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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언] 앎의 불교와 삶의 불교 / 이도흠
[65호] 2016년 03월 01일 (화) 이도흠 본지 편집위원장 / 한양대 교수

   

이도흠
본지 편집위원장 /
한양대 교수


앎이란 무엇이고 삶과 어떤 연관을 갖는가. 근자에 현응 스님이 깨달음을 “연기성과 공성에 대해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언급한 이래 이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바둑의 정석을 오랫동안 열심히 배우면 어느 순간에 양의 변화가 질의 변화로 바뀌며 눈앞에 몇 수 앞의 바둑판이 그려진다. 어떤 운동이든 공부든 마찬가지다. 그 순간 우리는 달인, 도인, 신의 경지에 올랐다고 표현한다.

그러기에 인지과학자들은 꾸준한 훈련과 학습에 의하여 총 500조 개에 달하는 두뇌의 신경세포(1,000억 개의 신경세포와 각 신경세포당 5,000개의 시냅스)의 네트워크가 확대되다가 임계점을 넘어 물리적 구조만이 아니라 기능적 조직까지 변화하면서 재조직되는 두뇌의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을 깨달음으로 본다. 개인적인 차원만이 아니다. 인류 문명의 역사를 보아도 600만 년 동안 뇌 신경세포의 다발이 늘어나다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재조직될 때 깨달음이 왔다. 붓다, 공자, 예수도 이 순간에 나타났다.

교(敎)를 추구하는 이들은 깨달음이란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경전을 읽으며 사티(sati)에 들어 그에 담긴 지혜를 터득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선(禪)을 행하는 이들은 언어와 인식은 한계가 있으므로 이를 초월하여 선정을 통하여 부처님의 마음에 다다를 때 깨달음이 온다고 본다. 지금 깨달음 논쟁에 참여하고 있는 대다수는 어느 한 편에 서서 경전이나 조사들의 어록을 논거로 삼아 상대방을 비판하고 있다.

여기에는 분명히 타자에 대한 비판과 배제를 통해 동일성을 강화하려는 욕망과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 초기불교를 따르는 이들은 초전법륜에 묘사된 깨달음은 연기와 공성에 대한 깨우침에서 그리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한다. 대승에서 보면 알라야식에 있는 종자들을 마음대로 부려 언제든 청정한 불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해탈이고, 인간의 의식 저편의 마나스식과 알라야식이 작동하는 원리를 터득하여 이를 진여 실제와 일치시키는 것이 깨달음이다. 선에서 보면 초기불교든 대승불교의 주장이든 언어와 의식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깨달음에 미치지 못하는 하근기의 인식일 따름이다. 남종선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혜능만이 적통이고 《단경》만이 정전이며 나머지는 모두 이단이다.

선 쪽에 선 이들은 확철대오의 체험을 하지 않았다면 감히 깨달음에 대해 논하지 말라고도 한다. 이에 맞서는 이들은 그 체험을 검증할 수 없을뿐더러, 설혹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깨달은 뒤에도 거듭나지 못하여 삼독(三毒)을 행한다면 그것이 과연 깨달음이라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인지과학자들은 이 체험을 일종의 환각으로 간주한다.

500조 개의 신경세포 다발은 회로이고, 이들이 정보를 교환하며 소통하면서 실질적으로 사유와 마음을 작용시키는 것은 화학물질이다. 그러기에 어리석고 탐욕이 넘치는 사람에게 특정의 화학물질을 투여하여 확철대오의 환희심과 똑같은 경지의 신비 체험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이 화학물질의 약효가 다하면 본디 자기 모습으로 돌아간다. 선에서는 그것과 유사하지만 분명히 차이가 나는 체험이라 한다.  

여기서 누가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다. 왜 그리 오래 수행을 하였는데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지, 깨달음에 이른 자가 왜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간화선을 종지로 하는 조계종의 지도층 승려들이 왜 그리 많은 범계와 비리에 연루되었는지, 대승을 표방하는 한국불교가 왜 그리 중생구제에는 인색한지에 대한 의문이다.

진정으로 깨달은 자는 앎과 삶이 일치한다. “불교의 수행은 깨달은 내용을 실천하기 위한 수행이고, 부처로서 살기 위한 수행이고, 열반을 완성하기 위한 수행이어야 한다.” 불도들의 삶의 목적은 깨달음이 아니라 부처가 되고 열반에 이르려는 것이다. 깨달음이 이를 포괄하지 못한다면 이는 반쪽의 깨달음이리라.

한마디로 말해, 붓다로 산다는 것은 이 세계가 연기되어 있어 무상하고 공하다는 것을 깨달아 아직도 고통 속에 있는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무상과 공을 지극히 높은 차원에서 깨달았다 하더라도 ‘자기 비움’과 ‘자기 버림’이 없다면 이는 올바로 깨달은 것이 아니다. 연기를 이해하는 자가 타자들이 나와 서로 조건과 원인을 만들며 상호작용하며 서로를 생성하는 상호생성자(inter-becoming)임을 깨우치고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지 않는다면, 아직 연기의 지혜에 다다르지 못한 것이다. 확철대오의 체험을 하였다는 이가 돈, 권력, 성욕 등에서 자유롭지 못하거나 아만(我慢)과 사집(邪執)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면, 그 체험은 가짜이거나 착각이다.

진(眞)과 속(俗),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 부처와 중생은 둘이 아니다. 게송에 묘사된 것처럼, 저 아름다운 연꽃이 맑은 바람이 불고 향기가 욱연한 높은 언덕에 피지 않는 것과 같이 내가 부처가 되었어도 열반의 성에 머무르지 않으며,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과 같이 세간의 중생을 구제한 뒤에 열반을 얻는다. 내가 지극한 정진과 선정을 통해 몰록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 하더라도 고통받는 중생이 있는 한 나는 부처가 아니다. 그리로 가서 그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그 순간에 나는 부처가 되는 것이다.

우선 지혜로써 모든 경계를 파악하여 온갖 사념과 망상을 떨쳐버리고 나쁜 욕망을 멈추는 지행(止行), 세계와 타자와 나 사이의 연기적 관계를 통찰하는 관행(觀行)을 쌍으로 부린다. 이렇게 하여 먼저 깨달은 자는 항상 큰 자비로써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중생의 의혹을 제거하고 삿된 집착을 버리게 하여 그들을 깨달음에 이르도록 한다. 그러기에 참된 깨달음이란 내가 그리로 가서 그를 완성/열반에 이르게 하고 그를 통해 다시 나를 완성/열반에 이르게 하는 행위다.

이때 이 행위가 윤리적인 당위를 넘어서려면 중생의 삶에 참여해야 한다. 그들과 뒹굴며 그들과 함께 슬퍼하고 기뻐해야 한다. 그러려면 내 몸과 마음 또한 무상한 것을 깨우쳐 나를 버리고 비우며, 타인 및 온 생명들과 나 사이의 연기를 깨달아 이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동체대비의 자비심과 실천이 필요하다.

한국불교는 이미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중생들은 지극한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데, 불도들은 이를 외면하고 있다. 앎이 올바른 깨달음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깨달음이 올바른 삶으로 승화되지 못한 탓이다. 지금 우리는 ‘헬조선’이라 할 정도로 모순과 고통이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다.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자세로 모든 삿된 것을 인식하고 이를 일소하는 실천 없이 깨달음이란 공염불이거나 성인들의 은유 놀이에 그칠 것이다. 논쟁보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이번 특집의 주제는 ‘불교경전의 번역과 유통’이다. 주지하듯, 부처님의 말씀은 아난의 기억, 성중(聖衆)의 기억을 거쳐 문자로 기록되어 경전이란 그릇에 기억을 정박하기 시작하였다. 원본과 재현은 늘 괴리가 있고, 기억은 늘 왜곡되고 파편으로 남으며, 언어란 맥락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에 번역은 항상 원문의 뜻을 오롯이 담을 수 없다. 그러기에 부처님의 말씀, 아난의 기억, 성중의 기억, 빨리어대장경, 범어대장경, 한역대장경, 티베트대장경으로 번역되고 유통되는 사이에 점점 시간의 거리만큼이나 말씀의 거리도 상존할 것이다.

먼저 경전 번역의 중요성과 불교사적 의미를 캐고, 빨리어와 산스끄리뜨어, 티베트어 번역은 물론 서양의 경전 번역의 과정과 기존 경전과 차이 및 영향을 살폈다. 중국불교와 일본의 역경 시스템을 분석하여 이를 현대적으로 적용하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한국의 한문 대장경 번역사업의 현황과 과제에 대해 알아보고, 불교문헌을 디지털화하고 한국불교문헌을 영역하는 사업의 현황과 과제, 방향에 대해 분석하였다. 아울러 경전 번역에 따라 신행의 지형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도 알아보았다.

독자들께서 이번 호를 읽으며 부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하되 말을 떠나는 인식, 그 인식을 삶으로, 중생구제로 실천하는 신행 속에서 각자 근기와 지향하는 바에 따라 우리 불교의 희망을 발견하기를 마음 깊이 발원한다.

2016년 3월
이도흠(본지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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