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밀한 문헌 연구로 중국 불학을 이끌다

1. 어우양젠(歐陽漸)과 금릉각경처

어우양젠(歐陽漸, 1871~1943)
어우양젠(歐陽漸, 1871~1943)

근대 중국불교는 불교라는 시점에서만 이해할 수 없다. 청말 혼란기에 불교는 일종의 대안 사유였고 서구 근대사상과 결합하거나 혹은 충돌하면서 새로운 사상으로 변화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주요한 배경은 불교 지식을 부단히 생산하고 전파한 집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집단은 양원후이(楊文會, 1837~1911) 거사가 설립한 금릉각경처(金陸刻經處)와 양원후이의 제자 어우양젠(歐陽漸, 1871~1943)이 설립한 지나내학원(支那內學院)이다. 

양원후이는 청 동치(同治) 5년(1866) 10여 명의 동인과 각경 사업을 발원하고 ‘금릉각경처’를 설립했다. 그들은 태평천국 전쟁으로 전통문화가 황폐해진 상황에서 불교 지식의 보존과 확산에 노력했다. 양원후이는 ‘각경(刻經)’이라는 어쩌면 불교 보존의 가장 근원적인 역할을 기꺼이 담당했고, 도처에 산재한 불전과 다양한 판본을 수집하고 교감하여 이른바 ‘비판교정본’을 작성했다. 이 판본을 목판으로 각인하여 유통시켰다. 금릉각경처는 근대 시기 “불전의 편교(编校), 각인(刻印), 유통(流通) 그리고 강학(講學)에 종사한 최초의 불교문화 기구”였던 셈이다. 불교라는 종교 체계 혹은 사유 체계의 앎을 정리했고 그것을 일반 대중에게 보급하려 노력했다. 량치차오도 《청대학술개론》에서 “경전이 광범위하게 유통되자 그것을 구해서 학습하기가 비교적 쉬워졌다. 그래서 연구하는 사람은 날로 늘어났다.”고 당시 분위기를 소개했다. 

양원후이 개인으로는 《화엄경》을 연구하고 정토를 신앙했다. 하지만 그는 중국에서 오래전에 일실된 문헌을 다방면으로 찾았고, 급기야 영국 체류 중 인연이 된 일본 승려 난조 분유(南條文雄, 1849~1927)의 도움으로 대량의 일본 보존 중국 찬술 문헌을 중국 국내로 들여온다. 양원후이 연구자 천지동(陳繼東)은 “1890년부터 1894년까지 양원후이가 난조 분유에게 구매 의뢰 불서 명단 4종을 을 보냈는데 모두 221종에 달하고, 난조분유가 대신 구매하거나 기증한 불서는 235종에 달한다.”고 했다.

특히 당시 중국 국내로 전래한 중국 찬술 문헌 가운데 당대(唐代) 법상종의 희귀 문헌이 다수 있었다. 당대 현장삼장의 제자 자은규기(慈恩窺基)가 쓴 《성유식론술기》가 대표적이다. 당대 법상종 문헌의 귀환은 이후 중국 학계와 사상계에 유식학이라는 새로운 사유 체계를 선물했다. 이때 ‘새롭다’는 것은 물론 처음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당연히 당대 중국에서 저술된 것이기에 중국이라는 공간에서 처음은 아니지만 청말이라는 시공에서 그것은 수백 년 동안 본 적이 없는 내용이었다. 

법상종 문헌의 중국 귀환은 사실 중국 근대사상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다. 왜냐하면 탄쓰퉁, 장타이옌, 량수밍, 슝스리 등 주요한 사상가의 사유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유식학과 깊은 관련을 맺었다. 또한 그들이 획득한 정보의 연원은 많은 경우 금릉각경처 각인의 불서였고, 슝스리와 같이 직접 금릉각경처 그룹에게 유식학을 사사한 경우도 있다. 사상사에서 저들의 중요성을 고려한다면 유식학 부흥의 계기로서 양원후이와 금릉각경처의 역할은 대단히 컸다고 할 수 있다. 양원후이의 금릉각경처는 주로 불서 수집과 교감 그리고 각인을 통한 불서 유통이라는 불교 지식 확산의 토대를 구축했다. 양원후이를 이은 어우양젠은 ‘연구와 강학’이라는 제2단계로 금릉각경처를 이끌었다. 

어우양젠은 자(字)는 징우(竟無)이고 청 동치 10년(1871) 음력 10월 초파일에 중국 장시(江西) 의황(宜黃)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우양젠의 부친 어우양후이(歐陽暉)는 젊어서 거인(擧人)이 되었지만 이후 과거시험에 번번이 낙방하여 변변한 벼슬을 하지 못했다. 부친은 본처와 후실 둘을 두었는데 어우양젠은 둘째 후실 태생으로 어우양후이의 셋째 아들이었다. 형제가 많았지만 어려서 사망한 이가 여럿이었고, 1876년 그가 겨우 여섯 살 되던 해에 부친까지 사망했다. 1897년에는 하나 있던 형이 사망하자 집안에 남자라곤 어우양젠밖에 없었다. 집에는 홀로 된 어머니와 형수 그리고 홀로 되어 돌아온 누이가 있었다. 

유년시절 숙부 어우양위(歐陽昱)에게서 교육을 받았고, 이후 난창(南昌) 경훈서원(經訓書院)에 입학해 전통 학문을 공부했다. 정주이학을 공부하고 육왕심학을 공부했다. 또한 이 시기 구이보화(桂伯華)와 교류했다. 구이보화는 청일전쟁 이후 변법유신에 참여했다가 변법 실패 후 불교에 심취했다. 그는 난징으로 가 당시 금릉각경처를 운영하던 양원후이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됐다. 사실 양원후이와 인연은 구이보화가 어우양젠보다 먼저인 셈이다. 구이보화는 어우양젠에게 불교 공부를 권했고, 《대승기신론》과 《능엄경》을 선물했다. 바로 이 사건이 훗날 불학대사 어우양젠이 탄생한 인연이라고 할 수도 있다. 1904년 어우양젠은 난징으로 가 양원후이를 친견했다. 

1906년 모친이 사망하자 어우양젠은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이후 부귀공명과 음식남녀 같은 일체 세속의 일을 끊었다. 그가 불교를 대하는 태도는 대단히 경건했다. 성(聖)과 속(俗)을 분명하게 분리했고 정(正)과 사(邪)를 칼같이 간별했다. 적어도 이런 점에서 그는 전통적이었다. 훗날 《대승기신론》을 비판하면서 중국불교 전통을 가격했지만 그의 불교 연구는 근대 시기 출현한 ‘학자’의 모습은 결코 아니었다. 1906년 어우양젠은 난징 금릉각경처로 향했고 양원후이 문하로 입실했다. 이후 어우양젠은 각고의 노력으로 공부하였다. 1911년 양원후이는 사망 직전 어우양젠에게 금릉각경처의 일체 사업을 부촉했다. 

 

2. 《유가사지론》 교감과 지나내학원

어우양젠은 1904년 양원후이 친견 전후로 유식학 문헌을 읽기 시작했다. 그가 어떤 계기로 유식학에 집중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자신의 취향이나 판단도 영향이 있겠지만 양원후이의 계승이라고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양원후이는 말년에 이미 유식학 문헌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일본에서 입수한 법상종 문헌을 교감하고 각인하는 데 집중했다. 일찍이 “양원후이는 금릉각경처에서 현장 역 《해심밀경》 5권(1871), 현장 편역 《성유식론》 10권(1896), 규기(窺基) 찬 《성유식론술기》 60권 20책(1901) 등 유식학 문헌을 지속적으로 판각 · 간행했다.” 그는 이후 《유가사지론》 교감에 집중했다. 

금릉각경처에서 “《유가사지론》 100권은 세 차례 걸쳐 간행됐다. 1903년 제1권에서 제33권까지, 1905년 제34권에서 제47권까지 간행됐다. 이는 양원후이 생전의 작업이다. 1917년 제48권부터 제100권까지 완간했다. 1911년 양원후이 사망 이후 어우양젠이 《유가사지론》 간행 작업을 담당하여 결국 완성했다. 양원후이의 유훈을 제자 어우양젠이 완수했다고 할 수 있다. 1917년 《유가사지론》의 완간이야말로 금릉각경처가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전환점이 됐다.” 또한 근대 중국불교에서 유식학의 근본 지식이 완성됐다고 할 수도 있다. 

1917년 어우양젠은 〈《유가사지론》서〉에서 “수백 년 동안 유식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상종팔요(相宗八要)》와 《성유식론관심법요(成唯識論觀心法要)》 외에 정밀한 연구는 없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금릉각경처에서 행한 법상종 문헌의 교감과 각인은 중국불교사에서 법상종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다. 어우양젠은 스승이 입적한 이후 현장 역 《유가사지론》 100권의 후반부 교감을 담당했다. 어우양젠이 금릉각경처 시기 진행한 유식학 연구는 사실 스승 양원후이에게 직접적으로 교육을 받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교감(校勘)’이라는 과정이 그에게 학습의 장이었다. 그는 문헌을 직접 대하고 고군분투하여 낱낱의 의미를 파헤치고 이해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단단한 바탕 위에서 유식학을 연구할 수 있었다. 어우양젠의 제자 뤼청(呂澂)과 왕언양(王恩洋) 같은 인물도 실은 ‘교감’이라는 훈련 과정을 통해서 성장했다. 이는 금릉각경처라는 특별한 공간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양원후이 입적 이후 10여 년간 금릉각경처는 그의 유훈에 따라 운영됐다고 할 수도 있다. 어우양젠은 스승의 유훈대로 충실히 《유가사지론》을 교감했고 결국 교감과 각인을 완료했다. 《유가사지론》의 각인 완료는 금릉각경처와 어우양젠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드는 계기였다. 교감과 각경을 통한 불교 지식의 정리와 확산이라는 단계에서 연구를 통한 지식의 생산과 심화라는 단계로 넘어갔다. 어우양젠은 이후 ‘유식학 연구’를 필생의 업으로 삼고 전문적인 교육과 연구를 위해 기관 설립을 추진했다. 그것이 ‘지나내학원(支那內學院)’이다. 여기서 ‘지나’는 중국을 의미하고 ‘내학’은 불학을 의미한다. 금릉각경처와 지나내학원의 관계는 다소 모호한 점이 있다. 초창기 지나내학원은 금릉각경처의 연속이었지만 이후 별도의 기구로 전환되었다. 

지나내학원은 작은 연구회 정도의 규모가 아니라 이사회까지 설립할 정도로 꽤 큰 규모였고, 각계 저명인사가 이사회에 참여했다. 현재로 보자면 ‘대학’ 수준의 규모와 ‘대학원’ 수준의 전문성을 갖췄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어우양젠은 1915년 금릉각경처 내에 ‘연구부(硏究部)’를 설치했다. 그는 경전 교감과 판각 그리고 간행이라는 각경처의 역할에 불교 연구라는 한 임무를 더 부여했다. 1918년 금릉각경처는 이 연구부 산하에 ‘지나내학원(支那內學院)’ 설립을 의결했고, 수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1923년 9월 정식으로 설립했다.” 

어우양젠은 지나내학원 설립 자금을 모으기 위해서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협조를 받아 1922년 설립되어 학생을 모집했고 1923년 정식 수업이 시작됐다. 지나내학원은 크게 학무처(學務處), 편교유통처(編校流通處), 사무처(事務處)로 조직됐고 각각 연구 · 강좌 · 출판, 교감 · 편찬, 행정 등을 담당했다. 어우양젠을 비롯하여 제자 뤼청, 왕언양 등이 강의했고, 당시 난징의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던 탕융퉁도 일시적으로 강의했다. 1925년에는 법상대학특과를 설치하여 출 · 재가 40여 명을 모집하여 교육했다. 1924년에는 연간지인 《내학(內學)》을 창간하여 전문적인 연구물을 실었다. 중국 근대불교 잡지 가운데 학술성이 가장 뛰어난 잡지라고 할 수 있다. 

“어우양젠의 이런 교감 정신을 가장 잘 보여준 작업은 지나내학원의 《장요(藏要)》 편찬이다. ‘장요’는 대장경[藏]의 핵심[要] 문헌이란 뜻이다. 어우양젠은 비록 대장경 전체는 아니지만 대장경의 핵심적인 문헌을 추려서 정밀하게 교감하고 교감주를 달아 정본을 확정하여 간행했다. 《장요》는 전체 3집(輯)으로 73종, 400여 권의 불서를 포함한다. 어우양젠의 지도로 제1집과 제2집을 각각 1929년과 1935년 간행했다. 제3집은 1985년 현재의 금릉각경처에서 당시까지 완성되지 않은 부분을 편집하여 간행했다. 1995년 중국 상해서점(上海書店)에서 10책으로 영인본 《장요》를 간행하기도 했다. 3집 모두 경률론 삼장으로 구성됐고, 주요한 문헌에 어우양젠이 쓴 서(敍)가 붙어 있다.”

 

3. 중국불교 전통 비판과 《대승기신론》

1922년 가을 어우양젠은 지나내학원 설립을 맞아 열 차례에 걸쳐 〈유식결택탐(唯識決擇談)〉을 강의했다. 그는 《성유식론》 강의를 진행하기에 앞서, 유식학의 도론(導論) 성격으로 10강을 진행한 셈이다. 이 강의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유식학 연구 성과를 마음껏 발휘했고 유식학을 기준으로 기존 불교에 대해서 서슴없이 비판했다. 그는 가장 먼저 기존 중국불교 전통의 다섯 가지 폐단을 지적했다. 그의 비판은 대단히 신랄하다. 첫 번째 폐단은 중국불교가 어느 때부턴가 보이기 시작한 반주지주의 성격이다. 당대 법상종처럼 치밀한 논리와 비판적 사고를 앞세운 전통은 송대 이후 점차 사라졌고 명 · 청대는 거의 소멸했다고 할 수 있다. 어우양젠은 그런 경향을 초래한 이유로 선종을 지목했다. 

눈먼 자들은 멋도 모르고 그저 선가(禪家)의 공안(公案) 한두 개 들고서 구두선을 행하면서 들여우처럼 앉아서 참선한답시고 입만 벌렸다 하면 ‘불성은 문자에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이 때문에 이전 성인의 전적과 고승의 지극한 가르침은 폐기되어 사용되지 않고, 불법의 진의는 몰락하여 미약해졌다. 

물론 선종 모두가 이러지는 않았지만 어우양젠이 보기에는 분명 책임이 있었다.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은 모두 고원한 경계에 도달하는 방법이지만, 맹목적인 이들에게 그것은 기존의 찬란한 불교 전통을 훼손하는 칼날이고 망치일 수도 있다. 어우양젠은 아마도 당시 불교계의 저속한 경향에 분노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는 대단히 거친 언사를 내뱉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어우양젠의 유식학 부흥 노력은 반주지주의 불교에 대항한 주지주의 불교의 지향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어우양젠은 대단히 독실하고 경건한 불교도였고 공부는 내면의 성장이 있고 나서야 가능하다고 했기 때문에 그의 앎에 대한 강조가 그저 단순한 글공부를 말하지는 않았다. 

두 번째 폐단은 중국인은 학문상 정밀한 관찰을 결여했다는 점이다. 불교에 한정해서 보자면 교리상 심사숙고하는 일도 없이 자신의 소견으로 글을 짓고는 대단한 작품이라도 되는 양 득의양양 으스대는 꼴을 지적한다. 세 번째 폐단은 천태종이나 화엄종 같은 중국 고유의 종파가 출현한 이후 오히려 불교의 광명은 더욱 어두웠다는 점이다. 이 비판은 기존 중국불교 전통 자체에 대한 심각한 비판이라고 할 법하다. 그는 저들 종파의 조사들 수준은 인도 논사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데, 신자들은 그들을 세존의 환생쯤으로 여긴다고 지적한다. 네 번째 폐단은 불교를 공부한다는 자들이 불서의 수준과 내용을 판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다섯 번째 폐단은 불교를 공부한다는 사람이 불교 공부의 방법론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냥 자신이 하는 방식이 무턱대고 구경의 것이라고 해버린다. 

이상의 폐단을 극복하고 불교를 제대로 공부하는 법은 무엇인가. 어우양젠은 “불교를 배우는 사람이 유식과 법상을 연구하여 그 의리를 분명히 통찰한다면 사상의 미숙함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고, 완전하지 않은 학설에 미혹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유식과 법상은 불교를 배우는 사람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중국불교를 전통의 인습 속에서 구원할 것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우양젠은 제5강에서 유식학의 오법(五法)에 대해서 말한다. 오법은 오사(五事)를 가리키는데 상(相) · 명(名) · 분별(分別) · 진여(眞如) · 정지(正智)이다. 상(相)은 언어로 지시된 사물의 모습이다. 명(名)은 사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분별(分別)은 언어를 이용한 심리 활동과 언어를 동반하지 않는 심리 활동을 통칭한다. 진여는 궁극적 진리를 가리킨다. 정지는 진여를 인식하는 바른 앎이다. 어우양젠은 〈유식결택탐〉에서 진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여(眞如)는 언어와 사고를 초월하기에 근본적으로 이름을 붙일 수 없지만 억지로 그것을 진여라고 하는데, 단지 간별(簡別)일 뿐이다. ······여기서 간별함의 의미는 차전(遮詮)이다. ······진여라는 말은 결코 특별한 작용을 가리킨 게 아니다. 고금의 사람들은 상당수가 이런 이해에 어두워 다만 진여(眞如) 두 글자를 표전(表詮)으로 보아 진여가 훈습하여 만법을 연기한다는 학설로써 불법이 전도되고 지리멸렬하며 그 까닭은 논변하지 않는 상황에 도달하게 됐다.

어우양젠은 진여라는 말은 차전(遮詮)일 뿐이라고 말한다. 차전에 상대한 말은 물론 표전(表詮)이다. 표전은 알맹이를 가진 어떤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차전은 공(空)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알맹이는 없지만 다른 것과 차별화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표현이다. 진여를 하나의 본질 혹은 원천으로 파악하여 그것이 특별한 역할을 행한다는 사고는 동아시아불교에 만연해 있다. 진여뿐만 아니다. 공(空)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무자성의 표현이라고 다들 말하지만 거기서 세계가 출현한다느니 수승한 역할이 있다느니 하는 형이상학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우도 많다. 어우양젠은 자신이 경험한 중국불교 전통 속에서 이런 분명한 경향을 보았다. 그가 보기에 “진여가 만법을 연기한다.”는 진여연기설이야말로 그런 것이었다. 

근대 불교학이 성립한 이후 일본이나 한국 그리고 중국 할 것 없이 ‘진여연기설’이란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여래장연기종’ 같은 표현이 근대 이전에도 있었지만 업감연기설, 아뢰야연기설, 진여연기설, 법계연기설 등의 표현은 근대 불교학에서 정립한 현상 성립의 제 이론이다. 진여연기설은 간단히 말하면 현상 세계의 출현과 그것의 전개를 진여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학설이다. 진여연기설의 대표 문헌으로 《대승기신론》을 거론한다. 어우양젠은 유식학의 오사 가운데 진여 개념을 거론하면서 결코 그것은 세계를 현상시키는 작용이 아님을 강조한다. 《기신론》에서 우리는 일찍이 진여가 ‘부동(不動)’과 ‘수연(隨緣)’이라는 어쩌면 상반된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보았다. 어우양젠은 유식학의 진여 개념을 들어서 바로 이 점을 비판한다. 

어우양젠은 단지 《기신론》이 진여 개념을 오용하고 있다는 수준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기신론》의 주된 주장이 소승의 것이라고 함으로써 그것을 대승 정통에서 배제하려 한다. 그는 《성유식론》에 등장하는 소승 분별론자(分別論者)의 견해에 주목했다. 《성유식론》은 분별론자는 “심성은 본래 청정한데 객진번뇌에 오염되기 때문에 잡염이라고 명명하고, 번뇌를 여읠 때 무루법으로 전환한다.”는 입장을 취한다고 말한다. 《기신론》에서는 “이 마음(중생심, 진여심)은 본래부터 자성이 청정하지만 무명이 있어서 무명에 의해 오염되어 염심(染心)이 있다.”고 말한다. 《기신론》에도 아뢰야식을 말하고 훈습설이 등장한다. 유명한 ‘진망화합식’이나 ‘진망호훈설’이 각각 그것을 대표한다. 어우양젠은 그것이 정합적인 이해가 아니라고 본다.

어우양젠은 《기신론》의 이론 구조가 불안정하기 때문에 “《기신론》의 저자 마명은 소승 출신으로 《기신론》은 대승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의 논의로서 그 내용은 소승과 대승 양쪽에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실제 《기신론》이 소승과 대승 과도기에 출현했는지 쉽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그것을 소승과 대승 정통 모두에서 제외시켰다는 점이다. ‘《기신론》은 불교가 아니다.’라는 선언은 아니지만 적어도 ‘온전한 가르침은 아니다’라는 선언은 된다. 

어우양젠은 유식학 입장에 서서 진여는 앎 즉 정지(正智)의 대상이지 그 자체로 작동하는 무엇은 아니다. 앎의 대상이라고 해도 그것은 알맹이가 있는 대상이 아니라 그저 실체 없음으로써 사실이다. 이런 입장에 서면 《기신론》의 진여 개념은 형이상학의 개념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계 출현의 근거이고 또한 세계의 수렴처이기 때문이다. 《기신론》에서 진여는 유식학에서 말하는 ‘진여’와 ‘정지’ 두 개념의 결합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한편 본질이고 한편 그 본질을 아는 능력이다. 진여심 혹은 중생심이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다. 이때 심은 ‘심체’와 ‘심작용’ 두 측면이 있다. 이에 반해 어우양젠은 진여를 체로 한정하고자 한다. 

어우양젠의 《기신론》 비판은 당시 불교계 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천태, 화엄, 선 등 중국불교 고유 종파가 건립되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기신론》에 대한 이론적 비판은 기존 불교계 인사에게 반감을 샀다. 더구나 어우양젠의 제자 일부는 스승보다 훨씬 강하게 《기신론》을 비판했는데 제자 왕언양 같은 경우 심지어 그것이 ‘비불설’이라고까지 했다. 당시 불교계의 보수적인 그룹뿐만 아니라 타이쉬(太虛)와 같은 개혁적인 인사들까지 나서 지나내학원 그룹의 ‘기신론관’을 공격했다. 결국 어우양젠이 이끈 지나내학원 그룹과 타이쉬가 이끈 무창불학원 그룹의 《기신론》 논쟁이 전개되었다. 

지나내학원 그룹은 곧잘 ‘비판불교(批判佛敎, Critical Buddhism)’와 비교된다. 1990년대 하카야마 노리아키(袴谷憲昭), 마쓰모토 시로(松本史朗) 같은 일군의 일본 불교학자는 불교 전통 속의 몇몇 이론과 개념을 비판했다. 하카야마는 《비판불교》(1990)와 《본각사상비판》(1991)을 간행했고, 마쓰모토는 《연기와 공: 여래장사상 비판》(1990)과 《선사상의 비판적 연구》(1994)를 간행했다. 저들이 대항하고 파헤치고 비판한 내용은 동아시아불교의 전통을 지탱한 본각, 여래장, 견성과 같은 개념이다. 1997년에는 하와이대학 출판부에서 일본과 서양 학자들의 비판불교 관련 글을 편집하여 《보리수 가지치기(Pruning the bodhi tree)》를 간행됐다. 이 책의 부제는 “비판불교를 둘러싼 폭풍(the storm over critical Buddhism)”이다. 

필자가 보기에 비판불교는 마땅히 폭풍이 되어야 했음에도 실은 폭풍이 되지 못했다. 주목할 만한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다. 이론적으로 부실해서도 아니다. 기존 불교학계가 다양성을 존중해서도 너그러워서도 아니다. 기존 불교학계의 암묵적인 무시 전략 때문이라고 하는 편이 더 맞는 것 같다. 특정한 불교 이론이 정통의 적부와 관계없이 수많은 불교 대중에 의해 선택됐다면 그것은 현실로서 불교다. 과거 불교 전통뿐만 아니라 현실 불교 속에서도 분명히 살아 있는 본각과 여래장과 견성을 몇몇 학자들의 아카데미즘으로 축출하는 건 불가능하다. 지나내학원의 《기신론》 비판도 비판불교론자의 여래장 비판도 실은 이슈 정도 수준에서 그치고 말았다. 

4. 결론 

어우양젠과 그의 제자 그룹은 탕용퉁 같은 캠퍼스 학자가 불교학을 장악하기 전 재가 거사로서 최고 수준의 불교 연구를 행했다. 또한 그들은 당말 이후 거의 맥이 끊긴 법상종 전통을 부활시켰고 불교 인명학 연구의 유행을 이끌기도 했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 어우양젠은 지나내학원을 난징에서 쓰촨(四川)으로 옮겨 지나내학원 촉원(蜀院)을 설립하여 강학과 간경(刊經)을 지속했다. 어우양젠은 자신의 평생 저술을 선별하여 1942년 《어우양징우 선생 내외학(歐陽竟無 先生 內外學)》 3함(函) 32책(冊)을 간행했다. 1943년 어우양젠은 병환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후 제자 뤼청이 지나내학원 원장으로 취임했다. 

1952년 사회주의 중국에서 지나내학원은 멈추었다. 일부 역할이 난징의 금릉각경처로 귀속됐고 보관 중이던 수많은 불서와 경판은 몇몇 사원으로 흩어졌다. 지나내학원에서 훈련하고 강학한 뤼청이나 왕언양 그리고 슝스리, 멍원통(蒙文通, 1894~1968) 같은 학자는 여전히 연구를 진행했다. 오늘날 지나내학원의 구체적 계승은 찾아볼 수 없지만, 근대불교에서 그것의 역할은 대단히 컸고 더불어 어우양젠의 역할 또한 대단히 컸다. 어우양젠에게서 우리는 엄밀한 문헌 연구로 불교의 이상에 도달하고자 한 경건한 불교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김영진 1722dew@hanmail.net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동 대학원 졸업. 주요 저서로 《중국근대사상과 불교》 《공(空)이란 무엇인가》 《근대 중국의 고승》 《불교와 무(無)의 근대》 《중국 근대불교학의 탄생》 등이 있고, 역서로 《중국근대사상사 약론》 《대당내전록(大唐內典錄)》(공역)이 있다. 대원학술상(저서 부문), 불이상(학술 부문) 수상. 현재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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