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러시아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쓴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전통적 의미의 소설이 아니다. 소설적 구성이 없고, 다만 작가가 오랫동안 수백 명의 사람을 인터뷰해서 모은 이야기를 논픽션 형식으로 전개할 뿐이다. 그럼에도 한번 손에 들면 5백 쪽이 넘는 책을 덮을 수 없다.

2차 대전 당시 러시아는 1백만여 명의 여성이 전쟁에 참가했다. 남자들과 똑같이 총을 쏘고 부상을 입고 죽었다. 그녀들이 전장에서 겪어야 했던 비극은 어떤 필설로도 모자란다. 젊은 여성은 생리를 멈추었고, 무당벌레도 밟지 못하는 여성이 사람을 죽이는 짓을 해야 했다. 도대체 왜 인간은 이런 전쟁을 해야 한단 말인가? 작가는 전쟁에서 돌아온 2백여 명의 여성을 인터뷰한 내용을 17가지 주제로 나누어 그 참상을 가감 없이 보여줌으로써 왜 우리가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지켜야 하는가를 고통스럽게 설득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부처님 당시 강대국이었던 코살라가 석가족을 멸망시키던 때의 비참한 모습이 떠오른다. 코살라가 카필라를 공격하려고 한 것은 새 왕으로 등극한 비루다카가 다른 나라와의 영토확장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는 비루다카가 소년 시절에 카필라를 방문했다가 자신의 어머니가 노비 출신이라는 이유로 받은 모욕에 대한 앙갚음의 뜻도 포함돼 있었다. 증일아함 26권 〈견등품〉에 따르면, 소문을 들은 부처님이 국경 지역의 앙상한 나무 밑에 앉아서 출정하는 비루다카의 길목을 막았다. 일종의 ‘나 홀로 반전시위’였다.

“잎이 무성한 니그로다 나무도 있는데 왜 마른나무 밑에 계시는지요?”

“친족의 그늘이 다른 곳보다 시원한 법이지요.”

부처님의 뜻은 당신을 생각해서라도 카필라를 공격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왕은 끝내 카필라를 침공해 석가족을 참혹하게 도륙했다. 《비나야잡사》 8권은 부처님이 끝까지 전쟁을 막지 못한 후회와 고통이 어떠했는가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종족이 몰살당하자 부처님은 심한 두통을 느꼈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발우에 가득 물을 떠오게 했다. 그 물을 이마에 뿌리니 곧 연기가 나며 소리 내어 끓었다. 그것은 마치 달아오른 쇳덩이에 물을 뿌린 것과 같았다.”

부처님이 재세하던 기원전 5세기경의 인도 사회는 이렇듯 전쟁의 풍운이 거셌던 시대였다. 당시 인도는 16대국이 분립해 쟁패를 거듭했다. 새로운 군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수많은 전쟁을 거듭했다. 부처님 만년에 이르렀을 때 인도는 드디어 마가다, 코살라, 카시, 아반티 등 4대국만 남게 되었다. 그 뒤 카시는 코살라에 병합되었고, 마가다는 다시 코살라를 공격해 최초의 통일제국을 건설했다. 불교는 이런 살육과 약육강식이 횡행하는 시대적 배경 아래 태어난 종교였다. 따라서 부처님은 어떻게 하면 인간 불행의 원인인 탐욕적 이기주의와, 이에 근거한 전쟁을 극복할 것인가에 설법의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법구경》에 나오는 유명한 경구들은 격동기의 인도 사회를 향해 끊임없이 평화의 중요성과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한 가르침들이다.

“모든 사람은 폭력을 두려워한다. 모든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견주어서 남을 죽여서는 안 된다. 남을 시켜 죽이게 해서도 안 된다.”(130)

“원한을 가진 자들 사이에 살면서도 아무도 미워하지 말고 행복하게 살자. 근심으로 지친 사람들 속에 살면서도 근심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자.”(197)

설법만이 아니었다. 앞에서 인용한 증일아함의 사례에서 보듯 부처님은 적극적인 반전운동가이자 전쟁의 중재자였다. 《본생경》 536화 ‘쿠나라의 전생 이야기’에는 물싸움이 발단이 돼 전쟁이 일어나려 하자 부처님이 이를 말리는 모습이 나온다. 이 싸움의 당사자인 콜리족과 석가족은 로히니 강을 사이에 두고 평화롭게 지내는 사돈지간이었다. 그러나 어느 해 여름 가뭄이 들자 농업용수 때문에 시비가 일어나 전쟁 일보 직전까지 이르렀다. 마침 이곳에서 멀지 않은 숲에 있던 부처님은 이 소식을 듣고 물싸움 현장으로 달려가 싸움을 중재했다.

“왕이여, 물과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합니까?”

“물론 물보다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물싸움 때문에 사람을 죽이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전쟁은 원한을 낳고 원한은 다시 더 큰 전쟁을 부를 뿐입니다.”

두 종족이 부처님의 중재로 전쟁을 포기하고 화해의 악수를 나누었음은 물론이다. 잡아함 46권 《전투경(戰鬪經)》은 강대국 코살라와 마가다가 전쟁을 할 때 부처님이 평화를 위해 화해를 권고하는 모습이 기록돼 있다. 부처님이 사밧티의 기원정사에 계실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걸식을 나갔던 비구들이 돌아와 이렇게 아뢰었다.

“며칠 전에 코살라의 파세나디왕과 마가다의 아자타사투왕이 사이가 벌어져 전쟁을 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코살라군이 패하여 별처럼 흩어졌고, 파세나디는 겨우 몸만 살아서 사밧티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제자들의 말을 들은 부처님은 안타까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싸워서 이기면 원수와 적만 더 늘어나고 패하면 괴로워서 누워도 편치 않다. 이기고 지는 것을 다 버리면 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편안하리라.”

얼마 뒤 아자타사투는 아예 코살라를 없앨 심산으로 다시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그러나 미리 준비하고 있던 파세나디는 마가다군을 궤멸시키고 아자타사투까지 사로잡았다. 그러나 독실한 불교도인 파세나디는 부처님의 권고를 받아들여 아자타사투를 놓아주기로 했다.

“마가다국과는 오랫동안 원한이 없었으나 어쩌다 사이가 나빠졌습니다. 이 젊은 왕은 나의 오랜 친구 빔비사라왕의 아들입니다. 놓아주려고 합니다.”

“참 잘 생각했습니다. 싸워서 능히 이긴다 한들 끝내는 원한만 더욱 커져서 이익이 없습니다. 그를 놓아주면 서로 편안하고 안락해질 것입니다.”

두 나라 왕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쁜 얼굴로 돌아갔다.

앞에서 예로 든 경전들은 부처님이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헌신했던 모습을 알게 해주는 자료들이다. 그랬다. 부처님은 당신의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때로는 전쟁을 막기 위한 중재자로, 때로는 반전농성으로, 또 때로는 평화의 전도사로 최선을 다한 분이다. 역사적으로 불교가 한 번도 종교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키거나 참여하지 않은 것은 부처님이 보여준 평화의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불행하게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다. 70여 년 전에 형제와 친족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묘사한 바로 그런 전쟁을 치러야 했다. 동족끼리의 전쟁은 더 참혹하고 비극적이었다. 그 전쟁이 겨우 중지되고 불안한 휴전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한반도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부처님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어떤 정의로운 전쟁도 불안한 평화보다는 못하다. 죽임을 멈추고 살리는 일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다. 따라서 당연히 대립 당사자를 찾아다니며 중재도 하고, 반전시위도 하고, 끊임없이 평화를 설교했을 것이다.

다행하게도 최근 한반도는 전쟁의 먹구름이 조금씩 가시고 평화정착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 그렇지만 일부 사람들은 구원(舊怨)을 들먹이며 대결을 부추긴다. 이는 옳지 않다.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의 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이간한다면, 그 과오는 천추에 남을 것이다. 마땅히 전쟁 반대와 평화 정착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 그것만이 부처님 제자의 이름에 합당한 행동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번 호 특집의 주제는 평화이다. 한반도에 찾아온 평화를 어떻게 정착시킬 것인가를 다시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2018년 12월
홍사성(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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