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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는 분노로 극복되지 않는다 / 박병기
[67호] 2016년 09월 01일 (목) 박병기 본지 편집위원

   

박병기
본지 편집위원

분노가 유령처럼 우리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프랑스 남부 휴양도시 니스에서 트럭을 이용한 테러가 일어난 이후, 독일 뮌헨 인근 통근열차에서 일어난 홍콩 여행자 가족을 대상으로 한 칼부림, 뮌헨의 쇼핑몰 테러와 프랑스 북부 어느 성당의 신부 참수 등으로 이어지며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그 배후에는 좌절과 분노가 도도하게 자리하고 있다. 우리 사회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른바 ‘묻지마 범죄’가 끊이지 않고, 보복운전 등으로 표현되는 일상 속 분노가 언제 어느 곳에서 폭발할지 알 수 없어 긴장감을 늦추지 못한다.

분노의 원인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사실 분노는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하루를 돌이켜보면 사소한 일에도 쉽게 화를 내서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이 빈번하고, 운전을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으면서 보복운전의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시인 김수영의 표현처럼, 우리는 대체로 사소한 일에만 분노하는 경향이 있고, 정작 화를 내야 하는 사회적 분노에 대해서는 애써 눈을 감거나 아예 무감각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분노는 우리와 가까운 곳에 있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기도 하는 대상이다.

분노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원초적 감정이다. 슬픔과 기쁨, 두려움과 같이 인간이 어떤 대상 또는 상황과 마주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고, 이 감정은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도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석가모니 부처가 인간이 가장 경계해야 할 세 가지 독 중의 하나로 분노, 즉 성냄[瞋]을 꼽은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어리석음과 탐욕을 함께 꼽으면서 이 세 가지 독소를 없애는 일이 곧 열반에 이르는 길임을 강조한 부처님의 음성이 오늘만큼 절절하게 들리는 때도 드물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화를 내는 사람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나 자신도 어떤 때 그런 느낌을 받으면서 화를 낼 때가 있기도 한 것 같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인간 의식의 심층을 들여다보면 화의 뿌리를 찾는 일이 불가능하지 않음이 정신분석학과 신경과학의 연구결과로 밝혀지고 있다. 물론 화는 틱낫한 스님의 적절한 지적처럼 이러한 심리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화는 사회적 문제이기도 하고 습관의 문제이기도 하다. 오늘날은 사회적으로 화를 북돋우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어 어느 곳에서 어떤 유형의 화와 마주하게 될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게 되었다. 마치 자살이 한 개인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자살을 부추기거나 동조하는 사회적 분위기의 문제인 것처럼, 화 또한 개인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화를 부추기는 요인들은 많다. 그중에서도 작은 일에도 쉽게 화를 내는 사람들과 마주할 일이 많아진 분위기가 일종의 모방심리를 작동시켜 사회적으로 화를 확산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로마 황제 네로의 스승이었던 철학자 세네카가 《화에 대하여》라는 저서를 통해 강조한 것처럼, 화를 내는 얼굴은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기 마련이고 그런 얼굴과 마주하는 우리 얼굴 또한 일그러진다. 이렇게 화를 내는 상황과 마주하는 일이 많아지고 그에 따라 자신도 쉽게 화를 내게 됨으로써 결국 화는 일종의 습관으로 굳어지게 된다.

정의감과 분노의 문제

우리 인간에게는 탐욕 같은 부정적인 욕망과 함께 올바름을 지향하는 정의감 또한 주어져 있다. 옳지 못한 일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지고 그 불편함을 숨기지 않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함으로써 정의감을 더욱 강화할 수 있다고, 정의(正義)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이후 옳지 못한 일이나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향하는 분노를 긍정적인 것으로 바라보게 하는 생각으로 굳어졌다. 실제로 우리 역사의 진보가 이러한 정의감에 근거한 분노를 직접적인 행동으로 표출해온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 역사 속에서도 동학농민운동과 4 · 19 학생의거, 5 · 18 광주민주화운동 등이 그런 정의감에 바탕을 둔 저항의 몸짓이었기도 하다.

그런데 화에 대해 말하는 세네카나 틱낫한은 그런 행동들조차 분노로부터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 같다. 그렇게 하는 일이 가능할까? 부정의한 일을 바라보면서 아무런 분노를 느끼지 않은 채, 그것을 시정하고자 하는 정의감을 가질 수 있을까? 틱낫한은 연민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하고자 한다. 부당한 일을 당하는 사람을 향하는 연민이 그 일을 향한 저항을 가능하게 하고, 그것을 통해 정의의 구현 또한 가능함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우리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가장 높은 정신적 경지일 것이다.

불교 윤리에서 연민과 자비는 나와 남이 분리된 존재일 수 없다는 동체의식(同體意識)을 전제로 해서 성립하는 최고의 실천윤리다. 나 자신을 사랑하듯이 다른 사람이나 존재자를 사랑하는 일이 자신과 타자를 분리하는 개체주의적 사고 속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자신과 타자가 분리되는 일이 본래부터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 속에서는 가능한 일일 뿐만 아니라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정의를 향하는 감정이나 행동의 기반을 분노가 아닌 연민에 둘 수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지점이다.
그런데 그런 연민에 근거한 정의감의 표출로 해결할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부정의와 마주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의 경우에는 전두환으로 상징되는 부정의의 원흉이 전혀 뉘우치지 않으면서 눈앞에 살아 있고, 안중근의 경우에는 이토 히로부미로 상징되는 침략세력이 그런 사례였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그 인간들에 대한 연민에 근거한 저격과 살해가 허용될 수 있을까? 부정축재로 모은 엄청난 재산을 숨겨놓고 자신의 통장에는 몇십만 원밖에 없다고 느글거리는 미소까지 띠면서 말하는 전두환은 말 그대로 구제불능의 인간이고, 그를 향하는 분노 대신 연민으로 저격하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리고 그 행위는 그가 확대재생산 해내고 있는 부정의(不正義)의 업을 종식시키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지점에서 일정한 망설임과 마주하는 것은 그런 행위로 인한 분노의 재생산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전혀 뉘우치지 않는 사람을 향하는 분노와 연민은 쉽게 분리되기 어렵고, 그 분노와 연민이 합해져 행한 일이 다른 분노를 불러와 재생산될 수 있는 여지가 남게 된다. 이슬람 청년들의 분노와 좌절은 그리스도교로 상징되는 서구세력이 그들에게 저질러온 악업에 근거한 것이고 그런 점에서 그 청년들의 저항으로서의 테러는 일정한 정당성을 지닐 수 있다. 하지만, 결코 문제를 해소시키는 근원적인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통근열차에서 아무런 죄도 없이 칼에 찔린 홍콩 여행자의 이슬람에 관한 적대감과 그것을 지켜보는 우리의 분노와 공포를 확대시키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분노는 분노로 다스려질 수 없다는 진리와 만나야만 할 듯하다.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을 모두 아우르면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평화적이고 제도적인 대안을 함께 모색하기 위한 진지한 대화를 시작하는 일이 시급하다. 우리에게는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로서 인간다움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하고 또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2016년 9월
박병기(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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