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소설은 불교문학 진흥과 새로운 콘텐츠의 개발을 위해  ‘재단법인 보덕학회’ 후원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비로암은 지리산 천왕봉 바로 아래쪽, 등산길에서 30여 분 정도 벗어난 산자락에 있었다. 전문 산악인들만 드물게 들를 뿐 일반 등산객들은 찾기 힘든 곳이었다.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숨겨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주차장에서 ‘경상남도 환경교육원’을 거쳐 법계사까지는 그래도 걸어 올라가기가 수월한 편이었다. 

그러나 법계사 위쪽 천왕봉 가는 등산길에서 비로암으로 가려면 너덜겅 초입부터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너덜겅 돌길까지는 오솔길이 희미하게 보이다가 구상나무 숲속에서 갑자기 증발한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오솔길을 잃어버리면 법계사로 돌아오거나 비로암 가는 것을 포기하고 하산해야만 했다.

산돌을 쌓아 두른 비로암의 텃밭은 제법 넓었다. 스님들이 산자락을 일군 밭인데 1백 평쯤 되었다. 그런데 작물 수확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감자는 먹을 만큼 수확했지만 냉해 때문에 옥수수나 상추, 배추, 무 등은 시원찮았다. 설상가상, 멧돼지가 나타나 밭을 갈아 엎어버릴 때도 많았으므로 배추나 무는 반드시 암자 가까운 쪽에 심었다. 비로암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 소리가 멧돼지의 접근을 어느 정도 막아주곤 했기 때문이었다. 

전기는 호롱불을 켜다가 작년 봄부터 발전기를 설치해 하루에 대여섯 시간씩의 전기 사용은 해결했다. 선승 법성은 반대했지만 시봉하는 상좌 우멸이 우겼다. 결국 법성의 반승낙이 떨어지자마자 우멸은 무게 48kg의 발전기를 진주에서 구입해 ‘경상남도 환경교육원’에서부터 지게에 지고 올라온 뒤 당장 가동했다. 지게질 후유증으로 닷새 동안 몸살을 앓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멸은 할 일을 했다고 자부했다.

법성이 반대한 것은 전깃불이 켜지는 순간부터 암자는 속세와 같아질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법성이 걱정한 대로 암자는 서서히 변했다. 냉장고, 티브이, 전기밥솥, 전기약탕기, 전화 등이 암자 살림으로 들어왔다. 산 아래 암자와 별로 다를 바 없이 바뀌었다. 우멸은 가끔 법성의 눈치를 보면서 불교방송 텔레비전을 시청했다. 물론 KBS 같은 지상파방송이나 상업방송은 보지 않았다. 법성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우멸에게 눈총을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멸은 그날만큼은 법성의 눈치를 보지 않고 암자 골방에 있는 텔레비전을 켰다. 선득한 바람이 불고 잔설처럼 하얀 억새꽃이 나부끼는 날이었다. 텔레비전에서는 며칠 전에 입적한 법공의 영결식을 생중계하고 있었다. 우멸은 한때 M사에서 법공을 시봉한 적이 있었으므로 합장하고 나서 텔레비전을 봤다. 

입적한 법공은 은사 법성의 사형이었다. 우애가 좋기로 소문난 사형 사제 사이인데 웬일인지 법성은 법공의 부고를 받고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우멸은 법성이 닳은 무릎연골 때문에 걸음걸이가 불편하여 산에서 내려가지 않는가 보다 하고 짐작했는데, 문득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날마다 암자 주변에 널려 있는 고사한 구상나무 둥치나 참나무 삭정이를 주워 나를 뿐이었다. 법성은 주워온 구상나무 둥치나 참나무 삭정이를 암자 부엌 옆 공터에 직사각형으로 쌓았다. 한여름부터 지금까지 쌓은 나뭇단만으로도 겨울은 충분히 나고도 남을 분량이었다.

우멸은 텔레비전을 보다가 마음이 격동할 때는 합장하곤 했다. 법공의 법구는 M사 법당 앞마당에서 영결식을 마친 뒤 다비장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만장을 들고 가는 스님들 중에는 우멸의 도반과 강원 선후배들도 적잖았다. 

이윽고 다비장에 도착한 법구에 장작이 쌓이고 있었다. 법구 앞쪽에는 영정을 든 법공의 손상좌가 섰고, 영결식을 감독 진행한 M사 주지가 연화대 장작더미를 확인했다. 법공의 상좌들은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며 연화대 속에 안치된 법구 주위를 돌았다. 법공과 마지막 이별이었다. 상좌와 신도들 중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보였다. 이윽고 사회자가 거화(擧火)를 알리자 문도들이 일제히 외쳤다. 

 

“큰스님! 불 들어갑니다!”

장대 끝에 불을 붙인 거화봉들이 일제히 연화대 밑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연기만 솟아올랐다. 잠시 후에는 불길이 삐쭉삐쭉 장작더미를 뚫고 나왔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골방 문이 확 떨어져 나갈 듯 열리더니 법성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못난 놈!”

법성이 바싹 마른 삭정이로 우멸의 어깨를 후려쳤다. 우멸은 날아온 삭정이를 맞으며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법성이 한 마디를 더 내뱉고는 나가버렸다.

“어리석음을 멸하라고 우멸(愚滅)이란 법명을 주었더니만 요원한 일이구나!”

우멸은 텔레비전을 껐다. 법성이 텔레비전을 부숴버리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우멸은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화가 나기도 해서 암자 골방을 나와 텃밭으로 갔다. 텃밭은 배추와 무만 파랄 뿐 서리 맞은 옥수수와 고추, 오이 덩굴 등은 누렇게 죽어 있었다. 텃밭 끝에는 서너 사람이 좌선할 수 있을 정도의 거무튀튀한 반석이 튀어나와 있었는데, 법성은 평소에 반야용선이라고 불렀다. 우멸은 반석에 올라가 가부좌를 틀었다. 마음이 심란할 때마다 명상을 하면 소용돌이치던 잡스러운 생각이 가라앉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못난 놈!’이란 꾸지람을 들은 탓인지 마음은 더 심란하기만 했다.

쌀쌀한 바람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우멸은 겨우 평상심을 되찾았다. 반석에서 좌선하고 있는 지금과 조금 전 자신의 내면이 보였다. 조금 전의 자신이 흙탕물이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정수기에 걸러진 물 같았다. 그러나 우멸은 ‘못난 놈!’이란 법성의 꾸지람이 또다시 떠올라 맑은 물이 다시 흙탕물로 변한 느낌이 들어 허탈했다. 우멸은 오락가락하는 자신의 내면을 보면서 실망했다. 한편으로는 자신을 나무랐던 법성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우멸은 혼잣말로 항변했다.

‘어리석음을 멸했다면 이미 부처가 아닙니까!’

암자 가까운 곳의 텃밭에는 가을 상추가 땅바닥에 바짝 붙어 자라고 있었다. 고산의 냉기 탓에 이파리가 쭉쭉 자라지 못한 채 오글오글했다. 우멸이 삭정이를 옮기고 있는 법성에게 다가가 합장했다. 그러자 법성이 받아주었다.

“장작은 네가 패거라.”

“예, 큰스님.”

“이놈아, 스님이면 스님이지 어디에 큰스님이 있고 작은 스님이 있느냐?” 

“예, 스님.”

“장작은 장작대로, 삭정이는 삭정이대로 벼늘을 만들거라.” 

법성의 목소리는 금세 자애롭게 변해 있었다. 우멸은 질문해도 될 때다 싶어 법성에게 물었다.

“스님, 여름부터 모으신 삭정이만으로도 겨울을 날 것 같습니다. 이제 장작은 그만 준비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장작 패는 것이 힘들어서 그러느냐?”

“날도 추워지는데 스님께서 고생하시는 것 같아서 드린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쓸모없는 일은 하나도 없다. 하다못해 똥 싸는 일도 쓸모가 있지. 밭에 거름이 되지 않느냐.”

법성이 산자락에서 끌고 오는 나무들은 모두 말라죽은 것들이었다. 생나무는 단 한 개도 없었다. 우멸은 암자 뒤뜰에 자라는 굴참나무를 베었다가 야단맞은 적이 있었다. 잎들이 양철지붕에 떨어져 쌓여 썩는 것을 막고자 굴참나무를 베었던 것인데, 법성이 이틀 동안이나 우멸을 보고도 침묵했던 것이다. 그만큼 법성은 푸나무들을 사랑했다. 단 두 사람이 사는 산중암자에서 한 사람이 침묵해버리면 나머지 한 사람은 허수아비나 유령 같은 처지가 돼버렸다. 그러니 우멸은 은사 법성 앞에서 실수를 저질렀을 때는 곧바로 참회했다. 그렇지 않고는 유령 같은 신세를 견디어낼 수 없었다.

그날 밤. 보름달 달빛이 보자기만 한 창호에 유난히도 일렁거렸다. 우멸은 밤공기가 차가울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바깥으로 나갔다. 보름달이 자애롭게 다가와 우멸을 비추었다. 달빛이 ‘못난 놈!’이란 말에 사로잡힌 우멸을 감쌌다. 암자 마당에는 달빛이 한 줌 한 줌 켜켜이 쌓이고 있었다. 된서리가 내린 잣나무 이파리들은 바늘처럼 반짝거렸다. 우멸이 자신도 모르게 이끌리는 적막한 풍경이었다. 어떤 밤에는 암자 안팎의 적막이 그윽한 심연 같아서 익사할 것 같은 두려움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도 지리산 밖으로 나가 있는 동안에는 심연 같은 적막이 그립기조차 했다. 그때마다 우멸은 허망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우멸은 툇마루에 앉아서 아침에 텔레비전으로 보았던 법공의 영결식을 떠올렸다. 일부러 떠올렸다기보다는 산등성이를 구르는 것 같은 보름달을 보는 순간 생각이 났다. 법성의 사숙 월적의 입적과 크게 비교가 되었다. 월적의 입적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법성은 월적이 중답게 입적했다고 가끔 추모했다. 

 

돌이켜보니 9년이 지난 일이었다. 법성이 H사를 찾아간 것은 사숙 월적이 입적하기 며칠 전이었다. 월적은 대중이 서너 명밖에 되지 않는 낙동강 강변의 퇴락한 H사 조실이었다. 이름만 조실이었지 선방이 없는 절이었으므로 월적의 존재는 유명무실했다. 평생 선방만 다닌 선객이었으므로 상좌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변변한 절 한 채 차지하지 못한 데다 참선만 고수했던 탓에 상좌가 되겠다고 자청하는 행자가 드물었다. 행자들 사이에 힘 있는 주지나 고명한 조실을 은사로 삼으려는 풍조가 만연해 있는 것도 한 이유였다. 

그런데 법성만은 달랐다. 하안거나 동안거가 끝난 산철에는 반드시 월적을 찾아가 안부를 살폈다. 우멸도 은사 법성을 따라가 월적에게 인사를 드렸다. 산철 동안 H사에 와 있는 월적을 뵈러 갈 때는 무엇이든 승용차에 싣고 갔다. 봄에는 화개나 보성으로 가서 녹차를 구하거나 진주 포교당에서 보시받은 골다공증을 치료하는 한약, 풀 먹인 깔깔한 장삼 등을 가져가기도 했다. 월적은 특히 차를 보면 도반을 만난 듯 반가워했다.

“어디서 오신 햇차인가?”

“화개에서 덖은 야생찹니다.”

“칠불암 생각이 나는구먼. 칠불암에 살 때 나도 차를 만들어 보았지.”

언젠가 법성이 화개와 보성의 차 맛을 묻자 마지못해 대답하기도 했다.

“차를 마시면서 이러쿵저러쿵 시비 분별하는 것이 뭣하지만 내가 마신 화개 차 맛은 돌밭에서 자라선지 단맛이 돌고, 보성 차 맛은 바닷바람을 쐬어서 그런지 간간하더구먼.”

어느 때나 법성은 한두 마디 묻고 말았다. 그러나 우멸은 궁금한 것이 많았다.

“조실 스님, 좋은 차는 어떤 차입니까?”

“어째서 묻느냐?”

“다음에는 더 좋은 차를 구해 오겠습니다.”

“분별하지 마라. 그것이 집착이다. 다만, 네가 물었으니 답하겠다. 혼자 마시면서 차 한 잔에 내가 풍덩 빠질 수 있는 차지.”

“무슨 말씀인지요?”

월적이 미소만 짓고 있자, 법성이 찻잔을 내려놓고 대신 말했다.

“중국의 동산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추울 때는 추위 속으로 들어가고, 더울 때는 더위 속으로 들어가라고 했어. 사숙님께서 찻잔에 풍덩 빠지신다는 얘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둘이 아니고 하나가 된다는 것이야. 선(禪)이란 그것이 아니겠느냐?” 

“하하하. 법성 스님 경지가 나보다 위네.”

“사숙님, 과하십니다. 저에게 견처(見處)가 있다면 아직도 겨자씨만 한 것일 뿐입니다.”

이처럼 사숙 월적과 차담을 하는 시간은 늘 상쾌했고 가을바람처럼 소쇄했다. 우멸에게는 자신의 수행을 점검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법성도 마찬가지였다. 고지식한 법성도 월적 앞에서는 부드럽고 융통성이 많아졌다. 일찍이 은사가 입적한 탓에 법성은 월적을 사숙보다는 은사로 여기었던 것이다.

우멸은 그렇게 믿었다. 9년 전에 마지막으로 월적을 뵀을 때 그의 법을 이을 법상좌는 법성이 아닐까 싶었다. 이틀 전에 내린 장대비로 낙동강 강물은 흙탕물로 변해 누렇게 소용돌이치며 흐르고 있었다. 전해 들었던 소식보다 월적의 노환은 위중했다. 월적의 유일한 상좌 법일은 벌써 심신이 지쳐 있었다. 법성을 만나자마자 법일이 월적의 중한 상태를 알려주었다.

“병원으로 모시려고 해도 거절하십니다.”

“사람을 알아보는가?”

“정신은 총총하십니다. 다 알아보시는지 간간이 말씀도 하십니다.”

“공양은 좀 드시는가?”

“일부러 곡기를 끊으신 것 같습니다.”

“얼마나 됐는가?”

“열흘 됐습니다.”

“허허. 가실 날을 스스로 아시는 모양이네.”

법당으로 들어가면서 우멸이 법성에게 물었다.

“그럴 수도 있습니까?”

“수좌라면 그래야지.”

우멸은 법당 부처님 앞에서 삼배를 하고 난 뒤에도 참지 못하고 말했다.

“조실 스님께서 가실 날을 정해두셨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래야 수좌라니까.”

법성과 우멸은 월적이 누워 있는 조실방으로 들어갔다. 월적이 누워 있는 조실방은 예나 지금이나 불(佛) 자 족자가 하나 걸려 있을 뿐 몹시 소박했다. 한약 냄새 대신 차향이 그윽하게 감돌았다. 곡기는 끊었지만 말라가는 입술과 목을 축이기 위해 상좌 법일이 차를 우려내 준다고 했다. 법성과 우멸은 월적에게 삼배를 했다. 법성이 말했다.

“사숙님, 법성이 왔습니다.”

“잘 왔어. 며칠간 쉬었다 가시게.”

월적이 손을 내밀어 법성을 잡았다. 월적의 손가락은 야윈 갈대처럼 손가락 마디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깎지 못한 긴 손톱이 법성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산철이니 여기서 살겠습니다.”

“내 상좌 법일은 아직 멀었어. 수행을 잘해야 하는데 큰일이네.”

“어째서 그러십니까?”

“명색이 수좌로 살아온 내게 병원에 가자고 그래. 중이 링거를 꽂고 있어야 하겠는가? 그럴 수는 없지.”

“상좌로서 도리지요. 누워 계시는데 못 본 체하란 말씀입니까?”

“내 나이 팔십구, 얼마나 더 산다는 말인가? 부처님도 팔십에 열반하셨는데 염치없는 일이지.”

“저 같은 아둔한 중을 더 이끌어주셔야지요.”

그날 오후, 법성은 우멸에게 가마솥에 물을 데우게 했다. 우멸은 법일에게 장작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하고는 아궁이에 군불을 지폈다. 법일이 우멸에게 물었다.

“혹시 은사님 목욕물을 데우는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사실이었다. 실제로 법성은 우멸에게 조실방으로 세숫대야에 목욕물을 담아오게 했다. 상좌 법일이 월적의 장삼과 러닝셔츠를 벗겼다. 월적의 상체가 드러났다. 어깨뼈와 갈비뼈만 앙상한 상체는 육탈에 가까웠다. 살갗은 불거진 뼈에 바짝 달라붙어 있었다. 법성은 수건에 미지근한 목욕물을 묻혀 월적의 몸을 구석구석 닦기 시작했다. 월적이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법성 스님이 내 마음까지 닦아주는군.”

목욕하고 싶었는데 법성이 알아서 자신의 몸을 닦아주고 있다는 칭찬이었다. 법성은 월적의 마른 과일처럼 쭈글쭈글한 엉덩이와 젓가락 같은 다리까지 닦아주고는 세숫대야를 물렸다. 그러고 나서는 걸망에서 손톱깎이를 꺼냈다. 월적의 손톱과 발톱을 깎아주기 위해서였다. 다만, 월적의 손톱과 발톱은 시력이 좋은 우멸이 깎아주었다.

한밤중에 또 장대비가 쏟아졌다. 남풍이 거세게 불어와 마당 가에 선 회화나무 잔가지들이 휘청거렸다. 회화나무 이파리들이 날벌레처럼 창문에 날아와 붙었다. 법일이 법성과 우멸이 자는 방으로 달려왔다. 

“스님! 큰일 났습니다. 큰스님이 숨을 몰아쉬고 계십니다.”

“알았네.”

법성이 일어나 급히 조실방으로 건너갔다. 우멸은 더 자고 싶었지만 법성을 뒤따라갔다. 법일이 놀랄 만도 했다. 월적이 죽은 듯이 들숨을 멈추었다가 한참 만에 푸우푸우 하고 날숨을 내쉬었다. 법성이 월적의 손목 맥을 짚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맥이 분명하니 안심해도 될 것 같네.”

“숨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방 밖에서 들었습니다.”

“단전호흡 하시는 분이라 그러네.”

“놀랐습니다.”

“잠이 깨버렸으니 나는 여기 있겠네. 새벽예불 때까지라도 가서 자게. 우멸도 자거라.”

그러나 법일은 물러가지 않았다. 우멸만 조실방을 나갔다.

“나는 사숙님 모시고 정진할 때 가행정진 기간마다 장좌불와를 했지. 그때는 앉아 있는 것이 더 편하더군. 눕는 것이 불편했어.”

가행정진이란 평소보다 치열하게 정진하는, 고행에 가까운 수행을 뜻했다. 법성은 그런 시절을 회상하듯 꼿꼿하게 가부좌를 틀었다. 반면에 법일은 조금 흐트러진 자세로 은사 월적을 응시했다. 조그만 들창으로 검푸른 빛이 스며들었다. 꼭두새벽임을 알리는 빛이 창문을 투과하고 있었다. 방을 나갔던 우멸이 되돌아왔다. 

“혼자 누워 있기가 송구스러워서 왔습니다.”

“사숙님 옆에 있으니 만감이 교차하는구나.”

“거룩하십니다.”

“선지식이 따로 없어.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사무치니 고마울 뿐이야.”

법일도 마음이 격동되는지 자세를 바로 하고 합장했다. 어느새 장대비가 그치고 바람도 잦아들었다. 그때였다. 월적이 눈을 떴다. 눈을 감고도 다 지켜보았다는 듯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법성 스님, 가까이 오시게. 너희도 듣거라.”

“무슨 말씀이신지요?”

“사흘 뒤에 나는 갈 것이다.”

“큰스님, 안 됩니다.”

상좌 법일이 만류했다. 이내 법일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그러나 월적의 말투는 차분하고 완고했다.

“슬퍼하지 마라. 사람은 누구나 이별한다. 부처님 말씀이니라.”

“사숙님, 듣고 있습니다.”

“법일아, 나를 다비장으로 운구하지 말고 화장장으로 보내거라.”

“다른 큰스님들은 모두 사부대중이 구름같이 모인 가운데 다비장에서 여법하게 가셨습니다. 저는 상좌의 도리를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니 너는 상좌로서 도리를 이미 다했다. 그러니 명심하거라. 굳이 사람들을 모이게 하지 마라. 다비장으로 나를 보내 공연히 생나무 생가지를 베지 마라. 화장장에서 지체하지 말고 빠르게 태워 재가 나오거든 낙동강에 뿌려다오.”

우멸도 조심스럽게 한마디 했다.

“큰스님, 다비식은 누구나 자신이 공(空)임을 알게 하는 무상법문입니다. 그러니 법일 스님의 의견도 일리가 있습니다.”

월적이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면서 한두 마디 중얼거렸다.

“나는 은사님이 지어준 내 이름대로 살아왔다. 월적(月跡), 달의 흔적이 어디 있더냐. 흔적 없이 뜨고 지는 것이 달이 아니더냐.”

그래도 법일이 애원하듯 월적의 손을 잡자 뿌리치며 조금 큰소리로 꾸짖었다.

“법일아, 나마저 시체 장사를 하란 말이냐!”

월적의 ‘시체 장사!’란 말에 법성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불벼락 같은 충격적인 말이었다. 우멸은 다비장의 불길이 무상법문이라고 말했지만 월적은 미화하지 말라는 듯 단호하게 꾸짖었다. 월적의 꾸지람에 세 사람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월적이 원하는 방식대로 일반인들 시신이 가는 화장장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월적은 유언대로 사흘 뒤에 입적했고, 법구는 부산 당감동 화장장으로 옮겨졌다. 법성, 법일, 우멸 등이 화장장으로 가서 유골함을 들고 나왔다. 월적의 원대로 낙동강에 재를 뿌렸다. 마침 흙탕물이었던 낙동강 강물은 쪽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퍼붓곤 했던 비가 사흘 동안 내리지 않은 데다 햇살이 쏟아져 양명했기 때문이었다.

우멸은 지리산으로 돌아와서 한동안 ‘시체 장사’란 말이 걸렸다. 벼락같은 일갈이 가시처럼 박혔던 것이다. 사부대중이 모여 영결식을 하고 다비식을 치르는 것이 월적의 일갈처럼 정말로 ‘시체 장사’인 것인가! 

그러나 우멸은 몇 년이 지나면서 잊어버렸다. 지리산 비로암 산중생활이 각박하고 법성과 함께하는 참선수행이 힘들어서였다. 하루 공양은 일식만 했다. 예불과 공양, 울력 시간을 빼고 남은 시간은 대부분 텃밭의 반석으로 나가 가부좌를 틀었다. 눈보라 치고 비바람이 거센 날은 툇마루로 올라와 화두를 들었다.

 

우멸은 암자에 발전기를 들여놓은 것을 후회했다. 발전기가 없었다면 텔레비전으로 생중계하는 법공의 다비식을 보지 않았을 터였다. 뿐만 아니라 은사 법성에게 ‘못난 놈!’이란 소리도 듣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못난 놈!’은 화두처럼 우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못난 놈이라고 생각하는 놈은 누구인가?’ 

‘못난 놈!’은 의심 덩어리 즉 의단(疑團)이 돼버렸다. ‘못난 놈!’은 꿈속에서도 나타나 우멸을 꼼짝 못 하게 했다. 이른바 몽중일여(夢中一如) 경계가 오락가락했다. 어느새 ‘못난 놈!’은 법성이 우멸에게 주었던 화두 ‘이 뭣고?’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싸락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우멸은 낙엽 무더기에 떨어지는 싸락눈을 보면서 또 ‘못난 놈!’이란 어쩔 수 없는 의심에 붙들렸다. 문득 은산철벽 앞에 선 듯 절망에 사로잡혔다. 절망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갔다. 뒹구는 낙엽이든 모래알 같은 싸락눈이든 모두가 허망했다. 우멸은 자신도 허망한 그것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실상인지 허상인지 헷갈렸다. 법성을 시봉하면서 무엇을 공부했는지 알 수 없었다. 새삼 비로암 생활에 회의가 솟구쳤다. 우멸은 활로가 없는 미궁에 빠져버린 듯했다. 

‘이름값도 못하고 사는 놈이 바로 나였구나.’

우멸은 문득 비로암을 떠나기로 작심했다. 진주 포교당으로 갔다가 때를 보아 선방으로 갈 생각을 했다. 진주 포교당에는 사제 우명이 있었는데, 그는 비로암에 올라올 때마다 고소공포증을 호소한 데다 은사 법성을 까닭 없이 어려워했다. 은사 법성을 잘 시봉하려고 노력했지만 기름과 물처럼 겉돌았던 것이다. 작심하자 하룻밤을 넘기기가 힘들었다. 마침내 우멸은 자정 무렵에 걸망을 멨다. 법계사까지 단숨에 내려와 법당으로 들어가 잠시 쉬었다. 법계사 대중들은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컴컴한 하늘에 별이 몇 개 또록또록 빛났다. 꼭두새벽이 되자 산길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싸락눈이 쌓여 희부옇게 열린 산길이었다. 

법계사에서 ‘경상남도 환경교육원’까지는 평소에 1시간 30분 정도였는데, 밤길이었으므로 2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다행히 먼동이 터 동녘 하늘부터 밝아지고 있었다. 우멸은 주차장 한쪽 구석에 있는 승용차를 놓아두고 중산리까지 걸어갔다. 함박눈이라도 느닷없이 퍼붓는 날이 되면 승용차는 무용지물이 돼버렸다. 지리산 산길은 사륜구동 지프가 아니면 다닐 수 없었다. 중산리에서 첫 버스를 탄 우멸은 슬그머니 법성을 떠올렸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공양은 ‘쿠쿠보살’이 해결해 줄 터였다. 법성은 전기밥솥을 ‘쿠쿠보살’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진주 포교당에 도착하자, 우명이 맞아주었다. 우명은 사시예불을 막 끝낸 듯 가사 장삼을 수하고 있었다. 신도 몇 사람이 우멸에게 합장하면서 지나쳤다.

“사형님, 무슨 일이십니까?”

“선방에서 살려고 내려왔네.”

“더 추워지기 전에 틈을 내서 비로암에 올라가려고 하던 중이었습니다.”

“은사님께서 부르시던가?”

“아니요. 은사님하고 사형님 누비 승복을 마련해 놨거든요.” 

우멸은 우명의 방으로 따라 들어간 뒤 맞절을 했다. 우명의 말투에는 십여 년 동안 법성을 시봉해 온 우멸에 대한 미안함이 스미어 있었다.

“사형님, 고생이 많으시죠?”

“지나간 과거보다는 지금이 중요하지 뭐.”

“선방 가시기 전까지는 포교당에서 편하게 계세요.”

“우명 스님이 허락해주니 고맙긴 한데 나도 어찌 될지 잘 모르겠네.”

우명은 은사 법성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우멸이 보기에 신도들에게는 헌신적이고 친절한 것 같았다. 절이 많은 진주에서 포교당을 수년째 잘 운영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신도들이 줄기는커녕 늘어나 내년 봄에는 더 넓은 평수로 이사할 모양이었다.

“신도회장이 더 넓은 곳으로 이사 가자고 성화입니다.”

“우명 스님이 포교당을 잘하고 있다는 증거네.”

우멸은 며칠을 우명이 내준 넓은 방에서 지냈다. 동안거가 끝나자마자 산철이라도 선방이 있는 절로 가려고 알아보는 중이었다. 문경 D사는 안거와 산철 구분 없이 대중들이 꽉 차 무작정 대기해야 했다. 그리고 하동 C사는 조실이나 구참 수좌의 추천이 없으면 방부를 들이기가 힘들었다. 삼보사찰 선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바에는 지리산 칠선계곡 초입에 있는 B사 선방이라도 갈 요량을 했다. 지리산 B사는 십여 명 안쪽으로 선객을 받는 조그만 절이었지만 유서 깊은 참선수행 도량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멸이 포교당에 머문 지 한 달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함박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우멸에게 법성의 편지가 왔다. 법계사 주지를 통해서 부친 편지였다. 법성은 진주 포교당 주소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편지 겉봉에 쓰인 주소는 법성의 필체가 아니었다. 다만 ‘우멸아, 바로 보아라.’라는 뜻의 우멸즉견(愚滅卽見)은 법성 필체였다. 우멸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볼펜을 꾹꾹 눌러 쓴 반듯한 행서체는 법성의 글씨가 분명했다. 

우멸은 봉투 끝을 뜯어 편지를 꺼냈다. 편지 내용은 한시 한 수뿐이었다. 한시를 읽는 순간 우멸은 고압 전류에 감전되어 버린 듯 온몸이 굳어버렸다. 

 

我今終生死   나는 이제 생사를 마친다네

誰得誰失道   도는 잃지도 얻지도 않았고

過去無來處   과거는 온데간데없는데

山色自靑靑   산빛은 절로 푸르고 푸르네.

 

잠시 후 우멸은 편지를 앞에 놓고 큰절을 올렸다. 과일 접시를 들고 방에 들어오려던 우명이 우멸의 모습을 보고는 물러섰다. 우멸이 말했다.

“우명 스님, 은사 스님 편진데 한번 읽어보게.”

“예, 사형님.”

우명이 편지를 읽은 뒤 도리질을 했다.

“사형님, 은사 스님 신변에 무슨 변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지금 비로암으로 가야 할 것 같네.”

우명은 즉시 사무장을 불렀다. 그런 뒤 신도회장과 상의해서 포교당을 잘 지키라는 당부를 했다. 우멸은 우명이 운전하는 지프를 탔다. 포교당에서 사용하는 새 차였다. 지프는 눈이 쌓여가는 도로를 거침없이 달렸다. 단성 인터체인지를 벗어난 지점에 사고 차량이 보였다. 눈길에 추돌한 승용차 두 대가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있었다. 우명이 운전하는 사륜구동의 지프는 아랑곳하지 않고 질주했다.

우명은 시천면 중산리 버스 종점에서 소변을 한 번 보았을 뿐 ‘경상남도 환경교육원’ 주차장까지 단숨에 내달렸다. 진주, 단성과 달리 지리산 중산리 쪽은 눈이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지리산 일대는 며칠 동안 폭설이 내린 듯했다. 지리산 계곡과 산등성이는 눈이 부실 만큼 흰 빛깔 일색이었다. 우명과 우멸은 걸망을 바짝 등에 붙였다. 우멸이 말했다. 

“눈길은 몇 배나 힘드니까 걸망 짐을 줄이게.”

“사형님, 제 걸망에는 은사님 누비 승복하고 누비 조끼밖에 없어요.”

예상한 대로 산길은 폭설에 덮여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산길에 산짐승 발자국들이 드문드문 찍혀 있었다. 먹이 때문에 산 아래를 오간 산짐승 발자국이었다. 우멸은 미끄러지지 않고 능숙하게 산길을 탔다. 법계사까지 무난히 올랐다. 법계사 주지가 우멸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어제 한 대학생이 산속에서 헤매다가 헬기에 실려 갔어요.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왔다가 동사한 거지요.”

“우리 스님을 뵀습니까?”

“보름 전쯤이었을 겁니다. 편지를 부탁하러 한 번 내려오신 뒤로는 뵙지 못했습니다.”

“그러셨군요.”

“조심하세요. 여기까지는 그래도 산길이 나 있지만 비로암은 길이 없잖습니까?”

“길 없는 길이죠.”

특히 너덜겅 돌길이 위험할 터였다. 화창한 날인데도 너덜겅 돌길에서 낙상한 등산객이 헬기에 실려 간 적도 있었던 것이다. 눈 덮인 너덜겅 돌길이라면 기어서 가야 할 듯싶었다. 뿐만 아니라 구상나무 숲도 오리무중이나 다름없을 것이었다. 우명은 벌써부터 불안해했다. 우멸 역시 법계사 주지의 ‘보름 전쯤’이란 말에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법계사 뒤쪽 등산길인 천왕봉 가는 길부터는 바람이 거셌다. 매서운 바람이 쌓인 눈을 다 파헤칠 듯 불어제쳤다. 흩날리는 눈가루가 우멸과 우명의 눈을 찔렀다. 얼마나 불어제쳤는지 쌓인 눈이 바람에 쓸리어 등산길이 거무튀튀하게 보였다. 낯익은 소나무와 잣나무들은 적설을 뚫고 우뚝 서 있었다. 두 사람은 너덜겅 돌길을 산짐승처럼 기어서 건넜다. 그런데 구상나무 숲속에 들어서서는 평소와 달리 안도했다. 누군가가 비로암 초입까지 노란색 천 조각을 나무에 매달아 놓아 헤매지 않았다. 

‘은사님께서 달았을까?’

우멸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은사 법성은 등산객이 비로암에 오는 것을 몹시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비로암 풍경 소리가 뎅그렁뎅그렁 들려오자 우명이 말했다.

“사형님, 은사님이 계신 것 같습니다.”

“비로암은 늘 바람이 좀 있다네.”

우멸은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법성이 인기척을 느끼고 인법당 문을 열고 나오기를 바랐다. 그러나 비로암은 풍경 소리만 날 뿐 적막했다. 법성의 흰 고무신 한 켤레는 툇마루 밑에 놓였고, 눈 쌓인 마당에는 산짐승 발자국만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우멸은 인법당 문을 열었다. 바깥의 날빛에 반사된 비로자나불이 부드러운 빛을 발했다. 우멸과 우명이 삼배를 올렸다. 그러나 인법당도 곧 적막해졌다. 법성의 작은방도, 우멸이 머물렀던 골방도 적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멸이 잤던 골방 방바닥에는 쥐똥이 검은콩처럼 굴러다녔다. 개켜놓은 이부자리 속에서 들쥐라도 튀어나올 듯했다. 우명이 툇마루에 걸터앉더니 말했다.

“사형님, 은사님께서 인연처를 찾아서 떠나신 것이 아닐까요?” 

“그러셨을 것 같지는 않네.”

우멸은 밖으로 나와 비로암을 한 바퀴 돌았다. 혹시라도 변고를 당하지 않았나 싶어서였다. 그러나 뒤뜰 굴참나무도 둥치가 베어진 채 그대로 있었다. 변한 것은 장작 나뭇단만 사라졌을 뿐이었다. 삭정이 나뭇단도 줄어든 것이 없었다. 군불을 지피는 부엌 아궁이는 불을 들인지 오래된 듯 습했다.

우멸은 우명의 손을 잡아끌었다. 두 사람은 산돌로 둘러쳐진 텃밭으로 나갔다. 우멸의 직감으로는 텃밭 끝에 있는 널따란 반석이 수상했다. 산바람이 쓸었는지 반석에는 잔설이 몇 줌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반석 앞으로 다가갔다. 과연, 반석 위에는 타다만 숯덩이들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우멸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챘다. 암자 부엌 옆의 장작 나뭇단이 사라진 이유였다. 법성이 장작더미를 만든 뒤, 그 위에 눕거나 가부좌를 틀고서 스스로 불을 붙인 것이 분명했다. 그제야 우명도 눈치를 챘다. 반석 앞에서 오체투지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우멸은 담담했다. 월적이 입적했을 때 ‘슬퍼하지 마라. 사람은 누구나 이별한다’라는 말이 전광석화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우멸이 말했다.

“은사님께서는 당신 뜻대로 입적하셨네. 자화장(自火葬)이란 말을 들어보긴 했지만 은사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실 줄은 몰랐네.”

“은사님께서 아금종생사(我今終生死)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이었군요.”

“맞네.”

우명은 마음을 추스른 듯 법성의 편지 한 구절을 말했다. 두 사람은 반석 위로 올라가 숯덩이들을 들어내고 손바닥으로 잔설도 조심스럽게 치웠다. 두 사람 모두 처음으로 경험하는 습골(拾骨)이었다. 우멸이 곧 누런 뼛조각 두 개를 발견했다. 잠시 후에는 우명이 소리쳤다.

“사형님, 사리가 있습니다.”

우멸이 쪼그려 앉은 우명 쪽으로 다가갔다. 물방울만 한 사리였다. 모두 다섯 과로 붉은색, 푸른색, 하얀색, 황금색 사리들이었다. 우명이 사리를 수습한 뒤 우멸에게 건넸다. 

“비로암에 모셔야 할 것 같습니다.”

“우명 스님, 그건 은사님 뜻이 아니네.”

“그럼 무엇이 은사님 뜻인가요?”

우멸은 손에 쥔 사리 다섯 과와 유골 조각 두 개를 멀리 휙 던져버렸다. 텃밭 너머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었다. 우명이 비명을 질렀다.

“사형님, 무슨 해괴한 짓입니까!”

“은사님께서 사리 같은 것은 줍지 말라고 말씀하셨네. 누구나 지수화풍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라고.”

“사형님……”

“부질없는 짓이네. 여기 지리산 나무와 풀들이야말로 은사님의 생사리가 아니겠는가.”

우멸이 말한 생사리란 말에 우명이 무릎을 꿇었다. 우멸이 도리질을 했다. 그래도 순진무구한 우명은 막무가내였다. 우멸에게 삼배를 올렸다. 조금 전까지는 사형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스승의 예를 갖추겠다는 듯 절을 했다. 이후 우멸은 ‘못난 놈!’이란 의심에 다시 걸리지 않았다. ■

 

정찬주 ibuljae@naver.com

전남 보성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과 졸업. 1983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작가등단. 2002년 전남 화순 계당산 자락에 산방 이불재(耳佛齋)를 지어 집필에 전념 중. 장편소설로 《산은 산 물은 물》(전 2권), 《소설 무소유》 《다산의 사랑》 《이순신의 7년》(전 7권) 《천강에 비친 달》 등 다수, 산문집으로 《암자로 가는 길》(전3권), 《법정스님의 뒷모습》 등 다수와 동화로 《마음을 담는 그릇》 《바보 동자》 등이 있다. 행원문학상, 동국문학상, 화쟁문화대상, 류주현문학상 수상.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