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우리는 부처님오신날을 기념하며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의 의미를 되새겼다. 《묘법연화경》 방편품에 따르면,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 일대사의 인연은, 우리 중생으로 하여금 바른 지견을 깨우쳐서 삶을 올바르게 살도록 이끌어주시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남섬부주(南贍部洲) 어디쯤인가 부처님이 오시는 길에 커다란 장애물이 놓인 것 같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바르게 가야 할 방향을 잃고 이토록 좌충우돌 표류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너나없이 모두가 느꼈을 것이다. 올해 선거 때문에 드러난 대한민국의 진흙탕 패싸움은 부끄러움의 극치다. 근년의 코로나와 같은 역병의 폐해는 말할 것도 없고, 홍콩에 이어 미얀마에서 정치로 촉발된 분쟁, 스리랑카에서 경제로 촉발된 분쟁, 파키스탄에서 종교로 촉발된 분쟁, 그리고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의 도발 전쟁에 이르기까지 지구촌은 온통 목숨을 내어놓고 난리법석 중이다. SNS의 발달로 이 모든 난리들은 실시간으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이제 ‘나 홀로 안녕’인 시절은 한낱 꿈일 뿐, 중중무진으로 우리의 괴로움이 깊어진다. 모든 생명에 자비하신 부처님은 사방팔방에서 넘치는 이 괴로움을 보시고 어떤 마음이실까. 

《금광명최승왕경》 사천왕관찰인천품(四天王觀察人天品)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이 경을 호지독송(護持讀誦)하면, 온갖 중생이 안락을 얻을 수 있다. 육도윤회의 고통을 쉬게 하고 온갖 두려움을 없애준다. 원수나 대적이 곧 물러가게 하며, 흉년으로 굶주릴 때는 능히 풍년이 들게 하며, 유행병은 깨끗이 낫게 한다. 남섬부주에서 만일 어떤 도둑이 침공하여 소란하거나 굶주림과 질병의 재액이 있을 때 경전의 말씀을 공경하여 읽고 외우면, 그 힘으로 백천 가지 괴로움이 사라지게 된다.”

같은 경전의 사천왕호국품(四天王護國品)에는 또 이런 말씀도 나온다.

“남섬부주 모든 나라에서 자재함을 얻으며, 재물을 풍족히 가지고 서로 빼앗지 않으며, 남의 나라를 탐내지 않고 전쟁으로 얽매이는 고통이 없을 것이며, 백성들은 서로 귀하게 여기며 자비롭고 겸양하여 선근을 증장할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남섬부주가 편안하고 백성은 번성하고 땅은 기름지고 추위와 더위가 조화롭고 절기가 순서를 어기지 않는다. 해 · 달 · 바람 · 비가 때를 잘 맞춰서 모든 재난과 횡액을 벗어난다.”

 

그런데 정말로 부처님 말씀만 잘 읽고 외우면 그대로 세상이 모두 편안해질까? 불교인으로서 그렇게 되묻는 것을 그저 신심불량(信心不良)으로 치부하기에는 당면한 현실이 너무나 참혹하기 때문이다. 지금 지구촌 사방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전쟁으로 잃은 생명이 너무 애석하고, 그중에서도 민간인의 떼죽음을 생각하면 그곳은 더 이상 인간계(人間界)가 아니고 아수라 · 지옥과 같다. 러시아 침략전쟁을 피해서 집을 떠난 우크라이나 어린이가 500만 명 이상이라는 소식은 우리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외세 침입으로 인해 남녀노소 수많은 생명이 죽음의 공포로 전율했던 역사가 있다. 그런 아픔을 기억하는 우리로서는 더욱이 21세기 대명천지에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침략전쟁의 참상을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지, 과연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아무래도 회피하기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모든 전쟁이란 인간계 구성원 피차간에 가장 어리석고도 사악한 면모를 드러내는 작업(作業)이다. 당장 침략의 피해자인 우크라이나의 고통만이 아니라 침략 가해자인 러시아에서 그 업보가 막중할 텐데, 우리와 같은 범부중생의 머리로는 그 도발 전쟁의 연유를 헤아리기가 막막할 뿐이다. 부처님의 열 가지 별호 중에는 세간을 완전히 이해하신 분[世間解], 인간을 가르쳐 선도하는 데 탁월한 역량을 가지신 분[調御丈夫]이라는 호칭도 있다. 지금 저들처럼 침략하고 방어하는 전쟁의 인과법을 우선은 부처님께 여쭙고 싶은 심정이다. 더 나아가서, 사랑과 자비를 가르치는 모든 종교와 그 종교인의 이름으로 지금 당장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도 묻고 싶다. 

오늘날 고난과 비통함의 한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오시는 부처님은, 마치 특별 손님처럼 멀리서 일 년에 한 번씩 오시는, 그런 구세주가 아닐 것이다. 많은 경전에는 여러 불보살(佛菩薩)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하고 일체를 구제함으로써 보살이 되고 부처가 된다고 쓰여 있다. 《대반열반경》 여래성품(如來性品)에서 비유하기를, 가난한 여인의 집안에 순금 항아리가 묻혀 있는데 정작 집안 식구들이 아무도 그 진실을 모른다고 했다. 모든 중생이 품은 부처님 성품[一切衆生 悉有佛性]은 바로 항아리 속 순금과 같은데, 중생의 한량없는 번뇌에 덮여서 스스로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불교인이라면 저 멀리 허공계를 바라보며 부처님이 구름 타고 오시기를 기다리지 않고, 당장 여기서 내 안의 부처님을 공경하며 이웃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한 걸음이라도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전쟁의 참혹상들을 보게 될 때 물론 그 순간은 우리 누구나 측은과 연민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먼 나라에서 벌어진 그들끼리의 전쟁을 우리라고 여기서 어쩔 도리가 없으니 짐짓 외면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다시피 온 세상의 일이란 서로 의존하고 서로 연관되어 움직이는 법이므로, 어느 곳에서의 전쟁도 더 이상 그들만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연기(緣起)의 이치에 비추어 본다면 누구보다도 불교도는 전쟁터 난민들의 고통과 절박한 바람을 도저히 눈감고 모른 척할 수가 없다. 

이렇게 널리 중생의 괴로움을 덜어주려는 바로 그 마음에서 불보살의 보리심(菩提心)이 일어난다. 이 초발심이 오락가락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증장(增長)되도록 하는 방법을 《발보리심경론》 발심품(發心品)은 범부중생 누구라도 마땅히 수행하면 반드시 성불하리라 믿고, 성불해서 얻게 될 대자비심과 중생구제의 수승한 역량을 간절히 희구(希求)하라고 가르친다. 또, 중생의 무지와 온갖 어리석음이 악업을 짓고 그 괴로움에 속박되는 현실을 자세히 관찰하라고 강조한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우선 자신에게 잠재하는 자비심과 그 실천력을 굳게 믿어야 하고, 세상의 어리석음과 악업과 괴로움을 결코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각자의 불성을 믿으며, 사방에서 들리는 괴로운 소식들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깊이 통찰함으로써 세상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초발심을 잃지 않고 지켜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우리의 눈과 귀를 강제로 막지 않는 한, 불행히도 지구촌의 어디서나 언제나 괴로운 소식들을 자세히 보고 들을 수 있는 시절이다. 그런데도 혹시 나 자신의 삶이 고단하고 내 가족의 삶이 여의치 않고 우리나라가 평안하지 않을 때라면, 먼 나라 우크라이나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가 있겠는지 의심스러울 것이다. 부처님 말씀에 따른다면, 보살필 길이 있다. 삶의 어느 위치에서든 우리가 서로를 반영하고 융통한다는 화엄의 사사무애(事事無碍)한 세계관과 인드라망의 법문을 잘 이해하면, 나의 곤란 속에 그들의 곤란이 상즉상입(相卽相入)하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 먼 거리 보살핌에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무조건 하루 한 번씩 우크라이나에서의 종전(終戰)과 상처받은 어린아이들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자. 홀로 기도를 지속하지 못할 것 같아서 걱정된다면, 그 기도실에 친구들을 초대하고 친구들은 또 친구들을 초대하여 더 널리 기원(祈願)을 모아서 우크라이나에 보내자. 전달하는 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시공을 초월한 세상의 통로로서 온라인(on-line)이면 된다. 

 

2022년 6월

이혜숙(본지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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