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호
본지 편집위원
한국불교 전통의 특이한 경향 가운데 하나는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계율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다는 것이다. 계율은 처음 불교에 입문한 초보적인 사람, 또는 고지식하고 완고한 사람이나 지키는 것으로 여긴다.

아니면 그저 타율적이나 형식적으로 일정한 때에만 지키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계는 하근기의 사람이나 지키는 것으로 폄하되어 도가 높거나 한소식을 이룬 사람은 아예 계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파계하는 것이 마치 일종의 활달자재한 경지를 보여주는 것처럼 치켜세우고 상찬하는 극단적인 경우까지 있다. 그래서 깨달은 자는 파계의 무애행(無碍行)도 할 수 있다고 적극 변호한다. 계율은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고도 주장한다.

계율은 단지 공동체 유지를 위한 규범이나 제도 또는 관습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깨달은 자는 계율을 초월하여 있기에 계율에 걸리지 않고, 결코 계율의 잣대로 들이댈 수 없다고도 한다. 이러한 분위기로 말미암아 사부대중이라는 불교공동체의 윤리의식이 희박해지고 끝내는 불교를 폄하하거나 비난하는 근거가 되어 불교 발전을 가로막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계율을 떠난 깨달음의 근거를 초기불교나 이후 불교 역사 또는 다른 불교권에서 찾을 수 있는가? 만약 찾을 수 있다면 그러한 사례는 어디에 있는가? 오로지 한국불교에서만인가, 아니면 다른 불교권이나 전통에서도 가능한가? 또한 한국불교에서만이라면 근현대에만 한정되는가, 아니면 그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가? 설령 이러한 경우를 찾을 수 있다 하더라도 과연 그것을 번뇌가 다한 경계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아직도 번뇌의 경계로 보아야 하는가?

한국불교의 계율 경시 풍토는 단연코 계학(戒學)을 중시하는 불교 본래의 전통과는 다르다. 또한 다른 불교권과 비교해 보아도 명백한 차이가 있다. 우리는 다시금 한국불교에서 왜 이러한 계율 경시 풍조가 만연하는지 맥락을 점검해 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불교는 새삼 불교의 근본문제인 계율이 다시 쟁점으로 부상되는 시점에 있기 때문이다.

한국불교는 수계의식은 있지만 계율의 실천은 없다는 비판이 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또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계율 경시와 함께 지계의 부재가 이어지고 있는데 이는 한국불교의 모든 고질적인 문제를 파생시키는 원천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 논란의 중심에는 출가스님의 범계가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이 때문에 마치 현 한국불교계 모든 문제의 소지와 책임이 출가자에게만 있는 것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엄밀하게 본다면 이 문제는 재가자와 형평성이 맞지 않다고 지적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불교뿐만이 아니라 불교 역사가 출가수행자가 중심이 된 구조임을 감안하면 이를 전적으로 부정할 수만은 없다. 그만큼 출가자의 위치와 역할 그리고 책임은 중요하다. 특히 이러한 점에서 불교공동체의 문제는 바로 출가자의 계율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중생들은 이중적이게도 자신들이 하지 못하는 것에서 종교적 존경을 찾으려 한다. 일례로 재가자는 의식주 문제에서 출가자가 자신들보다 더 못 먹고, 더 못 입고, 더 못한 곳에서 살아야 존경한다. 그래서 고급승용차를 타고, 좋은 음식을 먹고, 편한 주거환경에서 사는 출가자를 존경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출가자는 소욕지족의 모습일 때 재가자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출가자가 자신보다 더 갖고 누린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출가자를 비난하고 심지어 경멸하기까지 한다. 율장에서도 계율의 제정 유래가 거의 그렇게 나타난다. 이처럼 불교승가는 세간을 떠나 있지 않고 세간에 의존해 있다. 때문에 부처님은 처음부터 재가자의 감시와 견제, 비판 그리고 외호라는 맥락에서 계율조항을 제정했다. 이를 수범수제(隨犯隨制)라 한다.

인도의 자이나교 승려들은 무소유(無所有)라는 계율로 완전한 도덕적 권위를 내세워 재가자의 완전한 존경과 철저한 외호를 받는다. 같은 대승권이지만 타이완 불교도 이러한 기준으로 출가자는 존경을 받으며 외호를 받는다. 상좌부 불교권도 마찬가지이다. 상좌부 불교는 계율지상주의라 할 정도로 엄격하게 지계를 강조한다. 특히 미얀마는 더 그렇다. 미얀마 스님들은 재가자들로부터 ‘완전한 존경(full respect)’을 의식하고 일거수일투족을 여법하게 행하려 한다. 부처님 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세계 어디나 출가스님들이 존경받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재가의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엄격한 계율 속에 살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공동체의 계율을 통해 서로 규제하는 것이 불가능해져 가는 상황이다. 계율 부재에 따른 공동체 의식의 결여 때문에 한국불교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집단처럼 비치기도 한다.  최근 한 일간지의 인터뷰 기사에서 종단의 큰스님은 불교계의 이러한 상황을 생각하면 ‘화’가 난다는 표현을 한 적이 있다. 계율을 통해 화합중(和合衆)이 되어야 하는데, 물질과 권력 문제 때문에 공동체가 이합집산한다는 것이다.

계율의 수지는 불교 공동체가 건강해지는 지름길이다. 본래 붓다의 의도는 계율을 통해 ‘지나친 개인주의를 막으려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 불교계에 만연하고 있는 계율경시 풍조와 이에 따른 개인주의는 비판받아야 한다. 불교의 종교적 이상은 도덕적 청정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을 때,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허망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계율정신의 회복은 불교의 중흥과 발전을 위해 필수적이다.

우리가 다시 확인해야 할 것은 상가(sangha)라는 공동체 개념의 회복은 계율을 통해 불교 대의(大義)가 실현될 때라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과거나 현재나 불교가 발전한 것은 출가자의 수가 많아서가 아니다. 적은 출가자라도 계율을 지켜 도덕적으로 청정하고 순수하다는 진정성이 인정될 때이다. 오랜 불교역사에서 그리고 국내외에서 증명하듯 단 한 명의 청정하고 여법한 출가자가 나오면 그 공덕으로 만 중생이 제도되지 않았던가? 마찬가지로 작은 불교단체라도 계율 수지라는 도덕적 권위로 불교대의를 잘 실현하면 사회적 영향력은 거대 종단보다도 더 클 수 있다. 반면에 거대 종단이라도 지도자들이 세속인들처럼 공심이 아닌 사심에 지배되어 있으면 사회적 영향력이 미미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집단에서는 무늬만 거대 종단이지 보살도나 자기희생은 없다. 불교 대의 구현의 의지도 노력도 없다. 다만 호구지책의 적주(賊住)로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불교에서 출가스님은 도덕적 권위를 갖춘 스승이자 지도자이다. 부처님은 교단의 도덕적 권위가 추락하지 않도록 계율을 제정했다. 출가 스님들이 사회의 지도자로서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존경을 받으면서 교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계율이 살아 있어야만 공동체로서 ‘화합한 불교교단[和合衆]’은 물론이고 대사회적인 대의실현도 가능하다. 그러하기에 부처님은 반열반에 임하여 계율과 교법을 스승으로 삼을 것을 재삼 당부했다. 정법(正法)이 영원히 머물게 하는 것은 오로지 계율의 확립 이외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계율을 실현하는 것 자체가 개개인에게는 도덕적 실천인 동시에 자비라는 사회적 실천을 의미한다. 즉, 불교사상의 사회적 실천의 선결 조건 또는 전제 조건이 바로 도덕적 권위를 갖추는 계율이라는 것이다. 이는 불교인이 항상 일반 사회의 귀감이 될 수 있는 윤리 도덕의 실천자로서 모범을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때만이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자리이타의 불교적 삶을 구현하게 되고, 진정한 의미의 전법교화 또한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동안 계율 부재로 인한 불교인의 도덕성 추락에 실망한 나머지 불교를 떠났던 많은 사람이 다시 돌아와 긍지를 느끼게 될 것이다.

계율은 욕망과 번뇌에 결박된 중생들로서는 가장 귀찮고 힘든 실천 덕목이다. 하지만 불교의 종교적 이상인 완전한 열반의 실현을 위해서는 반드시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할 때다. ■


2013년 3월
조준호(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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