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시인이 쓴 〈몸을 철학해보니〉라는 시를 읽은 적이 있다. “몸이 전부다// 몸이 있어 숨 쉬고 몸이 있어 일하고 몸이 있어 사랑하는 거다 그래서 몸에 충성하는 거다 몸을 우습게 보지 마라 몸한테 잘 보이려고 옷 입고 몸 배고프지 말라고 밥 먹고 몸 쉬게 하려고 집 짓는 거다// 그래서 악착같이 돈 벌려고 하는 거다 몸이 있으니 살아 있는 거
우리는 타자의 시선 속에서 살아간다. 그 타자가 누구인지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고 한 사람에게서도 시기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타자를 완전히 의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가끔 자신이 바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고 내세우는 경우를 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오히려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시선을 더 의식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타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참선 수행’이란 용어가 익숙하겠지만, 이를 현실에서 활용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명상 치료’라는 용어가 더 친숙하게 쓰이고 있다. 참선 혹은 명상이 종교적으로 수행(修行)하는 방법이라기보다는 어떤 병리적 문제를 치료하는 방법으로 소개되는 경우들이 늘어난 것이다. 이미 1995년도에 미국의
어떤 구루(Guru)가 저녁예배를 올리기 위해 자세를 가다듬고 앉아 있었다. 그때 아슈람에서 키우던 고양이가 들어와 마음을 산란케 했다. 구루는 제자들에게 예배 시간에는 고양이를 묶어두라고 지시했고, 그때부터 예배 시간이 되면 고양이를 묶어 두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른 뒤 구루가 타계했지만 고양이는 여전히 묶여 있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양이가 죽자
한국불교 전통의 특이한 경향 가운데 하나는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계율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다는 것이다. 계율은 처음 불교에 입문한 초보적인 사람, 또는 고지식하고 완고한 사람이나 지키는 것으로 여긴다. 아니면 그저 타율적이나 형식적으로 일정한 때에만 지키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계는 하근기의 사람이나 지키는 것으로 폄하되어 도가 높
최근 교과부가 받아들인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위원회(이하 교진추)의 청원에 대하여 고등학교 과학 교과서를 출판하는 인정교과서 업체 대부분에서 ‘시조새는 파충류와 조류의 중간이다.’라는 기술과, ‘말(馬)의 진화’ 부분을 삭제하거나 수정하기로 했다는 소식은 일반인들을 놀라게 했다. 이 일은 저명한 국제적 과학학회지인 《
1. 십악(十惡)으로 얼룩진 한국 사회저 인도의 부처님은 흔히 지혜와 자비의 화신으로 불린다. 그가 최초로 보인 자비행은 교화의 행위이다. 정각 직후에 깊디깊은 불법을 중생에게 가르친다는 것이 피곤한 일일 것으로 예상하여 주저했지만 결국 교화하기로 한 것, 이는 분명 자비행이다. 하지만 자비는 우주에 줄곧 존재해 왔는지도 모른다. 우주의 오묘한 법이 고통과
불교는 개혁의 종교다. 인간을 개혁하여 부처를 만들고, 역사를 개혁하여 진리를 증언하고, 세상을 개혁하여 정토를 이루는 것이 목표다. 부처님이 출현한 것은 이러한 개혁을 모범적으로 보여주고자 함이었다. 부처님이 가르친 팔만사천 법문은 개혁의 이론과 방편을 시설한 것이다. 불교교단이 존재하는 것은 부처님에 의해 추진된 개혁의 사명을 역사사회 안에서 완성하기
요즘 한국불교가 추진하고 있는 과제 중 하나는 한국불교의 세계화다. 몇 년 전부터 조계종에서 추진하는 사업에는 ‘한국불교의 세계화’라는 이슈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최근 한국불교문화를 홍보하기 위해 프랑스를 방문한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이 “한국불교 세계화를 위한 ‘씨’를 뿌리겠다.”고
이번 불교평론 특집은 한국인에게 불교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주제로 다루었다. 과연 현대 한국인에게 불교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면서, 전통적으로 불교는 한국인에게 무엇이었는가를 회고적인 관점에서 조망하는 기획이었다. 현재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해서 과거에 대한 질문으로 확대해 보자는 것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교는 종교이지만, 또한 철
1. 들어가면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위치 세계사적 관점에서 보면 불교는 바야흐로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지난 천 년이 기독교가 꽃을 피운 시기였다면 지금은 불교의 시대가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구의 불교 붐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최근 100년간 지속적으로 그리고 질적 양적으로 불교는 서구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있
인류는 원래 생존을 위하여 자연을 ‘경작’하며 문명을 일구어 왔지만 현대문명은 그 ‘생존’에 만족하지 않고 욕망의 무한 증식을 꾀하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거의 정점에 달한 인간의 문명은 인간을 엄청난 ‘위험’ 속으로 내몰고 있다. ‘대량생산−대량소비’ 경
1. 불교는 일단정지(一旦停止)를 먼저 가르친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대중이 모여 사는 세속 사회 한국-이곳이 바로 우리가 ‘불교와 사회’라는 주제에 대해 글을 쓰는 장소이다. 이 글쓰기는 출세간적 성향이 강한 불교를 세간과 연결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시민이라는 대중은 중생일 것이니 ‘시민 중생&rs
2010년이 저물어가는 즈음 교계와 학계에서 올해 가장 기억될 만한 사건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기억(記憶)이라는 말은 한역 불전에 이미 나타나는 말로 더 보편적으로는 염(念 smṛti)이라고 하여 기억하는 자, 기억된 것 등 다양한 맥락 속에서 쓰인다. 불교에서 기억은 과거의 경험을 현전해 내는 것을 말하거니와, 과거의 정보와 경험을 재현
한 스님이 몸을 불살랐다. 남 보란 듯한 시위가 아니었다. 재가 될 때까지 홀로 있었다. 혼자 앉아 성도하신 부처님처럼, 자문자답(自問自答)의 시현이었다. 뭇 생명들의 삶터가 무너지고 있는 낙동강. 그 지류인 위천의 둑방 위였다. 반듯하게 접어 놓은 승복과 주머니 속 수첩에 유언이 적혀 있었다. “4대강 사업을 즉각 중지, 폐기하라. 부정부패를
이 땅의 진정한 스승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던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에 이어, 법정 스님이 입적하였다. 그래서 “영웅들이 사라진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막강한 세속 권력을 누렸던 이들에게만 영웅이라는 칭호를 붙이는 것으로 알고 있는 이들에게야 이 말이 낯설게 느껴지겠지만, 법정 스님과 김수환 추기경은 한 시대를 바른 길로 이끌어
수년 전부터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달러 수준에서 자맥질한다. 1960년과 비교할 때 무려 20배로 늘어났다고 한다. 국민총소득 역시 세계 10위권 진입을 앞두고 있다. 그 원동력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궤변과 이설이 분분하지만 어쨌든 참으로 놀라운 발전이다. 그런데 더욱 괄목할 통계 수치가 두 가지 더 있다. OECD 국가 가운데 우리나라의
불교평론이 어느덧 창간 10주년을 맞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것이 괜한 말이 아니다. 우공이산(愚公移山)! 어떤 일이든 구성원 모두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온 정성을 다해 끊임없이 10년을 행하면 양의 변화가 질의 변화로 전이하고, 구조의 배열이 바뀌는 법이다. 교계에 진지하고 활발한 토론의 장을 마련하고 불교를 대중화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한 면이
혹자는 말한다. 유구한 역사에 비추어보았을 때 한국불교는 미래의 대안일 수밖에 없다. 또 혹자는 말한다. 서구사회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는 한국사회의 특성상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서구불교의 성장 여파가 한국불교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위기사회의 대안은 불교일 수밖에 없다, 등등. 한국불교계에는 이 같은 낙관론 혹은 희망론이 다양한 방식으로
올 시월로 예정되어 있는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여러 가지 공식적인 논의들과 함께 비공식적인 언급들이 난무하고 있다. 우리 불교계와 사회에서 총무원장 스님이 차지하는 위상과 비중을 감안한다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중에는 우리 모두를 위해 자제했으면 싶은 극단적인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어서 듣고 있자면 마음이 어두워질 때가 있다. 도대체 무엇이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