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글

촛불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분노한 시민들 1,500만 명이 거리로 나섰고 이들은 폭력 없이 대통령의 탄핵과 파면을 이루어냈다. 대통령이 밀려난 자리에는 ‘촛불대선’의 열기가 뜨거웠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도화선이었을 뿐이다. 거리로 나선 시민들의 마음에는 세월호 참사, 백남기 농민의 국가폭력에 의한 살인,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밀실야합, 국정교과서의 강행, 개성공단 폐쇄, 사드 배치, 문화예술인의 블랙리스트 작성, 노동 배제와 탄압, 실업 증대, 언론통제 등 이 나라를 ‘헬조선’으로 전락시키며 헌정질서를 유린하고 민주주의를 해체한 데 대한 분노가 들끓었다. 그 분노의 저층에는 그동안 바다에서, 공장에서, 거리에서 죽어간 이들과 유가족의 아픔에 대한 공감 내지 동체대비심이 자리하고 있다. 계급 모순과 민족 모순, 분단 모순, 무엇보다도 불평등과 정경유착을 심화한 신자유주의 체제의 모순이 분노와 공감의 토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촛불시민은 1987년이나 광우병 파동 때와 구분되는, 공감하고 연대하는 주체 곧 눈부처 주체의 연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제 수학여행을 가다가 대규모의 학생들이 수장을 당하고 거리에서 농민이 진압으로 살해당하고 일터로 돌아가게 해달라는 노동자가 폭행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죽거나 자살하는 대한민국을 모두가 행복한 나라로 대전환해야 한다. “성찰하지 않는 과거는 미래”란 자세로 무엇이 이 나라를 ‘헬조선’으로 전락시켰는지에 대해 정권, 시스템과 제도,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성찰하고, “미래의 앞당긴 실천은 현재”란 마음으로 ‘내가 살고 싶은 대한민국’을 상상하고 이를 실천에 옮겨야 한다.

그런 바람을 담아 우리는 지난 5월 9일 선거를 통해 새 대통령을 선출하고 새 정부를 세웠다. 그렇다면 새 정부와 국민은 광장에서 촛불시민들이 외쳤던 의제들을 어떻게 수용하여 어떤 비전과 방안으로 건설할 것인가. 그리고 이 과정에서 불교의 역할은 무엇인가.


2. 새로운 대한민국의 패러다임과 비전

지금 대한민국은 ‘헬조선’이란 표현이 그리 과장이 아니다. OECD 국가 가운데 자살률, 산재 사망률, 노인빈곤율은 1위이고 불평등은 최상위권이며, 출산율과 어린이와 청소년의 행복지수는 가장 낮은 데다가 사회복지는 밑바닥이다. 청소년들은 입시지옥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청춘을 낭비하고, 국민 대다수가 경쟁과 탐욕을 서로 증대하고 있다. 모두가 과도하게 노동을 하는데, 절반이 비정규직이라 같은 일을 하고도 절반의 임금만 받으며, 권력-자본-사법부-보수언론-종교 권력층-지식인 및 전문가 집단의 카르텔로 이루어진 지배동맹체가 자본과 권력 대부분을 독점하고 있다. 따라서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벗어나기 힘들며, 이런 구조적 폭력을 개선하기도 어렵고 개인의 자유와 시민의 권리는 심하게 억압당하고 있다. 냉전체제는 대미 종속을 심화하고 민주주의를 유린하며, 냉전수구 세력의 이데올로기와 권력을 강화하는 토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제 근본적으로 양적 발전보다 삶의 질, GDP보다 국민의 행복지수, 경쟁보다 협력, 개발보다 공존,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을 지향하는 대한민국을 추구해야 한다. 무역량보다 이 땅의 강과 숲에 얼마나 다양한 생명이 살고 있는지, GDP보다 거리를 지나는 시민들이 얼마나 미소를 짓고 있는지, 국부를 늘리기보다 가난한 이들에게 얼마나 공평하게 분배되고 있는지, 기업 이윤을 늘리기보다 노동자들이 얼마나 행복하게 자기실현으로 노동하는지, 뛰어난 인재를 길러내기보다 열등한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의 숨은 능력을 드러내는지, 내기하고 겨루기보다 얼마나 마당에 함께 모여 신나게 노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국가를 경영하고 정책을 구사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비정규직과 정리해고가 없이 노동이 중심인 사회, 의료, 교육, 주택의 공공성을 확보한 모두가 평등하고 존엄한 정의로운 생태복지국가, 남북평화협정을 바탕으로 한 한반도 평화체제, 대의민주제에 참여민주제와 숙의민주제를 결합한 민주공화국을 꿈꾸고 이를 헌법으로, 제도로 구체화하여야 한다. 이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고 그에 맞는 상상과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야 한다.

새로운 정치세력은 산업사회의 낡은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혁신해야 한다. 지금 지구촌을 한마디로 규정하면 ‘빈틈’이 사라진 세계이기 때문이다. 강물이 흐르며 스스로 정화할 수 있는 양이 하루 1,000톤이라면 999톤의 폐수를 버린다 하더라도 1톤의 여분 때문에 강물은 흐르며 이온작용, 미생물의 분해, 식물의 흡수로 늘 일급수를 유지하는 예에서 추론하듯, 무위(無爲≒自然)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빈틈[虛]을 만드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탐욕과 확대재생산의 원리는 자연에서든, 국가에서든, 사회에서든, 인간의 마음에서든 그 빈틈을 거의 사라지게 하였다. 그 바람에 지금 세계는 어둠에 가득 차 있으며, 인류 종말의 유령이 어둠 속을 배회하고 있다. 절반에 가까운 생명체들이 멸종 위기에 놓이고, 산업화의 동력이었던 화석연료는 80년 치가 채 남지 않았으며, 최고 갑부 8명이 전 세계 재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필자는 새로운 사회를 위하여 8가지 정도의 패러다임 혁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지면 관계상 한 가지 패러다임, 불일불이(不一不二)만 제시한다. 홍수를 막는 방법은 크게 보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댐을 쌓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물이 흐르는 대로 물길을 터주는 것이다. 서양의 근대는 한마디로 이데아와 그림자, 인간과 자연 등 세계를 둘로 나누고 한쪽에 우월권을 준 폭력적 서열제도다. 이 이분법의 패러다임에서는 댐을 쌓듯 인간 주체가 자연에 도전하여 자연을 개발하고 착취하는 것을 문명이라 하였고, 이것으로 그들은 17세기 이후 전 세계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댐은 당장의 홍수는 막을 수 있지만, 물의 흐름 또한 가로막는다. 물이 흐름을 멈추면 이온작용, 미생물의 활동, 식물의 중금속 흡수 등도 줄어들어 썩기 시작한다. 물이 썩으면, 결국 거기에 깃들어 사는 수많은 생물이 죽는다. 비유지만, 이처럼 이분법에 근거한 폭력적 서열제도가 바로 근대성의 위기(the crisis of modernity)를 야기한 근본 요인이다.

댐을 쌓는 것이 서양의 현대성 패러다임에서 비롯된 대안이라면, 물길을 터서 물을 흐르게 하고 나무를 심는 것은 화쟁의 불일불이(不一不二) 패러다임에서 비롯된 대안이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에서 이를 씨와 열매의 비유로 설명한다. 씨는 스스로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으나 열매와의 ‘차이’를 통하여 의미를 가진다. 씨는 씨이고, 열매는 열매이다. 씨는 씨로서 자질을 가지고 있고 씨로 작용하고, 열매 또한 열매로서 자질이 있고 열매로 작용하니 씨와 열매는 하나가 아니다[不一]. 씨로 말미암아 열매가 열리고, 열매가 맺히면 씨를 낸다. 씨가 씨로서 작용하면 싹이 나고 꽃이 펴서 열매를 맺고, 열매가 열매로 작용하면 씨를 만든다. 국광 씨에서는 국광사과를 맺고 홍옥 씨에서는 홍옥 사과가 나오듯, 씨의 유전자가 열매의 거의 모든 성질을 결정하고 열매는 또 자신의 유전자를 씨에 남긴다. 그러니, 양자가 둘도 아니다[不二]. 씨는 열매 없이 존재하지 못하므로 공(空)하고, 열매 또한 씨 없이 존재하지 못하므로 이 또한 공하다. 그러나 씨가 죽어 싹이 돋고 줄기가 나고 가지가 자라 꽃이 피면 열매를 맺고, 열매는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지만 땅에 떨어져 썩으면 씨를 낸다. 씨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면 씨는 썩어 없어지지만 씨가 자신을 공하다고 하여 자신을 흙에 던지면 그것은 싹과 잎과 열매로 변한다. 세계는 홀로는 존재한다고 할 수 없지만 자신을 공하다고 하여 타자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공(空)이 생멸변화(生滅變化)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화쟁의 패러다임을 견지했던 최치원은 함양의 태수로 부임하자 위천의 홍수를 막기 위하여 둑을 쌓는 대신 숲을 조성하고 숲 사이로 실개천이 흐르게 하였다. 일제 강점 시대에 벌채를 하여 하림(下林)은 사라져버리고 상림(上林)만 남았으나, 지금도 폭 200〜300m, 길이 2km에 걸쳐 200년 된 갈참나무를 비롯한 114종, 2만여 그루의 활엽수목이 원시림과 같은 깊은 숲을 이루고 있다.

서양의 이항대립 철학이 댐을 쌓아 물과 생명을 죽이는 원리를 이룬다면, 화쟁의 불일불이는 그 반대다. 씨와 열매처럼, 물은 자신을 소멸시켜 나무의 양분이 되고, 나무는 흙 속에 구멍을 뚫어 물을 품는 원리다. 최치원은 이런 패러다임으로 상림을 만들어 1천여 년 동안 홍수를 막으면서도 물이 더욱 맑게 흐르게 하였다. 만약 이런 패러다임과 방식으로 산업화나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면, 환경파괴가 없는, ‘지속가능한 발전’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서양, 특히 독일, 호주, 캐나다 등은 댐으로 홍수를 막던 방식이 물도 오염시키고 홍수도 잘 막지 못함을 깨닫고, 댐이나 둑을 해체하고 외려 강의 유역을 넓히고 숲을 조성하며, 그 사이에 실개천과 습지를 만들어 흐름을 분산시키는 것으로 전환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독일의 이자르 강이다. 21년 동안 458억여 원을 들여 8㎞에 걸쳐 둑을 허물고 자연하천으로 복원하자 다시 모래톱과 습지가 생기고 물이 맑아졌고 사람과 동물들이 강을 다시 찾았다.


3. 새로운 대한민국의 조건과 지향점

1) 경제적 조건과 지향점

지금 한국 경제는 거의 공황상태다. 비정규직이 1,100만 명에 이르고, 작년 3분기에 제조업은 −1.0% 성장을 했으며, 적금 해약은 45.2%인 259만 건에 달한다. 실업률은 10%대를 넘어서고, 기업은 투자와 고용을 늘리지 않고, 소비는 위축되고, 성장의 동력이었던 수출은 마이너스이며, 국내총생산은 0%대에 머물고 있다.
양극화는 최고라던 미국조차 추월하였다. 상위 1%가 전체 종합소득의 22.9%, 상위 10%가 55.5%를 가져갔으며, 근로소득은 상위 1%가 전체 소득의 6.41%, 상위 10%가 27.8%를 점유하였다. 일종의 불로소득이라 할 수 있는 자본소득의 격차는 더욱 커서, 〈2012년 배당소득 · 이자소득 100분위 자료〉를 보면, 상위 1%가 배당소득의 72%, 이자소득의 45%, 상위 10%가 배당소득의 93.5%, 이자소득의 90.6%를 차지했다. 게다가 가계부채는 임계점이라는 1,300조를 넘어섰다. 2014년 11월 현재 사실상 실업률은 공식 지표인 3.2%의 3배 이상인 10.1%이며, 실업자는 300만 명에 육박한다. 2015년 1월 30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1월 기업경기실사지수(BSI)’에 따르면 제조업의 업황 BSI는 73으로 전월과 같은 수준을 유지했다. 앞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이 매출액 기준 600대 기업을 대상으로 발표해 조사한 1월 BSI는 94.0으로 10개월 연속 기준선인 100을 밑돌았다. 같은 달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103으로 10월보다 2포인트 하락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국민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최고의 문제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비롯된 모순임을 인지하고 이의 극복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우선 기업 하기 좋은 나라에서 노동하기 좋은 나라로, 재벌이 잘 사는 나라에서 서민 · 노동자가 행복한 나라로 전환해야 한다. 그 첫 작업으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에 관련된 법을 개정하고, 나아가 특수 분야를 제외하고 비정규직과 정리해고를 단계적으로 철폐하는 정책을 구사한다. 비정규직 철폐를 비현실적인 대안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30대 대기업의 경우 매년 기업이 벌어들이는 당기순이익의 단지 1.5%만 투자하면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할 수 있다. 인공지능 시대에 대비하여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일자리 나누기를 하며, 모든 직장인과 노동자에게 저녁과 주말이 있는 삶이 가능하도록 제도적 개선을 한다. 최저임금 1만 원을 보장하고 기본소득제도 점진적으로 확대한다. 대기업의 곳간에 쌓아둔 700조 원을 임금인상과 일자리 창출로 풀어 소비를 진작하고 경제를 활성화한다. 스페인의 몬드라곤식으로 노동이 자본을 견제하거나 경영의 주체가 되는 기업 및 공장을 점진적으로 확대한다. 노동자들이 총회에서 자신들 가운데 이사를 선출하고, 이들이 노동자들과 유기적으로 소통하고 협력하는 가운데 일정 기간 경영과 중요한 결정을 한다.

지금껏 자본과 국가는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에 따라 경제성장을 시켜 파이를 키우면 그 혜택이 빈자에게도 돌아간다고 설득하였다. 하지만, 낙수효과는 허구에 불과하며 분수효과(fountain effect)가 타당함이 드러났다. 실질적인 공황, 장기불황의 근본적인 원인은 불평등이다. 중산층이 붕괴하고 서민은 물론 중산층까지 소비를 꺼리면서 시장이 얼어붙고, 이는 경기를 감축시키고 그 여파는 다시 기업의 생산 감소와 노동자 해고로 이어진 것이다. 성장과 복지는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보완적이다. 이는 미국 부시 정권의 사례로 증명이 되었으며, 이제 세계 경제학자들은 ‘부유층의 세금 및 저소득층에 복지 및 지원 증가→소비증가→생산증가→경기부양’을 가져오는 분수효과가 더 현실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공공성의 원칙에 입각한 보편적 복지를 추구해야 한다. 현대 국가의 정당성은 적극적이고 보편적인 복지를 수행하는 데 있으며, 보편적 복지는 신자유주의 모순을 극복하는 길인 동시에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경제를 활성화하는 길이다. 의료, 교육, 주택, 금융의 공공화 및 단계적 무상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분배의 정의를 수립하여야 한다. 증세 없는 복지는 수사이거나 거짓이다. 복지를 달성하려면 조세정의를 먼저 확립해야 한다. 복지의 재원은 부자감세 환원 20조 원, 사회복지목적특별세 20조 원, 상속세의 정상화(4조 원에서 30조 원으로), 모든 불로소득(자산/토지/주식)의 세수를 통한 사회적 환수 약 100조 원, 부패방지를 통한 공적 자금 확보로 50조~100조 원을 마련하고, 소득세의 최고세율을 군사독재정권 때처럼 70∼90%로 환원하면 된다. 사회복지목적특별세는 누진적 직접세인 소득세 · 법인세 · 상속증여세 · 종합부동산세 4개 세목에 20%를 추가하는 부가세 형태로 연간 20조 원의 재원을 확보한다. 법인세는 단계적으로 30%대로 올려야 하지만(미국 39%, 일본 37%), 법인세 증가에 따른 국내투자 기피, 세수 가운데 법인세가 차지하는 비율의 증대 등 역기능을 보완해야 한다.

현재 자영업 위기는 근본적으로 노동의 유연성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위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철폐를 하면 절반 이상이 정상화할 것이다. 자영업법을 만들어, 프랜차이즈 및 연쇄점에서 모든 ‘갑질’을 근절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다. 재벌의 자영업 업종 영업금지, 동종 업종의 근거리 영업 제한과 함께 창조적 자영업을 선정하여 국가 차원의 지원 체계를 수립한다. 재벌의 폐해를 극복하는 정책을 구현하고 제도화하며, 재벌에 대한 사회적,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고 금융과 산업, 언론을 재벌에서 완전히 분리시킨다.

한국은 천연자원이 부족하지만 고학력의 인적자원이 풍부한 여건, 성실함, 조급함 등이 디지털 산업을 선도할 수 있는 필요조건을 형성한다. 4대강처럼 시대착오적인 토건 사업에 낭비할 예산을 ‘미래혁신산업투자기금’(가칭) 식으로 적립하여 제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면서도 우리의 여건과 특성에 맞는 분야에 투자한다. 대한민국을 정보공학, 생명공학, 나노공학, 환경공학, 문화산업, 로봇공학, 인공지능 등 첨단기술(high-technology) 중심의 산업국가로 재편하며, 사회적 기업 및 협동조합형 기업을 육성하고 지원한다. 근본적으로 GDP보다 국민의 행복지수, 공유가치를 바탕으로 공평하게 분배되고 공정하게 권력이 행사되고, 경쟁보다 협력과 연대를 추구하는 정의로운 사회를 지향한다.

2) 정치적 조건과 지향점

그동안 대통령과 한 개인이 마음대로 국정을 농단하고 관료가 국민을 ‘개, 돼지’ 취급할 정도로 이 땅의 권력은 소수에 집중되고 정치는 모순의 극단에 있었으며 민주주의는 이름뿐이었다.

이제 기득권층이나 엘리트만이 아니라 모두가 주인인 세상으로 전환해야 한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국민이 주인이 되는 급진적 민주주의를 추구하되,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민주화, 제도적 정치와 노동, 대의민주제와 참여민주제, 숙의민주제를 종합한다. 서민과 노동자의 절규와 시위, 자살이 끊이지 않은 근본 이유는 그들의 목소리를 정치적으로 수렴하는 통로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대의민주제는 ‘구조적 불의’의 시스템일 뿐이다. 경제자본이 우선이고, 여기에 상징자본, 사회자본, 문화자본이 많은 이들이 대표로 선출되어 자신을 비롯한 권력층과 자본의 이해관계에 충실한 정책이나 법을 제도화하고 있다. 노동자가 2,000만 명에 달하고, 국민 가운데 보수 : 중도 : 진보의 비율이 대략 4 : 3 : 3의 비율인데, 실제 정당 지지율과 국회의원 가운데 진보정당이 차지하는 비율은 2~3% 내외에 머물고 있다. 현실과 정치적 재현 사이에 심한 괴리가 존재하기에, 노동자와 서민의 의사는 정치로 수렴되지 않는다. 대안은 정당정치와 계급적 조건을 종합하는 것이다. 선거제를 독일식 정당 명부 비례대표제로 개선하고 국회를 양원제로 바꾸어 상원은 지금처럼 정당에 기반한 지역대표제로 하되, 하원은 직능대표제로 한다. 예를 들어, 하원의 의원 정원이 1,000명이고 선거인 중 노동자가 60%라면 노동자 대표가 600명이 되도록 구성하는 것이다. 랑시에르가 말한 ‘몫 없는 자의 몫을 위한 민주제’를 달성하려면, 하원의원은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선거인단을 대상으로 직능별로 안배한 후에 무작위 추첨으로 정한다.

교육감처럼 중앙과 지역의 검찰 수장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고, 검찰의 기소독점을 제한하여 시민이 기소할 수 있도록 미국의 대배심제나 일본의 검사심사회의 장점을 잘 살린 시민검찰제를 시행하며, 피해자가 원고인 검사를 대신해 소송을 제기하는 ‘사인소추제’, 피해자나 변호사가 검사와 함께 공동으로 당사자의 지위에서 소송에 참여하는 ‘부대공소제’를 도입한다. 무엇보다도 공직비리수사처를 국회의 직속으로 두는 것을 제도화한다. 아울러, 국정원을 해외정보처로 바꾸고 감사원, 국세청 등 국가권력기관 또한 시민위원회의 통제를 받도록 법을 개정하고 제도화한다.

근본적으로 응보적 정의에서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로 전환한다. 범죄는 한 개인의 일이 아니라 전체 공동체의 아픔이고 문제다. 구성원 가운데 죄를 범한 사람에게 공정하고 타당한 벌을 주거나 격리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범죄 행위로 인하여 피해를 당하거나 인간관계가 훼손된 모든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고 공동체 전체의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3) 사회문화적 조건과 지향점

세월호 참사의 일차적 원인은 구조변경, 과적, 변침 실수 등이지만, 근본적 원인에는 개발독재, 천민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체제의 모순과 부패의 카르텔 등이 내재하기에, 이는 언제 어디서든 또 발생할 수 있는 현재성을 갖는다. 이윤과 효율을 앞세워 생명과 인권을 경시하는 신자유주의 모순에 따른 안전사고로 사람이 무더기로 죽는 일은 지금도 매일 벌어지고 있다. 하루 평균 5명, 1년에 세월호에서 사망한 승객의 6배가 넘는 노동자들이 안전사고로 산업현장에서 목숨을 잃고 있다.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산업재해 현황분석〉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에서 산업재해로 숨진 노동자는 1,929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산업재해 사망률 1위이다. 지난해(2013년)부터 이달(5월) 11일까지 국내에서 발생한 대기업 안전사고 사상자를 분석한 결과, 사망자는 모두 협력사 직원으로 조사됐다. 부상자도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협력사 직원으로 분석됐다. 저가입찰을 한 후 효율성과 비용절감을 목적으로 공기 단축을 압박한 데서 사고가 빚어졌기에 협력사 노동자만이 죽음의 길로 간 것이다.

이제 효율과 이윤, 결과, 속도를 앞세워 인간과 생명, 과정, 안전을 희생한 것을 절절하게 성찰하고 후자를 중시하는 가치관과 삶, 노동으로 대전환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신자유주의를 해체하여야 한다. 일상까지 지배한 시장과 돈의 논리를 제거하고, 시민의 안전에서부터 주거와 의료, 교육에 이르기까지 공공성을 확보하고, 공동의 복지와 평화, 행복을 구현해야 한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신자유주의의 희생자들인 비정규직 노동자, 정리해고자를 중심으로 한 노동자와 민중, 시민이 연대한다.
아울러, 소극적 자유에 적극적 자유와 대자적 자유(對自的 自由)를 종합한다. 우리 인간은 주체로서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소극적 자유(freedom from)를 추구함은 물론, 노동을 통하여 생산하는 주체로 거듭나면서 진정한 자기실현(self-realization)을 하거나, 부조리한 세계에 저항하여 이를 자신의 목적에 맞게 개조하는 행위를 통해 자기를 실현하거나 또는 고도의 수행을 통하여 자기완성의 열락에 이르는 적극적 자유(freedom to) 또한 구현한다. 더 나아가 인간은 타자와 자신의 상호 의존성을 깨닫고 이기적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고,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며 타자를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는 실천을 하면서 진정한 자기를 완성한다. 자기소외와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고 자기의 혁명과 사회 혁명을 종합한다. 이 순간에 느끼는 자신에 대한 충족감에서 오는 희열이 바로 대자적 자유(freedom for)이다. 대자적 자유를 추구하는 순간 자유는 정의 및 평등과 일치한다. 이렇게 세 가지 자유를 모두 추구하는 자가 바로 눈부처-주체다. 이 세 가지 자유를 종합한 가치관에 부합하도록 제도와 법을 개정한다.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에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지속가능한 발전’으로, 토건 국가에서 생태복지 국가로 전환해야 한다. 절반에 가까운 생명체들이 멸종 위기에 놓일 정도로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는 극심하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온 생명은 멸종의 위기에 있다. 국제자연보존연맹(The International Union for Con-servation of Nature)은 전 세계 과학자 1,700명이 참가하여 조사한 끝에 4만4,838종의 대상 동식물 가운데 38%인 1만6,928종이 멸종위기에 놓였다고 발표하였다. 이 가운데 3,246종은 심각한 멸종위기 상태에, 4,770종은 위험상태, 8,912종은 멸종에 취약한 상태에 있다.

우선 경제 또한 생태경제학으로 전환한다. 경제 실적과 사회진보의 계측을 위한 위원회는 GDP 이외에 삶의 질을 측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은 주관적인 행복 개념, 적절하게 영양을 섭취할 수 있는 능력과 조기 사망을 피할 수 있는 능력 등 생활여건에 개인이 선호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역량, 공정한 배분 등의 세 가지의 개념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나라나 지역의 경제도 GDP나 무역량 등 양 중심의 경제적인 가치만이 아니라 자연의 내재적 가치, 지속가능한 개발의 가능성 등 삶의 질 중심의 생태적 가치, 인간의 행복지수도 경제적 가치에 포함하는 경제로 전환을 한다.

예를 들어, 개펄의 모든 생태계가 순환하고 유지되는 범위에서 하는 지속가능한 개발과 노동, 곧 제한적인 어패류의 채취와 가공, 양식업, 개펄 관광 등은 양자의 공존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처럼, 생태경제학이란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유지하는 범위 안에서 생태적 합리성에 따라 생태노동을 하여 생산한 가치를 개인의 생존과 타인의 구제, 자연의 순환과 재생에 활용하는 데 초점을 맞춘 지속가능한 경제학이다. 아울러, 식량주권을 확보하고 탈핵사회를 구축하여, 노후원전을 폐기하고 재생에너지 체계로 전환하고 지역 단위의 에너지 공동체를 수립해야 한다.

65세 이상 고령 인구는 2010년에 545만 명에서 2030년에는 2.3배인 1,269만 명으로 증가, 65세 이상 고령 인구는 2010년에 545만 명에서 2030년에는 2.3배인 1,269만 명으로 증가할 것이다. 이에 어떤 고령화사회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성찰과 대안이 지금 필요하다. 저출산 고령사회가 성장동력을 현저히 잠식한다는 점에 기반한 경제 및 생산 정책을 추구해야 하며, 노인부양과 부의 분배, 노인복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하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노인들이 진정한 자기실현으로서 노동과 자존감 유지, 건강을 병행할 수 있는 일자리 창출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민족모순 및 분단모순도 함께 극복되어야 한다. 이제 남북한 사이에 평화협정을 맺고 한반도 평화체제를 수립하고 통일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모두가 상생하는 길이다. 여러 상황을 고려할 때, 북한핵 문제는 핵과 6자회담을 통한 평화협정을 맞바꾸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다. 평화협정이 정전협정을 대체하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법적 장치라면, 평화체제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구조적 장치이다. 통일은 미국이나 남북한의 지배층이 아닌 남북한 민중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 남북한 민중의 자유를 증대하고 정의와 평등을 강화하는 방향에서 양자의 공동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것을 최소 조건으로 하여 한반도의 미래, 곧 동아시아 평화체제를 바탕으로 한 정의평화 생태복지 국가를 지향하는 것이어야 한다. 남북한의 통일은 자주, 평화, 정의와 복지, 인권과 생명 중시, 민주주의의 대원칙 아래 ① 남북의 통일을 위한 최소 합의, ② 평화협정 체결, ③  남한과 북한 사이에 완전히 자유로운 교류와 협력, 통행, 소통 ④ 남한에 공산당과 공산주의 마을, 북한에 자본주의 정당과 자본주의 마을을 허용하면서 양 체제를 대대적(待對的)으로 화쟁시키는 화쟁코리아 ⑤ 남북의 국가연합 ⑥ 낮은 단계의 연방제 ⑦ 완전한 통일국가 등 7단계에 걸쳐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서로를 악마화하는 경쟁과 탐욕의 교육에서 공감하고 협력/연대하는 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 수조 원을 들여서 외려 창의력과 인성을 마비시키고, 교실을 경쟁과 폭력과 자살충동의 장으로 바꾸는 한국 교육은 이제 종언을 고하여야 한다. 하지만, 입시제도 철폐와 대학서열화 해체 없이는 어떤 대안도 미봉책이다. 이런 취지에서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와 전국교수노동조합을 비롯한 교육단체를 중심으로 담론화한 대안은 대학네트워크 체제와 국립교양대학의 설립이다. 그렇다면 작금의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를 달성할 것인가. 필자는 ‘특성화’와 ‘재정지원’을 매개로 단계적으로 대학 서열을 해체하면 이것이 ‘불가능한 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1970년대만 해도 부산대나 경북대의 입학점수가 연 · 고대보다 높았다. 한양대 공대, 홍익대 미대, 건국대 축산학과 학생들은 일류임을 자부하였다. 세계 100대 대학의 서열은 재정의 크기와 완전히 비례한다.

서울대를 제외한 9개 거점 국립대학을 교수진과 시설, 전통과 역사를 고려하되, 지방산업과 문화와 연계해 특성화하고, 그 분야에 한하여 매년 1,000억 원에서 3,000억 원 정도의 재정지원을 한다. 예를 들어 대구의 섬유산업단지와 연계하여 경북대 섬유산업 관련 학과를 5년 동안 지원하여 연구와 교육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졸업생도 섬유산업계에 진출한다. 그러면 이 대학의 관련 학과는 일정 정도 수준에 이를 것이다. 6년 차에 9개 거점 국립대학과 주변의 국립대학을 네트워크화하여 특성화에 따른 재정지원을 계속하며, 사립대학에도 이를 개방한다. 사립대학은 대학네트워크에 들어오는 지원 사립대학과 독립 사립대학으로 이원화한다. 대학네트워크에 들어오는 사립대학은 반의반값 등록금이 가능하도록 지원한다. 대학네트워크는 2년 과정의 국립교양대학을 운영한다. 대학네트워크에서는 자격고사만 치른 후 공동선발을 한다. 대학네트워크에 들어오는 학생에 대해서는 입시가 폐지되는 것이다. 학생 배정은 서울을 공동학군으로 하고 나머지는 거점대학을 중심으로 지역으로 묶어 추첨한다.

대학네트워크 초기에는 서울대와 명문 사립대가 비(非)대학네트워크 대학으로 남을 것이다. 고교평준화 초기에 추첨으로 학교를 배정하고 이를 거부하는 학생은 비평준화 학교에 시험을 치고 진학했던 것처럼, 명문대를 선호하는 학생들은 입시시험을 보고 이들 대학에 지원하면 된다. 하지만, 재정지원과 특성화에 따라 대학네트워크의 수준과 명문대 사이의 차이, 취업률이 급격히 좁혀질 것이기에 이는 과도기 현상으로 그칠 것이고, 결국에는 서울대와 명문 사립대도 대학네트워크로 들어올 것이다. 이 경우 입시는 완전히 폐지된다. 10조 원의 재정이 소요되는데 별도로 거둘 필요가 없다. 부자감세 20조 원을 MB정권 이전으로 되돌리면 충분히 쓰고도 남는다.

4) 시민사회의 지향점

각자 입장에 따라 서로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지만, 촛불에는 다양한 시민들이 모였다. 신문을 보고 달려온 아날로그 세대와 SNS로 실시간 소통하는 디지털 세대, 청장년만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노인, 평범한 시민과 학생, 노동자와 농민은 물론 빈민과 백수,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자에서 반기문이나 유승민을 지지하는 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들이 촛불을 들었다.

촛불의 최고의 의의는 헌법 제1조에 대한 구체적 각성을 하여 정권에 맞서서 항의하고 대통령도 끌어낼 수 있다는 인식을 한 주권자로서 시민이 등장하였다는 점이다. 이들은 직접 및 참여 민주주의에 대한 욕구가 강하지만, 시민사회나 집단적 조직화를 하지 못한 불안정성을 띠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제 이들은 가까이로는 재벌개혁, 검찰개혁, 언론개혁, 정치개혁 등 사회개혁을 하고 멀리는 곳곳에서 광장과 공공영역을 만들고 시민사회를 조직하고 정의롭고 평등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해야 한다.

민주제는 정치, 경제, 사회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독점을 깨는 것이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지역과 마을, 학교, 일터에 공공영역(Öffentilichkeit)을 확보하고 이를 증대하는 것이다. 이는 하버마스식의 공공영역에 동양적 공공성(公共性)을 종합한 것이다. 서양에서 교회 권력에 맞서서 시민사회(civilis societas)가 등장하고 이후 이를 기반으로 18세기에 ‘계몽의 기획’이 진행되면서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에 공공영역이 형성되었다. 비교적 자유로운 개인 가운데 의사소통적 이성을 갖춘 공중(public)들이 집단을 이루고, 이들이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문제들을 공동의 장으로 끌고 와서 공공의 쟁점으로 바꾸어 토론하고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하며 공공성을 확보하였다. 반면에, 동아시아는 전통의 공동체가 국가로 통합되고 유교에 바탕을 둔 관료체제가 작동되면서 사익(私益)을 억제하고 공익(公益)을 추구하자는 대의가 정치영역만이 아니라 생활세계까지 지배하면서 일찍부터 서양과 다른 공공성을 추구하였으나, 자유로운 개인의 합리적인 성찰과 민주적 토론은 부족하였다. 두레마을처럼, 자유롭고 합리적인 개인을 주체로 하여 지역 공동체를 결성하고 여기서 공정(公正), 공평(公平), 공공(公共)으로서 공공영역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곳에 거버넌스 시스템을 만들고 시민주권을 바탕으로 시민위원회를 구성한다. 마을, 기업, 학교, 기업과 공장의 중요한 정책과 사업은 이 위원회에서 협치를 통하여 합리적이고 공정한 토론을 통하여 결정한다.


4.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을 위한 불교의 역할

이 국면에서 불교는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보다 제2장에서 한 예만 들었지만, 불교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한다. 21세기는 근대성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며, 불교는 실체론이 아니라 관계론, 인간 중심주의가 아니라 생명 중심주의, 소유가 아니라 무소유를 지향하기에 서양의 근대적 세계관과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많이 함유하고 있다. 불교는 어떤 종교나 신앙보다 강력한 생명사상과 연기관을 가지고 있다. 서양과 달리 불교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연기를 말하며, 근대를 지배한 뉴턴의 기계론적 물질관과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과 달리 온 생명들과 불이(不二)의 공존을 하는 생태론과 미생물마저 죽이지 않는 불살생의 생명론을 펼친다. 불교는 성장신화를 해체하고 느리고 여유로운 삶, 타인을 위하여 나의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는 삶, 소욕지족(少欲知足)의 삶을 제시한다.

불교는 권력을 위한 파괴적인 투쟁을 단념한 사회, 평안과 평화가 정복과 패배를 극복한 사회, 무고한 자에 대한 박해가 맹렬하게 비난받는 사회, 홀로 자기 정복을 한 자가 군사적 · 경제적 힘으로 수백만  명을 정복한 사람보다 더욱 존경받는 사회, 친절이 증오를, 선이 악을 정복하는 사회, 원한, 질투, 악의와 탐욕이 사람의 마음을 물들이지 않는 사회, 자비가 행동의 추진력이 되는 사회, 가장 작은 생명을 포함해서 모든 생명을 공정과 배려와 사랑으로 대하는 사회, 물질적으로 만족한 세계에 있으면서도 평화와 조화로운 삶이 가장 높고 고결한 목표인 궁극적인 진리, 니르바나의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사회를 창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불교는 일체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불성의 잠재성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중생은 모두가 존엄하고 평등하다. 붓다는 “나의 제자는 종성(種姓)이 같지 않고 출신도 각각 다르지만 나의 가르침에 의지해서 출가하여 도를 닦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대에게 종성을 묻는다면 그 사람에게 ‘나는 사문 석가모니의 종성의 아들이다’라고 말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의 출신과 신분이 어떻든 중생은 모두 석가모니의 아들로 평등하다. 주지하듯, 디가 니까야를 보면, 붓다가 밧지족이 자주 회의를 열어 민주적으로 의견을 수렴하는 것 등 7가지 사항을 들어 마가다 왕이 이 나라를 범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것을 승가에 적용한 것이 칠불퇴법(七不退法)이다. 거기에 더해 원래 공화주의, 혹은 공화국의 정치 형태인 부족국가를 뜻하는 승가(僧伽)는 모든 안건을 대중의 동의를 통하여 처리하는 민주주의 전통인 갈마(kamma)를 행하고 있다. 이와 같은 민주적 가치관과 제도를 서양의 민주제와 결합하여 21세기에 맞게 변형하여 지역, 학교, 일터, 나라로 확산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불교는 대안의 공동체를 제시한다. 불교의 교리는 무소유를 지향하고, 나눔을 장려하고, 탐욕을 지멸하라 하고, 이타적 삶을 추구하기에 교리상 반자본주의적이다. 그럼에도 자본주의 자체를 비판하는 데 한계도 지닌다. 고대 사회를 현대에 적용할 때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며, 작은 집단인 승가의 공동체 논리를 국가나 체제로 확장하는 것 또한 많은 오류와 비약을 범한다. 이를 감안하여 필자가 두레공동체와 다산의 여전제(閭田制), 마르크스, 불교를 종합한 대안은 눈부처생태공동체다.

마을을 단위로 하여 두레와 같은 마을 공동체를 건설하며, 마을은 주민이 누구나 동등한 권력을 갖고 참여하는 주민자치제로 운영하며 지역의 특성에 맞게 풍력, 수력, 지열 등을 이용하여 상당량의 에너지를 자립하는 생태공동체로 유지한다. 개인 또한 눈부처-주체가 된다. 눈부처 주체는 근대의 주체가 타자를 배제하여 동일성을 강화하기 때문에 타자에 대한 배제, 폭력과 학살을 야기한 것을 성찰하여 차이의 공존을 추구한다. 눈부처 주체는 소극적 자유, 적극적 자유, 대자적 자유를 종합한다. 눈부처 주체들이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으로서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분배하며, 필요한 것은 호혜적으로 보답하는 방식으로 교환한다. 개인의 자유와 행복이 타인의 자유와 행복을 위한 조건이 되고, 개인의 권리와 존엄이 동등하게 인정되고 작용하면서, 모든 이들의 합의에 의하여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상호성의 정의와 평등을 구현한다. 교육은 공감협력 교육을 실시하며, 이타와 이기, 경쟁과 공존을 종합한 화쟁의 사회경제적 체제를 수립하고 마을화폐를 활용하며 행정과 입법을 모두가 평등한 권력을 갖는 자치위원회에서 합의하여 행하고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를 구현한다.

이를 위해 한국불교는 교리상 몇 가지 성찰과 재해석이 필요하다. 불교는 상구보리(上求菩提)와 하화중생(下化衆生), 지혜와 자비를 쌍으로 한다. 개인이 깨달아야 세상을 바꿀 수 있지만, 세상이 바뀌어야 깨달음도 유지된다. 설령 내가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 하더라도 고통받는 중생이 있는 한 나는 아직 부처가 아니다. 여실지견(如實知見)의 눈으로 현실을 직시하여 그 모순을 인식하고 그 모순에서 희생당하고 고통받는 중생들의 아픔을 내 것처럼 공감하고 동체대비심으로 연대하는 것이 부처님처럼 사는 길이다. “불교의 수행은 깨달은 내용을 실천하기 위한 수행이고, 부처로서 살기 위한 수행이고, 열반을 완성하기 위한 수행이어야 하”며, 그 열반은 나만의 열반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국불교는 깨달음 지상주의에서 떠나 중생구제의 큰길로 나아가야 한다.

《대방편경》을 보면, 선장이 499명의 선원을 살리기 위하여 499명을 죽이려던 한 명의 선원을 죽인 이야기를 싣고 있다. 여기서 세 차례나 설득을 시도했는데도 실패하자 499명을 살해하려던 선원을 죽인 선장이 바로 전생의 부처다. ‘정의로운 분노’는 이를 행사하는 개인이나 집단의 이데올로기의 소산일 수 있어 경우와 맥락에 따라 다르지만, ‘자비로운 분노’는 불교적으로 정당하다.

요한 갈퉁에 따르면, 구조적 폭력을 없애는 것이 적극적 평화를 달성하는 길이다. 구조적 폭력(structural violence)이란 “(인간이) 지금 처해 있는 상태와 지금과 다른 상태로 될 수 있는 것, 잠재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 사이의 차이를 형성하는 요인”이다. 구조적 폭력이나 술락 시바락사가 말하는 사회적 고(苦)는 분노 없이 제거할 수 없다. 분노는 삼독의 하나로 지멸의 대상이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세친 보살이 잘 간파하였듯, “지혜로 말미암아 열반을 버리지 않고, 자비로 말미암아 생사를 버리지 않는다.”

지혜가 있기에 삼독과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려 하지만, 곁에 고통받는 중생이 있다면 그에 대한 자비로 인하여 설혹 부처가 되었다 하더라도 이를 미루고 중생구제에 나선다. 중생을 구제할 때까지는 방편으로서 삼독(三毒)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니, 이 딜레마를 해결하는 길은 그들의 고통을 억압하는 제도와 세력에 대해서만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 대한 자비심에서 비롯된 분노를 허용하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공업(共業) 개념까지 결합하자. 그러면, 개인의 업만이 아니라 자신이 소속된 집단이 범한 공업을 소멸시키기 위하여,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 공감하여 구조적 폭력, 사회적 고를 없애는 실천에 나서서 중생을 구제하여 너와 나, 모두의 열반을 도모하는 것이 진정한 불자의 길이다. 그럴 때 우리는 이 땅에 정토를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약자의 고통을 내 아픔처럼 공감하고 그를 억압하는 구조적 폭력과 고를 없애고자 연대하는 그 자리에 부처님이 계신다. ■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양대, 동 대학원 졸업. 한양대 한국학연구소 소장, 의상 · 만해 연구원 연학실장, 《문학과 경계》 주간, 정의평화불교연대 상임대표 등 역임. 주요 저서로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인류의 위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 등 다수가 있다. 원효학술상 특별상, 유심작품상 학술상 수상. 현재 본지 편집위원장.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