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강 스님

“스님, 득도(得度)하셨다는데, 해탈하기 전과 후가 어떻게 다릅니까?”

전강 스님께 절을 올리고 앉자마자 대뜸 물었다.

“누가 해탈했다고 해?”

“사람들이 다 우리 전강 스님은 젊어서 견성(見性) 득도하셨고 대덕고승(大德高僧)들께 인가(印可)도 받았다고 합니다.”

“쓸데없는 소리!”

“머리에서 피가 날 정도로 용맹정진(勇猛精進) 끝에 깨달음을 얻으셨으니, 경지에 큰 변화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보채는 아이처럼 더 칭얼거렸다.

“한가한 소리 할 시간 있으면 공부해. 둘 다 벽 보고 돌아앉아. 가부좌 틀고 화두를 잡아. 화두가 뭐야? ‘이뭣고’ !”

스님은 응석에 일체 대꾸 없이 단호하게 참선을 지시하셨다. 형형한 기세에 눌려 면벽하고 가부좌를 틀 수밖에 없었다. 전강 스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한 친구가 아니었으면 박차고 일어나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그냥 앉아만 있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 

좌선 중에 슬며시 뒤를 살피니 스님은 깊은 잠에 빠져 계셨다. 온몸이 뒤틀리고 팔다리가 저려 오자 괘씸죄라고는 해도 가혹한 처사 아닌가 싶었다. 힘들었다. 한 시간쯤 지나 잠에서 깬 스님이 비로소 면벽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굳은 다리를 펴는데 곡소리가 절로 나왔다.

 

나의 불교 입문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인천 용화선원에 드나들 때의 일이다. 초라한 암자에 공부하는 스님이 많았다. 23세 젊은 나이에 깨달음을 얻어 보월 스님, 한암 스님, 용성 스님 등 여러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25세에는 만공 스님의 법맥(法脈)까지 이어받으셨으니 그 명성이 저자에까지 은은하게 번졌다. 

많은 대중이 그 초라한 선원에 모여들었다. 법의(法衣)로 갈아입고 깨달음의 노정에 든 친구를 따라 스님을 뵈러 간 그때, 내 나이도 마침 23세였다. 관념적이고 버릇없는 대학생의 막무가내 질문 공세에 소이부답(笑而不答)이시던 스님의 세수(世數)가 지금 내 나이와 얼추 비슷했다.

이제 스님 나이 언저리에서 돌아보니, 없는 것을 묻고 없는 답을 구하던 젊은 날의 어리석음만 환히 비쳐 부끄럽다. 스님은 깨달음을 얻은 후 40여 년 동안 수행과 실천을 통해 부처의 길을 닦으셨다.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쓰셨고, 대중들이 신심(信心)을 갖고 정진하도록 오랜 시간 조금씩 당신의 터전을 일구셨다. 초라했던 주안의 용화선원은 스님의 깨달음과 지혜의 가피(加被)를 입어 공부하는 수많은 스님들의 도량이 되었고 번뇌망상에 찌든 대중들이 쉽게 찾아들어 마음의 평정을 찾는 아름답고, 활기찬 선원으로 바뀌었다.

그 대학생은 유난할 것 없이 하루하루 쌓여가는 일상의 절살이가 스님의 도통(道通)인 줄 도대체 몰랐다. 지금이라고 무엇을 중뿔나게 아는 것도 아니지만.

 

송담 스님

“무슨 일을 하십니까?”

낮고 맑은 목소리가 물었다.

“교삽니다.”

“아, 선생질을 하시는군요!”

고승의 말씀이라기엔 왠지 상스러웠다.

“스님, ‘질’ 자는 보통 도둑질, 기집질, 토구질처럼 저속하고 나쁜 짓 뒤에다 붙입니다. 저는 가르치는 일이 저속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불쾌함을 못 숨기고 국어 선생티를 내며 대거리했다.

“저는 중질합니다.”

“예?”

“중생이 하는 모든 행위가 ‘질’입니다. 삽질, 괭이질, 땜질처럼 땀 흘려 일하는 소중한 노동도 다 ‘질’입니다.”

스님은 태평하게 법문을 시작하셨다. 잠시 인사나 드리고 가려던 참이었는데 가르침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인생 삼라만상의 근본 이치가 ‘질’ 한 글자로 꿰어나갔다. 일절 막힘없이 아주 쉽고, 정확한 비유를 타고 물 흐르듯 불법이 흘러나왔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니 제법무아(諸法無我)며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니 하는 절집 말 하나 섞이지 않은 보통의 말, 생활의 말이었다. 

국어 선생이랍시고 스님 큰 뜻에 접미사의 쓰임이나 갖다 붙인 꼴이 민망하고 창피스러웠다. 시작한 줄도 몰랐던 법문이 끝난 줄도 모르고 끝났다. 시간을 보니 어느덧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만공 스님

만공 스님 계시는 절에 도착한 때는 한밤중이었다. 밖에 나와 계시던 만공 스님께 전강은 절을 올렸다. 천하제일경(天下第一景)이라는 금강산은 어둠에 묻혀 그 윤곽만 희미하게 비쳤다.

“머리에서 피가 나도록 용맹정진, 참선고구(參禪考究)했다는 젊은이가 자넨가?”

“예, 전강입니다.”

“금강산까지 어인 일이신가.”

“큰스님께 여쭙고자 서둘러 왔습니다.”

만공은 잠시 젊은 학승을 바라보다 곧 어두운 밤하늘로 눈길을 옮겼다. 전강도 고승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부자뻘 두 승려가 말없이 서 있는 시간이 길었다.

“저 수많은 별 중에 자네의 별이 어느 것인가?”

흑단 위에 흩뿌려 놓은 보화처럼 반짝이는 금강산 밤하늘의 별들을 가리키며 마침내 만공이 물었다. 전강은 대답 없이 그대로 그 자리에 엎드려 땅바닥을 더듬었다. 한참 동안 땅바닥만 더듬는 전강의 모습을 오래 지켜보던 만공이 마침내 한마디 뱉었다.

“선재(善哉)라!”

 

전강이 금강산에서 만공에게 인가받는 모습을 상상으로 그려본 것이다. 요령부득의 선문답이 아닌가? 이 기이한 의식(儀式)으로 만공은 전강의 깨달음을 인가했다고 한다. 경허(75대), 만공(76대), 전강(77대), 송담(78대)의 계보를 잇는 우리 선종의 큰 흐름이 이렇게 이루어졌다.

일찍이 열반에 드신 만공 큰 스님을 친견할 기회는 없었지만 전강, 송담 두 큰 스님을 가까이서 뵙고 가르침 받은 인연이 있어 몇 자 적어보았다. 공교롭게 두 스님에게서 공히 한 시간쯤 가르침을 받은 셈이다. 한 분은 주무셨고, 또 한 분은 설하셨다. 지금 보니 한 분은 주무시면서 설하셨고 또 한 분은 설하시는 동안 편안하게 주무신 것도 같다.

친구 덕에 큰 스님 두 분을 가까이서 뵙게 된 것은 큰 불은(佛恩)이었다.

 

큰스님께 삼배 올리고 합장하며, 승보(僧寶)에 귀의(歸依)합니다. 

 

신상철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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