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견이 우는 날은 누군가 올 것 같아

가슴을 비우고 기다린다

— 정휴 스님

 

가을이라는데, 찐 가을이라고들 하는데… 

유리창을 통해 볕살이 바안히 들어온다. 손바닥 위에서 햇살이 고물고물 논다. 11월엔 어딘가로 떠나볼까. 문득 도솔암 내원궁 오르는 석계가 그립다. 돌계단 한편에 발그레 물든 혹은 나처럼 머리에 서리 얹은 풀잎들의 마음자리가 더없이 쓸쓸하겠고 바스락대는 가랑잎의 가을을 와사삭- 밟고도 싶다. 

도솔암 출입은 큰 아이가 대학 들어가던 정초이니 어언 20여 년, 신도도 아니면서 순전히 아이의 합격을 기원하는 기복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 후 해마다 지장보살좌상이 그저 좋아서 마애불에 끌려서 혹은 9월, 꽃무릇 붉은 바다에 사무쳐서 1박 혹은 2박 3일을 산사에서 유숙하며 일천 배를 올리곤 했는데 어인 일로 요 2, 3년 출입을 끊었다. 좁은 소견에 계속되는 불사로 늘 공사장만 같아 사찰의 아늑함이 무너짐에 실망스러워서이리라. 한겨울 눈길에 헛도는 차바퀴로 고생하던 거며 늦은 밤, 암자 옆으로 흐르는 작은 수로에 차바퀴가 빠져 보험사에 긴급 출두를 부르기도 한 봄 방학도 있었으니, 추억이 주렁주렁 매달린 암자와의 인연이 문득문득 그리워지는 곳인 것을. 

신축년이 저물고 있다. 도솔암 길에도 여린 목숨들이 언 땅의 어둠 속에서 긴 겨울을 견뎌낼 채비에 바쁘리라. 가을 잎이 가만히 진다. 나이를 먹어서일까, 아름다움에 대한 시각이 바뀌고 있는 듯.

여행길에서 만나는 새벽시장의 바쁜 발걸음 소리며 좌판에 널려 있는 갖가지 생선들도 매운 세상살이의 속을 푸는 파시의 취한 목소리도 훈훈하고 아름답다, 고개 주억거리게 된다. 이런 것이 우리네 삶이거니, 껴안을 수 있다. 

세계 곳곳이 껌껌하고 전쟁 중이지만, 어제보다 아까보다 달라지고 있다면 새로 태어남이리라. 나사못이 늘 제자리를 도는 듯해도 앞으로 나아가듯, 어둠의 역사가 반복되는 듯해도 조금씩 달라지고 발전해 가듯. 창가에 서서 쓸쓸함을 곱씹고 있으면서도 미소를 띠는 까닭이다. 

내 집에 밉고 밉지만 아픈 그가 숟가락질하는 소리며 아파트를 몇 바퀴 돌고 와 운동을 했다고 땀내를 풍기며 들어오는 것이 고맙고 이쁘듯……

이처럼 무언가를 위해서 움직이는 자는 삶의 여행자이며 목적지가 있다. 목표가 있는 사람은 한시 반시도 쉴 수가 없는 것. 설사 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더 열심히 뛰기 위한 휴지(休止)의 시간일 뿐…… 그렇다고 늘 뛸 수 있는 것만도 아닌 것이 뛰고 뛰어도 그것이 좌절로, 아픔으로, 슬픔으로 결과하는 예는 많은 것이다. 그러나 어떠랴, 넘어지고 자빠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집념, 이것이야말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지 않겠는가. 좀 늦어지면 어떠랴, 좀 남보다 덜 가졌으면 어떠랴. 생각하면 다 꿈인 것을.

 

萬水千山路

만수 천산의 길에 

凄然獨去身

쓸쓸히 외롭게 가는 몸아

無論去與住

가고 머무는 걸 따지지 말라

但星夢中人

우리 다만 꿈속의 사람인 것을 

— 정휴 《적멸의 즐거움》에서

 

이 가을에 조카가 어렵게 아기를 가졌다고 온 주변이 축복하는 마음들이다. 삶이 꿈이라 해도 탄생은 큰 축복이며 소망, 그래서 사람들은 태교(胎敎)를 하나 보다. 태어나기 이전부터의 기도하는 마음,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근신하며 아름다움만을 생각함으로써 태어날 새 생명에게 이전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다. 내 마음의 파동이 에너지로 이동해 가는 것이다. 이 기도를 보내는 마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의 파동, 기(氣)이며 양자물리학이기도 하다. 만유에 인력이 있듯 부처님의 원력이 개개인에 전해지듯 이 간절함의 에너지는 움직이고 꿈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이제 양자역학은 의학, 과학을 넘어서 예술, 종교, 철학, 학술이며 생활에까지 관여되고 있음을 안다.

아직 세상의 뜰은 많이 어둡고 전쟁 통이지만 구석구석 발그란 꽃빛처럼 간절한 기도들이 있다. 해서 나도 올해가 가기 전에 내원궁 석계를 오르고 싶다. 몇 년 전 내원궁에서 내 사람의 환우쾌차를 기원하는 새벽 백팔 배를 드리는 중에 고운 비구니의 나지막한 염불 소리며 염주 굴림을 지켜본 적 있다. 정목 스님이라 했고 서로 전번도 나눠 가졌지만 내 부실한 신앙이 부끄러워 전화를 걸지 못했다. 다만 방송으로 정목 스님의 〈나무 아래 앉아서〉 마음공부를 한두 번 경청하면서 작은 걱정들을 탈탈 털어 비우듯 환해지던 걸 느꼈다 할까. 생각도 많은 티끌인 나, 이 가을엔 어딘가로 잠시 떠나면서 비우면서 나를 세상을 돌아보고 싶다. 내 본체는 어디쯤에서 헤매고 있는지를.

 

어둠이 밤을 새우고 걸어와서 해 뜨는 나라의 아침을 열고 빛으로 닿는 것을 생각하며 오늘은 미움도 짜증도 지우기로 한다. 속말을 걸며 그에게 파동하는 입자의 양자를 쏜다.

“아프지? 나도 아프다. 그래도 뛰어보자 사람아.” 

내 간절함이 그의 몸으로 마음으로 흘러든 건지 싱긋, 그의 단풍든 미소를 본 듯하다.

 

김추인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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