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러시아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쓴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전통적 의미의 소설이 아니다. 소설적 구성이 없고, 다만 작가가 오랫동안 수백 명의 사람을 인터뷰해서 모은 이야기를 논픽션 형식으로 전개할 뿐이다. 그럼에도 한번 손에 들면 5백 쪽이 넘는 책을 덮을 수 없다. 2차 대전 당시
‘세 치 혀가 사람 잡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세 치에 불과한 혀지만, 잘못 사용하는 순간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 한편,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도 한다. 혀는 사람을 살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혀가 갖는 또 다른 힘이다. 누군가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위험하지만 매우 유
근자 우리 사회의 화두는 단연 ‘미투(MeToo)’다. 친구들 사이에 만나서 서로 문안을 하다가도 “혹시 자네도 떨고 있나, 미투?” 하며 농담한다. 대체로는 모두 싱거운 농담인 듯 반응하지만, 그 속내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미투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면 보통의 ‘남자사람친구’들은 괜스레 볼
우리의 시간은 늘 찰나적이고 연기적이다. 지금 이 순간조차 온전히 붙잡을 수 없지만, 내게 주어진 오늘의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가면서도 지속성이라는 환상을 안겨준다. 다른 한편, 시간은 지금 머물고 있는 이 공간 속에서 수없는 연기(緣起)의 인드라망을 연출하며 삶의 복잡성과 복합성을 부른다. 언제까지고 지속될 것 같은 착각 속에서, 그 연기의 얽힘으로 인한
우리 현대사에서 촛불 혹은 촛불집회는 하나의 상징이다. 민의를 반영하는 통로가 간접적인 방법밖에 주어지지 않은, 그나마도 4년에 한 번씩밖에 기회가 없던 시절에, 정치꾼들에게 왜곡되어버린 민심을 바로 세우는 유일하다시피 한 기회였다. 그래서 촛불은 그리고 촛불 저항은 우리에게 시민참여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다. 2000년대 이후, 우리 사회는 자주 촛불을 들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세상살이이다. 누가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을 받고 지금의 수인(囚人) 신세로 전락할 줄 알았으며 또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어 대기업 총수들과 호프 미팅을 할 줄 알았겠는가? 우리는 주위 도처에서 미래의 일을 잘 알지 못해 사주풀이도 하고 점집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을 본다. 부처님 당시에도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
1. 머리글촛불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분노한 시민들 1,500만 명이 거리로 나섰고 이들은 폭력 없이 대통령의 탄핵과 파면을 이루어냈다. 대통령이 밀려난 자리에는 ‘촛불대선’의 열기가 뜨거웠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도화선이었을 뿐이다. 거리로 나선 시민들의 마음에는 세월호 참사, 백남기 농민의 국가폭력에 의한 살인,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밀실야합, 국정교과서의 강행, 개성공단 폐쇄, 사드 배치, 문화예술인의 블랙리스트 작성, 노동 배제와 탄압, 실업 증대, 언론통제 등 이 나라를 ‘헬조선’으로 전락시키며 헌정질서를 유린하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는 참 많은 말들이 있다. 특히 남을 헐뜯거나 무시하는 말들이 많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대화에 끼어들게 될 때가 있다. 심심하고 지루한 일상 속에서 남을 욕하는 것은 생각보다 재미있는 일이거나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기회에 그 대상이 바로 자신임을 알아차렸을 때 느껴야 하는 당혹감과
올 것이 왔다. 최근 발표된 우리나라 종교인구 조사결과 불교는 기독교에 비해 2백만 명이 더 적은 2위 종교로 내려앉았다. 이는 정부수립 이후 종교인구를 조사하기 시작한 처음 있는 일이다. 일부에서는 조사방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불교는 이미 한국사회에서 1위 종교 자리를 기독교에 내준 지 오래됐다. 통계수치 때문이 아니다. 생
어느덧 한 해의 끝에 다다랐다. 나라 전체가 혼란스럽다. 유전자가 침팬지와 98.8%나 일치하는 인간이 짐승과 다른 특성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중에서도 백미는 성찰이다. 내 안의 짐승들의 유전자가 작동하여 본능적으로 탐욕을 추구하다가도 멈추어 서서 돌아보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성찰이다. 성찰로부터 우리는 자아와 직접 대면하고 그 앞의 세계와 그 의미와
분노가 유령처럼 우리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프랑스 남부 휴양도시 니스에서 트럭을 이용한 테러가 일어난 이후, 독일 뮌헨 인근 통근열차에서 일어난 홍콩 여행자 가족을 대상으로 한 칼부림, 뮌헨의 쇼핑몰 테러와 프랑스 북부 어느 성당의 신부 참수 등으로 이어지며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그 배후에는 좌절과 분노가 도도하게 자리하고 있다. 우리 사회라고
종교적인 성향이 강한 한국사회에서도 최근 십여 년 사이에 종교 환경이 급격히 변화했다. 도심 명상센터를 채우는 마인드풀니스와 자비명상, 오색등 화려한 연등 행렬, 산사의 템플스테이, 초파일마다 동자승들의 재롱과 함께 불교는 더 현대화되고 더 대중화되었지만, 종교라는 말보다 문화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것이 되었다.종교의 세속화와 사사화가 한국사회에서도 광범위
앎이란 무엇이고 삶과 어떤 연관을 갖는가. 근자에 현응 스님이 깨달음을 “연기성과 공성에 대해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언급한 이래 이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바둑의 정석을 오랫동안 열심히 배우면 어느 순간에 양의 변화가 질의 변화로 바뀌며 눈앞에 몇 수 앞의 바둑판이 그려진다. 어떤 운동이든 공부든 마찬가지다. 그
인도의 종교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째는 제사(祭祀)의 길(Karmamarga)에 속하는 종교, 둘째는 신애(信愛)의 길(Bhaktmarga)에 속하는 종교, 셋째는 지혜(智慧)의 길(Jnanamarga)에 속하는 종교다. 제사의 길에 속하는 종교는 제사의례에 최고의 중점을 둔다. 여기서는 의례집행이 바르게 이루어지면 운명까지도 좌우할 수 있
불교의 보편주의 전통갠지스 강 아지라파디 강 사라푸 강 마히이 강은 인도의 문화와 삶이 흐르는 이름난 강들이다. 하지만 그 강이 유유히 흘러 대해에 이르면 각각의 이름은 사라지고 단지 바다로만 불린다. 마찬가지로 출가한 사람은 그가 어떤 계급이었고, 무슨 일을 했든 단지 부처님의 제자[釋迦子]로만 불린다. 초기경전에 나오는 이 말씀은 흔히 계급을 부정하는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 그리고 희론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물론 동물들도 의사소통을 하지만 인간만큼 섬세한 감정을 나누거나 정의와 진리 같은 추상적 개념을 주고받을 수는 없다. 언어가 있어 인간은 감정을 표현하고, 경험과 지식을 축적하여 후세로 전승할 수 있다. 2,600여 년 전 붓다의 말씀을
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누누이 강조한다. 수없이 나오는 ‘보시공덕’은 이웃과 나누고 봉사하라는 가르침에 다름 아니다. 무엇보다 부처님 자신이 어려운 이웃을 보면 두 팔을 걷어붙이고 헌신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이런 사실은 한두 경전만 읽어보아도 금방 확인된다. 먼저 증일아함 32권
불성에는 남북이 없다노(盧) 행자는 중국의 변방 영남 신주의 궁벽한 촌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는 어떤 스님이 독송하는 경전을 듣고 영혼에 깊은 진동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홍인 대사를 찾아가면 그 경에 대한 가르침을 배울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 길로 스승을 찾아 나섰다. 당시 홍인 문하에는 천 명에 이르는 걸출한 제자들이 모여 있던 터라 시골 총각을 압
가톨릭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다녀갔다. 교황은 방한 기간 중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는 평소 가난한 사람들을 배제하는 현대 자본주의를 ‘새로운 형태의 독재’라고 비판한 것과 맥이 닿아 있다. 노숙자가 숨지면 뉴스가 안 되지만 주가가 2포인트만 떨어져도 뉴스가 되는, 이 비정상적인 세상을 질타하는 그의
5월은 계절의 여왕이다. 겨우내 숨죽였던 나무들이 잎을 틔워 산하대지는 연초록으로 싱싱하다. 5월 한 달에는 즐거운 날들이 줄줄이 몰려 있다. 5일은 어린이날, 8일은 어버이날,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부처님오신날도 음력으로는 사월초파일이지만 5월 초순에 들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언제부터인가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부른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