선
2022.02.27 22:54
-
아내는 35권의 시집이 있다가난한 공무원인 나를 만난 후 쓴 시(詩)다제목은 가계부출판사는 주부생활이다//한 해를 마무리할 때면어김없이 출간된 시집이지만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그런 나를 아내는 너그러이 용서했다//아내의 시집이 늘어날 때마다나와 네 명의 딸들은하나씩 꿈을 이루어갔다아내의 시집(詩集)은 도깨비방망이가 아닐까//아내의 회갑 날이다나는 그 시집 한 권을 훔쳐본다“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쬐끔만 참자”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다 — 시집 《아내의 시집(詩集)》(청어, 2021) 이남섭2004년 《현대문예》로 등단. 시집 《마
내 마음의 시
이남섭
2022.02.27 22:5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