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정성과 행정력, 수행력을 겸비한 차기 총무원장을 기대하며

박병기 교수
<불교평론 편집위원>
올 시월로 예정되어 있는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여러 가지 공식적인 논의들과 함께 비공식적인 언급들이 난무하고 있다. 우리 불교계와 사회에서 총무원장 스님이 차지하는 위상과 비중을 감안한다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중에는 우리 모두를 위해 자제했으면 싶은 극단적인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어서 듣고 있자면 마음이 어두워질 때가 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의 본질인가?

현재의 총무원장 선거 제도는 이른바 ‘1994년 종단개혁 체제’의 산물이다. 권력의 독점을 방지하고 공의를 수렴할 수 있는 제도로서의 직간접 혼용 선거를 채택한 ‘1994년 체제’는 그러나 중앙종회 의원들과 본사 주지들의 권한 행사 과정에서의 절차적 정당성이 문제가 되고 있기도 하고, 그들 사이의 이합집산 과정에서 나타날 가능성이 높은 금권 선거가 도를 넘어서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개혁의 상징으로 평가될 만한 요소가 분명히 있는 현재의 총무원장 선출 제도가 이렇게까지 비판과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게다가 현재와 같은 의사결정 구조 속에서는 문제가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다는 사실까지 감안해 보면, 차기 총무원장으로 어떤 분을 어떻게 모실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 시점에서 결코 소홀히 다룰 수 없는 쟁점임이 분명하다.

문제의 본질을 파악한 후에 그것에 걸맞은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는 응병여약의 전통을 현재의 상황 속에서도 활용할 수 있다. 우리는 먼저 이 병이 어떤 것인지를 다양한 진료 도구들과 임상 경험을 활용하여 찾아내야 하는데, 다양한 진단이 가능하겠지만 그럼에도 이 진단에서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공통점도 있다고 판단된다. 그 공통의 진단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승가공동체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민주자본주의적 삶의 질서 속으로 급속히 편입되고 있다는 외적인 차원의 진단이다. 우리의 자본주의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질서와 결합되면서 정착했고, 이 자유민주주의는 주로 선거에 의해 지탱되는 대의제 민주주의와 동의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선거권과 피선거권의 제한을 두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 대의민주주의는 주민소환제와 같은 부분적인 보완 수단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일단 선거만 끝나고 나면 끝이라는 어려운 결정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삼권분립과 같은 권력 분산 제도를 도입했지만, 우리나라처럼 대통령 중심제를 택하고 있는 나라에서는 그다지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고 우리는 현재의 정치 상황 속에서 이러한 한계를 충분하게 경험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삼는 선거의 만능화와 그 선거 자체의 근원적 한계 봉착은 시민 참여의 제도화 요청이라는 새로운 과제와 함께 차선의 의사결정 수단이었던 다수결의 원칙을 절대화하는 문제점을 우리에게 던져 주고 있다. 다수결이란 공유할 수 있는 다르마(Dharma)를 전제할 수 없거나, 더 이상의 합의가 불가능할 정도의 상황에 내몰렸을 경우에 하는 수 없이 택하는 차선의 의사결정 수단일 뿐임을 우리는 고등학교 사회와 윤리 수업을 통해서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 원칙을 다수가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거나 유지하기 위한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이러한 현실이 승가공동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는 점이 우리 문제의 핵심 중의 하나이다.

자본주의적 질서로의 편입은 더 심각한 문제이다. 자본주의적 질서는 돈과 일상의 지배로 구체화된다. 모든 것을 돈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유물론적 환원주의는 다른 한편으로 모든 것을 일상의 지배 속으로 흡수시켜 버리는 무서운 흡인력으로 나타나 우리의 삶을 옭아매 버린다.

더 무서운 것은 상품 소비를 목표로 삼는 광고문화의 탁월성 때문에 이러한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좀처럼 갖기 어렵게 되었다는 점이다. 멋진 몸매와 아름다운 얼굴을 지닌 인간 상품들을 내세워 의식을 마비시키고 삶의 목표를 끊임없이 왜곡시키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그런데 우리의 승가공동체도 이러한 자본주의적 삶의 질서 속으로 급속도로 편입되고 있는 다양한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고급 승용차를 타야만 주지로서의 권위가 살아난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고, 돈이 있어야만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스님들도 꽤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는 승가공동체의 어떤 일도 돈이 매개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어떤 일을 하는데 돈은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도 돈이 꼭 필요하고 의미 있는 불사(佛事)를 하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하지 않으냐고 반문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때의 돈은 청정성과 투명성이 전제된 돈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 돈은 승가공동체의 존립 근거를 소리 없이 무너뜨리는 치명적인 독약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문제 상황에 대한 공통된 진단의 두 번째는 이러한 첫 번째 진단 결과의 내적인 차원의 문제와 연계된다. 빠른 속도로 민주자본주의 질서로 편입되고 있는 승가공동체의 문제는 종단개혁의 과정에 세속적인 비전이 담기게 하는 결과로 나타났고, 그것이 1994년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라고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1994년 당시의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향한 세속적인 열망이 정제되지 않은 형태로 승가공동체의 미래 비전에 담기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외형적으로는 승가의 권위주의적 한계나 당시 정치문화 속의 권위주의는 그다지 차별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응하는 대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도 외적인 정치상황의 영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결과로 나타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어떻게 해야만 이러한 현실을 근원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지에 관한 지혜를 모으고 하나씩 실천에 옮기는 일이다. 그 시작은 총무원장으로 상징되는 승가공동체 지도자들의 위상과 역할을 다시 정립하는 일이어야 한다.

사판승(事判僧)이라는 개념으로 구체화되는 그들의 삶은 내면적으로나 외면적으로 이판(理判)의 세계와 분리된 곳에 위치하지 않는다. 화엄의 이사무애(理事無碍) 지향은 모든 중생들의 비전이지만, 특히 그들의 삶에서 구현되어야 하는 비전이고 다행히 우리는 그러한 삶을 상당 부분 구현해 내고 있는 분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인연의 축복을 누리고 있기도 하다.

세속적인 기준으로 볼 때 윤리와 정치는 서로 분리된 개념이다. 전자는 당위의 영역에 속하는 개념이고 후자는 사실의 영역에 속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개념은 서로를 대응 개념으로 삼을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그 의미가 드러나는 불완전 개념들이라는 점에서 상보적 관계에 있다. 총무원장이라는 자리는 이 상보성을 제대로 인식하면서 각각의 상황에 맞는 중도(中道)를 구현해 내기를 요구받는 자리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윤리 영역의 청정성과 정치 영역의 행정력을 겸비해야만 하고, 이 둘을 끊임없이 일치시키고자 하는 수행력과 의지를 갖추고 있어야만 한다.

현재의 총무원장 선거제도가 문제가 있다는 상황 인식에 불교공동체 구성원 대다수가 동의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는 적극적으로 이 제도를 보완하고자 노력해야 하고 그 결정권을 갖고 있는 중앙종회와 여러 종책 모임은 이합집산의 한계를 과감하게 탈피하여 노력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줄 때에야 비로소 그 존재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음을 철저히 인식해 주기를 기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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